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장 윤정기 2009-09-14 16:52:27, 조회: 89, 추천:0
# 1
문득, 비에 젖은 아스팔트 바닥을 내려다본다. 우리들의 세계 속, 평행한 대지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물이 잔뜩 고인 웅덩이에는 세계 속에 담긴 나의 입상이 서있다. 때때로 바람이 불면 그 입상은 흔들리고, 한 방울의 비에도 수많은 동심원들이 입상으로부터 춤추듯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마음속에도 어떤 여울들이, 그 떨림이 번져나간다. 세계를 그린 그 작은 그림은 언젠가 내리쬐는 태양에 증발하여 허공 속으로, 바람 속으로 다시 환원될 것이다.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세계 속으로 돌아가는 원의 운동, 빗물의 삶 속에서 우리는 그 속에 비친 세계를 보고, 그 ‘흔들림’을 감지한다.
1. “이것은 분명 소유와 존재, 그리고 욕망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도화서의 엄격한 화풍과 양식, 그리고 조선이라는 시대정신의 억압 속에서 윤복은 ‘해방’을 꿈꾼다. 그저 보이는 것, 그리고 실체의 수많은 그림자들을 통해 그는 진실을 찾아가려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래서 그에게 진실에 관한, 실체에 관한 그리움이다. 인간의 욕망, 사랑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그리워하는 모든 것을 그는 ‘욕망’한다. 그저 인간의 욕망을 욕망하는 행위는 그에게 묵墨의 세계로부터 빛의 세계로의 이행이다. 하지만 절절한 운명은 그로 하여금 ‘실체’를 숨기고 살아갈 것을 강요하고, 현란한 색채속의 세계는 ‘그녀’를 외려 묵향 속에 묻어버렸다. 진실과의 대면은 때로 거짓보다 더 가혹하므로.
우리는 대부분 ‘김조년’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조년처럼 사는 것을 ‘성공한 삶’이라고 부른다. 김홍도는 지나치게 외곬수고, 신윤복은 너무 시대를 앞서간 천재다. 그리고 정조는 대궐지붕에 가려 태양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김조년은 다르다. 콧대 높은 권문세족들을 구워삶고, 예술적 심미안과 예인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게다가 수많은 자신의 ‘욕망’들을 소유로써 ‘현실화’시킬 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동력은 윤복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고, 홍도를 굴복시키고, 왕의 권위마저 넘나든다. 김조년은, 조선이라는 시대에서 이미 후대의 사건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개인적 이윤추구’가 곧 ‘사회적 선’이 되는 사회의 존재양식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많이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린 현대인들은, 분명 그의 신념을 따를 것이다. 비록 김조년의 욕망처럼, 끊임없는 추동들이 그들을 진정한 존재의 샛길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그는 아버지를 ‘소유’하지 못했다. 오이디푸스의 삼각형 속에 갇혀, 보이지 않는(얼굴 없는)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실체와 권위속에서 그는 신음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 만이라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을 유일한 욕망으로 대체한다. 거세불안처럼 덮쳐오는 ‘진실’과의 대결은 그로 하여금 리비도, 그 자체를 거세시키는 이유가 된다.(정조가 사랑하던 이마저 잃고, 소년들을 좋아했다는 야사(?)는 결코 거짓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진실과의 대면만이 그를 오이디푸스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유일한 돌파구이며, 그 그림자를 통해 아버지를 인식하고 공허한 욕망의 고리를 끊을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홍도의 유일한 욕망은 바로 윤복이다. 허나, 그는 자신의 욕망이 들추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욕망을 거세한다. 그것이 그 세계속에서의 올바른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제자를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윤복의 그림이 자신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에, 그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번민한다. 소유하고 싶다. 시대를 넘어선 천재를,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망울을 소유하고 싶다는 것은, 그의 오래된 욕망이자 그 욕망에로의 번민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욕망속에서만 더불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욕망을 소유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동시에 간절히 거부한다.
네 인물들의 욕망은 서로 얽히고 얽힌다. 서로를 향한 ‘존재욕’ 즉, 서로를 갈망하고, 서로를 증오하는 이 욕망의 연결고리는 ‘침묵하는 나선’처럼 그들의 언어와 존재의 분절된 세계를 깁는다. 그리고 그들 속의 ‘그림’은 그 나선속의 ‘누빔점’이 되어 두 경계 속을 먹물처럼 퍼져나간다.
