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베스트-독서후기]미안하지만, 이제 나는, 기형도를 노래하련다-책마을과 기형도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24 10:33:18, 조회: 230, 추천:1
1. 사실 오늘날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가든 간에, 그러한 생각들은 결국 몇 가지 정신적 태도들로 유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탈출구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책마을에서도 저는 그와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일종의 문예사조의 언어로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우선은 장르의 언어에서 벗어나자마자 여러분들은 낭만주의를 가장 손쉽게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진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지요. 우리들은 이제 막 장르적 언어에서 벗어난 수 많은, 연애에 실패하거나 간신히 성공한, 그리고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버리고픈 바이런의 후예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환멸을 느끼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연주의' 혹은 '리얼리즘'의 언어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어떤 결의로 지탱됩니다. 이러한 논객 유형의 사람들은 과거 스탕달과 발자크 그리고 플로베르와 위고의 후예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마저도 질리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돌아가게 되며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 같이, 자신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문필가가 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이것은 서구 문예사조에 있어서 '환멸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결핍감과 환멸 그리고 삶의 좌절과 분노에 대한 여러 가지 정신적 태도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서구의 문예사조일 뿐이라고 이야기해도 별 소용은 없지요. 왜냐하면 '삶'이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은 이미 그들이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언어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런데, 그들이 실험한 것은 이미 거의 모든 지평을 개척해버렸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 점에 관해서는 분명한 '유물론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연애나 여행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고요.
2. 하지만 저는 아직 한 가지 조류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더니즘'이라는 사조입니다. 우리는 그것의 위대한 대가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죠. 제임스 조이스, 미셸 푸르스트, 프란츠 카프카, 기타 등등... 저는 문학에 일천하기 때문에 이들을 가지고 제 자랑을 하려나,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서구 문예사조의 '환멸의 역사'의 최고조에 달해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점'이라는 게 동시에 그것의 '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이 적어도 문학의 영역에서의 낭만주의나 리얼리즘 그리고 자연주의 사조와 변별되는 것은 특유의 '아이러니'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학을 하는 자나 문학의 독자들이 지니고 있는 소위 말하는 '진심'(이게 제 아무리 무의식적이고 혼란스럽고 반어적이든 간에 무관하게)에도 관심이 없고, 또는 저 바깥의 저속한 '현실'에 대한 심술궂은 직설적 묘사에도 무관심한 것입니다. '아이러니'는 단순한 반어적 언급에서 동떨어진 채로, 바로 문학사를 관통하는 동일한 환멸감과, 결핍감, 그리고 좌절을 즐겁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도의 비유와 상징 그리고 이미지들을 통해서요. 그래서, 그것이 어떤 현실을 형상화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처럼 고도의 정합적인 이미지와 기호들 그리고 알레고리를 통해 새로운 언어적 현실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심리적 주관을 반영하지도 않고, 저 바깥의 현실적 관성을 묘사하지도 않는 '제3의 현실'을 창조해낸 것입니다. 그것은 가령 프루스트의 미로와 같은 기억 속에서 형상화된 유미주의적 현실이요,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온갖 기억의 단편들과 편지구절들을 통해 재구성된 현실이자, 카프카의 그로테스크한 알레고리들로 넘쳐나는 현실이지요. 이것들은 언뜻 보면 현실 속에서 겪는 심리적 '환멸'과 유사한 것도 같지만, 실은 이와 전혀 무관한 독립적인 경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홍명교 님이 언급한 <기형도>라는 기표는 바로 그 '모더니즘'이라는 한국의 정신사에 있어서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상징하기 때문에, 주목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국 문학사에서 '모더니즘'에 대해 해방 이후에 말할 것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해방을 전후해서 생산된 문학이 '모던문학'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요. 