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가지고 노는 사람들의 자세
문득, 이런 식의 뻔한 잡담이 하고 싶어졌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카페의 창가에 앉아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머리는 최신유행하는 스타일을 기본으로 하여 독특한 포인트로 마무리했다. 귀에는 이어폰 또는 헤드폰(오디오테크니카나 소니겠지)을 끼고 클래지콰이나 바이브(혹은 데프콘이나 다이나믹 듀오일 수도 있다)를 들으며 책을 보고 있다. 책은 에쿠니 가오리나 하루키(혹은 베르베르나 폴 오스터여도 괜찮다)일 것이다. 옷은 적당히 세련된 스키니진에 가방은 적당히 실용적인 백이다. 지갑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문화공간의 멤버십 카드가 들어있고, 튜닝하고 색을 새로 입힌 핸드폰이 옆에서 반짝인다. 핸드폰을 받으니 여자친구인지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반쯤 남은 아이스카푸치노를 두고 카페를 나선다.
대충 이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는 자신이 나름대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길거리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세련되고 문화를 즐길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리엔 이런 댄디보이들이 늘어만 간다.
귀에다 베이오다이나믹이나 슈어를 꽂든, 음악을 Deathangel이나 Kraftwerk로 듣든, 책이 까사레스나 이언 맥클라우드로 바뀌든, 그건 그리 큰 차이는 되지 않을 성 싶다. 어차피 중요한 건 나르시시즘과 댄디즘에 빠져 소비를 문화로 둔갑시키는 태도에 있는 것이니까.
물론 나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의 예를 들어볼까. 머리는 대충 동네 미용실에서 숱만 좀 치고, 귀에는 크레신을 끼고 온라인 할인매장에서 산 In Flames를 들으며 선물받은 도서상품권으로 산 '붐 그리고 포스트 붐'을 읽고 있다. 옷은 3000원짜리 티셔츠에 만원짜리 바지와 신발, 핸드폰은 없다. 지갑에는 카드 한 장이 달랑 있다. 이곳저곳 거리를 쏘다니다 근처 공원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벤치 옆에 놓고 책장을 넘기는 중이다. 이것도 다를 바 없다. 결국 문화소비는 문화소비일뿐 소비문화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혹여 카페 테이블에 5시간 죽치고 앉아서 노트에 소설을 적어내려가며 에스프레소를 작살내는 식의 '소싯적 조앤 K 롤링스러운' 생활을 한다면 그건 생산적 문화활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물론 그러한 생산적 문화활동과 폐인생활의 차이는 백짓장 하나 차이쯤일 거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지만, 하고픈 말은 이런 것이다. 남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남들은 그저 휩쓸려가고 있을 뿐인데 그 유행에 내가 휩쓸리는게 못마땅한 거라면, 그 남들이 보기엔 당신도 그저 유행에 휩쓸리는 또 다른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당신이 비웃는 그 댄스음악을 듣는 남들은 또 당신이 들고있는 싸구려 커피를 보고서 에티오피아산 커피의 독특한 맛을 떠올리며 알량한 스타벅스 커피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고, 당신이 비웃는 베르베르의 싸구려 상상력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들 중에는 한물 간 스키니진에 쿨하지 못한 헤어스타일을 속으로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고, 여하튼 어떤 것에 빠져들다보면 다른 것은 소홀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니까.
백짓장 하나 차이다. 모든 남들은 남들을 보며 비웃고, 모든 남들은 남들이 촌스러워보인다. 그 댄디즘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을 완벽한 소비문화의 정점으로 올려세우거나, 댄디즘 따위는 비웃어주며 자신의 촌스러움에 당당해진 상태에서 남들을 실컷 비웃는 모순을 즐기거나, 소비문화 자체에 초연한 채 공수래공수거를 중얼거리며 신구할아버지식 너털웃음을 짓거나, 그냥 나름의 문화에 애착을 갖고 비슷한 취향일 것 같은 사람을 하나둘씩 꼬셔가는 재미로 소비문화를 적당히 즐기는 자세를 견지하는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마지막 자세를 견지하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는 자기 감각에만 충실하게 마련이다. '향수'의 그르누이는 소녀들이 변태성욕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향수제조에 필요한 에센스를 얻기 위한 재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처럼 문화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바보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멋지게 꾸며내기도 한다. 그 문화의 장난놀음에 어느 정도 발을 담그고 어느 탕에 몸을 담글지는 각자 다른 마음이겠지만, 결국 인격을 나타내는 건 문화적 소양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씀씀이일 것이다. 온천에 다녀왔다고 인간적인 향기가 풍겨나는 것은 아니듯이, 하루키와 클래지콰이로 멋진 사람이 될리는 없을 것이다. 뭐, 그렇다는 거다.
