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Episode 


설이고 연휴고 하다보니, 게다가 내일까지 선임들이 모두 집에가있는 상태다보니, 시간도 남고 뭔가 생각할거리는 있어야겠고 해서 여기저기를 뒤적이다가 센과 치히로 이야기가 잠깐 보이길래 (명절이고 하니) 문득 생각이났다. 내가 소위 말하는 '고전명화'라고 불리우는 '사막의시몬(브뉴엘)'이나 '시네마천국(토르나토레)', '희생(타르코프스키)'같은 걸작들과 동급의 반열에 올려놓을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애니메이션으로 이슈 파텔의 작품들을 제외하면 아마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또한 이슈파텔의 작품들이 마이너리티한 '아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중적 성공까지 거머쥔 센과 치히로는 가히 '비틀즈적 혁명'에 비할만한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을것이다. (이점은 2001년 베를린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내가 너무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더불어 내가 문학-예술을 해야할 나아갈길을 결정적으로 제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내게 이 작품은 '수작'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앨리스, 어스시, 크라바트. 오마주와 재창조가 빚어내는 빛나는 상상력 -


이 작품이 하야오의 모든것이 집약된 작품이라는걸 인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하다. 센과 치히로야말로 하야오가 추구하는 애니메이션의 정점이자 동화Faerie Tale미학의 결정판으로 이전작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이 작품이후에 발표되는 하울이나 어스시를 보자면, 앞으로도 하야오는 센과치히로를 능가하는 작품은 만들수 없지 싶다.

센과 치히로는 세가지 동화의 리메이크 - 오마주 작품이다. 이야기의 구조와 플롯적 진행, 내러티브에서는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기대고 있고, 치히로가 센으로 변한 다음 언령주술言靈呪術에 속박당한다는 내용의 '이름'에 관한 진지한 태도에는 르귄의 명작 '어스시의 마법사'에 신세를 지고 있다. 그리고 센과 하쿠의 묘한 러브스토리와 하쿠와 유바바의 주종관계 역시 반대로 보는 오트프리트의 '크라바트'에 다름 아니다. 원래 크라바트가 보헤미안 지방 전통민담이었던걸 감안한다면, 서양 민담에 뿌리를 둔 하야오의 작품 토양이 얼마나 '서구적'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야오는 인터뷰에서 늘상 자신은 어릴적부터 서양민담과 동화에 매혹되어 왔고, 마음의 한구석에 동경으로 남아있었으며,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품이 위의 세 작품이었다고 즐겨 말했다. (특히 이번에 '어스시의 마법사'를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하는 것을 보면 이들 작품에 대한 열의가 어느정도인지는 쉽게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80-90년대 그의 전성기를 관통하는 작품들을 보면, 철저히 그만의 철학으로 무장된 일본적인 아기자기한 아니메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웃집 토토로'나 '원령공주'에서는 지극히 일본적 정서가 묻어있는 따뜻한 판타지나 자연과 타자, 기계문명에 대한 경고와 일본적 토속의 부활과 정체성 회복으로 표현된다. 그가 서양동화에 대한 열정과 찬사는 반대로 '빨강머리 앤'이나 '마녀 키키의 우편배달'같은 완전한 서구적 판타지로의 전향을 의미했다. (비록 그 안에 숨겨진 정서가 일본적인 그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서양 판타지에의 흠모와 일본적 정체성 사이의 괴로운 간극. 어쩌면 그것은 센과치히로 탄생의 필연을 의미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작품은 위에서 말했듯이 서양의 세 동화에 대한 오마주이지만, 그 오마주로서 가지는 재창조의 상상력은 일반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우선 이 작품은 나같은 사람이 볼때 눈이 돌아갈정도로 환상적인 작품이다. 가장 평범한 일본 외곽의 낡은 유원지, (인간의 손이 탄 곳이 버려지면, 그곳은 귀문鬼門이 된다는 사실은 동양에 퍼져있는 주지의 신앙이다. 도깨비신앙, 귀문둔갑술 참조)그곳에서 벌어지난 다소 이상한 현장의 목격으로 신들의 목욕탕에 들어선다는 구조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환상적 플롯구조 (에릭 랍킨이나 츠베탕 토도로프가 정의했던 작품 내의 패러다임에 대한 공공연한 위반)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뒤에 벌어지는 수수께끼처럼 황당한 사건들의 단절된 에피소드는 앨리스의 여러 이야기와 일맥상통 한다. 
그런데, 이 앨리스적 플롯구조라는것이 기가 막히게 일본 고유의 정서로 치환되고 있다는게 이 작품 최대의 매력이자 마력이다. 캐롤의 앨리스의 병치적 에피소드가 모두 서양 고유의 민담속에 산재한 우화들의 집합이라고 하였다면,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에서 외적 플롯은 앨리스(혹은 서양 민담)를 따오되, 안의 내용물을 죄다 일본신화와 요괴담으로 채워넣은것이다. 센과 치히로에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모든 신과 요괴들은 일본 고유의 신과 요괴들이고, 그것은 '목욕탕'이라는 일본적 소재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새 그릇에 낡은 정신을 담았다는 표현이 이처럼 완벽하게 어울리는 작품도 없을것이다.

