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45일간의 유럽여행 중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그 중에서도 많은 부분은 이른바 명품쇼핑에 사용되었다. 5명이 함께한 여행이었으나, 리더격의 여자애가 이탈리아에 와서 명품을 안보면 아깝다는 말에 나머지 4명은 줄줄이 사탕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잘은 모르겠으되 피렌체는 유행의 첨단에 있는 도시란다. 길거리 마다 명품 로드샵이 늘어져있었다. 구찌, 샤넬, 루이비통, 프라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등등. 아무튼 도시의 곳곳에 샵은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샵을 하나하나 순회했다. 마침 피렌체의 두오모는 공사중이라 스케쥴이 비어버린 우리의 시간은 많았고 우리는 원 없이 명품을 볼 수 있었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우리는 이내 조르지오 아르마니 매장에 도착하였다. 모노톤의 단조로운 간판 아래에는 마네킹이 서있다. 리더는 프라다 쇼핑백을 든 채 가자- 라고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명품의 세계로 안내되었다. 매장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묵직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고 기다란 회랑이 우리를 반겼다. 표범무늬의 기다란 카펫이 바닥에 깔려있어 샌들로 밟는 것이 부담스럽다. 앞에는 검은색 정장에 무선 송수신기를 부착한 건장한 흑인의 보디가드가 우리를 낮게 응시하고 있다. 여행을 위해 간편히 입은 콜롬비아의 주황색 셔츠와 칠부바지가 부담스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잘 입고 올걸 그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샵에서 풍겨지는 은근한 압박감에 나머지 4명은 주춤거렸으나, 리더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에 걸어놓은 프라다 쇼핑백이 자랑스럽게 흔들린다. ‘우리는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에요’ 백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회랑을 몇 걸음 걸었을까 갑자기 경보벨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한다. 경보장치 같은 건 안보였는데, 나는 겁 먹어 시야를 이리저리 옮긴다. 리더가 들고 있는 프라다 쇼핑백이 문제가 되었나 보다. 보디가드는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정중하게 다가와, 리더를 향해 잠시 쇼핑백을 맡아 놓아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본다. 아니 물어보는 것 같다. 나는 이탈리아어는 모른다. 리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다 쇼핑백은 보디가드의 손에 갈무리 되어진다. 우리는 빈손으로 회랑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난다. 매장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화강암을 연마했는지 유리처럼 빛나는 적색의 아름다운 돌들이 가지런히 나열된 바닥의 타일을 밟으며 우리는 그 조르지오 아르마니 매장에 도착했다. 매장 주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낸다. 그 앞에는 푹신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놓여있고, 동양계로 보이는 남자가 거만하게 앉아있다. 몸을 깊숙히 묻은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입을 열었다. 일본어다. 명품 쇼핑을 하러온 일본인 인 것 같았다. 그는 손을 까닥까닥 거렸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 점원이 다가오자 그는 일본어로 말했다. ‘이런거 말고 좀더 고급스러운 걸로 가져와봐요’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장 안으로 향했다. 일본어를 알아듣는구나 나는 내심 감탄했다. 

나는 어쩐지 그 일본인 앞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 남자의 뒤에 길게 늘여뜨려져 있는 매장 안으로 향했다. 회랑과 마네킹만이 전시되어 있는 지상과는 달리 지하의 매장은 상당히 컸다. 깊숙하게 놓여진 매장을 적황색의 은은한 불빛이 감싼다. 마치 교회나 성당과 같은 엄숙함이 감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각자 돌아다니며 상품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당당하던 리더도 프라다백을 압수당한 이유로는 조심스레 상품을 들어 가격표를 확인한다. 나도 가만히 서있는 것은 뻘쭘해서, 가볍게 샵을 돌았다. 

지나가다보니 가죽제품 코너가 눈에 띄었다. 역시 가죽제품은 비싸겠지. 얼마나 비쌀까 – 나는 생각했다. 가장 무난해 보이는 갈색의 블루종을 꺼내들었다. 가격을 확인했다. 4200 유로다. 얼마지? 대충 500만원은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손때가 묻을까봐 무서워 조심스럽게 블루종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옆으로 아까의 점원이 다른 옷을 들고 걸어간다. 아까의 일본인에게 가져다 줄 옷인 것 같았다. 지나가며 나를 흘끗 보았다. 나는 그 눈길이 왠지 부담스러워 시선을 돌렸다. 가죽제품은 너무 고급스러우니까 안되겠다. 최대한 싼걸 찾아보자. 나는 생각했다. 

샵을 천천히 돌았다. 그렇게 걸어 가다보니 가장 평범한 면티가 눈에 띄었다. 완전 흰색에 아무런 무늬도 장치도 없는 그 티는 정말로 완전히 평범한 티였다. 가서 슬그머니 티를 뒤집어 보았지만 티의 뒤쪽에도 아무런 무늬가 없었다. 그냥 보면 ‘어라. 런닝구로군’ 이라고 할 정도로 평범하다. 지금 충성클럽에서는 이런 하얀 런닝을 세금제외 1690원에 팔고 있다. 이 정도면 좀 싸지 않을 까 싶었다. 나는 옷 속에 숨겨져 있는 태그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가격을 확인했다. 150유로다. 눈을 비볐다. 15유로도 아니고, 150유로? 예전의 일이라 환율이 어느 정도 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18만원 정도는 했을 것이다. 런닝이 갑자기 무섭게 보였다. 아니다 이건 런닝이 아니야. 이건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하얀 셔츠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개어 원래의 자리에 놔두었다. 런닝의 목부분에 ‘조르지오 아르마니’라는 태그가 붙어있었다. 원가를 생각해봐도 태그의 가격은 16만원은 할것이다.


출세했구나. 너.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새하얀 셔츠는 침묵했다. 


나는 더 이상 이 공간에 있는 게 싫어서 입구 쪽으로 향했다. 일본인은 여전히 거만하게 앉아서 점원과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구석 근처에 나를 제외한 4인이 어정쩡하게 서있는 것이 보인다. 리더도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리더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가자 - .


다시 계단을 올라 출구로 향했다. 검은 정장의 보디가드가 다가와 프라다 쇼핑백을 리더에게 건네주었다. 뭐라고 말했다. 작별의 인사말인 것 같았다. 리더는 프라다 쇼핑백을 다시 어깨에 걸치곤 유리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섰다. 그 뒤를 나도 따라 나왔다. 하늘은 파랗고, 다만 내리쬐는 이탈리아의 햇살은 따스하다. 패션의 거리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리더는 다시금 프라다 쇼핑백을 어깨에 걸쳤다. 이번엔 ‘안나 수이’로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말없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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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명품을 사는 것의 의의는 고가의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능력 즉, '가치'를 사는 것이라고 했다. 피렌체의 여행을 마치고, 그의 발에 신겨져 있는 프라다 스니커즈를 보며 나는 말했다. 너나 많이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