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게 생긴 녀석에게서 용기를 얻다 (상병 김강록/051127) 
 
 
 
 
* 이 글은 '나는 왜 학교 열람실과 거리가 먼가'와 함께 제가 별로 거창하지 않은 동기로 얼렁뚱땅 기획하게 된 이른바 '본격 농땡이 예찬 시리즈(가칭)' 3부작 중 제 2편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3편은, 계획상으로는─어디까지나─제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럼, 감사합니다.




80. 멀쩡하게 생긴 녀석에게서 용기를 얻다 :



한동안 공관병으로 가있던 후임 하나가 내무실로 돌아왔다. 그를 환영하는 과자파티도 열었다. 제법, 사람이 사는 듯한 오늘의 풍경.

그는 실로 멀쩡하게 생겼다. 개념도 있고, 싹싹하고 날렵하다. 노래도 잘 부른다. 헌데, 그의 빼어난 학점이 문제였다. 밖에서 그는 여느 내노라하는 야구 투수들이 부럽지 않은 빼어난 학점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살고 있다. 문득, 내 몸 깊은 곳 오랫동안 막혀있던 혈관으로부터 펑! 하고 터져나오듯 샘솟는 삶의 용기!

기왕 학점 얘기가 나온 김에 내무실에서 학점 3점 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물론, 해당자인 주제에 조용히 입다문 인물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내 학점이 내무실에서는 제법 고득점 축에 든단 말이렷다? 평소 나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종류의 것과는 뭔가 다른 느낌의 용기가 새삼 솟아났다.

쳇.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삶에도 문제야 왜 없겠냐마는, 학점으로 인한 문제는 아닌 듯 했다. 그들은 움츠러들지 않았고, 당당했다! 헌데 나는 어떤가. 정작 '학점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던 나야말로 가장 학점에 얽매인 삶이 아니었던가. 정작 과거에 가장 얽매였던 것은 정대만이었듯이 말이다.



인간이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동물이다. 대개는 아둥바둥하면서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우리의 줄타기는 부당하다!"라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부류의 인간에 속한다. 주변에선 닥치라고도 하지만, 대개 내 입을 막으려드는 이들보다는 내가 그나마 한결 나은 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비난하는 내용이 그러한 단순한 불만의 토로는 아무것도 개선시킬 수 없으므로 더 나은 전략을 찾아보자는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게 그들의 결론이다. 그러니 씨알이 먹힐 턱이 있나.

그런데, '줄타기의 부당함'을 외치면서도 끝내 그 줄을 놓지 못하고 있는 어정쩡한 나와는 달리, 진작에 줄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학점과 무관하게 밝고 당당한 태도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 중에는 날개가 달린 이들도 있다. 오로지 줄에 의지해 공중에 떠있으려 하는 자는 결코 자신의 날개를 발견하지 못한다. 아아, 그렇다면 몰락이야말로 인간이 날개를 얻기 위한 과정인 걸까.

헌데 왜 우리는 몰락을 두려워할까. 왜, 줄을 놓지 못할까. 심지어 줄타기가 실로 바보짓거리라는 걸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말이다. 누구나 유격훈련가서 줄타기를 할 적에 가운데쯤 오면 하나같이 마음 속으로 '제기랄!'이라고 외친다. 이걸, 계속 앞으로 가기도 막막하고,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고. 줄에 몸을 싣는 그 순간이야말로 바로 우리들 '인간으로서의 삶'이라 불리는 오이디풋다. 한번 덫에 빠지면 벗어날 수가 없다. 힘든 세상살이 속에 그래도 가족이 있어서 든든하다고? 가족은 빚이고 담보이다. 우리들 입에 물린 재갈이요 고삐다. 세계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인질이다. 인질극만큼이나 가해자에게 유리한 범죄는 없다. 결국, 우리는 삶 앞에 무릎 꿇어야만 하는가.