외부적 플롯으로는 '서양의 동화이야기 - > 일본적 신화의 목욕탕'으로 밑그림이 되었다면 그 안을 채색하는 작품의 '내용'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의 메타포가 작용하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주된 이야기는 '이름을 빼앗긴 센의 성장스토리'와 '하쿠와 유바바의 주종 속박관계'이다. 이 두가지 이야기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얽혀있지만 각각의 이야기 역시 위에서 말한것처럼 서양의 유명한 두가지 동화에 대한 오마주이자, 재창조이다. 이름을 빼앗긴 어린이 센이 유바바밑에서 여러가지 경험을 하면서 소녀로 성장한다는 성장스토리는 하야오가 즐겨 쓰는 전형적인 소재중 하나이다. 이런점에서 이 작품은 하야오적이다. 또한 자연과 기계문명, 신들의 배타적 대립 속에서 우리는 하야오 특유의 '녹색문학'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대한 가장 절충적 대안으로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바다위를 가르는 증기기관차 - 즉 스팀펑크-를 생각해볼수도 있겠다)
이 '이름'의 속박과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독특한 스토리는 바로 20세기 최고의 환상성장소설이라 불리는 어슐러 K. 르귄의 '어스시의 마법사'의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하야오는 이 이야기를 르귄식의 차용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플롯의 일본적 변용에서 그러했듯이, 여기서도 '가마할아범'과 '먼지요괴'를 통해서, (사실 이 부분이 작품 내에서 융적인 심리성장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논문도 꽤 발표된 상태이다)일본 특유의 신화적 심상과 융심리학의 교묘한 혼합으로 이 작품 자체가 '신화에 대한 스토리'라는 커다란 틀을 받쳐주는 플롯적 조감에도 기여하게 만든다. 이것이 센과 치히로가 여러가지 이야기가 꼬여있어도 자연스러운 두번째 이유다. 이 이름에 대한 또하나의 재밌는 에피소드로 많은 관객을 매료시킨 사건은 아마 가오나시의 등장일것이다. 가오나시는 말 그대로 '얼굴없는 신'으로 (역시 일본 신화에 나오는 요괴다) 스스로 말을 못하며, 자신을 불러주지 못한다. 즉, '이름이 없는'것이다. 이 점에서 가오나시는 센이나 하쿠와는 비교된다. (가오나시에서 타자에 대한 현대인의 표상을 읽어낼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 안에서는 그 의미보다는 이점에 더 주목할만한 필요가 있다.) 센은 이름이 '잘려나간' 불안정한 상태이고(불완전한 성장을 하는 아이를 암시), 하쿠는 이름을 잃어버린 상태로서 서로 불안정하다.(이에 대해서는 동화 크라바트를 읽어보길) 하지만 가오나시는 이름이 '없다' 그래서 타자가 부르는 가오나시라는 것을 그대로 이름으로 만들고 살아간다. (이름이 없는 가오나시가 얼굴도 없어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상적이다.) 이름의 존재는 '자신을 변화시킬수 있는' 주술적 코드다. 이름은 불려지면서 효력을 가지고, 그 타자가 자기에게 효력을 발휘하는 가장 큰 방식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가장 커다란 주제는 이 '이름'이라고 말할수 있고 이 '이름을 찾으므로써' 하쿠도 치히로도 모두 본래의 상태를 찾는다. (또 이런 환상속의 깨어진 패러다임을 복원하므로써 현실로 돌아온다는 플롯적 구조 역시 앨리스적이다.)
이 이름에 대한 코드와 엮이는 성장스토리는 물론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성장스토리는 어스시의 그것과는 여러모로 다르고 독특하다. 따라서 단순한 패러디나 오마주로 치부해버리기는 너무나 새롭다.

