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글내생각]무라카미 하루키와 성 바울로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13 05:25:53, 조회: 171, 추천:0 

0.
[그러나 이윽고 썰물이 되자, 나는 혼자 모래밭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무력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슬픔은 깊은 어두움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울곤 했다. 운다기보다 마치 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가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익혔다. 혹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진리였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 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매일처럼 골똘히 그런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위스키를 몇 병씩이나 비우고, 빵을 씹고, 물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를 모래투성이로 만든 채, 배낭을 메고 초가을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주1)

1.
  제가 '상실의 시대'(원제는 물론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저는 '상실의 시대'라는 번역본만을 읽었으므로 이렇게 호칭하겠습니다)를 읽었을 때, 저는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신앙심이라는 게 그래도 조금은 있었던 나이였습니다. 이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는데, 소설 자체도 그렇거니와, 아무튼 이 강렬한 구절이 전해오는 어떤 분위기나 세계관의 편린들이 저에게 일종의 '영적 도전'을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목사님이 평소에 설교하시던 '죄성'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은 깨달음이 왔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 예수님이 왜 우리를 위해 못박혀 죽으신 다음에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 살아나셨는지 알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못박힌 다음에 부활했다는 게 왜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의 '복음'인지에 대해 묘하게 납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오코와 가즈키의 죽음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는, 바로 와타나베를 위한 게 아니었을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와타나베 같은 불쌍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것이라고 말이죠. 성령의 감동이 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농담만은 아닙니다. 다들 알다시피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탈이데올로기 시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연애'라는 새로운 보편사적 이념의 과녘을 정확하게 맞췄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됩니다. 일본의 경우 그것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상실의 시대 열풍이 불었을 때 역시 우리도 정확히 그러한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던 때였을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소설 자체도 그렇고 인용한 구절에서는 뭔가 우리와 동시대적인 어떤 감수성을 제대로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후-하루키 세대의 통속적인 젊은 감각의 소설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작중에서 화자는 심지어 그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루키 소설을 단순히 세대교체적인 어떤 문턱으로만 볼 때 놓치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루키 이후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냐면은 전혀 그렇지가 않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은 이 '연애소설'을 기점으로 더 이상 사회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마치 '전공투'를 거부하는 주인공처럼, 거기서부터 퇴각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부터 이후 일본 소설들의 단순한 연애담이나 풍속적(낭만적)인 것에 대한 서술만이 나오는 것이냐면은 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때 하루키는 세대론적인 작가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하루키는 정확히 어떤 '보편사적인 이념'을 다루고 있었고, 이것이 이 작품을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념'이란 단순히 '연애', 더 정확히 말해서, 소설 내에서 반복되는 '삼각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보다 근본적인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와 진지하게 대결하기 위해서는 그 '근본'을 따지는 게 우선일 것입니다.

2.
  가령 상실의 시대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연애'를 단순한 경험적인 연애담으로 볼 때, 혹은 거기에 대한 어떤 회한어린 회고조의 서술태도만을 볼 때, 그것은 단순히 달콤한 우수로 가득 찬 연애선배의 경험담으로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말하자면 미도리나 나오코 그리고 레이코와 같은 인물들은, 레이코 자신이 반어적으로 언급했듯이, '센티멘털리즘의 지평'에서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오코의 자살은 단순히 청춘의 성장기적 아픔과 상실의 한 요소로 환원되고 맙니다. 가즈키와 나오코는 성장의 아픔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나 역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할 겨를도 없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있고, 당신과 나를 나누는 거리는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더욱 멀어져만 간다, 삶은 상실의 연속이며 오직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에서만 상실했던 것의 소중함을 어슴푸레 깨닫는다, 그러나 기억은 희미해져도 그때 당시의 절실한 격통은 지금도 확실하다, 뭐 그런 식이지요. 확실히 성장소설에 관한한 하루키는 하나의 전범을 제시했고, 오늘날도 그런 것이 유행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여기에는 어떤 동일시의 태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성장소설 류 멜로드라마로 포장된 외관 이면을 볼 때, 사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나오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하자면 여기에는 연애담의 디테일에 대한 경험적인 공감이라기보다는, 나오코라는 고유명에 담지되어 있는 어떤 '가능성'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나오코는 '죽음'에 대한, 그것도 매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학적 환유입니다.("나오코는 죽음을 안은 채 거기서 살고 있었다"<412p>) 그리고 이 죽음은 물론 어떤 경험적인, 단순히 비참하고 끔찍하거나, 처연하게 슬픈 죽음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죽음을 내포한 삶, 그것이 언제나 현실적 가능성으로 엄존하고 삶을 압도하게 만드는, 어떤 삶 내부의 구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현실화 여부와 무관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죽음'에 관한 하나의 태도를 '발명'하는 절차입니다. 나오코는 단순히 나랑 한 번 밖에 X스도 안해주고 목숨을 끊은 무정한 여자친구가 아니라, 와타나베의 삶 속에 죽음을 들여오고, 정확히 그런 '가능성'으로서 살아 있는 '죽음'을 발명하는 하나의 형상形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 죽음이 들어왔으니..."(주2)라고 했을 때 정확히 염두에 두었던 게 아닐까 생각 들 정도로 말입니다. 바울에게 이 한사람은 물론 '아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죽음'을 들여왔으며, 현실적 삶 속에서 산주검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끔찍한 가능성, 인간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바로 그 죄성을 발명한 장본인이었습니다. 물론 이 '아담'은 이러한 '가능성'의 환유로서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나오코가 정확히 그러한 죽음의 형상이듯이 말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이 구절은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다루었던 모든 '주제'(삶, 죽음, 진리,)들의 절반 정도를 매우 훌륭하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로는 율법, 죄, 구원을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반'만으로도 그것은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이 무엇인지를 역으로 짐작케 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를 던져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복음이 무엇에 유용한가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주3) 제가 상실의 시대를 읽고서 역으로 성경 구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계기는, 그것이 바로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선언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켰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직도 '복음'이라는 게 있다면, 상실의 시대 이후에 우리들의 삶의 표상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나오코'들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어떤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데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의지에 관해서라면 와타나베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 나름의 삶의 준칙을 가지고서 나오코의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합니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주4)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긍정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잘 되지 않고, 그는 그런 과정 속에서 역으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주4)라는 깨달음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이야말로 바울이 "죽음의 권세" 혹은 "육신의 길"(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생각은 생명입니다(주5))이라고 명명한 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표준적인 성경 번역에서 '사망의 권세'로 읽히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볼 때 성경구절은 보편적인 날카로움을 잃고, 그것이 추구하던 바는 일종의 의학적 기적(불치병 환자가 가사상태로부터 살아남 등등)으로만 읽혀지게 됩니다.

