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다양성과 통합
병장 이승일 05-05 02:30 | HIT : 170
< 문화의 '다양성'에 '구체성'을 부여하라 : 프랑스 이민자 문제 다시 바라보기> 를 읽고
이 글은 재영씨의 긴 글, <문화의 '다양성'에 '구체성'을 부여하라>에 대한 답글입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재영씨의 깊은 관심과 열의, 그리고 진지함을 엿볼 수 있었던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재영씨의 따듯한 마음과 문제의식에 크게 공감하며, 저의 마음도 재영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따로 답글을 쓰는 이유는 진정한 <통합> 의 의미에 관해 재영씨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재영씨의 구체적이고도 실증적인 글에 비하여 저는 자료도 없고 읽은 것도 없어서 뭐 또 그냥 혼자 삐약삐약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삐약삐약.
[1] 프랑스적 다양함과 오만함
< 통합>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뻘소리로 프랑스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느낌을 이야기고 싶습니다. 재영씨가 글의 서두에서 밝히신 것과 같이 프랑스 사회는 결코 똘레랑스의 사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결코 '고요한 아침의 나라' 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프랑스를 세번 방문해보았습니다. 모두 여행이 아니라 '체류' 에 가까웠기 때문에, 프랑스 일반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 느낀 프랑스인의 모습은 제가 경험해본 그 어떤 나라의 국민보다도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수많은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을 통해, 프랑스 사회가 굉장히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기비판적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 판단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러한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은, 프랑스사회가 그만큼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한 사람들이지, 결코 프랑스의 일반 문화를 대표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실제로 데리다를 비롯한 여러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은 프랑스 국내에서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미국에서 유명해진 뒤 그 국제적 유명세를 타고 프랑스에 역수입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문화의 근원을 찾아보면 이 지식인들이 단지 '반항의식' 만을 가지고 깝쭉댄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인의 자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아무런 정체성도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부터 프랑스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들이 혼합된 장소였습니다. 갈리아지방에 정착한 프랑크인들은 동남쪽으로는 거대한 라틴문화와 라틴민족, 서남쪽으로는 포르투칼과 소위 '무어인', 동쪽으로는 친척뻘인 게르만족과 그 일파인 고트족과 동프랑크족, 북쪽으로는 노르만족과 더불어 영원한 앙숙인 앵글로색슨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이 모든 민족, 문화와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형성해왔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그 어떤 구체적인 정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그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구체적 민족성에도 포섭되지 않는 커다란 전체, 그것이 프랑스인들이 지닌 자의식이었으며 또한 자부심이었습니다. 따라서 다양성이라는 모토는 프랑스가 그 시원부터 떼어낼 수 없는 가치인 것입니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포스트모던적인 성향은 이러한 문화적 뿌리에서 결코 크게 떨어져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프랑스 사회의 문화를 다양성/통합의 관점에서 극히 단순하게 도식화해본다면 ① 다양성의 통합으로부터 구축된 정체성 → ② 이것이 확고해진 뒤의 폐쇄성 → ③ 그리고 다시 다양성에 대한 요구 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화적 전이의 도식은 수많은 나라에서 발견되는 과정입니다. 중국이 그러했고, 영국이 그러했으며, 미국이 그러고 있습니다. 이것을 꼭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묘사하고 싶진 않지만, 결국 그와 비슷한 구도를 그려내고 말았군요. 뭐, 제가 의도한 바는 그것이 아니지만, 저의 표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라도 묘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양성, 통합과 관련하여 프랑스는 다중적인 층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진행되어온 층위이며, 그 역사가 매 현재에 누적되어 지층을 이룸으로써 문화의 심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성과 통합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해와 관심은 거의 뼈속에서부터 나온 것이며 이 문제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외국인이 보기에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가치에 대해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복잡한 방식으로 예민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 통합
이제 좀 더 중심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재영씨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 모르겠으나 조금 추상적인 방식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책상 위에 꼬냑 한 병이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꼬냑이 책상 위에 있다" 라는 명제는 추측컨대 참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 명제의 부정, 즉 "꼬냑이 책상 위에 없다." 라는 명제는 아마도 거짓입니다. 이제 실제 사실이 어떠한가는 접어두고 단지 이 두 명제만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앞의 명제를 p 라고 부른다면 뒤의 명제는 -p 가 될 것입니다. 이 두 명제는, 실재와의 대응관계 에서는 완전히 비대칭적이지만, 단지 하나의 문장으로서 인식될 때에는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는, 대등한 기호의 구성체일 뿐입니다.