인질범은 기본적으로 피해자보다 우월하다. 사태의 통제권이 인질범에게 있으니 일은 그들의 주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체로 급박하고 비장한 상황 전개를 선호한다. 그럴수록 피해자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그들의 계산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호명한다. '너 가장이여, 부양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악한 노동 여건에도 꾹 참고 일을 해라.' '너 자식색기여, 뒷바라지하느라 애쓰는 부모를 위해 입 다물고 공부해라.' 이런 식의 문장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너 커피포트여, 전기를 공급해줄테니 물을 끓여라.' '너 한석봉이여, 불을 끌테니 너는 글씨를 써라' 등등.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모두가 탐욕스러운 꿍꿍이를 간직하고 있다. 이름을 불린 이들은 자신이 꽃이 되는 줄 알지만, 아뿔싸, 그건 착각이다. 인간이 피워내는 그 모든 꽃들, 결국은 꺾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아아, 우리에겐 이 얼마나 많은 이름이 있나. 고객님, 국민 여러분, 이보게 학생, 등등. 누군가가 우리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대체 무슨 수작인지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인질범들의 수법은 교묘하여 대개가 거기까지 이미 게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호명은 급박하고 비장한 상황 속에서 난데없이 이루어진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역시 수업시간의 출석 호명일 것이다. "김강록!" 출석이 일단 불리면 이것이 무슨 수작인지를 생각할 틈이 없다. 결국 무책임하게 답하고 만다. 호명에 답하는 행위는 수작을 거는 이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아, 출석을 불러도 결석하는 이 하나없이 좌석을 가득 매운 강의실의 모습이란, 이 얼마나 끔찍한 광경인가.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는, 이 얼마나 추악한가.



고로 출석은 범죄다! 그것이 범죄임을 알면서도 이에 동조하고 기여하는 행위 역시 죄가 된다면, 출석은 분명 범죄다. 살아서 수업에 열심히 들어갔던 이라면 다른 아무리 좋은 선행을 쌓았더라도 반드시 죽어서 좋은 데 갈 거라고 낙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허나, 이것은 인질극이다. 우리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인질범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출석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비극에 대처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최악이고, 동시에 안타깝게도 가장 흔한 방법은 숙명론의 도입을 통한 합리화이다. 가령, '저기 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졌으니 나의 죽음은 정당하다'는 식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출석부에 이름이 등재되어 호명받는 학생들은 자신의 출석을 정당화한다. 출석은 학생의 도리라고, 출석이야말로 정의이며 신의 뜻이라고! 그러한 거짓 믿음이 세계를 구성하는 일반 원리가 되어간다. (우리 목동학파에서는 이를 출석주의, 영어로는 presentism, 내지는 출석의 이데올로기라 부르기로 하자.) 마침내 세계는 절망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만다. 우린 지금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



비극에 대처하는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도출해내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나는 그 영감을 바로 이 멀쩡하게 생긴 주제에 탑 클래스 투수 수준의 학점을 자랑하는 녀석에게서 얻었다. 마치 피리 소리에 홀린 쥐떼들처럼 출석 부르는 소리에 홀려 강의실로 들어앉는 이들과는 달리, 꼭 딴 데로 새는 이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호명을 거부한다. 출석을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출석에의 냉소─배째라! 고 나오는 이들 앞에서는 인질극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로써 비극은 극복되었다. 비장했던 인질극도 한편의 코미디로 끝나며 명랑한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이때 멀쩡하게 생겨먹은 이 녀석은 수업을 째고 PC방에 앉아있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생각만 조금 달리 하면, 사실 출석보다 현저히 쉬운 것이 바로 결석이다. 이러한 결석의 중독성이란 출석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한번 맛보면 잊을 수가 없는 짜릿한 기분을 안겨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땅에 결석자보다 출석자가 더 많은 이유는 단지 출석이 합법적인 마약이기 때문임에 다름아니다. 쉽게 생각하면 될 일이다. 오이디푸스의 극복? 인식론적 단절? 출석부라는 기관들 없는 신체의 표면에 코드화된 거짓 생산에 대한 폭로? '호명─답변─출석처리'라는 출석의 일반공식으로부터의 탈주? 다 쓸데없이 번잡한 말들이다. 우리 멀쩡하게 생긴 그 녀석은, 그저 수업보다 워크래프트3가 좋아서 PC방에 간 것 뿐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니 학점이니 미래니 하는 건 안중에 없었다. 하나씩 떨쳐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끌어다붙이는 온갖 힘겨운 장애물들, 그것들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용케 찾아낸 도망갈 구실에 불과하다. 숙명론자들은 절망을 선호한다. 그 절망적인 숙명이 삶에 대한 책임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마지막 잎새'─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가련한 환자의 몽상은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병실 밖으로 나서라! 그곳에서 진짜 세상을 만나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를 이제는 걷어내자.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울타리 때문에 갇혀 사는 것만이 숙명이라는 둥의 애처로운 변명은 그만 두자. 나는 속지 않으니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으로부터 학점이니 출석이니 하는 둥의 핑계를 대며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그것을 향해 나아갔던 우리 멀쩡하게 생긴 이 녀석은 실로 멋진 청년이다. 세상 어디에다 내놔도 부끄럽지 않도록 삶에 대한 소신과 긍지를 간직한 청년이다. 우리 결석주의파(영어로는, The Absentists)의 자랑스러운 선봉, 내가 진실로 아끼는 내무실 후임 신○○ 일병 5호봉에게 가멸찬 박수와 함께 오늘 이 글을 바친다.