  저는 사도 바울과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가장 잘 안 어울리는 저자들의 예기치 못한 '조우'를 이런 식으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봤을 때 역시 두 저자가 가장 잘 읽힌다는 것은 저에게도 조금은 놀라운 사실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하루키를 단순히 어떤 유행으로만 읽히는 어떤 세대사적인 인물로 보지 않을 때, 이러한 조우가 가능해지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하루키와 대결하려 한다면, 역시 바울이 아니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바울이 다루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루지 못한 나머지 '주제'는, '율법'과 '죄'일 것입니다. 그 이전에, 우리들은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죽음의 길' 혹은 그것의 권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합니다. 논의를 축약하기 위해 바울에 대한 알랭 바디우의 논의를 인용하겠습니다:

  "율법은 욕망에 삶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율법은 주체가 죽음의 길 외의 어떤 다른 길에도 들어서지 못하도록 만든다.
   죄란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은 욕망 그 자체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죄가 율법 및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죄란 자율성, 자동성으로서의 욕망의 삶이다. 율법은 욕망의 자동적 삶, 반복의 자동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요구된다. 왜냐하면 율법만이 욕망의 대상을 고정시키기고, 주체의 '의지'가 무엇이든 욕망을 대상에 묶어놓기 때문이다. 주체를 죽음이라는 육체의 길로 끌어들이는 것이 바로 욕망의 이러한 대상적 자동성이다.
  분명히 여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무의식(바울은 그것을 의지적이지 않은 것, 내가 원치 않는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문제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해서 고정되고 해방되는 욕망의 삶은 주체라는 중심축으로부터 이탈해 무의식적인 자동성으로서 완성된다. 그것과 관련해 의지적이지 않은 주체는 죽음을 생각해내는 것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것이 없다."(주6)

4.
  사실 바울 자신이야말로 로마서에서, "율법에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몰랐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선취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욕망의 문제로 생각했던 것은 사실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60년대 급진파의 사고에서 이미 두드러졌던 것입니다. 거기서도 '무의식의 해방'이 화두가 된 바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70년대 초반의 '전공투' 활동이야말로 사실은 그러한 사고방식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은 사실 여의치 않았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시 퇴행해 버렸으며, 궁극적으로 '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에서 벗어나지 못함'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히 이전의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이전보다 철저하게 극복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입니다.

  사실 법에서 해방된 삶을 의욕하겠다는 기획에서는 들뢰즈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뢰즈는 신경증Neurosis과 정신증Psychosis의 차이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주7): 신경증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억압하는 대신 온전한 현실감각을 돌려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콤플렉스는 리비도를 억압하는 데서 생기는 심적 장애와 불만들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감추고 숨겨야 현실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다음부터입니다. 역으로 정신증은 현실원칙을 무시하고, 다시 콤플렉스를 전면에 드러내는 광기를 의미합니다. 기묘한 것은, 현실적인 제약을 깡그리 무시해도 여전히 '콤플렉스'는 항수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오히려 심적 장애는 해방되기는 커녕 더욱 그 한계를 모르고 날뛰게 되고, 그 속에서 욕망은 더욱 위법적인 근친상간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다시 말해서 애미 애비도 몰라보는 몰대상적인 충동으로 변해버리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실은 '위법'적인 측면에의 새로운 도착적 매혹으로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68 이후 붉은여단이나 적군단과 같은 극좌 테러리즘의 등장이나, 극단적인 성적 타락과 환각제에의 탐닉의 등장과 맞물려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곤궁'을 통해서 다시 사도 바울의 본래의 사유가 다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사실상 넓은 의미의 콤플렉스의 문제로 본다면 말이지요. 사실 바울이 말하는 율법도 이런저런 계율로서 율법을 비판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걸 비판해도 걸려들어버리고 마는 그런 율법의 다른 '어두운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실의 시대의 화자와 더불어 그를 향유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신경증에서 정신증으로의 이행기에 있는 독자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와타나베를 사로잡고 있는 곤궁은 바로 그를 향유하고 있는 독자들을 사로잡는 곤궁이 아닌가요. 와타나베는 전공투의 패배에서 초연하기는커녕, 그것과 아주 깊숙히 연루되어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시작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전공투라는 신좌파 운동의 패배는 정확히 정신증으로 빠져버리는 실패의 이행기를 거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법을, 혹은 저들의 언어로 산학협동체를 혹은 제국주의를 부정한다 손 치더라도, 그것이 해방된 욕망을 낳기는 커녕 더욱 그것의 교착상태로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68혁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유럽과 달리 일본에서는 그 실패가 더욱 처절하고 뼈아픈 것이긴 합니다. 말하자면 와타나베라든지 하루키라든지, 그를 심미적으로 향유하는 독자들은 이러한 패배를 어떤 의미에서 같이 향유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말하자면 신경증적인 존재에서 정신증적인 존재로 이행하면서, 그리고 그 상태에서 꼼짝없이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와타나베나 우리들은, (나오코의) 죽음 말고는 달리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은, 정확히 그런 '죽음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상태를 심미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멈추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바울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측면에서입니다.