끝으로 하쿠라는 이 매력적인 인물은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의 동화 '크라바트'의 주인공인 크라바트의 완전한 오마주이다. 보헤미안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의 마법사 크라바트는 자신의 가난함에 이기지 못하여 방앗간 길드의 마법사에게 찾아가 제자가 된다. 그것은 가난함을 이기고 모두다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때 마법사와 맺은 계약은 바로 '속박'이다. 속박속에서 크라바트는 점점강해지지만, 속박안에서의 강함은 아무 소용이 없을 뿐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도 만나지 못하고 사랑한다 말하지도 못한다. 크라바트는 결국 연인의 도움으로 스스로를 극복하고 마법사와의 계약을 해제하는 성공하여 사랑과 자유를 얻게 된다는것이 이 전설의 줄거리다. 
하야오는 이 매력적인 중세 스토리를 반대로 엮어서 이 작품에 투영시켰다. 하쿠는 시골의 작은 강의 신이다. 자신의 강이 점점 오염되가서 그것을 막기 위해 막강한 신인 유바바에게 마법을 배우러 오지만, 마법을 배울수록 그는 점점 속박당하여 (이름을 빼앗긴다) 자신조차 지킬수 없는 상태가 된다. (작중에서 하쿠의 강은 완전히 매립되버린걸로 나타난다) 크라바트에서 연인이 결정적으로 그의 해방에 도움을 주듯, 하쿠는 센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이 결정적인 방식은 아주 재밌게도 작품 마지막부분에 센이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찾아야하는 퀘스트로 한번더 패러디하면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 사실 이 방식이 크라바트에서는 연인이 크라바트를 찾는 방법이었다. 크라바트가 연인과 사랑을 용납하기 위해선 마법사가 제시한 문제는 바로 크라바트와 동료들을 모조리 똑같이 생긴 까마귀로 변신시키고 그 아홉마리의 까마귀중에서 여인이 크라바트를 찾는것이다.) 이렇게 작품 속에 엮이는 또다른 이야기는 '자연(신화,주술)'과 '기계문명(마법, 혹은 기술)'의 대립이 만들어가는 투쟁과 해방의 내용. 즉, '원령공주'나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 드러나는 그의 녹색주의성향이다. 신통하게도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작품을 이끌어나가면서도 그 안에다가 하고 싶은말은 다 집어넣은것이다. '이름'에 대한 센의 이야기와 '해방에 대한(크라바트적인) 하쿠의 이야기'는 끝에 서로 합쳐져 (어찌보면 변증적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작품의 카테고리를 만들어버린다. 그 더 높은곳으로의 상승에는 '서양적인것의 동양적 치환'이라는 이야기적 플롯이나 패러디와 재구성이라는 위에서 말한 소재들을 능가하는 부분에 있다.



- 미야자키하야오, 일본의 거장이라는 아이콘 -


센과 치히로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위대한 점은 결론적으로 '일본적인 테두리'로 감싸안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이 하야오는 바로 전후세대 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전후 일본의 처참하고도 쓰라린 농촌의 환경속에서 자란 사람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본 토속적 정감들을 그리워하는 노스텔지어적인 측면을 함께 지닌 감독이다. 그것은 하야오의 작품성향에 '자연에 대한 인간적 묘사'로 종종 드러나는데, 그게 바로 하야오의 모든 애니메이션을 감싸는 가장 커다란 특질중 하나다. 이 작품은 분명 서양 동화에대한 오마주이자, 일본적인 재구성이지만, 이 커다란 하야오만의 특질로 작품 전체를 감싸안으면서 비로소 '하야오의 작품'이라는 아이콘을 형상화할수 있는것이다.
낡은 유원지에서 부는 바람과 갈대의 흔들림같은 세세한 묘사나, 목욕탕의 어릿한 풍경들, 그리고 섬짓할정도로 아름답고 환상적인 물위를 지나가는 기차는 하야오가 아니면 누구도 만들수 없는 낭만적인 장면들이 분명하다. (이 기차씬은 하야오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겪은 추억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전후 파괴된 일본 농촌은 유독 태풍으로 인한 홍수가 많았고, 홍수가 끝나고 개인 날이면 빗물이 무릎까지 찼다고 한다. 그러면 침수된 농촌 위를 어김없이 지나가는 낡은 기차들은 혹 바다위를 달리는 모습이었다고 회고한다. 하야오는 그 추억의 장면을 이 작품에서 거의 완벽하게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서양문학에 대한 동양적 메타픽션,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작품 안에서만의 고유한 주제와 플롯, 그리고 그 모든것을 통합하는 하야오적 색채감. 이점에서 이 애니메이션은 '완벽하다'는 칭호를 붙여줄수 있을것이다.


