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비유의 어려움 
 병장 김지민 04-25 12:55 | HIT : 265 







 문학은 참으로 오랜 세월을 거쳐 발전해 왔다. 그 동안 많은 집단으로부터 문학 공격론을 통해 공격받아왔음에도 문학은 끊임없이 형태를 변형하며, 혹 때로는 영역을 확장하며 개념을 변화시키며 존재해 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유구한 역사 탓에 문학이 가지는 '비유'들이 그 역사동안 천문학적인 수만큼 생산되었으며, 이에 따라 겹치는 비유들이 많고 결국은 식상한 비유들이 늘어나고 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언어는 무궁무진하다지만, 계속 어휘가 생겨난다는 단서를 없앴을 때, 한계가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비유 역시 그 한계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군다나 비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통용되는 사고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중복되는 경우를 피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다음의 그림에서 주황색 동그라미가 현재까지 축적되고 중복된 이른바 '식상한 비유' 라고 한다면, 카키색 동그라미는 '참신한 비유'일 수 있다. 다행히도 두 원이 확장하는 정도는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문학이 온통 식상한 비유로 점철 되는 경우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식상한 비유가 점차 늘어나는 만큼 이러한 식상한 비유를 피해 참신한 발상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려워진다는 결론이 난다.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비유가 얼마나 참신한가, 그리고 얼마나 훌륭히 모사해 내는가 하는 문제는 커다란 관건이 아닐 수 없다. 비유를 핵심으로 두는 문학인 '시'의 경우를 보면, 식상한 메타포를 쓰는 시의 경우에 있어서 '진부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물처럼 내 세월은 흐르네.
 그대는 꽃과 같다
 봄날 같은 행복

 이 진부한 시행들을 보라. (물론 이 시행들은 임의로 만들어낸 것들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을 창조해 내려는 이들에게 있어서 기 존재하는 비유들을 피해 비유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꽤나 중요한 하나의 능력이 된다. 기껏 생각해 냈는데, 이미 널리 쓰이는 비유라면, 마치, 발명품을 생각하려 할 때, 뭐라도 하나 생각났다 싶으면 '어? 그거 이미 있는건데' 라는 대답을 듣는 것과 같은 절망감이다. 때문에 이러한 목적에서라도 작가들은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문학에 있어서도 복고가 가능하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패션에서 보듯이, 참신한 패션만을 찾다가도, 오히려 옛날의 패션이 참신함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잊혀진 트렌드를 다시 꺼내어 생소함으로 자리잡게 하는 예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아까의 그림에서와 다른 점은 초록색 원의 추가이다. 이 초록색 원은 짐작하듯이 '망각의 영역'이다. 문학작품은 역사처럼 기록되어지고 전승되기 때문에 패션과는 엄연하게 말해서 다르고, '망각의 영역'이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구시대의 센스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문학역시 복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는 바다. 

 따라서 초록색 원은 이미 축적된 '진부한 비유의 언어'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식상하지는 않은' 언어가 될 수 있다. 이런 <같기도>같은 일이!
 아무튼 그리하여 비유의 세계는 다시금 확장 될 수 있다. 초록색 원 역시 다른 원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의 법칙이다. 아니, 복고의 법칙인가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비유를 만들어내는 방법적 측면의 고려이다. 비유는 실재를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용자 측의 인식에 그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 맞다. 혹 모호성을 통해 이 실재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면, 다시 말해서 비유가 의미하는 것이 여러가지일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더라도 수용자 측의 인식에 역점을 두어야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인식의 가능성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참신해 질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말 그대로수용자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머니는 스프레이
 다람쥐꼬리 같은 산


( 이 역시 임의로 만든 비유에 불과하다. 물론 이 시행들이 참신하다는 건 아니다(땀)) 이런 시행들이 있을 수 있다. 분명 식상한 비유는 아니지만, 읽으면서도 이것이 어떤 비유인지 선뜻 떠올려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꼭 이런 시편이 아니더라도, 동물을 최대한 추상화 시켜 공작품으로 만들라는 미술 과제가 있다고 할 때,
 코끼리를



 이런 형태로 구현 했다면, 실재와는 동 떨어질수록 참신하다는 평을 들을 가능성이 높아진 다는 것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이므로 '실재와 동떨어질 수록 참신하다'는 명제와는 엄연히 다름을 이야기 해 둔다)