(주1)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413p
(주2)성 바울, 고린도전서, 15장 21절
(주3)성 바울, 로마서, 6장 9절
(주4)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412p
(주5)성 바울, 로마서, 8장 6절
(주6)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153p
(주7)Gille Delueze, Two Regimes of Madness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8:14:06 



상병 김태완 
  잘 보았습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숨기는 세태에서 거침없이 리비도를 드러내는 세태가 만연해진 현 사회를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고 계시는군요. 리비도의 방임은 극단적 성적 타락이나 폭력을 낳고 죽음에 대해 개방성을 띄게하죠. 저도 상실의 시대를 향유하는 사람 중 한사람으로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 필요없다. 죽으면 끝인데.'와 같은 생각. 참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고를 용인하면 범죄의 제국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작가들도 그렇고 매체나 언론을 봐도 범죄에 대한 보도만 했지 그 이면에 고착화되고 있는 우리의 사상에 대해선 직시하거나 방향론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종교가 정신증적 존재로 가는 길을 미약하게나마 억제하고는 있지만 성경이나 경전에 내포된 비합리성을 고려할 때 이것이 원론적 문제의 해결책이 되진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의 사유가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산주검에서 생인으로 전환하기 위한 계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계기로써 바울의 것을 채택하는 것 또한 안일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오히려 반작용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고 생각하구요. 

어디 '삶은 늘 죽음을 동반하므로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삶은 그자체로써 참 의미있다.'로 바꿔줄 묘안 없을까요. 2009-06-15
16:21:05
  



상병 박원익 
  바울도 소시적에 비슷한 것을 고민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죽음을 향한 삶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계기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들고 나온 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통해 당대 로마 제국을 양분하고 있던 철학적 헬라-그리스 담론과 메시아적 신비주의적 유대담론에 대한 제3의 길을 제시했던 것이고요. 헬라인들의 눈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광기'에 불과했고, 메시아를 갈구하던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스캔들'에 비쳐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정확히 그러한 방식으로 시대의 급소를 건드렸고, 보편적 대의를 향한 충실성을, 말하자면 당대에 완전히 생소한 주체성을 '발명'했던 것입니다.(여기서 저는 어디까지나 알랭 바디우의 논의를 원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게 단순히 의지로 가능한 일은 아니고, 모종의 '사건'을 통해서만,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물 때만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이 순전히 익명적이고 우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불안정성에 (수학적으로)존재론적으로 기초해 있다는 알랭 바디우의 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사도 바울 역시 헬라인들에게는 우주론적 총체성이요 유대인들에게는 불가해한 기적과 예언의 능력이었던 '신'을 단순히 한 죽음에 앞에 무력한 '인간'이 자처하고 나선 것에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예고하는 사건을 발견했던 것은 아닐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가 행한 이적이나 그의 언행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사람이고, 단순히 그가 일으킨 '사건'에서 새로운 길을, 새로운 주체성을, 새로운 조직을, 새로운 보편성(헬라인도 유대인도, 남자도 여자도 모르는 급진적 '보편성')을 철저하게 추구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이 길은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바울의 기획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가 당대의 담론과 정신사적 교착상태를 예리하게 포착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것을 정확히 포착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획이 어찌 될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바로 그런 능력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삶은 그 자체로서 참 의미 있다'는 언명을 가능케 할 새로운 사건적 현장이 무엇인지, 그게 어디서 가능해지는지, 이런 점을 모색해야할 때라는 것입니다. 2009-06-16
09:31:13
  



상병 진수유 
  정말 잘 읽었습니다. 

re : 응원!  
이병 장명철   2009-06-13 09:28:27, 조회: 223, 추천:0 

재미있는 글이군요.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정도의 감상과 의식의 개진이라니 정말이지 멋지네요. 저 역시 하루키의 센서블한 문장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지만, 단순히 그것으로 상실의 시대가 소설적 성과를 일궈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가지를 하나의 글에 쓰셨지만, 저는 죽음에 대해 직설적인 언급을 하는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싶습니다. 

하루키의 청춘 삼부작이라고 불리는 초기 3부작들은 상실의 시대와 비견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꽉 짜여져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유연하고 흐름에 어긋나지 않는 구성으로 소설적 성과를 얻어내고 있습니다. 팬의 한사람인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 세작품에서의 성과는 여러가지에서 이루어졌겠지만 아무래도 쓸쓸함과 경쾌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문장의 힘이 가장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고 쉽게 생각해버리는 상실의 시대에서는 그런 센티멘털리즘 뿐만 아니라 진중하고 무거운 죽음이라는 소재(이것은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했을 경우, 더구나 그것이 작가라는 영향력있는 인물의 경우에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피력하고자 하는 의견이 진실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어야하고, 그 진실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되더라도 감수할 수 있는 모종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에 대해 직설적인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복되고 있지요. 이것은 하루키에게 익숙한 독자들로서는 세련되게 읽히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글쓴이께서 하루키의 후예들에 관한 언급에서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조금 저는 다른생각을 해봅니다.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한들 그들에겐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힘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힘에 관해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관념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축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있군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그리고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실상 죽음뿐만 아니라 인류사에서 공통적으로 언제나 이야기되는 몇몇 글의 소재(소재이기 전에 삶의 진리겠지만요)들은 요즘 작가들에게도 중요한 테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 직설화법을 피하곤하죠.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에게는 그것들이 아주 세련된 양식으로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와 은유와 알레고리로 뒤덮혀져서 전언은 적당하게 가리는, 한마디로 열린 소설들의 경우지요. 하지만 글을 쓰려는 사람이나 약간의 편집증적인(저같은) 독자들에게 이것은 변을 보고 밑을 닦지 않은 것처럼 불편한 감정을 줍니다. 뭐 어쩌라는 거지 이런 식이지요. 하지만 이런 감정이 모든 텍스트에는 하나의 목적이 있어야하는데 그 목적은 주제에 다름아니다라는 얼토당토한 명제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죽음이나 삶 같은 관념덩어리들을 다루는 방법들이 하루키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지요. 어느 것이 좀 더 적확한 텍스트를 만드는지에 관해서는 시대의 평가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평가도 적합하지 않겠지만요.