*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6-08 15:16)
상병 김민성 (2006/05/26 09:55:54)
유행에 뒤떨어진 바보보다 유행을 쫓는 바보가 낫다. - 칸트
병장 박진우 (2006/05/26 10:02:53)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수 없고, 노력하는자는 즐기는자를 이길수 없다. -아무개씨.
병장 이종규 (2006/05/26 10:08:52)
언젠가 지인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 : 넌 지금 일에 만족하냐?
친구 : 아니. 별로...
나 : 왜? 하긴 너 그일 별로 안 좋아 하긴 했지. 근데 그 일은 왜 했어?
친구 : 즐기면서 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야. 우리나라는...
....
그냥 생각나서...
병장 박원홍 (2006/05/26 10:33:54)
'촌'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시대에서 '촌스러움'이라는 단어를 통해 유치함을 떠올리는 것은 무의미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촌스러움, 유치함이란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나의 조급함이 아닐까요.
상병 조주현 (2006/05/26 10:43:12)
노력하는 자는 천재를 이길수 없고, 천재는 운좋은 놈을 이길수 없다 라던데?
병장 박진우 (2006/05/26 10:52:17)
주현// 예, 그렇습니다. 운빨은 모든 악조건을 뛰어넘을수 있는 최대의 스탯중 하나죠.
으하하.
상병 허익준 (2006/05/26 11:03:01)
운좋은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돈 많은 놈은 못 이긴다.(...?)
상병 박병학 (2006/05/26 13:39:01)
이 시대의 문화는 돈이 없으면 누릴 수가 없어요.
돈이 없어도 누릴 수 있는 건 사람들이 문화라 부르지를 않지요.
왜 그럴까?
병장 마성은 (2006/05/26 13:52:09)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끌려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또는 '뉴요커'라는 단어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식민지적 발상.
병장 박형주 (2006/05/26 14:05:16)
머리는 대책없이 안 자르는 스타일을 기본으로 하여 빨간물을 들였다. 귀에는 CDP의 번들 이어폰을 끼고 갱스타나 가리온(혹은 김광석이나 엠플로일 수도 있다)을 들으며 책을 보고 있다. 책은 홉스봄이나 칼(혹은 리영희나 한겨레21도 괜찮다)일 것이다. 옷은 유행 지난 힙합에 가방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가방이다. 지갑에는 멤버쉽 카드는커녕 돈도 없으며, 4년째 쓰고 있는 진동마저 고장난 단음의 휴대폰이 그 두께를 자랑한다. 핸드폰에 전화할 여자친구는 옛날 일이 된 지 오래고 커피는 마시지 않는다.
힙합은 90년대의 것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일본 소설보다 사회과학 책이 진정으로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배럭 짓는 scv가 8번째의 것인지 9번째의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 드라마 스케줄 챙기는 것보다 백만배 더 중요하다. 나는 이 문화와 그 소비양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그럼 됐지.
병장 박준응 (2006/05/26 14:21:11)
오오, 형주씨의 강렬한 아우라!!(탕!)
병장 김동환 (2006/05/26 14:46:47)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데올로기만 아니면 됐죠 뭘.
병장 박형주 (2006/05/27 00:19:51)
동환/방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는데 거기서 인용했던 예수의 말이 저것이었군요! 아까 리플 볼때는 몰랐는데 이제 명쾌하게 이해가 됐습니다.