 따라서 참신하고도 감각적이고 모호성을 띄어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는 비유는, 발상의 전환과 함께 실재와 모방 사이에서 인식의 역치를 찾는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학에서 비유를 하는 행위는 무척이나 고도의 기술이며, 결코 쉽지 않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고려 대상을 '자신'이 아닌 '수용자'로 두어야 함에서 어느 정도 작가는 고객만족 마인드를 가져야 할 지도 모르고, 이런 만족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진부함에서 탈피하는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이 문제는 지금 여기서 다루었던 '비유'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플롯의 측면, 구성의 측면에서도 요구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문학 창작을 하는 사람의 피똥이 얼마나 굵고 빨간지 새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병장 이승일 
 와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정말로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군요. (저 코끼리는 정말로 생동감 넘칩니다(낄낄)) 
 비유야말로 인간 사고의 정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이 결국은 비유라고 생각해요. 물리학같은 학문도 말이지요. 그래서 비유능력이 탁월한 사람들 보면 정말 부러워요. 그것은 단지 수사능력일 뿐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보는 시력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지민씨 말대로 진부하지 않다고 해서 좋은 비유는 분명 아니지요. 사람들이 보지 못했지만 실재에 아주 가까운 측면을 꼬집어 줄 때 그것을 훌륭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지민씨가 말씀하신 "동떨어진" 이라는 말은 기존의 사람들 의견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지 실재로부터 동떨어져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황민우씨가 항상 강조하셨듯, 문학 역시 일종의 발견이 아닐까 합니다. 04-25 * 

 병장 김지민 
 네네, '인식으로부터 동떨어진' 이라고 추가 설명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비유는 보통 사물을 볼 때 보이지 않는 면면들에 스캔을 뿌려주는 기능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네요. (낄낄) 04-25   

 병장 이영준 
 저 코끼리를 보니 문득 어린왕자의 코끼리와 보아뱀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04-25   

 병장 김지민 
 영준 / 그걸로 하려다 참았습니다. 헛헛 04-25   

 병장 정성우 
 달리 문학에서가 아니더라도 
 만화 창작에 있어서도 다른 측면으로 상당히 도움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고 할때- 최대한 이전에 있던 길에서 멀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더욱 가깝고 보행이 즐거운 길을 찾아 내어야 겠지요.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04-25   

 병장 김선목 
 책마을 보안관다운 포스가 혁혁하게 묻어나오는 글이었습니다. 히힛 
 참신한 비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창작하는 이들의 피똥이 수용자입장에서는 훨씬 양질의 부산물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존에 것으로는 도저히 수용자에게 아무 입질도 줄 수 없기에 끊임없이 감시자의 눈을 피해 확장되지 않은 영역의 담장을 넘어 그만큼의 땅을 따먹는 이들이 있기에 저같은 독자들이 새로운 장르와 기발한 기법과 참신한 묘사가 있는 작품을 만났을때, 마치 RPG게임 미니맵상의 어두웠던 지도를 펼치는것처럼 우리 머리속에 의식세계의 범주도 펼쳐지는 거겠지요. 
 물론 지민씨 말처럼 꼭 '식상한비유'에서 참신한비유'로의 확장뿐만 아니라 잊혀져 있던 과거에의 회귀, 즉 '망각의 영역' 통해 또 다른 맛을 제공해주는 경우도 있구요. 마치 지난겨울 코트속에 넣어둔 만원짜리 지폐를 발견한것 처럼 말예요. 
 아무튼 저 역시도 언젠가 '피똥'한번 싸보고 싶습니다. 덜덜 04-25   

 병장 정성우 
 과연- 생각해보면 만화에서의 그림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형태라는 범위에서의 
 실체를A라고 놓고 보았을때, 회화가 구현하는 A의 상이 A'라고 한다면 
 만화는 그보다 더 단순하고 명시도 높은 A''나 A'''로 그 이미지를 구현해 
 왔습니다. 
 하지만 만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시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범용적인 
 미디어이므로 그 형태가 A에 가장 가까운 회화의 이미지 A'에 최대한 
 근접할수는 있으나, A'자체가 될 수는 없으며 반대로 A'''''''나 A''''''''''''처럼 
 모든 수용자가 A라는 대상을 이해 할 수 있는 범위의 이미지를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만. 

