[내글내생각] 박원익의 글은 '스펙타클'인가?
병장 정근영 2009-08-22 17:45:08, 조회: 156, 추천:0
나는 1차 텍스트에 무지하다. 박원익의(글의 흐름상 반말체를 사용했는데, 기분 나쁘시더라도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하트뿅뿅) 글에서 때때로 등장하는 알튀셰와 라캉, 또는 슬라보예 지젝이나 가라타니 고진 같은 이들을 이곳 책마을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야 처음 알았을 뿐더러, 스펙타클이니 뭐니 하는 개념도 나에게는 생소할 따름이다. 1차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지승인과 홍명교, 그리고 박원익의 글에 등장하는 스펙타클을 내 멋대로 해석하고 늘어놓았기 때문에 빈약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목소리를 전달할 방법이 없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펜을 놀린다.
홍명교는 ‘하나는 소비문화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의 스펙타클(풍경)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 양태의 폭발적 형상으로서의 스펙타클’이라고 하며 스펙타클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나는 여기에서, 앞의 논의에서 약간은 벗어나 보이는 의문점을 하나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권위있는 학자와 저자들, 그리고 그들의 저서도 또한 일종의 ‘스펙타클화’된 양상으로, 또는 어떠한 ‘스펙타클’을 강화하는 모습(굳이 자본주의라는 틀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닌)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며, 데카르트가 사유했던 모든 궤적을 이미 따라잡았다는 듯한 말투로 거들먹거리는 ‘윤리 만점’의 수험생들을 보라. 사실 그는 데카르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또한,‘체 게바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평했던 사르트르의 말로 인해, 체 게바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조차도 학자로서 사르트르가 가지는 무형의 권위에 굴복해 체에게 인위적인 경배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떤가. 이것은 체 게바라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배가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도 나는, 이 곳 책마을에서 박원익의 글들이 점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보니, 갑자기 오싹해졌다. 그의 대부분의 글들은 1차 텍스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독해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글을 읽는, 그리고 1차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을 때 한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권위있는 저자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이어진다. 박원익의 ‘대한민국의 88만원 세대여 단결하라!’는 글에서 그가 인용했던 한 문장으로 예를 들면 ‘철학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유지되는 동안에만 존속한다, 따라서 철학은 철학 자신의 자기소멸을 목표로 해야한다’는 막수의 말은 그 자체로 신성성을 부여받는다. 그 문장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오고갈 수 있지만, 왜 그러한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박원익이 쓰는 글의 포스와 상대적으로 적은 댓글,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지로-, 다른 글쓴이에 비해 비교적 많은 추천수 등은 독자들의 어긋난 욕망을 대변한다. 박원익이 인용했던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말을 변주하자면
‘자본주의의 상부구조(권위있는 저자, 또는 그의 글들)를 형성하는 소비와 기호(1차 텍스트의 이해를 돕는 글)의 영역에는, 하부구조(무지한 대중)에는 부재한 진정한 유토피아의 흔적(순수한 학문적 호기심과 노력)들이 뒤틀리고 왜곡된 방식(지적 허영심)으로 축적되어 있다’
정도가 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박원익의 글을 ‘제대로’ 독해하지 못하는 많은 독자들과(물론, 나도 그중에 하나라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다), 알찬 글의 내용에 비해 비교적 적은 논의, 그리고 그 글에 대한 어떠한 의견이나 의문도 없는 가지로-, 상대적으로 많은 추천수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의 글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무조건적인 찬사를 보낸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원익의 글에 나오는 저자와 저서들에 대한 독자들의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과 글에 대한 감탄은, ‘나도 이렇게 멋들어진 글을 쓰고 싶다!’는 지적 허영심으로 완벽하게 전이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찬사는 나는 이런 글을 쓸 수 없다는 ‘어색하면서도 감탄섞인 굴복’에 다름아니다.
‘번쩍번쩍 번개가 치는 것 같군요. 이 글이 단순히 ‘포스’로 이미지화 되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김예찬의 댓글이 바로 이런 우려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