그리고 윤복의 이 한마디는 그들의 욕망에게, ‘영원한 것은, <영원>이라는 단어 속으로의 회귀일 뿐’이라는 화제를 남긴다.
[ 인간은 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뛰어오르려 하고, 건널 수 없는 강에 몸을 던지려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 곳에 손이 닿고, 그 강을 건너고, 그것을 가진다면 가슴속에 들끓던 불덩이는 곧 재가 되고 말겠지요? ]
2. “바람난 화원을 어찌하리오.”
영화 「미인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신윤복’이라는 우리시대의 기표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여기서 신윤복은 이미 조선시대의 기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기표 이외의 장치는 모두 생략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반면 「바람의 화원」에서는, 그 기표가 엮이는 과정, 시대 속에서 꿈틀거리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정조와 김조년의 존재는 윤복으로 하여금 ‘화원’이라는 존재양식을 올바르게 일깨우도록 하지 않던가. 그래서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는 그 ‘주체’에 있어 이미 차별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두 작품 모두의 공통성은 바로 이 차별적인 존재의 양식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존재의 양식은, ‘여성성’이라는 시대의 코드를 부여받는다. 어찌 보면, 여성성의 시대, 작금의 시대에서 신윤복을 재해석해 내는 일은 필연적인 작업인 것이다.
신윤복을 왜 여성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사실이 그렇다. 학교에서의 국사시간은 ‘희한하게도’ 역사적으로 기록도 거의 없는 신윤복의 그림이 많이 나오지만,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당최 관심이 없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 속에서도 설명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무려 남자의 손으로만이 세계를 화폭 속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고고한 난이나 화초 따위만을. 그런데, 항상 여성이 등장하는 그의 그림들, 여성의 마음을 내밀하게 표현해낸 그 추임새를 보아하면, 이건 가능할 법한 얘기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여자로군?’ 하고 생각할 밖에.
사실 우리는 이런 징후를 이미 발견했다.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여성’이라는 담론을 두고, 그것을 드러내놓고 까발리고 있으니까. 너무 천연덕스럽게 까발려진 ‘여성’은 이제 우리에게 ‘21세기는 여성의 시대’ 라는 각인 이외에 어떤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남성 우월주의를 살아가고, 남성의 역사를 살아오던 ‘여성’은 이제 더 이상 역사의 구석자리에서 숨쉬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왕은 정신머리 없게 남자를 탐하기 시작했고(왕의 남자), 아내는 남편의 바람을 맞바람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바람난 가족) 성性은 해체되었다. 그리고 ‘여성’은 이 간극을 놓치지 않았다.
신윤복이라는 기표는, 그리하여 생성된다.
두 눈을 들어 살펴보아도, 두 손을 들어 휘저어 보아도 ‘바람’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다. 아무 곳에도 없지만, 모든 곳에 있는 것. 그것이 바람이고, 윤복의 삶이었다. 더불어 이것은 우리 삶의 부분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삶들, 저자거리에서 물건을 팔고, 쌈박질을 하는 사람들, 연못에서 멱을 감고 빨래를 하는 여인들, 그것을 훔쳐보는 남정네, 검무를 추고, 씨름을 하고, 피리를 부는 광경. 이런 것들에 관해 우리는 그저 바람이라 느낄 것이다. 바람이라 부를 것이다.
신윤복은 분명, ‘바람난’ 화원이었다. 그는 비록 그 시대로부터 태어나고 그 시대를 살아갔으나, 그 시대와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으니까. 시대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시대속의 실체들, 자신을 옭아매던 욕망들을 화폭 속에 옮겨내야만 했던 날들, ‘여자’라는 본질적 존재의 모습을 그림자로 가려야 했던 날들에서 그는 결국 해방했고, 마음껏 바람을 피웠다. 어찌할 수 없이, 아찔하게도.
3. “미인은 박명(수)인가요?”
어쨌든 우리는 마지막 그림, ‘미인도’에 한번쯤 천착해볼 필요성이 있다. 아름다움. 얼굴이라는 기관에서 빚어내는 아우라는 우리에게 이미 초월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점점, 더 ‘인간’이라는 주체를 잠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주체’라니, 상상할 수 있겠는가?