2005. 11. 23. 水

大영일고등당구스쿨 공채 24기 목동의 김프로





병장 이준영 (2005-11-28 05:21:55)  
브라보. 저도 소신있는 학생이었답니다 [먼산]
기형도가 마셨던 그 공기가 바람으로 청송대에 불어오는 봄날에 강의실에 앉아있는 것은
아무리 정현종 교수님의 시 쓰기 수업이라고 해도
독재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생각했기에- 저희는 결석주의 노선을 항상 고수했었지요  

일병 안대섭 (2005-11-28 09:26:47)  
워크래프트3 실력을 더욱 갈고 닦아야만 했었는데, 그렇고 그런 라이트 유저가 되버린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글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5-11-28 09:46:20)  
화이팅!  

상병 오철수 (2005-11-28 10:08:50)  
소심한 저의 선택은, 중간을 택하라! 입니다. 하는 말로 '놀때 놀고 공부할때 공부해라' 정도가 되겠네요. '출석'에는 이미 값비싼 부모님 노고의 결실이 들어있는것이기에 차라리 자퇴보다 못한 선택이 '결석'인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울타리는 아마 입학금을 낼 때 아니,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부터 시작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를 보호할수도 있게되어버린 그 울타리를 걷더내기보단 히는 쪽으로 해야겠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군요. 힘듭니다. 이겨내야겠죠. 즐겨야겠습니다. 하하.  

병장 임경훈 (2005-11-28 15:54:46)  
제가 보아온 수많은 예비역의 경우에도 여러분들과 비슷하였으나, 전역이후 팀방어율급의 학점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더군요. 물론 저는 2점대 초반의 방어율로 졸업까지 하였으니, 여러분들의 자랑아닌 자랑마저 부럽게 느껴지는군요.  

병장 황진혁 (2005-11-28 16:23:50)  
강록님의 글들을 읽어오다가 궁금한게 있어 질문드립니다.

강록님의 글들을 보면 참 일상적인 것들을 소재로 시작되어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과 이런저런 '주의'들과 버물어져 글이 진행되다가
말미엔 조금 오바다 싶을정도로 심오한 결론에 다다르곤 하는데,

그것들이 자연스레 유추된 것입니까?
평상시에도 저런 사고를 하시는것입니까?

아니면 칼럼을 써야한다는 생각으로
별것아닌것에 조금 난해한 용어들을 섞어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는겁니까?

단순하게 정말로 평상시에 저런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서 질문드려봅니다.

참, 강록님 글들을 참 좋아합니다.  