바울과 연관지어서 글을 꾸려나가신 것은 정말이지 멋진 일이고 대단한 성과라고 합니다. 모든 텍스트는 불완전한 언어로 쓰여져있다는 것에서 크게 동류이므로 한 종교의 경전과 어느 지역에서 한 세대를 풍미한 소설을 엮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이런 방면으로는 더욱 더 많은 텍스트들이 생겨나야하겠지요. 좋은 글을 또 기대해봅니다.


*사족 1.: 저 역시 기독교 신자이지만, 성경은 신앙에 대한 고백이요, 예수에 대한 이야기요, 구원에 관한 약속임이 분명하지만 세계인의 베스트셀러임에도 분명하지요. 많은 상징과 서사들이 넘쳐흐르는 텍스트입니다. 텍스트로써도 중요한 것임에 분명하지요. 하지만 비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이것을 단순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 믿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이야기로 생각해버리곤 하지요. 성경에 대한 오해를 벗겨내고 진짜 가치를 갖게하는데 있어서도 글쓴이께서 하신 이런 시도들이 부단하게 이루어져야하겠습니다.

*사족 2.: 중간에 들뢰즈가 언급되었는데, 글의 분량에 비해 인용한 것들이 조금 많아 저같은 난독증 환자들은 어렵게 어렵게 읽히는 군요. 그래도 정말 좋은 글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8:14:32 



일병 박준우 
  민감한 부분이긴 하지만 성경에 대한 오해를 벗겨낸다는 말이 무엇인지 의문이 드네요. 

저도 기독교 인이긴 하지만. 전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뭐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는건 아니지만 뭐랄까 그냥 참고서 라는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성경에 내재되어있는 몇가지의 모순과 이익을 위해서 이리저리 난자당한 지금의 성경은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본적으로 신학에서느 성경을 바라보는 두가지 관점이 있는데 한가지는 축자영감설이라는 것이고 한가지는 본문비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성경을 종교적인 도구로 접근하느냐 텍스트로 접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본문비평을 지지하는데, 본문비평에서 말하는 성경이란 놀랍도록 잘쓰여진 글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라는 정도입니다. 본문비평에서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긴 하지만 과연 성경이 
어떤 오해를 벗어야 하며, 과연 어떤 진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글쓴 분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네요. 

이런곳에 올라오는 글은 종교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올라온 글을 보니 꼭 그런것만도 아닌거 같아서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2009-06-13
09:42:08
  



상병 김예찬 
  명철님의 논지는 성경을 단순히 특정 종교의 경전으로 대하는 태도(오해)에서 벗어나, 진리(단지 종교적 진리 뿐만은 아니겠지요)의 가능성을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서 그 가치를 회복해야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준우님의 뜻과 그리 벗어나는 이야기 같지는 않네요. 2009-06-13
10:33:07




이병 장명철 
  우와, 어려운이야기군요. 관점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거부감을 어쩔 수가 없군요. 축자영감설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기록한 자가 기독교의 신 여호와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받아 작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대언자의 역할을 기록자는 하는 것이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믿어야한다라는 것이 골자겠지요. 본문비평이라는 것은 성경의 서사구조로 이루어지고 수많은 은유가 내포된 하나의 재밌는 텍스트이다 정도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관점이 없는 사람이네요. 물론 기독교신자로서 성경을 믿기는 하지만 비신자들이 생각하는 재미있는 텍스트임에도 분명하거든요. 이 두가지 관점이 반드시 선택의 사항인 것이냐가 저에게는 더 의문입니다. 두가지의 관점을 다 가질 수도 있지않을까요? 이건 어쩐지 아들에게 엄마랑 아빠랑 누가 더 좋아 같은 느낌이네요. 왜냐면 기독교 신자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테니까요.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박준우 일병께는 어떤 것인지 저는 종잡을 수가 없네요. 비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어쩐지 웃기지만 성령의 임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거나 예배의 능력을 믿는 것 같이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정을 하지 않고 성경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니 조금은 신선하군요. 제 글에서 종교 중립적이지 못한 부분이 어떤 점인지 저는 잘 못느끼겠군요. 그런 쪽에 둔한 사람이라서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진짜 가치라고 하셨는데, 저에게 실상 진짜 가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그러니까 제 정의에 따른 기독교인으로써의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들은 웃을지 모르는 마음의 치유나 삶의 변화같은. 

하지만 쓴 글에서 언급한 진짜 가치는 박준우 일병께서 지지하신다는 본문비평적 관점으로 접근했을 때 가지는 성서의 텍스트적 가치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든지 아니면 잘 꾸며낸 이야기로 보든지간에 완성된 텍스트가 가지는 매력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하나의 읽을거리로써의 가치 말입니다. 이정도면 어수선하지만 답변이 되겠는지요. 2009-06-13
10:41:30
  



이병 장명철 
  예찬씨 말이 맞아요. 그리고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 성경의 오해를 벗겨내서 읽을거리로써의 가치를 회복하자는 이야기도 했지만 하루키의 직설적인 화법이 갖는 마력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워낙 제 글이 두서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전언을 전하는 방식의 차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은유와 알레고리로 가려져 열린 소설들이나 혹은 열린 소설들에 편승해서 이도저도 아닌 이야기를 하고마는 소설들과 전언에 대해 직설적이고 조금은 투박한 형태로 다가가는(상실의 시대는 문장면에서 분명히 아름답고 어느 문장보다 섬세하지만 전언의 부분에서는 투박한 쪽이군요 역시)소설들 중 어떤것이 옥이고 어떤 것이 석이냐 궁금할 따름입니다. 족히 몇백년은 지나야 알 수 있는 일들일까요? 

