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도서관 27호 초급 사서 위센(wissen)의 사소한 이야기 (병장 한상원/051204)
왠지 무수한 글들 속에서 느껴질지도 모르는 식상함을 한번쯤 경계하기위해 이번에는 창작에 도전해봤습니다.
휘유, 창작이란 정말 너무 어려운 것이더군요. 작가분들이 존경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어설프고 논리적인 결함이 많음이 분명하지만, 저에게도, 여러분께도 무언가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쓰는 즐거움이 나름대로 있었던 칼럼쓰기였던 것 같습니다.
<바벨의 도서관>은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테마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바벨의 도서관을 읽어보지도 않고 그저 친구가 제게 이야기해준 약간의 모티브만으로 글을 써본 것이라 실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랑 많은 차이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기발한 발상-세상의 모든 텍스트들은 바벨의 도서관에 존재하는 글자들의 무작위 조합 중에서 선별되어 나온것이라는-을 한번 패러디 해본 것이라 생각해주셨으면 하네요.
에휴, 다음에 기회가 되어 <바벨의 도서관>을 읽으면 많이 부끄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분간 쉬는 날이라 무언가 댓글이 늦을듯 합니다. 많은 질책과 격려로 저에게 이 겨울을 이겨낼 조그마한 힘이라도 주시길.
그럼 부끄러운 칼럼 시작합니다.
바벨의 도서관 27호 초급 사서 위센(wissen)의 사소한 이야기
-의미가 생겨나는 가능성에 대해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의 손가락 몇 개는 여전히 그 중이 뭉치 마지막 장 틈에 끼인 채, 그 페이지를 한번 더 봐야한다는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가끔 내가 발견하게 되는 이런 애매모호한 글자들의 조합을 볼 때면 나는 이렇게 멍하니 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 장이라니! 그것도 앞서의 조합들이 다 맞아떨어진 가운데 마지막 단 한 문장이 이런 식으로 깨져버리다니 말이다. 아, 마지막 단 한 문장이라니! 마지막 한 문장이 깨진다는게 무슨 뜻이냐고? 일단 나를 슬픔과 방황, 무의미의 구렁텅이로 다시 한번 밀어넣은 이 조합을 보고 이야기하자. 그럼 당신은 나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진리는 영속히 저너머의 보물 그리고 그림자는 눕는다. 삶의-
나는 세계 만물의 진리의 근원이자 도서관, 도서관이자 곧 진리의 전후무후한 추종세력인 이 바벨의 도서관 초급 사서이다. 이곳은 세상의 많은 예비 지식들을 ‘발견’하는 곳이다. 바벨의 도서관의 사서들의 임무는 도서관에 넘쳐나는 무차별적이고 무한한-때로는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온갖 단어, 글자들의 조합 가운데 의미가 있는 것을 발견해 인류의 소중한 자산으로 훌륭히 발굴해내어 보관 혹은 사회로 보내는 일이다. 때문에 바벨의 도서관에는 정말 말 그대로 끝이 없을 무수한 글자들이 종일 도서관을 부유하고 있고, 사서들은 유령의 그림자와 같이 글자들의 베일 너머 숨겨져 있을 귀중한 조합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바벨의 도서관이 있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벨의 사서들에 의해 ‘발굴’되는 텍스트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바벨의 도서관은 인류에게 신비로움 속에 묻혀진 지적(知的)인 비보(秘寶)를 전해주는 위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 사서들은 그 비보를 찾아 헤매는 성스런 순례자 혹은 탐험가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인류의 엄청난 지식들, 19대 북동쪽 제238구역 사서장 칼이 찾아내어 이름붙인 <자본론>이라든지, 3대 도서관 부관장 플라톤이 힘겹게 간추려낸 <국가>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 다 우리의 업적에 들어간다. 이 책들이 사회에서 미친 영향력이란 어떠한가! 사람들은 이 책의 발견으로 인해 계급을 사고했었고, 철학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냐 말이다.
당신은 우리가 맡은 방대한 작업을 생각해보며 이미 놀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건 두말할 나위없이 순수하게 놀랄만한 작업이다. 와이키키 해변에 바늘하나 던져놓고 사람 풀어 찾는 일보다 훨씬 어리석고, 지난하고 두렵기까지 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조합들을 집요하고 날렵하게-마치 사냥감을 찾아 헤메는 맹수의 핏빛 본능과 비슷한 감정을 품고-추적한다. <가나다라마바사.. 고냐다랴미바소...> 이런 조합들이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 되려면 얼마나 무수한 글자들을 뒤적이고 치워내야한단 말인가. 사서가 되어 평생이 걸려야 한 권의 온전한 텍스트 묶음을 발견할까 말까인데 초급 사서인 나에게 일생일대의 천운과도 같은 그런 일이 지금처럼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벌써 다가올 리가 없지 않은가.