이 작품은 완벽하다. 서양에 대한 동양적 패러디와 신화적 상상력이 동시에 충돌하고 그 충돌된 콤플렉스들을 작가 특유의 아이콘으로 통합하는 이러한 어마어마한 개성에 있어서 이 작품은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과 동급의 위대함을 가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지극히 '일본적' 이야기 속에서 융심리학, 자아와 타자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서양 동화의 동양적 수용,이라는 거대한 담론들이 모두 녹아서 숨겨져 있는것이다. (이것 역시 백년의 고독과 매우 닮아있다)


이런 어마어마한 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지은 바다건너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애니메이션은 어떤가. 초기 명작이라 치켜세우던 '머털도사' 물론 우리것을 아주 잘 재현해놓은 뛰어난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우리적 정서에만 집착하여(물론 이두호씨에게는 집착이 아닐지라도 현대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분명 그렇게 보일 소지가 다분하다) 세계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기 어렵고,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는 하야오와 비슷한 방식으로 한국적 정감을 살린 영상 위에 한국 바닷가 소년의 성장이야기를 환상적으로 재현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바로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을 바라는건 한국 애니메이션계에 아직은 무리인걸까. 
왕후심청이나 거북이해로같은 '되받아쓰기'의 작품들도 센과치히로를 보고 나면 하나같이 바보놀음 일색이듯이 보인다.  

무작정 한국적인 것만 고집하고 그것을 재현하는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내세우는 -  국수주의나, 그럴듯한 서양문물을 한국적으로 포장하는 회색주의자의 입장이 만연한 한국 문화에, 어쩌면 하야오는 이 작품을 통하여 가장 확실한 대안을 내놓은것일지도 모른다.


푸른꽃 평점 9.8 / 10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3-08 08:41) 

  
 
 
 
상병 노지훈 (2006/01/30 17:01:43)

이거 너무 압도적인 글이라 반응이 없네요. 하핫.    
 
 
상병 송희석 (2006/01/30 17:54:15)

차라리 '바람의 계속 나우시카'를 주제로 했다면 수많은 논의들을 오고갈수 있을듯 한데, 
아무래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점에서 조금 약한것 같네요.    
 
 
상병 엄보운 (2006/02/16 08:24:08)

왜 이 글을 주목하지 않았나 스스로를 꾸짖고 있습니다. 굉장하군요. 지훈님이 말씀하신 압도적이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습니다.    
 
 
일병 허익준 (2006/03/08 09:29:56)

솔직히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의 "한국적인 정서"라는 것에 상당히 회의를 느끼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의 정서"라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을 꼽자면 "오세암"을 꼽고 싶습니다.(마지막의 관음보살님이 길손군을 성불시키는 것은 조금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지만) - 
확실히 일본은, 이런 점이 참 부러워요. "일본틱하다"라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거든요.    
 
 
 병장 김동환 (2006/03/08 09:48:23)

한국적인것의 부재가 비단 애니메이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지요. 
어쨌거나 좋은글이에요. 요거 읽고 센과 치히로 다시 봤었는데, 몇가지 더 알고보니까 좀더 
의미심장하더군요.    
 
 
일병 김주성 (2006/03/11 21:11:28)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한국적인것은 무엇인가?'라고 항상 고민해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병 이건룡 (2006/03/13 13:50:07)

이글이 올라 왔군요..개인적으로 인상깊은 글중 하나였습니다.    
 
 
 상병 강계정 (2006/03/17 04:46:48)

생갈치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