하루키의 입장을 조금 변호하자면 그 투박한 접근 어쩐지 능숙하지 못한 미성년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메마르고 투명한 그리고 깨질 듯한 아슬아슬함을 내포하고 있지요. 그것들이 하루키 개인의 성장과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봅니다. 후에 쓰여지는 해변의 카프카의 경우 전언에 관하여 조금 더 세련된 모습을 지니게 되었지요. 그래서 알레고리들과 상징으로 얽히고 霞 상실의 시대만 떠올리던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당혹감을 줄 정도로 난해성을 갖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런 하루키 개인의 성장 혹은 필력의 성장 혹은 의식의 성장(여기서 의식이란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라기 보다는 전하는 방식에 대해서의 의식으로 말해보고 싶네요)에 따라 변하는 그의 소설 중에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상실의 시대쪽을 응원하고야 맙니다. 아직 제가 어린 탓이겠지요. 해변의 카프카가 갖는 세련미와 상징체계 역시 매력적이지만 이유없이 좋은 상실의 시대의 방식이 맘에 드는군요. 무모하다고나 할까. 절벽같다고나 할까. 

결론적으로 어떤 방식에 관한 것은 결국엔 기호에 달린 것이 아닐까요. 기호란 어쩐지 너무나 수상쩍고 심히 가변적인 것 같지만, 그 개인의 기호들이 뭉쳐 대중의 평가를 만들고 그것들이 때로는 어떤 작품에 대한 평가로 굳어지기도 하니까요. 

어렵네요. 참. 2009-06-13
10:52:04
  



일병 박준우 
  제가 좀 애매하게 쓴거 같아서 좀 부연하겠습니다. 

본문 비평이라는것이 실제로 신학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내용인데, 그 이유인즉 성경의 근원을 파해치기 때문입니다. 본문'비평'이라는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이 본문 비평은 성경을 평가 절하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말 그대로 성경을 성스러운 경전에서 한편의 역사서정도로 바꿔 놨으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관점이 없는 사람이네요. 물론 기독교신자로서 성경을 믿기는 하지만 비신자들이 생각하는 재미있는 텍스트임에도 분명하거든요. 

라는 말씀은 조금 넌센스 입니다. 성경을 믿는다면 그건 축자영감설이고 성경을 읽는다면 본문비평에 가깝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본문비평의 이론에 따르면 성경은 낙하마디 문서인 코덱스들을 기원으로 하고 있고 그로부터 내용이 많이 변질 되었기 때문에 믿을만한 문서가 아닙니다. 
제 설명이 약간 애매하지만 믿는다면 본문비평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드릴수 있을꺼 같습니다. 

제가 내리고 있는 저 자신의 종교관은 성경을 건너뛴 교감입니다. 좀더 종교적인 단어를 선택하자면 삶에 임재라고 하면 적절할까요,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인이라고 자부 하는데 교회는 나가지 않습니다. 설령 교회에 나가더라도 목사님 개인사업에는 한푼도 투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가 없고 성경책이 없으면 기독교인도 존재 할수 없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살다보면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럼 왜 하필 기독교 이냐, 하고 의문을 제기하실분도 많을껍니다. 그럼 전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호, 라고나 할까요. 
다른 종교 인들이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던 야훼라고 부르던 뭐라고 부르던 전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냥 신은 있다고 생각하고, 신과 소통하며 살아가는데 있어 취하는 방법중 기독교가 취하는 방법이 저랑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명철님의 리플을 읽어보니 제가 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축자영감설과 본문비평의 차원에서는 성경의 성격을 경전과 텍스트의 양분으로 보고 이 둘이 공존할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경전이면서 텍스트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거 같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 때문인지 이런생각도 드는군요. 만약 독자가 성경을 텍스트로 읽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성경의 평가절하가 이루어진 셈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본문비평의 지지자중 한사람으로써 흐믓한 일이겠지만 말이죠. (종교 중립 어쩌고 하는 언급은 제가 잘못 이해해서 한 말인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2009-06-13
11:06:14
  



이병 장명철 
  개인적인 삶의 양식의 차이 좀 더 디테일하게 이야기하자면 종교관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거지요. 사람마다 믿고 있는 것이 다르고, 믿는 방법이 다르니까요. 그걸 가지고 구태의연하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것은 어떻게 믿느냐를 간섭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어떻게 믿어야할까 궁금해하거나 이건 아닌것 같은데 하며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야 선도라는 거북스러운 단어를 빌려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지만요. 한용운에게 님이 다양하듯 사람들마다 님이 다양하고 님에 대한 태도 역시 다를테니까요. 이 이야기는 각설하기로 하지요. 어차피 계속 이야기해도 평행사변형의 밑변처럼 만나지 못한채 이야기만 길어질 것 같군요. 

본문비평이 성경의 평가절하라는 사실을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일단 이론 자체에 약하니까요. 본문비평의 방식이 그런 것이라면 저는 표현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종교적 신념으로는 확실히 축자영감설을 믿는 편이지만 그것과 동시에 이것도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글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정도로 보시면 좋겠군요. 신을 대언하는 사람이 영감을 얻어 적었다고 한들 언어라는 불완전한 매체에 담겼기 때문에 오독의 요소(이 오독들은 다양한 해석을 낳겠지요)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신학자들도 한 구절을 두고 여러 방법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요. 저는 이런 점이 재밌는 겁니다. 또한 예수의 행적을 좇은 신약의 복음서들 같은 경우에는 진리로 믿는 것이 저에게 일단 선행되고 재미있는 이야기,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여러 예화와 우화들로 가득한 재미난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준우씨 말대로라면 전 본문비평쪽은 아니네요. 성서의 진정성을 믿음과 동시에 이것은 텍스트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니까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감정에 대해서 하나님은 과연 용인하실지 안하실지 모르겠지만요. 2009-06-13
12:08:26
  



병장 김동혁 
  ..수백년 후, 우리후손들도 이 이야기를 되풀이할지어다.. 