뭐, 어쨌든 오늘도 내 마음은 -진리는 영속히 저 너머의 보물 그리고 그림자는 눕는다. 삶의- 이 마지막 문장을 앞에 두고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는다. 온전한 텍스트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한 문장이 문제였다. 한 문장이. 이 처절한 쓰러짐의 거창한 이름은 <사서 입문 후 일흔 네번째 좌절로 인한 신경성 심근경색유사졸도증후군의 예비증상>정도 되겠다. 나의 교육을 담당했던 중급 사서인 애너니머스(Anonymous)는 내게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겸허하게 조합들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지막 단 한 문장, 심지어는 주석이 달린 것까지도 완전한 모양새를 갖추어야만 환호를 지를 당당한 자격이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이봐, 뷔센(Wissen). 우리는 인내에 인내뿐이야. 그러다 죽는날까지 온전한 텍스트, 큰 의미의 텍스트를 발견하지 못해도 그만인걸. 니가 걸러낸 무수히 많은 의미없는 조합들이 있잖은가. 그 자체로 자네는 세상의 진리에 공헌하고 있는 것일세. 추려내고 있잖은가. 많은 불필요한 가능성들을.”
그러나 애너니머스가 건네는 달콤한 타협의 말도 이내 그저 귓바퀴에서만 맴돌다가 그냥 새나가버리는 공허가 되고 만다. 사서가 되기 전에 진리의 시원(始原)이니 인류의 지적 선구니 신비롭기까지 하던 소문을 듣고 바벨의 도서관에 들어온 것이 나날이 후회된다. 젠장.
오늘 나를 멍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저 저주받을 괴상한 조합이 왜 마지막에 나오느냐하는 좌절감이었지만, 평소에도 나는 도서관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 사서들이 발견하는 완결된 문장구조를 지닌 이른바 완전한 텍스트는 세상으로 나가 의미를 지니며 소통된다. 그런데, 그 의미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도서관 밖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리나 사실, 의미 같은 것은 이 곳의 관점에서는 무수한 무작위에서 나오는 것 중 하나일 뿐이지 않은가.
돌 네 개를 던져서 그 돌이 딱 맞는 정사각형을 이루는 경우는 희귀하지만 그건 전체적으로 봤을 때 모든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이다. 결국 이곳에서 말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은 무수한 경우의 수 중에서 받아들이는 사람, 수용자가 그저 의미를 붙이는 것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 가 된다. 우리가 정답 혹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은 어쩌면 세상에 존재 가능한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 오른쪽 모퉁이가 약간 더 삐져나온 사다리꼴을 원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져서 나온 완전한 정사각형은 실패한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로만 기억된다. 물론 정사각형을 열렬히 원한 사람에게는 아닐테지만. 우리 도서관이 제공하는 것은 결국 그러한 가능성들의 집합일 뿐이다.
멍하니 있다 보니 애너니머스가 짖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얼굴에 가득 묻힌 채로 방 문을 밀고 슬며시 들어온다. 아, 별다른 위로는 이제 받기 싫은데. 애너니머스의 호쾌한 위로의 말이 그의 입에서 흐르겠지. 과연 그렇다.
“자네, 아직도 그러고 있는가? 곧 깨닫게 될거네. 우리가 하는 일이 지닌 가치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야. 그야말로 의미가 없는 것들만을 만나기 때문에 그런 좌절감이 쉽게 자네를 좀먹는거네. 하지만, 그 무의미함 자체는 그렇게 문제가 아니라네. 이 책을 한번 읽어보게. 자네가 머리를 싸매고있는 고민과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뭔가 느끼는 바가 있을걸세. 나는 그게 <좀머씨 이야기>가 아니라 <잠머씨 이야기>였으면 더 좋을거라는 생각을 했다네. 잠머라는 주인공의 이름에서 완전한 조합이 나왔으면 어땠을까하면서 말이야. 아, 아쉬워.”
그러면서 애너니머스는 푹 쉬라는 말을 하며 휙 나가버린다. 애너니머스가 건네고 간 책은 며칠전 쥐스킨트라는 고급 사서가 발굴해 낸 <좀머씨 이야기>라는 텍스트였다. ‘잠머씨였다면 더 좋았을거라고?’ 마지막 문장의 어그러짐은 내 심정까지 어그러뜨려 놓았다. 책 따위를 맘 편하게 읽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선배가 권하는 충고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 긴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가 바깥 세상에서 쌓아온 지식에 근거하면 읽는 사람에게 무언가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작게나마 어떠한 영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책임은 분명했다. 허나,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애너니머스는 Sammer였으면 더 좋았을거라고 말했을까? 좀머나 잠머나 내가 받는 느낌이 달라지는 건 아닌데.’
순간, 번쩍하고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건 내가 발굴에 실패한 책의 마지막 문장. 내가 저주를 퍼부은 바로 그 문장이었다.