장정일의 시를 필두로 해서, 우리는 삶의 고독과 방황 그리고 허무와 환멸에 대해 '모르는 척' 하는 하나의 새로운 초월적이고, 독아론적 주관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탁월한 업적인데 그 이후에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적 현실들을 개인의 심리적 갈등으로 더 잘 치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할수록 우리들은 더더욱 개인의 환멸에 대해서 밖에 이야기할 게 없어져버린 폐색에 빠져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것은 제 아무리 '의지'로서 초월하고자 해도 말이지요. 이에 관해서 '기형도'는 하나의 징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3. 기형도에 대한 흔한 비평들은, 소위 말하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이 그의 유년기의 좌절에서, 그리고 그가 직전까지 살았던 사회적-정치적 격동에서, 혹은 점차 농후해져 가는 사회적 소외현상에서 연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카프카에 대해서, "현대 자본주의에 밀착된 관료제 속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근대인의 운명을, 유대적 카발라 전통에서 답습한 그로테스크한 알레고리로 접목시키면서, 자신의 유년기적 트라우마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데요. 이는 이후에 카프카 비평을 비판한 들뢰즈가 "왜 카프카의 소설에 명백히 드러난 유머와 해학, 그리고 기쁜 정념들을 주목하지 않는지"(주1)를 반문한 바와 같이, 기형도의 시에 대해서도 동일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모티브들, 검은 잎, 사무실, 공장, 안개, 떠돌이 개, 등등이 변주는 되는 방식들은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개가 딱딱해진 손을 덥석 무는 것은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사실은 기형도의 시는 재밌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들이 어떤 비극적인 복선을 깔지 않고 읽기 시작할 때 그것은 정말 '재밌어지기' 시작합니다.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재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패스티쉬'나 '패러디' 내지는 '소극'으로서 존재하는 재미와 완전히 다른 모더니즘적 '아이러니'가 주는 재미입니다. 물론 시인이 응시하는 삶의 결락감과 허무와 좌절은 매우 진지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굳이 무언가 비웃고 깔보고 짐짓 모르는 체 하는 자의식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재미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희귀한 재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언가를 비웃고 비워내고 짐짓 초연한 태도를 취해야만 얻을 수 있는 어떤 지적 흥분(저는 저 역겨운 김훈의 소설들에서 그러한 것을 봅니다)에 대해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형도의 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우위입니다. 이것은 우울증이 없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 잠깐 열렸던 이 언어적 지평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닫히고 말았습니다. 만약 기형도의 죽음이 진정 '비극적'이었다면, 그의 느닷없는 죽음과 더불어 그의 시들이 '우울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비극적인 일이지요. 그는 마치 후 -운동권 세대의 우울증의 화신처럼 다뤄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4. 그의 <그로테스크 미학>은 언어적으로 매우 정교한 알레고리들과, 반복되는 모티브들 그러나 결코 소진되는 법 없는 독창성들로 변주되는 시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적 언어는, 이제 '모더니즘'이 아니라 '심리적 리얼리즘'의 범주로서 다뤄지고 있는 사태는 정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말하자면 아무도 그의 언어에, 그것의 정교한 알레고리와 그것을 다루는 화자의 진지하고도 즐거운 정신적 역량에 집중하지 않고, 그 이면에 있을지도 모르는 뭔지 모를 방황과 좌절 그리고 심리적 결핍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제 생각에, 이것은 프루스트의 소설을 그의 외상적 유년기에, 카프카의 소설을 그의 애증서린 부자관계에, 조이스의 소설을 그의 불운한 아이리쉬Irish 배경에 연결시키고야 마는 유감스러운 경향과 일치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모더니즘이 뭔지를 모르는 비평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언제쯤 우리들의 입에 검은 잎 하나쯤 매달 날이 올까요? 그가 자신의 입에서 끊임없이 돋아난다고 토로했던 검은 잎은 그의 자기고백과 눈곱만큼도 비슷하지 않은 자족적인 경제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요? 물론 저는 하나의 사조로서 모더니즘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문학의 영역에서 유물론자가 될 가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모더니스트이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이야기할 때, 조금이라도 우리의 '진심'이나, 혹은 어떤 '현실'의 관성에 대한 저 진부한 환멸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상한 상황에 빠져버려 있는 상황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주1)질 들뢰즈,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 책마을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7-14 12:36)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55:00
병장 김형태
매번 원익씨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논지로 삼아질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있던 '유물론자이자 실존주의 박원익'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원익씨는 원익씨라는 결말로 있지만요.