에멘... 2009-06-14
02:28:18
  



상병 진수유 
  잘 봤습니다. 2009-06-15
09:13:23
  



상병 김태완 
  성서를 텍스트적 측면과 복음적 측면 양방합일 형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일단 준우님은 성경을 배제하고 단지 사람과의 교감을 하기위해 '기호'에 따라 기독교를 선택하셨습니다. 신앙심이 아닌 집단에서 얻을 수 있는 유희와 교류가 기독교 단체에 소속되게 한 목적이자 배경이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신앙심이 부재되어 있으면 신에게 신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성경을 믿든 안믿든 기독교와 '기호'만 맞다면 누구든 신자로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명철님은 우화로 느껴지는 성경을 바탕으로 마음의 치유와 삶의 변화를 주는 듯한 기독교의 신령스러움에 감복하여 기독교를 선택하셨는데요. 글쎄요. 선녀와 나무꾼이 재밌다고 해서 거기에 나오는 선녀가 실존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명철님의 신앙은 신앙으로 보기 힘듭니다. 이는 종교단체의 교리와 전파로 인해 얻은 착각이라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신자화가 이룩된 것입니다. 

즉, 두분은 사회적 소외로부터 벗어나 종교로부터 부여받는 소속감을 통해 안정감을 찾기 위해 성경을 믿고 있는 아니, 믿고 있는 척 하시는 겁니다. 아마 속으로는 '성경은 그저 바울이 만들어낸 텍스트일 뿐이다. 그걸 진짜로 믿을 바보가 있을까.'라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직접적으로는 이야기 하지 못합니다. 이는 종교집단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암묵적 은폐 때문인데요. 종교는 여러 종교단체나 무교를 열거하여 보면 다양성의 일부지만 그들 내부를 살펴보면 이는 일방성으로의 유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정 반대의 사유를 하게 하는 다양성과 거리를 두고 자체적으로 결속해야 합니다. 요즘 세대는 각자가 삶이 바쁘고 신앙심도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유대는 쉽게 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 종교 단체는 종교의 유희적 측면을 부각시킵니다. 재밌기 때문에 종교활동을 하는거지 그렇지 않다면 아마 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귀차니즘과 니힐리즘에 금방 사로잡혀 종교활동을 그만두고 말 것입니다. 

저도 종교에 대해서 명철님, 준우님과 비슷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들어서는 무작정 믿는 것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권태를 느낍니다. 마치 목적이 뚜렷하지 않는 일에 목매는 것 같습니다. 단지 사람과의 교류로써 생각하기에는 강요되는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신이 과연 정말로 있을까요. 2009-06-15
15:38:32
  



상병 양동훈 
  태완씨의 말이 어찌 보면 제가 진심으로 하고 싶던 말이기도 합니다. 맞아요. 
태완씨는 종교인인가요? 저는 비종교인인지라.. 태완씨가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입장의 일치는 섬칫하기까지 합니다. 

정말 독실해 보이는 신자 중에는, 이런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제 중학교 동창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국어(사회?) 시간에 선생님이 종교에 관한 토론을 시킨 적이 있었지요.)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난지만, 저는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경에는 이러이러한 구절이 있고 어쩌구저쩌구 하며 과학이 어쩌구저쩌구 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근거가 너무 희박하고 비현실적이지 않나요? 

이 사람(굳이 계속 이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만)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있으니까요' 

느꼈죠. 종교적인 대화가 적어도 저와는 불가능한 진짜 종교인이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대다수의 종교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그걸 진짜 믿냐'라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고는 '나도 잘 모르겠어, 반반이라고나 할까' 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죠. 

결론은, 태완씨의 말이 정말 맘에 와닿는다는 겁니다. 결국 신자들이 신자인 이유는 그 종교의 교리나 역사나 경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아닌 그 종교를 믿음(혹은 믿는 척)으로써 얻는 또다른 것이라는 사실이요. 2009-06-15
15:49:10
  



일병 박준우 
  제 글이 또 의도와 다르게 이해된거 같군요. 기호에 따라 기독교를 선택한 것은 맞지만 집 
단에서 얻을수 있는 유희와 교류는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전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성경도 믿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믿습니다. 기호라는것에 대해 좀더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교회가 제 기호에 맞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제 기호에 맞는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저는 교회도 나가지 않고 성경도 믿지 않지만, 당당하게 기독교 인이라고 어디서든 말합니다. 제가 교회를 싫어하면서도 당당히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까닭은 제 삶에서 느끼는 신의 모습이 제가 이미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가장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단순히 기독교라는 애매한 범주안에서 저를 설명하는것도 사실은 너무 애매하지만(기독교내에도 많은 종파가 있고 그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기독교 틀 안에 있기때문에 기독교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과 교감하고 유희하기 위해서라는건 절대 아닙니다. 왜냐면 교회에 나가지 않으니까요. 꼭 종교 집단속에서만 종교활동을 할수 있는건 아니죠. 2009-06-15
19:15:34
  



상병 양동훈 
  준우// 너무 어려워지나요(웃음) 

왠지 조금 여유가 없어서 읽지 못했던 댓글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고 오니 준우씨가 말했던 재미있던 구절이 생각나서 다시 댓글을 덧붙입니다. 

교회가 없고 성경책이 없으면 기독교인도 존재 할수 없을까요? 