문화의 다양성이 의미하는 바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p 와 -p 를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지 문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듯이 다양한 문화를 '물화시켜서' 본다면 그들은 당연히 동등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은 삶과 인간의 진실에 더 가까울 수 있고 어떤 것은 더 멀 수 있습니다. 이들을 '단지 독립적인 문화라는 이유' 만으로 대등하게 바라보는 것은 피상적이고 물화된 관점 하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화들 사이에 우열관계를 메긴 후, 열등한 것을 버리고 우월한 것만 남기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우선 절대적인 우열관계는 인간이 메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월한 것 하나보다는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이 조화된 것이 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통합은 바로 이러한 맥락 위에 있습니다. 이 맥락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위해 일반적인 통합의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통합은 세가지 정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첫번째 방법은 전부다 섞는 것입니다. 한 나라에 다섯 개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p 와 -p 를 섞는 것처럼 모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 문화들은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상충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충을 무시하고 "그냥" 한 곳에 묶어놓는 것은 또다른 의미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방법은 어떤 것들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p 는 (참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p 는 거부하는 것이지요. 혹은 우월한 것만 남기고 열등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프랑스 소요사태 때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하고 있던 일이 될 것입니다. "쓰레기" 를 치우는 일 말입니다.
세번째 방법은 p 와 -p 가 모두 긍정될 수 있는 새로운 <일관적> 명제 q 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위에서 든 예를 다시 생각해보죠. 자세히 살펴보니 '꼬냑'이 책상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뽀뜨와인'이 책상위에 있었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뽀뜨와인이 책상위에 있다" 는 명제를 q라고 해봅시다. 이 새로운 사실에 비추어보면, p와 -p 는 (논리적으로는 -p 만 참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부분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p의 경우, 하여간 어떤 술이 책상 위에 있다는 것을 진술했다는 점에서는 옳지만, 그 술의 종류에 있어서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p 의 경우 꼬냑이 책상에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옳지만, 결국 어떤 구체적인 진술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는 점에서는 사실을 매우 불충분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p 와 -p 를 상보적으로 함께 고려함으로써 실제 사실에 더 근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명제 q 를 통해 p 와 p 모두를 부분적으로, 그러나 어느 것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포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q 의 발견과 제시입니다. 새로운 사실에 대한 언명인 q 가 없다면 p 와 -p 는 결코 스스로 합쳐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일 따름입니다.
문화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상충하는 문화들이 통합되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를 한 부분으로서 포함할 수 있는 더 큰 문화적 이상이 제시되어야합니다. 이러한 방식의 통합이 바로 과거 프랑스의 정체성이 수립되던 시기의 통합이었으며, 고대 중국과 근대 미국의 통합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 ①번 과정으로 표시한 부분입니다.) 프랑스의 경우, '더 큰 문화적 이상' 이란 카톨릭 신앙과 그에 수반하는 문화였습니다. 1806년까지 거의 천년동안이나 지속했던 프랑크 제국은 카톨릭을 바탕으로 창건되었고 또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구체적인 구심점이 존재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다양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심점, 총체성 하에서만 다양성이 불쾌하거나 균열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풍요로움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재영씨가 글의 말미에서 제시한 논조가 '첫번째 방법'에 의한 통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를 권리' 에 기초한 통합 말이지요. 뒷부분에서 말하겠지만, 저는 이러한 방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비적 단계, 잠정적 수단으로서의 의미만 지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상으로서의 문화가 제시되지 않은 통합이란 어느 쪽에건, 어떤 형태로건 폭력적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p 와 -p 를 함께 섞으려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프랑스 안에 혼재하는 이질적인 문화는 과거에 프랑스가 이루었던 대통합 이후에 유입된 것이고, 이 이질적 문화들마저 융융시킬 수 있는 더 커다란 문화적 총체성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진정한 의미를 갖는 새로운 통합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 이미 꽉 찬 밥그릇에 밥을 더 넣기 위해선 결국 더 큰 밥그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더 큰 밥그릇을 구해오지 못한다면 잠시 동안은 주걱에 밥을 얹은 채 기다릴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억지로 밥을 꾹꾹 눌러서 전부 다 맛없게 만들거나 여분의 밥을 쓰레기통에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밥을 합쳐야한다" 라는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큰 밥그릇을 고찰하는 것입니다.