미인도는 사실 미인도가 아니다. 통통한 얼굴의 약간 귀염성있는 여자의 그림일 뿐. 물론, 개인적인 취향에 있어 윤복이 미인도의 여인을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하여 나의 의견에 반박의 깃발을 높이 추켜올린다면 나 또한 할 말이 있다. 나의 미녀들 ㅡ 예를 들어, 김태희나 이나영이나 산다라 ㅡ 과 그녀를 비교해 볼 테면 해 봐라. 나는 나의 미녀들이 미인도의 여인보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하늘아래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것을 맹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또 윤복에게 굴복하고야 만다. 필경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미인美人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인美人이 아니라 미인?人*이다. 그저 아름답기 때문에 미인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 말은, 윤복의 삶이 대변한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그림 이전에 여자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진정 여자로서, 아름다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복의 ‘미인도’는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을 얻는다. 진정한 ‘여자’로의 태어남을 통해서 말이다. 비록, 아름다움이란 박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쉬이 잊혀 지지 않을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미인’은 어떠한가. 그것은 마치 ‘박명수’의 모습을 빼닮았다. 자신의 심리적 만족 ㅡ 그것이 사회적 통념을 향한 것일 지라도 ㅡ 을 위한 무한 이기주의. 그리고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 버럭! 하고 소리지르며 그것을 착취하려는 욕망을 여과 없이 분출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분출된 욕망들은 또 다른 욕망을 잠식하고, 타인의 욕망들을 부추긴다. 그래서 우리시대의 ‘미녀는 괴롭다.’
# 2
바닥을 내려 보던 고개를 살풋 들어, 식당을 향해 2열종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녀석들을 쳐다본다. 하늘은 이미 개어, 태양이 우악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행렬의 오른편에는, 햇빛에 반사된 그들의 그림자가 또한 뚜벅뚜벅 나름대로의 장단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숫자를 세지도 않지만, 언제나 그 행렬과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행렬이 ‘살아있음’을 증명해줄 것이다.
4. “빌어먹을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서서.”
윤복은 그림자를 통해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다. 색이 불러일으키는 우리들 마음의 ‘흔들림’을 통해 비로소 진실을 알 수 있다 했다. 그리고 비록 그 진실이 잔혹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람처럼 받아들이라 했다.
복제의 시대. 바야흐로, 진정한 복제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비효율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사진’은, 더 이상 예술이라는 범위에 종속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양한 종류의 인물사진, 풍경사진 등은 이제 ‘그림’의 단계를 뛰어넘어, 세계의 그림자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세계의 ‘움직임과 변화’마저 잡아내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비슷하다. 사진을 통해 내면을 드러내고, 영상을 통해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세계 속의 실체로 다가가는 길은 아직 소원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사진이란, 세계를 그린 매우 섬세한 그림이며, 영상이란 결국 그 사진들의 연속일 뿐인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아직 ‘얼굴 없는 인물화’나 다름없는 것이다.
혼을 담아내는 것. 그것을 아마도 우리는 ‘예술’이라 칭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혼’을 직시할 수 있는가. 실체를 직시할 수 있는가. ‘눈’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누구의’ 세계란 말인가. 사실,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닌 것’*이다. 플라톤은 그리하여, 우리의 세계를 그림자라고 말했다. 동굴속의 인간일 뿐이라고.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낸 예술작품은 그림자의 그림자, 현실의 현실일 뿐이라고 말이다. 시뮬라크르의 세계의 실체는 그토록 참혹하다.
하지만, 윤복은 그것에 낙담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진실의 ‘조각들’을 통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모방이지만, 세계 이상을 담을 수 있으며, 세계를 변형시키지만, 세계 그 자체를 조금 더 ‘정확히’ 바라보게 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우리는 ‘타인의 조각들’로부터 그를 이해해나갈 단서를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조각들’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비록 그림자일 뿐이라 해도, 우리는 그 그림자의 모습을 통해 진실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니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우리는 ‘지름길’이 아니라 조금 멀지만 ‘오솔길’을 통해 실존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3
그림자를 바라보던 눈을 들어, 이번에는 멀리 보이는 산들의 능선을 바라본다. 푸른 산들은 물을 타 명도를 달리하는 물감의 색채처럼 점점 엷어져 궁극에는 저 멀리 하늘의 경계와 겹쳐진다. 그리고 하늘은 또 어떠한가? 점점 엷어져 바람색이 될 것이다. 바람색이라니? 바람은 색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들을 수 있다. 냄새 맡을 수 있다. 바람난 그녀가 내 곁에 있는지, 무슨 향기로 속삭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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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人 : 여기서의 미(?)는 아름다움(美)에 여성(女)의 의미를 덧씌운다....는 자의적 해석이다.
*파이프~. : R. 마그리뜨의 그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나타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