네.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교회가 없고 성경이 없으면 기독교인이 존재할 수 없고, 절이 없고 불경이 없으면 불교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스크가 없고 코란이 없으면 무슬림은 존재할 수 없구요. 물론, 비슷한 영감을 받은 비슷한 종교가 나타날 수는 있지만 '바로 그것'은 없다는 겁니다. 종교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그저 제 시각일 뿐입니다만.) 인간이 만들어놓은 틀이 종교의 틀이기도 합니다. 그 틀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경전과 종교의 성전이겠지요. 종교를 믿는 사람은 대개가 그 종교의 만들어진 교리를 보고 그 종교에 다가갑니다. 또는 그 종교가 풍기는 분위기를 보고 다가가는 것도 있겠지만요. 물론 모태신앙도 있지만, 그것도 결국은 만들어져야지만 신앙이 되는 것이니까요. 뭐 말이 이리저리 도는데, 결국은 사람이 만들어놓은 틀을 믿는다는 것이지요. 2009-06-15
19:37:49
  



일병 박준우 
  동훈//제 생각과 약간 차이가 있군요. 저는 종교라는건 좀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말장난을 하려는건 아니지만 그럼 이런 질문도 드려보겠습니다. 

성경이 있기전에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 (제대로된 교리가 없던 시절 그저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의 종교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 사람들이 적어도 기독교와 카톨릭 중 하나라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구분법이기 때문에 적당히 어떻게든 껴 넣어야 한다는 가정하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예 결국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이 맞습니다. 근데 저는 그게 싫더랍니다. 그래서 교회도 안나가고 성경도 안믿습니다. (안 읽는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분명히 하나님은 믿습니다. 이 믿음은 거의 체험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을 믿다보니 기독교나 카톨릭계에 속하는건 맞는데, 그중에서도 기독교쪽에 가깝기 때문에 기독교라고 생각을 합니다. 
뭐 이렇게 돌고 돌다보니 사람이 만들어 놓은 틀을 벗어난다고 하면서도 틀안에서 분류가 되어서 기독교 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상한 세상입니다. 신을 믿으면 일단 무조건 무슨무슨 교에 들어가야 된다는것 자체가 모순인거 같습니다. 2009-06-15
20:12:57
  



상병 양동훈 
  준우// 제 말이 그겁니다. 
준우씨는 이미 기독교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기독교의 교리에 맞춰 보니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이라고 선을 그어버린 것이죠. 실제로는 기독교인은 아닐 겁니다. 그냥 '기독교와 비슷한 종류의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준우씨가 마지막에 한 말을 생각해 보세요. '신을 믿으면 일단 무조건 무슨무슨 교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네. 맞아요. 모순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이상한 세상이라고 하면서도 준우씨는 그 모순적인 생각과 그 이상한 틀에 자신을 끼워맞추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준우씨는 기독교인이 아닌데 말이죠. 

성경이 있기 전에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의 종교요? 기독교도 아니고 카톨릭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슬람도, 유교도, 신도도, 도교도, 불교도 아니겠지요. 그것이 기독교나 카톨릭에 가까운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과 기독교의 공통점만큼 그것과 이슬람의 공통점도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되네요(이걸 부연할 능력은 없지만). 지금 존재하는 종교의 틀에 끼워넣을 수 없는 것을 적당히 어떻게든 껴 넣으려고 하니 혼란이 오는 것이지요. 결국은, 준우씨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갇혀버린 겁니다. 

종교라는 것이 좀 더 본질적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의 본질인가요? 
준우씨가 기독교나 카톨릭, 혹은 기타 종교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백의 상태였어도 지금과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결국은 사회에 의해 굳어진 준우씨가 자신의 속에서 만들어낸 본질이 아닐까요. 2009-06-15
21:07:52
  



일병 박준우 
  동훈//그게 정답이긴 합니다. 모순된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게 현실이니까요. 세상과의 비굴하지만 적당한 타협이라고 할까요? 

->실제로는 기독교인은 아닐 겁니다. 그냥 '기독교와 비슷한 종류의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라고 설명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니까요. 

싫어하는것에 갖히는건 좀, 슬픈 이야기지만 살다보니 타협하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기독교라고 하렵니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기호니까요. 2009-06-15
21:18:16
  



상병 양동훈 
  준우// 더이상은 말을 이어갈 필요는 없겠죠?(웃음) 
서로서로 확인할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한것 같고.. 즐거웠습니다. 낄낄 

다만, 그냥, 

저라면 전 그냥 피곤하렵니다. 낄낄... 아직 젊잖아요. 2009-06-15
21:21:56
  



일병 박준우 
  동훈//윽... 회고록을 쓸 나이라면 충분히 늙어버린걸지도 모르죠. 기력이 쇠한거 같아서 씁쓸하네요. 