-진리는 영속히 저너머의 보물 그리고 그림자는 눕는다. 삶의-
이 문장이 아니었다고 해도, 마지막 문장이 내가 발굴하던 텍스트가 담던 진리를 바꾸어내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 좀머든 잠머든 마찬가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소한 문장구조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다. 잠머씨의 이야기이든 좀머씨의 이야기이든 읽는 사람이 거기서 의미를 찾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을 지라도 그것은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의 책과 같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찾아내는 완전무결한 조합, 그것은 형식에 다름 아니다. 의미라는 것은 무수한 가능성들 중 하나에서 오지만, 그것은 의미를 붙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위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 새로이 나오는 무수한 텍스트들은 바로 여기, 바벨의 도서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바벨의 도서관은 의미까지 제공해주진 않는다. 어느 시인이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야 비로소 나에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다고 노래한 것처럼, 우리는 선택항들을 제공할 뿐, 자신들의 꽃을 만드는 일은 각자에게 놓여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때론 어리석다. 내가 판별해야할 무수한 조합들이 내 앞에 놓여있고, 또한 누군가 그것들의 참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것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데, 허사로 돌아간 오늘의 수고에 이렇게 방황하다니. 애너니머스는 나를 얼마나 딱하고 어리석게 보았을까. 아,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세상 사람들이여, 우리가 찾아낸 텍스트들을 부디 정독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우 모여 논하는 것만 찾지말고 자신만의 진리를 담은 소중한 그릇을 꼭 찾길 바란다. 당신들이 쉬이 읽어 넘기는 책 한권은 바벨의 도서관에서 일하는 무수한 사서들이 일생을 걸고서도 못찾았을지 모르는 소중한 것이다. 당장 자신에게는 별반 도움이 안되어 의미없다 여길지 모르지만, 당신의 손길과 당신의 숨결이 진실하게 닿는다면 그 아름다운 글자들은 당신의 마음 안에서 의미라는 꽃을 활짝 피울지니.
병장 김동환 (2005-12-05 11:17:50)
재밌게 읽었어요.(웃음)
주인공 이름 위센(wissen)에는 어떤 사연이 있나요?
일병 이영준 (2005-12-05 13:43:07)
독어라면.. '안다'라는 뜻 같은데(기억이 가물가물..)
맞나요?
병장 김태경 (2005-12-05 13:54:23)
독어라면 '뷔센'이 될것 같은데요.
고급사서 '쥐스킨트'나 '애너니머스'의 이름을 보면
'진리는 영속히 저너머의 보물 그리고 그림자는 눕는다. 삶의'
이 글을 제대로 조합할 어느 사서의 이름이 아닐까요?
일병 이영준 (2005-12-05 14:25:17)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옆에 있는 한글이 위센이면..
독어는 아니겠군요. 지식이 짧아서.(땀.)
상병 김승연 (2005-12-05 21:20:55)
대충 가능한 구조로는
0. 삶의
1. 진리는 / 그림자는
2. 영속히 눕는다. / 저너머의 보물
0과 1중에 하나 2중에 하나를 묶어 한 문장을 만든다.
"그리고"는 적당히 문장사이에 넣는다.
이렇게 하면...
1. 삶의 진리는 영속히 눕는다. 그리고 그림자는 저너머의 보물 (어둠을 숭배하는 무리-그노시스?)
2. 삶의 그림자는 영속히 눕는다. 그리고 진리는 저너머의 보물 (기독교?)
3. 삶의 진리는 저너머의 보물. 그리고 그림자는 영속히 눕는다. (진리는 나의 빛,개인적으로는 이게 좋네요.)
4. 삶의 그림자는 저너머의 보물, 그리고 진리는 영속히 눕는다. (염세주의자? 차라리 자살을 하라지)
간밤에 읽다가 요새 읽는 책이 다 이모양이라, 재미로 한번 해봤습니다.
아참! 위센씨 이야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상병 이승준 (2005-12-05 21:56:18)
도통 무슨 말인지..
병장 김동환 (2005-12-06 09:10:08)
저는 '진리는 저 너머의 보물. 삶의 그림자는 영속히 눕는다.'가 제일 맘에 드네요.
상병 이준희 (2005-12-07 11:21:37)
짧은글로도 좋은뜻을 나타낼 수 있다는게 너무 부럽군요.
이제부터 초급,중급,고급 사서 따지지 않고 많은 텍스트를 섭렵해야겠습니다~
병장 구태우 (2005-12-07 23:54:55)
상원님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시려는 내용은 "의미"라고 하면 맞을까요? 누군가 어떤 의미를 두느냐? 에 따라서 그 의미는 클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좀 더 범주를 넓힌다면 결국의 소통 이라는 것과 일맥상통일 수도 있겠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