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에 관하여 
 병장 이승일 05-10 04:46 | HIT : 360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한이라는 개념을 기이하고 불쾌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이 생각한 '좋은 것' 이란 밝고 명랑한 것이었다. 밝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모든 것은 명확한 경계선을 지녔고 파악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추상적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기하학적 도형들은 사물에 경계를 부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점으로 인해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무한이라는 개념은 기분 나쁜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경계지어지지 않은 것, 태양 신 아폴론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중세, 심지어 근대까지도 무한은 단지 잠정적인 것이나 상상의 산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무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가무한적 관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집합론이라는 분야가 발전하면서 인간은 무한에도 명확한 질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한계가 없는 것" 이라는 수동적인 가능태가 아니라 "자신의 부분과 크기가 동일한 것" 이라는 적극적인 현실태로 등장한다. 이것은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라는 유클리드기하학의 공리 중 하나를 "전체는 부분보다 크거나 작다" 확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여전히 아무런 모순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풍요로운 법칙들이 존재한다. 

 나는 20세기에 와서야 드러난 무한의 질서에 대해 지성계가 더욱 주목해야한다고 믿는다. 물론 그 내용 자체는 여러모로 응용되어 과학과 철학에서 암암리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의미에 대해 묻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무한론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지적인 성향에서 크게 일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지적인 성향이란 무엇인가? 나는 과감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부담스러운 것들을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의 조합으로 대체하려는 것" 이라고 말이다. 목적, 의식, 가치, 언어 등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들은 오늘날 더 이상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주는 부담감을 더 이상 견디려고 하지 않는다. 무한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조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적 의미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 있는 것 같다. 무한이란 부담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좀 더 명료하고 단순한 것들, 즉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로 분해하고 싶어한다.  목적은 다위니즘으로, 의식은 뉴런의 연결망으로, 가치는 사회적 합의로, 언어는 행동으로. 그리고 무한은 유한의 조합으로....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 모든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여전히 놀라운 열정으로 수백년간 이어져온 계몽의 작업을 계속 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직한 사람들은 아예 '분해' 자체를 포기한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부담스러운 것들의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최소한 학문의 세계 밖으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목적, 의식, 가치, 언어를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런 거 없다." 라고 배짱을 부리거나 "잘 모르겠다. 내 문제는 아니다." 라며 겸손을 떨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아이러니하게도 이들만큼 강하게 목적성을 드러내는 인간 유형도 드물며, 이들 처럼 자신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열정적인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그 누구보다 언어적 합리성을 신뢰하고 있으며, 확실 친 않지만 아마도 자기 자신의 의식을 누구보다도 명료하게 지각하고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세상의 크기에 맞추어 자신의 이성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이성에 세상의 크기를 맞추길 원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들이 외면하는 영역은 더욱 넓어지고 또한 자명 하게 드러나서, 결국 자기가 서 있는 좁은 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는 것 같이 보인다. (물론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나는 부담스러운 것들을 완전히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 환원주의자들과, 그런 것을 아예 외면하는 제거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이 무한의 문제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무한이라는 개념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그 안에서 놀라운 일관성과 법칙이 발견되었는지 설명해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편히 수용할만한 것들' 을 받아드리는 것은 그것이 명료함과 단순함이라는 이성적 기준을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한도 그러한 것을 만족시킨다면, 대체 무한을 원천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무한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개념이며, 유한한 것들의 조합으로 해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들의 주장이야 말로 정말로 부담스러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유한론적 환원주의자들은 무한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경험, 혹은 그것의 조합에 의해 도달 가능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경험과 상상력 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어떤 경험을 통해 무한을 발견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떤 경험의 조합을 통해 무한이라는 개념을 상상해 낼 수 있는가?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란 공간적으로건 시간적으로건 혹은 그 이외의 다른 측면에 있어서건 모두 다 유한한 것이다. 그리고 유한한 것들을 아무리 뒤 섞어 놓아도 그것은 유한한 면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반복' 이라는 개념 속에서 무한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무언가에 대한 순환적 반복을 통해 무한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 번의 순환적 반복을 거쳐야하는가? 당연히 무한한 반복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제아무리 반복해보았자 그것은 유한에 불과할 것이다. 무한이라는 개념을 이미 전제하지 않고서는 반복에 의해 무한에 도달할 수 없다. 
 일부 수학자들은 "임의의 자연수에 대해 그것의 후자가 존재한다" 는 자연수 집합의 공리(페아노 공리)로부터 무한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선 사실이다. 문제는 "임의의 자연수" 라는 개념역시 이미 무한의 개념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의의 자연수'라는 것은 '조작적 내포' 라고 불리는 기술의 일종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대상의 성격에 의해 표현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자연수를 선택하는 조작적 <행위>' 에 의해 기술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수라는 것 자체는 시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것에 대한 우리의 조작적 행위는 분명히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10+1 = 11' 라는 수식이 표현하고 있는 수학적 진실은 탈-시간적이지만, 이것을 우리가 종이에 쓰거나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행위에는 명백히 시간이 소모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자연수든지 선택하고 그 후자를 발견하는 '행위'를 통해 정말로 무한 집합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구성해내는 집합은 단지 자연수 집합의 유한한 부분집합에 불과할 것이다. "임의의 자연수" 라는 개념은, 조작적 내포를 통해 수의 무한을 시간의 무한으로 슬쩍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무한을 유한한 것들의 조합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무한이라는 개념을 은근슬쩍 전제하고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무한이라는 개념은 유한의 개념 못지않은 풍부함과 정교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만약 무한이라는 개념을 폐기처분해야한다면 유한한 개념들 역시 정당하게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무한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무한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집합론의 방법으로 실무한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은 쉽게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하지도 않겠다. 게다가 예전에 간단히 쓴 글도 있으므로. 기하학적 방법으로도 실무한을 쉽게 개념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다만, 나는 무한을 허용하는 기하학에 대해 별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집합론의 개념과 완전히 상통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서로 독립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표방하는 아이디어는 대체로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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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평행선이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제 5 공준에 의하면,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평행선이 원점에서 무한히 먼 지점에서 만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심지어 그 점을 지나고 나면 서로 교차한다고 생각해보자. 교차점은 가장 작은 무한이 될 것이고, 그 이후의 모든 점들은 이보다 더 큰 무한에 대응하는 점들이 될 것이다. 이 점들이 표상하는 것이 바로 실무한이다. 
 이것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상충하지만, 이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모순 없이 포함한다. 즉 유클리드 공준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함으로써 얻어지는 기하학이 되는 것이다. 