포스트모더니즘, 아이러니에 관한 이들의 정신이 오히려 더욱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실존주의의 모습을 감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의 이상은 아이러니로 그치는 아이러니가 아닌 현실에 의한 아니러니이자 환멸이기 때문이겠죠.
누군가 칭해준 '포스트모던'이라는 지칭과 엮여 더욱 몸과 마음을 낭만주의로 이끌어 가는 저에게 언제나 '빨간서재'처럼 분명한 원익씨의 글을 볼때면 책마을과 연결된 수많은 고리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워지기도 하죠.
'글을 읽은 사람으로서의 예우'가 아닌 정보와 사상을 얘기하고픈 저인데 제대로된 예우조차 하지못할 것 같아 단문의 댓글을 다시금 지울때가 많습니다. 잘 보고있다는 것, 오늘에서야 표현해봅니다. 2009-06-24
11:09:22
상병 박원익
헉, 제가 실존주의자로 비쳐질 수 있군요....
제가 말하는 '아이러니'는 모더니즘의 유일한 도덕적 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뭐랄까, 사실 어떤 언어든 실패하고, 부조리해지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에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는 게 바로 모더니즘의 정신(아이러니)이 아닐까 해요. 따라서 아이러니는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정직한 도덕성을 지니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형도는 그런 정신을 가진 보기 드문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물론 곁가지로 기형도에서는 '포스트모던'이나 '낭만주의' 내지는 협의의 '리얼리즘'에서 그런 것을 찾긴 더더욱 힘들죠. 그것은 "나는 유한한 인간이야!"라고 외치며, 어떻게든 자신의 한계에서 도망치려고 하고 말입니다...
곁가지로, 기형도는 진정한 '유미주의'의 차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것 같아요. 오늘날 한국에서 제 아무리 탐미적인 유미주의의 흉내를 내봤자, 기형도를 못 따라간다는 것도, '모더니즘'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해봐야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만큼 정직하게 언어를 치열하게 탐구해 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언어적 세계가 자립화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언어적 세계가 현실세계보다 더 리얼해질 수 있는 순간, 그러한 인위성의 첨단에서 데카당스나 유미주의의 세계가 나오는 것이고요. 2009-06-24
11:53:03
상병 양동훈
휴아. 사실, 철학이나 문학쪽에 관한 지식이 일천한 저로써는 원익씨의 글에는 해독 불가능한 단어들이 상당수인 것이 사실입니다(웃음). 그래서, 원익씨의 글은 항상 '일단 닥치고 프린트'라는 정신으로 보고 있어요(웃음X2)
항상 논의되는 내용 중에 하나이지만, 글은 글이어야만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글이 아닌 '작가'로 보게 되면 그 글의 가치는 일단 반이 날아간다고 봅니다. 이육사, 윤동주는 저항시인이니까 그들의 시는 무조건 되도 않은 억지해석을 덧붙여서 저항시. 이러한 시도가 우리 나라의 중고딩들의 문학적 감성을 얼마나 짓뭉개놨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의 문학적 감성이 메마르다 못해 아주 쩍적 갈라져 버린 것을 교육과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 같아 가슴이 저려오네요(껄껄) 2009-06-24
18:33:51
상병 김태완
원익 / 잘 읽었습니다. 원익님은 현 청년들의 낭만주의적 글들이 못마땅하신 거군요. 꼭 찝어서 지금 올라오는 글들에 대한 비판은 안하셨지만 님의 글에 그러한 마음이 속속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특히 환멸의 역사를 우리가 그대로 따라갈 것이란 말씀에서 우회적 포장으로 덮인 매우 직설적이고도 신랄한 비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물론자이시기에 심리적 측면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것을 못마땅 하게 여기시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실제로 물질적 현상을 정신적인 것의 발현으로 해석을 하다 보면 우울로 치닿기 마련입니다. 상실의 시대에 빠져 죽음을 끼고 살며,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영혼없이 떠도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태로 치닿는 사례가 는다는 점에 원익님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전 모더니즘에도 그리 호의적이진 않습니다. 모더니즘은 사람을 기계화 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내재하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아이러니로써 얻게되는 재미가 진실로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복적 모티브나 단어들의 변주를 생각하고 보면 시가 조금 특이하게 다가 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냥 아무런 복선이나 해석없이 시 자체만을 보고 읽으면 모더니즘적으로 접근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시는 독자에 의해 재해석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더니즘적 해석은 자칫 교과서식 해석을 강요하는 것과 동일시 될 수 있습니다.