[3] 예비적 단계로서의 관용
저는 다양성을 포괄할 수 있는 <일관된> 총체성, 새로운 구심점이 없다면 통합은 결국 실패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현 상태에서 모든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일관된 총체성을 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통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재영씨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만, 재영씨의 의견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구심점, 새로운 이상이 사회가 원한다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로운 총체성을 모색하는 동안의 분열을 완화시키고 완충시키기 위해서 관용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더 큰 문화적 집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비좁은 집에서 어색한 동거를 하려면 상호간의 배려가 있어야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 배려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집에 대한 희망에 의해 지지되는 배려요 관용이라는게 중요합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으니깐 서로 이해하고 살아보자'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직 주어지지 않은 총체성을 기대하며 그것이 주어질 때까지 당분간 인내하자는 것입니다. 목표 없는 관용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 무수한 사례들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4] 결론
재영씨의 의견을 '다양성을 취합하는 것으로서의 통합' 이라고 제가 감히 요약할 수 있다면, 저의 의견은 '일관/포괄적인 총체성에 의한 다양성의 통합' 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전의 잠정적 상태로서 재영씨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이렇게 놓고 보면 크게 다른 의견같지도 않네요. (허무)
사실 저는 <똘레랑스(?)> 라는 글을 사회적인 차원이 아니라 개개인의 차원에서 쓴 것입니다. 개개인, 그리고 그것의 총체적 집합인 인류 전체는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인 성취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 구체적인 개별 사회는 인간이 구성한 것이고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며 결국은 퇴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신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 끊임없이 더 의롭고 선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나쁜일이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에 대한 재영씨의 엄청난 애정과 관심에 다시한번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병장 성태식
100% 동의합니다. 제 관점에서 이 주장은 표준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떻게하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차피 사람들은 다른 사람하고 같이 살아가는걸 생각하기 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떤 이성을 꼬실지 걱정하는걸요.
아니. 그만하면 양반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일 떠넘기려는 사람조차 많은데요. 뭐.
방법이 안 나오고 있습니다. (...)
자. 이제 재영씨의 글 읽으러 고고고~ 05-05
병장 이승일
태식 / 방법이 있습니다. 헤헤 05-05 *
병장 성태식
승일 // 더헛? 설마 대권도전? (퍼억!)
으음. 제가 요구한건 사실상 대중에 대한 계몽에 가까운지라 공교육의 내용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야 어려운데요. 공교육을 바꿔도 힘들어요. 최소한 우리나라에는 올바른것보다 하고싶은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아무리 승일씨가 똑똑해도 이 분위기 바꾸려면 힘들거같은데요. (웃음)
어떤 방법인지 어서어서 말씀해 주시와요. 05-05
병장 이승일
태식 / 기도하면 되요. (긁적) 05-05 *
병장 김대현
??? 정말 이상한데요 05-05
병장 성태식
승일 / GG....... 05-06
병장 이승일
태식 / 진짠데.. (울먹) 05-06 *
상병 김재영
승일 / 다양성의 취합으로서의 통합이라는 것을 가장 우선시하여서 통합에 대한 의미를 재정의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저는 '지금' '여기'서 차별당하는 각종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이 수립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저런 제언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역사적인 실험과 실천 속에서 진정한 일관된 총체성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칵테일을 섞는 방법으로서의 통합을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아울러, 인종주의와 <소외>에 대한 문제를 다시 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번 달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 총기 사건을 그런 측면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한 글을 기획 중이긴 한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걸 보니 저 역시 공부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05-09
병장 성태식
승일 // 완벽한 정답이라 GG를 친거죠. (땀) 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