 회화는 분명히 하나의 오브제에 대하여 A'''''''''''' 라던지 A'''''''''''''''''''', 하물며 
 새로운 개체인 B조차도 A의 오브제에 대한 이미지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이므로'라는 이유로 정당화 되고 있지요. 
 그렇기에 A'''''''''''가, 또는 A''''''''''''''''''''가, 게다가 B는 더욱더 용서되지 않는 
 것이 바로-만화라는 것.' 대중(특히 주류에서 떨어진 인간들)을 이해시키고 
 풍자하기 위해 태어난 만화미디어는 예술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지금까지 
'만화라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문학과 미술 음악이 난잡한 교잡을 거친 
 후에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 나타난 사생아일뿐이다. 퓨어 엔터테인먼트다.' 
 라고 주장해오며- 만화라는 것에 이상할정도로 예술적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배격해 온 저였지만- 지금까지 만화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할만한 근거는 단지 이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1- 애초에 인류가 그린 최초의 그림 동굴벽화 (알타미라라던지 라스코라던지) 
 는 아무래도 지금 역사책에서 말하고 있는 회화 이상의 주술적 의미를 지닌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성 즉,'문명에 대한 갈망'에서 
 빗어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와 '그림을 보고 싶은 욕구'가 빚어낸 위대한 
 창작물이었고- 회화의 시초는 그렇게 무한한 욕망의 결집체인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였습니다. 
( 성적인 요소까지 우스꽝스럽게 담고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보자면 더욱 
 명쾌한 해답이 되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언젠가부터 특정계급이 누리기 위한 고결한 미디어로 변질되어 
 서민은 누릴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렸고. 이것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모든 엔터테인먼트보다 더 상위의 것이라는 자부심에서 나온 
 칭호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입니다만. 
 어쨌든 만화는 시민혁명과 같이 대중을 위해서 태어났고-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떠나 모두에게 쉽게 읽히기 위해서 그야말로 '엔터테인먼트로서의 
 회귀'를 감행하였습니다. 
( 이것이야말로 진짜 르네상스다!!!라고 우기고 싶기까지한 마음입니다만) 

 그렇기에 저는 만화가 예술이 아니라 그저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에 더 자부심을 
 가집니다. 
 특히 싸구려 최루물이라고 하는 만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오히려 자랑스럽 
 습니다. 
- 싸구려=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운 -최루물=어찌보면 문학과 회화의 성격을 다 
 띄고 있기에더욱 몰입도가 높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겨우 찾아낸- 예술이라는 이름에서의 탈출이자 엔터테인먼트로서의 
 회귀인데 작금의 자칭 만화가라던지 제가 다니고 있는 소위 4년제 만화관련 
 학과의 학생들은마치 그 어떤 예술가로서의 특권을 지닌양 으스대며- 
 이해못할 그림으로 이해못할 스토리를 그려놓고 그저 '예술의 자유를 
 이해해달라' 며 도망치고 있지요. 
( 회화의 천재 피카소도 A라는 개체를 B라고 표현하기 이전에 A'를 완벽히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난 후에 B라는 단계로 돌입했는데 말이죠.) 
 우리나라 만화계가 살아나지 못하는 데에 무조건적인 제도 비판, 
 대여점 문화 비판 자체는 무의미 합니다. 
 애초에 우리 크리에이터들의 정신머리와 스킬부족, 공부부족등이 정답이라면 
 정답이겠죠. 

 문학도 마찬가지일까요.... 뭐 그건 제가 문학도가 아닌지라 단정지을 수 
 없지만-. 

 김지민 병장님 덕분에 제 신념에 한발자국 더 다가간 듯한 느낌입니다. 
 엔터테인먼트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에 더욱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겠죠, 
( 문학의 기법에 관한 이야기 였는데- 이런 결론을 내는 나란 녀석은 대체 뭐지.-땀-) 04-25   

 병장 김지민 
 매번 글에 대하여 자신의 전공분야에 입각한 감상을 하고 또 열의와 성의를 다해 답글을 달아주시는 성우님의 모습을 주욱 새겨두고 있습니다. 만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분이라면 정말 멋진 만화 만들 수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한가지, 예술의 정의는 현재까지도 여러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제가 본 글에서 다룬 '현재의 모방'이라는 정의는 저 먼 고대의 미메시스 이론에서 차용해 온 것을 밝혀 드립니다. 성우님의 댓글은 성우님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 이므로 예술의 범주를 정하는 것도 성우님의 몫이겠지만, 성우님의 기준점으로 하여금 '만화를 예술이랍시고 으스대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비판할 근거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예술 다운 예술의 의미는 또 다르겠지요. 마치 문희준이 아티스트라고 해서 망언 파문이 일었듯이 말이죠 (웃음) 04-25   

 병장 진규언 
 으어.. 무조건 책가지로 추천합니다. 지민님의 코끼리 그림이 최고 !! 
 더불어, 승일님, 영준님, 성우님, 선목님의 답글도 다함께 옮겨 가셔야 겠네요.(웃음) 
 잘 읽었습니다! 04-26   

 상병 신학수 
 수많은 책마을 분들의 덕석말이를 당해 피똥 쌀 각오를 하고...씁니다...덜덜... 

