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소도구들 
 병장 이건룡 03-08 16:24 | HIT : 102 



 벤야민의 실내에 대한 글중 인상 깊은 구절을 옮기기 전에 몇 마디 붙여봅니다(제목은 보들레르의 <무대의 소도구> 인용). 

 예전 몇가지 영화를 토대로 부르주의 가정의 실내의 이상한 조형물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성적인 기호로써, 외설적인 조각상이 놓여진 실내, 이 전경에 대한 분석으로 은밀하게 감춰진 부인의 외설적 취향을 영화감독이 표현한 암시에 대한 글이었다(영화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다 내게 낯이 익은 영화 <오만과 편견>를 참고하자면 남자 주인공인 달시 집안에서 일반인으로 대상으로 공개된 집의 실내 일부 중 가족과 달시의 흉상, 조각상이 놓여 진 공간속에 롱숏으로 만날 수 있었던 엘리자베스의 기묘한 표정, 그녀의 감정의 변화는 어떠한 변증법적인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인가? 이 과정의 결과를 상기하기 이전에 그녀가 조우했었던 대상은 무엇이었던가? 영화이자 책의 결론 상으로 엘리자베스의 화해의 지점으로써 조형물에서 그녀는 바로 달시의 오만함 혹은 귀족의 오만한 기질의 핵심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사정)를(과) 마주함을 유추할 수 있다. 

 관객으로서  보편화된 차원에선 이러한 내용을 언어가 아닌 영화의 스크린으로써 언어로 기록되지 않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있다. 유명한 고전인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사전 지식의 참고로 이러한 메시지를 상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문제이다. 보다 제기하고자하는 문제는 텍스트의 해석이 아닌 프레임상 배치된 사물이 주는, 실제의 영역에서 엘리자베스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마주하였던 기억들의 현재의 변증법적 상황이다. 

 텍스트가 주는 경계, 은유등의 친절함을 찾아보기 어려울 때 '상징'성을 지닌 물질을 마주하는 체험, 마치 특별한 별자리 지도(지식)가(이) 없이 우주에 풀어놓은 별조각 바라보는 것처럼 무한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한 해석의 과정 중에 타르코프스키의 '사유하는 물질적 사물', 라캉의 대상a와 같은 기도로서의, 또한 대중화된 표현이 되어 버린 아우라에 대해 다시금 재고해 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시 영화로 비단 스크린, 즉 텍스트로서만의 의미가 아닌 기묘한 감각적 의미로써 이 감각을 인식하는 별다른 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프레임 안에 특정한 사물을 배치하여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는/빨아들이는 '기계장치'를 만드는 이유 혹은 우연적 설치에 통해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의 개념을 보다 가까운 체험으로써 하지만 감독의 의도와, 관객, 혹은 비평적 시도가 서로 평이한 해석으로 가능하게끔 지점으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함에 재고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약속대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558쪽) 중 한 대목을 적어 본다. 이 문장은 1828년 1월에 있었던 벤야민의 두 번째 해시시 체험을 번안한 것이며 그는 자신의 사유의 새로운 시도를 열기위해 마약 복용을 시도하였다한다("해시시에서의 공간의 매춘, 거기서 공간은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에 봉사한다."(520쪽)).  

"19세기 실내. 공간은 변장하며, 유혹자처럼 여러 분위기의 의상을 갈아입는다. 자기만족에 빠진 속물은 옆방에서 샤를마뉴의 대관식 혹은 앙리 4세의 암살, 베르됭 조약의 체결, 오토와 테어파노의 결혼식등이 진행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느낌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결국 사물은 마네킹일 뿐이며, 세계사의 위대한 순간들조차 그저 의상일 뿐으로 그러한 의상 아래로 무가치한 것들과 하찮은 것들 그리고 통속적인 것과 공모의 눈길을 주고받는다. 그러한 니힐리즘이 부르주아적인 안락함의 가장 안쪽에 있는 핵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분은 해시시에 도취한 상태에서 악마적 만적, 악마적 지식, 악마적 휴식으로 농축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를 통해 이 시대의 실내라는 것이 얼마나 도취와 꿈의 자극제였는가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밖에 도 이러한 기분에는 자유로운, 소위 우라니아적인 대기에 대한 협오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대기는 당시의 실내 공간의 벽의 과도한 장식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내부 공간 속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자기 주위에 촘촘한 망을 짜는 것, 거미집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 거미집 속에는 여기적기 세계적인 사건들이 바싹 말라버린 곤충들처럼 걸려 있다. 사람들은 거미집의 숨겨진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실내와 같은 분위기에 대한 묘사는 개인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것 같다. 브루주아와 거리가 먼 실내이지만. <미성년>에서 '관과 같은 방'이건 아르까지의 꿈속에서 거미가 뿜어져 나오다시피 거미로 가득찬 목욕탕 등등.. <죄와 벌>에서는보다 넓은 춥고 어둡고 축축한 곳으로 페테르부르크가.  


 병장 김현동 
19 세기 러시아 소설에서는 언제나 속물적이고 퇴폐적인 이미지의 전형으로 페테르부르크가 나오죠. 그 전형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모스크바일테구요. 

 참, 열린책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새로 나온 거 아세요? 뭐 새로 라고 하기에는 나온지 좀 됐기 때문에 저어하긴 한데, 지난번 빨간색 판본을 보증/개정해서 냈더군요. 아마 작년 말 쯤에 나온 것 같던데. 03-09   

 병장 이건룡 
 예,,책마을에서 정보를 입수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기존에 뭉크 그림을 유지하고 하얀색 판본으로 나왔더군요. 그래서 <도박자>를 비롯해서 몇권 이미 사이버 지식 교육장에서 (알라딘)보관함에 넣어 두었습니다. 다만 현금카드를 잃어버려 당장 구입은 못하고 있지만요. 이번 판에는 조중권씨였던가? 그분이 편찬한 <도스토예프스키>사전도 함께 출판되었더군요. 다만 가격탓에 좀 망설이고 있어서. 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