병장 정치훈 (2006/05/27 08:53:51)
모르는 것이 약이다.
병장 강계정 (2006/05/27 14:27:34)
머리감기가 귀찮아서 언제나 스포츠로 박박 밀어버린 머리 복장은 언제나 청바지에 티셔츠 가끔날이 춥다싶으면 위에 남방을 걸쳐 입기도 합니다. 귀에는 오디오테크니카의 ES-5가 걸려있어 뭔가 스타일리쉬를 느낄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고개를 내려 보면 가방끈이나 호주머니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미니엠프(때론 새로 만든 자작엠프)와 CDP리모콘 그리고 그것에 연결된 작은 쌕쌕이 는
뭔가 어색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항상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등짝에는 볼썽 사나운 커다란 등산 배낭이 매여있고
그속은 항상 무언가로 차있어 터져 나오기 직전 이군요... 아 지금 식당에서 배낭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고 있군요... 가방속에는 정체 불명의 연장들과 책서너권이 나옵니다 한권은 성경책 한권은 월간 네오와 플래툰 아무래도 오늘을 월초인듯 합니다. 월말 이였다면 분명 뉴타입이 들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권을 보고 있노라면 이이야기의 주인공은 얼굴을 찌푸립니다.
아무리 읽어도 읽어도 이해하기힘든CPU 매뉴얼? 따위는 딱질색 이였거든요.. 아그리고는
뭔가 괴상한 물체를 꺼네더니 9V 전지를끼워넣고선 그디어 성공했다며 자랑을 하고있습니다....
이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접니다...
병장 임태우 (2006/05/27 17:43:35)
결국 자신이 좋아할 수 있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즐기면 되는 겁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같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함께 즐기면 더할 나위 없겠죠.
문제는 이게 항상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렇게 생각하지만 자문해 보면 전혀 결백하지는 않아요.
자꾸 알게 모르게 비교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타의에 의해서 그런 상황에 처해지게 될 때도 있고요.
김성모가 한창 럭키짱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을 무렵
소개로 만난 김태희의 한참 직속선배였던 학생이 김성모 만화가
자신이 일생동안 본 만화중에 가장 재미있고 흥분된다면서
열변을 토하는데 이러한 충동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약한 동물이 남자인지라 그만...
상병 송희석 (2006/05/27 19:05:37)
머리는 대충 기르고, 염색은 정말 싫어해서 그냥 검은머리를 한체, 커피숍은 커녕 대학가 풀숲에 앉아 남들이 한참 촘스키책 읽고있을 무렵, 지젝을 읽고있다. 남들 스타에 한참 미칠때, 스타는 한물간 게임이라며, 가정용게임에 집중하고 있었고, 당시 대학생들이 강준만,진중권같은 논객들의 글을 보며 통쾌하고 있을때, 나는 그자들에 잘못된 의식을 찾아보고자 그들의 글을 '해체적 읽기'를 하고 있었고, 뭐 대충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무지하게 노력했는데, 남들은 나보고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바보'라고 놀리니 그런 놀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꾸준이 내생활방식에 대해 멋지다고 생각한다.
병장 김희곤 (2006/05/27 19:13:35)
희석님 멋져요!
상병 손현 (2006/05/27 21:52:47)
각자 제 멋에 살면 되지 않나요? 굳이 남의 눈 의식하면 그것만큼 피로한 일도 없겠죠. 허허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서~
상병 문창현 (2006/06/02 20:21:04)
생각해보면 복잡한 세상에서 살짝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체 속편히 살아가는 것일텐데 말이죠.
상병 임재현 (2006/06/11 22:56:58)
따라하려무나
그대신 조그마한 개똥 철학은 있어줘
일병 김경원 (2006/06/15 00:19:37)
어제 새로산 30만원짜리 프리미엄 청바지보다
7년전에 산 동대문표 1만5천원짜리 청바지가 더 소중하다.
희안한건
아직까지 내 몸에 딱 맞는 다는 사실.
병장 엄보운 (2006/06/15 10:14:14)
동석님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