전 원익님과 반대로 유심론자에 가깝습니다. 청춘기를 보내는 사람으로서 딱딱한 모더니즘보다 인간적으로보이는 낭만주의나 심리적 리얼리즘에 더 끌립니다. 원익님의 생각에는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특히 우울로 치닿는 식의 글이나 해석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점에서는 완벽히 일치하게 동의합니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수용을 대안의 일안으로 내세우신 점에는 회의적입니다. 2009-06-25
12:16:56
일병 박준우
원익/ 글을 읽으니 뭔가 뜨끔 하는게 오더군요. 마치 제가 주절주절 올리고있는 글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계신거 같아서 뜨끔했습니다.
저는 사실 무식한 공돌이인지라 문학적 사조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저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한가지 내용이라면 어떤 대상들을 묶음지어서 구분짓는것에 대한 회의입니다. 덕분에 무슨무슨 ism이라는 말만 들으면 머리부터 아파오기 시작하죠.
사실 저는 어떤 대상이든 각각 개별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에 각각 다른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어떤 주의로 분류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어떤 사조로 분류 되어야 한다는것 자체를 거부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꼭 어렵게 가는것만이 좋은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쓰고싶은걸 쓰고 읽고 싶은걸 읽으면서 쉽게 가는길도 나쁜것만은 아니니까요. 2009-06-26
05:41:48
상병 박원익
김태완/사실 그렇게 지적하고 보니까 뜨끔해지네요. 하지만, 20대의 유심론적 낭만주의가 비단 책마을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점에서, 저는 책마을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쓴 건 아니라는 변명을 해둬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더니즘'이라는 하나의 명확한 조류를 옹호하고자 했던 게 아니라, 통상적인 서구의 정산사적 발달단계에 비춰볼 때, 기형도는 뭐랄까, 한국의 담론적 장에서 '잃어버린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한국에서 '결핍'이라는 역설적 양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모더니즘의 어떤 가능성을 일별케 하는 건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 가능성이란, 아주 간단히 말해서 우울증이나 치졸한 자의식과 나르시즘적 자조와 무관한 어떤 삶의 태도라는 겁니다.
박준우/저도 쉽게 쉽게 가고 싶습니다(웃음), 한가지 농담을 더 해보자면, 저는 변증법적 유물론자이기 대문에, 사물을 어떻게든 강박적으로 분류하는 것만이, 오히려 그 분류에서 빠져나오는 단독적 개별성을 더 잘 드러내는 첩경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06-30
05:14:33
상병 진수유
잘 읽었습니다. 2009-06-30
09:48:37
상병 정성근
흐음. 달의 이면같은 느낌이랄까. 결국 해석은 각자의 몫인 게지요. 낄낄.
개인적으로 저는 이상에 대한 해석들 중 제일 코믹했던 건 이상을 예수그리스도와 결부시킨 것이었지요. 중딩때 이걸 읽으면서 "이걸 찢어, 말어?" 고민했던 기억이. 2009-08-21
23:10:24
상병 정성근
흐음. 달의 이면같은 느낌이랄까. 결국 해석은 각자의 몫인 게지요. 낄낄.
"우리는 우리가 사물에서 보고 싶은 부분만 본다." 라는 말도 떠오르구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상에 대한 해석들 중 제일 코믹했던 건 이상을 예수그리스도와 결부시킨 것이었지요. 중딩때 이걸 읽으면서 "이걸 찢어, 말어?" 고민했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