 나는 '모순 없다' 는 사실이 결코 아무 때나 일어나는 싱거운 일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실무한(무한기수)이 존재한다는 가정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지만, 가장 큰 무한기수의 존재는 집합론의 체계 안에서 성립 가능하지 않다. '모든 것들의 집합' 이나 '모든 순서수들의 집합' 같은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무한한 것은 이성적으로 성립 가능하지만, 무한히 큰 것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것은 도저히 이성에 의해서 포착될 수 없는 것이다. 





 병장 정현수 
 무한에 대한 브로우베르의 직관주의적 관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05-10   

 상병 김영훈 
 현수 / 와! 브로우베르. 누구죠? 
 저는 현수님이 블로우베르의 직관주의적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더 궁금한데요! 05-10   

 병장 진규언 
 좋은글 감사합니다. 절반도 이해못했지만, 그래도 꼼꼼히 읽다보니 얻는것이 많습니다. 항상 승일님의 글을 보면 생각이 무한히 촉발될 수 있어서 좋아요. 언급해주신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선처럼 좀처럼 서로 만나지 않는 생각의 편린들이지만.. 사고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언제나 빚지는 기분입니다. 

" 이들은 세상의 크기에 맞추어 자신의 이성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이성에 세상의 크기를 맞추길 원한다." .. 라고 말씀해주신 부분에서 현대인의 교양 부족에 대한 비판을 읽어내려는건 조금 억지스러운 연결일까요. 05-10   

 병장 정현수 
 간단히 표현하자면, 무한 같은 건 없다 - 라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왜냐? 아무도 무한까지 세어본 사람이 없으니까, 라는 게 그 이유지요. 

.... 좀 김 빠지는 주장처럼 느껴질지는 몰라도, 브로우베르가 주창한 직관주의는 현대 수학 기초론의 3대 주의 중 하납니다. 논리주의, 직관주의, 형식주의. 05-10   

 병장 정현수 
 아차, 막상 질문하신 저의 생각에 대해선 미처 못 적었네요. 