저도 재미있었어요 낄낄 2009-06-15
21:34:43
  



상병 양동훈 
  기력이 쇠했다는 말을 하기에는 이르죠. 낄낄 

저녁만 먹으면 펄펄 날 나입니다.낄낄 2009-06-15
21:41:06
  



이병 장명철 
  우화로 느껴지는 성경을 바탕으로 느껴지는 신령스러움과 감복을 통해 제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 텍스트로써의 매혹을 지닌 성경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요. 저의 종교적인 입장은 무척이나 평범합니다. 인간은 절대 만유의 주재가 아니다.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살아있다. 모든 것을 만든 이는 하나님이다. 그것이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다가 저한테는 맞습니다. 신의 존재를 선행에 두고 어떤 신의 속성이 나의 기호와 맞느냐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는 정도의. 저는 이것들을 누구의 가르침보다 성서를 통해 알게 되었고, 성서가 많은 부분에서 변질되고 왜곡되었다고 하여도 큰 맥락은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확률적인 일로 치부해버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 그것에 대한 나름의 확신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했을 것이다라는 추측이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는 신앙은 나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조차도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믿음의 방편들도 추측은 반드시 포함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신앙은 추측과 주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이 불특정 다수에게는 절대성을 가지지 못할지언정, 그 신앙의 소유자인 개인에게는 절대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종교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개개인의 절대성들이 완전하게 서로에게 포함되는 집합이 되지 못할지라도 일정부분의 교집합이 있게 된다면 집단이 되고 종교단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교집합은 하나님(유일신)이며 그의 말씀인 성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주 개인적인 이해와 개인적인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개개인의 절대성들의 교집합인 하나의 종교단체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지니는 불확실성을 하나의 이유로 삼아 저의 신앙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분명히 기독교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요즈음 환상이라기보다 악몽의 형태로 변질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실존과 개인의 구원이라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 꾸준히 영향을 미치는 일입니다. 성경의 텍스트적인 매혹에 대해 언급한 것이 저의 신앙에 대한 평으로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태완님의 이야기나 준우님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저와 같은 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에 같은 입장인데 제가 굳이 부정하는 것일지라도, 이 부정하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두 분과 저의 신념 차이는 명백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렵군요. 2009-06-16
10:20:42
  



일병 박준우 
  명철//신념차이라고 하니 좀 그렇군요. 관점의 차이라고 해두면 될거 같습니다. 2009-06-16
10:43:22
  



이병 장명철 
  좀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마 신념 차이가 맞을 겁니다. 관점이란 것은 같은 것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이고, 신념은 가능성의 문제라기보다 다른 가능성에 대한 배타성의 문제니까요. 신념은 조금 편협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논쟁을 했던 저의 편협한 논리는 아무래도 신념쪽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9-06-19
13:00:02
  



일병 박준우 
  명철//위에도 언급했듯이 저도 저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때문에 관점의 차이라고 말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기독교이고 같은 하나님이지만 방향성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논의의 끝에서 저도 맞고 명철님도 맞다는 측면에서 관점의 차이라는것을 제시했는데 끝끝내 신념을 고집하시는군요. 

뭐 저도 저의 신념이 있으니 뭐라고 더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네요. 그럼 신념의 차이라고 해두죠. 그게 기독교 스러우니까. 2009-06-20
09:49:50
  



병장황동원 
  명철// 장명철맞구나?! 앞으로도 멋진생각 멋진글 많이 나눠서 궁에서 좋은일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건강하게 전역하길바래. 좋은부대네 벌써 책마을 들를정도면~ 2009-07-01
16:30:16
  



이병 장명철 
  설마 내가 아는 황동원? 곧 전역이잖아 너....나 책마을하다가 걸려서 요즘은 진짜 자주 못해. 연락한번 해 동원아 술한잔하자 조만간. 


[re] re : 응원!!!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14 06:49:46, 조회: 66, 추천:0 

장명철님의 글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책마당의 소개글 역시 잘 읽었지요.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해 애정이 있다는 것 역시 익히 알고 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반응이 있지 않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이었습니다. 예상대로 고마운 글 올려주셨네요. 장명철 님 역시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상당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저는 하루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안티입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공정하게 읽으려고 노력하는 독자이고요. 확실히 상실의 시대는 어떤 시대적인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울의 서신에 견주어 볼 때에야 비로소 예기치 못한 의미를 드러낸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그것이 결코 하루키 자신의 사고나 글쓰기에 부합하는 방향은 아니겠지요. 말하자면 저는 하루키에 맞서 하루키를 읽고 싶었습니다. 하루키는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바울이 말한 '죽음의 권세'가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하루키는 단순히 그것을 드러내는 것에서만 (저에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루키가 죽음에 대해 사유한 것 역시, 사실은 생물학적인 죽음이나 인간의 실존적 유한성에 대한 걱정거리와 무관한 층위에 가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 작가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반문은, 사실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죽음'의 가능성이 그들의 사유와 글쓰기 지평에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명철 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썼기 때문에, 그런 점을 지적하는 것은 더욱 무의미해 보입니다. 어쨌든 이걸 철학적인 문제로 끄집어내서 토론을 벌이는 건 아무래도 생산적인 방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사실 제 글에서,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榮쨉, 저는 '성경'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에 대한 위의 댓글 논의를 무척 흥미롭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성경의 위상이 제 관심거리는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려야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울'의 서신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글과 강력한 생각들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문헌학적으로도 바울의 서신은 공관복음서보다 더 일찍 기록된 것이고, 그것들과도 판이하게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을 요한이나 베드로에 견주는 것을 누구보다 거부하는 독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을 하루키에 견주어 읽고자 했었지, '성경'의 알레고리에 견주어 하루키의 텍스트를 독해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상실의 시대'를 성경에 견주어 읽게 된다면, 다시 하루키의 센티멘털리즘의 지평이 모종의 '성스러움'과 신화적 아우라를 띠게 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왠지 저에게 장명철 님의 방향은 그러한 쪽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효과를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저는 장명철 님이 말씀하신 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심이, 또한 한편으로 그것을 서사와 상징을 지닌 텍스트로 보는 다른 관점과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박준우 님의 시도들이 개인적으로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태와 반드시 모순적이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저 역시 언제부턴가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는데, 딱히 교회 자체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교회 밖에도 존재하는 일관된 요새사이 경향들 때문에,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곳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저 '바깥'의 저속한 세계에 흥미를 잃엇듯이 말입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8:14:57 



이병 장명철 
  음, 저는 특별하게 저의 취향에 성스러움이라는 부담스러운 어떤 것을 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다만 성경이라는 텍스트의 가치를 위해서도 여러가지 다른 텍스트들과의 만남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약간 오해가 생긴 모양이군요. 또한 젊은 작가들에 대한 언급은, 

이것은 연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후-하루키 세대의 통속적인 젊은 감각의 소설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줍니다.- 

본문중의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오해한 것이겠구요. 푸하 오랜만의 대화라 그런지 오해가 참으로 많군요. 이런 오해가 피곤하지만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