상병 이민혁 (2005-11-29 08:40:26)  
저도 강록님 글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팬클럽이라도 만들고 싶다니까요  

상병 김강록 (2005-11-29 20:55:08)  
진혁님/ 제가 이 개별적인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보다는 평소 제가 사용하는 말하기 방식─에도 주제의식이 반영되게끔 의도하고는 있습니다만─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답변 드리자면, 철학이 되었든 무슨 여타 인문사회과학의 이론이 되었든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삶을 설명해내거나 그것에 적용시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이론'이란 것이 우리의 땀내나는 일상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고상하고 훌륭해서가 아니라 삶과 유리된 뜬구름잡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되먹은 이론이라면,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삶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뻔뻔스러운' 글쓰기 방식 역시 이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 스스로 자신의 글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가 참 쑥스럽네요. 아직 완전히 뻔뻔스럽진 못한 모양입니다.) 우선, 철학은 이러이러한 위치와 역할이어야 한다는 믿음의 반영으로서 고색창연한 것들을 고의적으로 땀내나는 필드로 끌어내리는 하나의 '활동'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고상한 철학을 고작 '장난스럽고 과장된 어법을 구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그것이 담보하고 있는 병적인 엄숙함과 진지함을 교란시키는 것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초상집 분위기로 만드는 그러한 엄숙함과 진지함을 걷어내는 시도를 통해 여러분이 제 글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기분 좋게 웃으실 수 있다면, 저로선 그걸로 만족입니다.

케임브리지 강단에 서던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푸념했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내게서 대단한 이론만을 기대한다. 하지만 내가 정작 대학에서 원하는 것은 함께 웃으면서 가볍게 나눌 수 있는 사소한 농담 한 마디이다." 제가 하는 말들이 농담 같다구요? 하지만 건강한 농담이야말로 처연한 진담보다 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곳에 올리는 글들이 처음부터 칼럼을 의식하고 쓰는 글들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선 제가 인트라넷에 올리는 글들은 기본적으로 제가 평소에 내무실 바닥에 엎드려서 쓰는 일기를 그대로 올리는 것들입니다. 처음부터 칼럼을 위해 쓰인 글이라기보단 일기로 쓰여진 이후에 칼럼의 탈을 뒤집어쓰게 되는 꼴인데, 그렇지만 전혀 칼럼을 의식하지 않느냐, 그건 제가 확답을 못드리겠네요. 제 스스로가 마음 속으로 항상 일기의 퀄리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요구 수준을 가지고 있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그러한 요구 수준이 추후에 칼럼으로 게재시킬 가능성과 아무래도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제가 이것만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다 하는 게 한 가지 있는데, 제가 글을 쓰면서 관심을 가지는 초점은 글을 통해 얼마나 나를 돋보이게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쓰는 있는 일기가 00년부터 시작해 15권째인데, 그동안 일기를 쓰면서 깨달은 게 스스로를 실제 이상으로 높이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면서까지 잔뜩 부풀려 쓴 글은 당장은 흡족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어보면 별로 가치가 없는 글이었다는 겁니다. 얄팍한 말재주로 얼마간의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꿰뚫어보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제가 띄엄띄엄 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는 마치 어릴 적에는 거짓말을 했다 들키고서 어떻게 알았을까 의아해했지만 이제 제가 형 오빠 삼촌의 입장이 되어 아이들의 거짓말이 눈에 그대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동안 그런 생각이 제 평소 사고 방식에 충분히 녹아들 만큼의 시간은 있었다고 보고, 그래서 저는 지금 최대한 정직하게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답변이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곧달상병 (2005-12-25 17:38:47)  
강록이형! 나야. 형 백일휴가 나왔을 때 지하철에서 담배주고 보낸게 엊그제 같은데 여기서 보네.
형 군 전화번호라도 남겨주길 바람. 꼭 남기길 바람!!! 꼭!꼭! -허다마-  

상병 김강록 (2005-12-26 10:06:44)  
허재영씨 / 여기서 보게 되다니! 부대에서 군전화로 통화할 형편은 못되고, 이곳 게시판 쪽지를 이용해주게!
컴퓨터는 매일 사용하니까. 그리고 계급+성명을 지켜주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