 제 생각은 힐베르트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칸토어의 낙원으로부터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낙원이란 칸토어로부터 촉발된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한'을 의미합니다. 물론 무한이란 없다라고 정의하고, 기존 수학 체계를 유한한 범위(정확히 말하자면 가무한의 범위까지) 내에서만 구성한다면야 더 이상 골치썩힐 일도 없겠습니다만, 그래서야 '재미'가 없지요. 전 개인적으로 무한과 관련된 집합론적 영역은 일종의 '취향의 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취향은 무한이란 것이 있다는 쪽이고요. 05-10   

 병장 김광철 
 글 초반부를 보니 문뜩 하이데거의 '폴리스'에 대한 분석이 떠오르네요. 

 고대 그리스의 사고 방식 안에서 <무한성>이라는 것은 분명 하나의 '악'이었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규정됨 속에서만 무엇인가는 그 본질을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예컨데 고대에서 미美의 구현이란 것은 오로지 '조형적 형상' 안에 들어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었답니다. 

 이러한 전통적 사상을 배경으로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에서 출현한 '폴리스'라는 매우 특이한 도시국가의 형태를 분석하며, 폴리스를 비로소 그리스인들이 출현하게 해주는 장소로서 이해합니다. 

 즉 폴리스는 어원적으로 '폴(막대기)를 세운 지점'을 의미하며 고로, 막대기를 세움으로서 하나의 경계설정을 한다는 것이 폴리스의 근본의미라는 것이지요. 폴리스는 도시국가라는 정치적 형태의 의미보다는 그 근본에서 '경계설정'이라는 함의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계설정은 예컨데 구체적으로 '문명/야만의 경계' 등으로 나타나지요. 

 폴리스를 세우면서 설정된 이런 식의 경계안에서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었던겁니다. 마치 어떤 형태속에 제한 될 때만 미의 본질이 예술작품 안에서 구현되는 것처럼 말이죠. 

 뭐...그냥 떠오른 잡담이었구요~(웃음) 
' 실무한'의 개념화라..... 수학적 지식에 어두운 저에겐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군요..끙.. 05-10   

 병장 이승일 
 현수 / 저도 현수님 생각과 비슷합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재밌는게 쵝오! .. 허나 저는 정말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또한 진실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이 글에서 이미 썼듯이, '자연수의 확장성' 에 기초한 무한의 해체는 이미 무한을 전제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생각합니다. 직관주의자들 중에는 브로우베르같은 막가파 말고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브로우베르는 이 글에서 '제거주의' 라고 말한 입장과 사실상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으로 브로우베르의 직관주의를 받아들이려면 귀류법을 포기해야하는데, 이것은 벼룩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늘날 수학자중에 공식적으로 직관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규언 / 기쁘게 읽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제 자신이 교양 부족인데 누구의 교양부족을 탓하겠어요. 다만 자기가 이해할 수 없다고해서 없다고 말하거나 추방해야한다고 말하는건 정말로 딱한 태도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지민씨가 쓰신 시인추방론처럼요) 

 광철 / 폴리스에 대한 정확하신 설명 감사드려요. 재밌습니다. 폴리스가 '폴'을 세운 지점이라는 뜻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왠지 푸코 feel 이 나는군요. 칸토어가 밝혀낸 것은 우리가 무질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무한에도 질서가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야만이들도 나름대로의 심오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05-10 * 

 병장 정현수 
 사족입니다만, 그래도 브로우베르의 무한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이 - 수학자들에게 귀류법의 테크닉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좀 더 생각하고, 또 주의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수학에 공헌한 부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귀류법을 사용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05-10   

 병장 이승일 
 현수 / 그러게요. 귀류법이 좀 '더러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 유한한 지성이라면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하는 무기 같아요. 그것도 아주 강력한 무기이죠. 한방에 왠만한거 다 날려버릴 수 있으니깐. 똥묻은 핵폭탄이랄까 (..) 05-10 * 

 병장 심승보 
 실무한에 관한 게오르크 칸토어의 삶과 탐구에 대해서, 그리고 전반적인 무한에 관한 연구사를 '아마츄어적' 수준에서 개괄하기에 퍽 유용한 책이 있습니다. 애머 악첼이 쓴 <무한의 신비>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이 저서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진진하고 깔끔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번역과 역자주 역시 비교적 탁월한 편에 속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