( 언어로 표현된, 혹은 표현된, 어쩌면 그 자체로)인간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은유(비유)적이지요...그러한 비유의 참신함과, 또 이해가능성 사이의 고민에 대해서는 공감합니다. 그러나 비유는 수용자 측 인식에 역점을 두어야 된다는 점 등은 말씀에 대해서는 조금 견해가 다른데요. 아니 견해가 다르다기 보다는 조금더 길게 보아야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수용자라는 것의 입장과 맥락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라, 나중에 새로이 조명되는 문학작품들이 많잖아요. 또한 비유라는 것이 어떤 대상과 대상의 속성중 유사점과 차이점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법을 드러내는 방법인데, 물론 작가와 독자가 어느 정도 비슷한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다르게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대상과 대상 사이에 무수히 많은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바와 마찬가지로, 재조명되는 문학작품들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복고라는 것도, 시어 자체나 표현 자체에 있어서는 복고일 수는 있지만, 그 복고가 가능한 것은 비단 향수 뿐 아니라 새로운 해석-시대적, 맥락적인-이 가능해진 때문이기도 합니다. 
 문학에서의 비유라는 것은 이미 작가 자기 자신이라는 수용자를 미리 전제한 것으로서, 그 최초의 전제를 기만하는-예를 들어 본인이 이해할 수도 없는 비유를 쓴다던가 하는-것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재평가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최초부터 자신이 아닌 타수용자의 관점을 생각할 필요는 생각만큼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올리신 글이 최근의 지민님의 시작(詩作)의 고민과 침체된 시기를 설명해주는 것 같아(즉, '작가'로서의 고민) 매우 가슴에 와닿습니다. 04-26   

 병장 김지민 
 학수 / 저번에 [명시까기]를 할 때에도 자꾸 이런 오해가 생겨서 제가 무척 난처했었는데, 수용자의 입장에서 인식에 역점을 둔다는 뜻은, 결코 수용자의 입장을 우선으로 하고 따라서 여기에 작가가 길들여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며, 다만 이기적인 글쓰기에 매진하는 것은 홀로의 중얼거림으로 끝날 뿐이라는 것임을 스스로 경고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해석적 우연성에 기초해서 훌륭한 작품이 태어난다는 것(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작가로서의 어떤 당위적인 이야기를 했던 것 입니다. 의도하는 바도 있되, 그것이 더 널리 확장 될 수 있고, 독자들의 수용 측면으로서 작가와 분리되어 비평될 가능성이 큰 작품이 훌륭하다는 생각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꾸로 말해, 자기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애초부터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제 논리가 자꾸만 비약되는데, 제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말씀드립니다. 04-26   

 상병 신학수 
 당연히, 모든 작품이 해석적 우연성에 기반해서 명작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너무 초조하게도, 해석이 불가능해질 것을 염려해 '자신의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상당히 안타까운 일임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해석적인 우연이 훌륭한 작품을 낳는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었습니다. 제 답글의 밑의 단락에서 언급하는 것처럼요.(본인이라는 일차 수용자가 있잖아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좋은 평가을 받는 것이 훌륭한 시일 가능성이 크고 나아가서는 명시로 오래 남을 가능성이 큰 것 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제가 지민님의 글과 댓글을 통해, 자기 자신을 통해 끊임 없이 반추하면서 수용가능성(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과 참신성을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 문학하는 자세다...정도로 이해하면 어떻습니까? 04-26   

 병장 김지민 
 그림 사라졌다.... 04-30   

 병장 이승일 
 우리 마음속에 있어요. 걱정말아요. 05-01 * 

 병장 김청하 
 정말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나봐요. 난 그림 못 봤는데도 그림이 그려져 05-01   

 병장 김청하 
 아 그래도 코끼리는 보고싶다 ...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