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베스트-내글내생각] 멀고 먼 미술관, 가까운 골목
상병 홍명교 2009-07-06 21:48:22, 조회: 300, 추천:3
아래의 형태씨 글을 읽고 드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적어봅니다. 쪽지 주신 형태씨께 감사드립니다. 형태씨 쪽지가 아니었다면 읽어보지 못했을거예요. 슈가 복귀하자마자 게임이 시작되어서 무지 지루한 상태에서 정신없이 대기하고 있거든요. 3박4일은 역시 짧습니다. 하고싶었던 게 참 많았는데 거의 한 게 없네요(울음)
1. 우리 가족
미술 교육이라는 주제는 저희 가족에겐 항상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미술 교육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가족 이야기를 빼놓기가 어렵군요. 아주 어릴때부터 저도 이 문제를 생각해보곤 했었는데, 그건 모두 집안 환경때문입니다. 일단 어머니 아버지 모두 유수의 미대를 나오셨고, 제가 어릴때 어머니는 안양, 의왕 등지에서 미술학원을 하셨었거든요. 저는 자연스레 그 미술학원에 다니는 제일 어린 꼬마였죠. 제가 막 제멋대로 제맘대로 그려대면 어머니는 항상 잘 그린다고 칭찬해줬어요. 그러면 주위의 아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깔깔깔 웃더라구요. 이게 뭐가 잘그린거야? 이상하잖아. 색깔도 빽빽하게 칠하지 못했고, 그림에 해도, 구름도 없어. 맞아요. 한국의 어린이들은 그림에 꼭 해와 달을 그려넣어야 한다고 배우거든요. 그럼 저는 난감해지는거죠. 나는 정말 엄마 말대로 잘 그리는게 아닌건가? 그저 엄마가 아들내미니까 말해주는 거짓말에 불과한건가? 이런 것이 어린 시절의 불안감과 신경증을 유발합니다. 칭찬하는 말은 칭찬으로 듣지 못하게 된 아이가 빠지고마는 결핍의 정서 따위.
아무튼 이런 난감함은 학교에 가서도 종종 생겨나곤 했습니다. 아마 저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도 제멋대로 그리거나 제멋대로 만들곤 했던 것 같아요. 찰흙 두상은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팔푼이처럼 만들었고, 제가 그린 수채화에는 실재적인 것이라곤 도무지 찾기 어려웠어요. 이상하죠? 그럴수록 제 미술점수도 낮아지더군요. 처음에 미술선생님은 뭐라고 꾸짖다가 나중에는 아예 터치하지를 않았구요. 아마 S대 미대나온 어머니의 학벌이 알려져버렸기 때문일거예요.
그럼에도 이런 선택된 무관심이 자발적인 창발력을 키워주진 못했나봅니다. 고교 시절이후 그림이란걸 거의 그려보질 않았습니다. 어쩐 일인지 의지를 상실해버렸어요. 무책임하게도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을 학교의 미술교육 시스템에 돌려봅니다. 형태씨 말처럼 한국의 미술교육은 철저하게 꽉 막혀있고, 창의력보단 정확성과 공예적 측면을 키우는 교육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 상상력을 키우는 연습이란 요원한 꿈일 겁니다. 입시미술의 성패는 상당부분 홍대 근처에 있는 유명한 미술학원에 들어가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제 동생도 그랬고, 국민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사촌누나도 그랬지요.
어릴적, 주말마다 할아버지댁에 가면 할아버지는 캔버스 위에 새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시고, 할머니는 서예를 보여주시곤 했어요. 할아버지는 책을 참 많이 읽으셨는데 책 표지마다 수채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서 자신만의 표지 그림을 만들곤 했어요. 아마 그런게 영향을 많이 끼쳤나봐요. 할아버지는 목공이라는 취미도 갖고 계셨는데, 지금은 저희 아버지도 듣도보도 못한 목공 기계들을 차고 가득 쌓아두고 집안의 책장들, 싱크대, 식탁, 수납장 이런걸 만드십니다. 어렸을때부터 별도리없이 아버지 목공일의 조수가 되곤 했는데, 그게 참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네요. 신기하게도 지금 제 하나뿐인 여동생은 홍대에서 목공예가구디자인학과에 다니고 있답니다. 이번 슈가때 홍대에서 만나서 동생과 그 학과 동기들이랑 같이 술을 마셨었는데, 너무 무리해서인지 필름 끊겨서 동생이 집에 데려다줬네요. 아침에 일어났을때 그 엄청난 쪽팔림이란...(울음)
2. 입시미술이라는 괴물
저의 미술교육에 대한 경험은 이런 개인적인 교훈들로 채워져있습니다. 이를테면 수능과 학벌사회라는 두 개의 괴물이 존재하는 한 미대입시에서도 역시 입시미술이 낳는 폐해를 그것 안에서만 개별적으로 극복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교육에 있어서의 문제들은 너무도 복잡다기하고 다양한 문제들로 얽혀있어서 무엇부터 파해치고 해결해나가야할지 난감하게 느껴집니다. 제 입장에서는 수능을 폐지하라는 요구가 가장 합리적이고 합당한 수준으로 여겨지지만 교육계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공급자들과 기성세대에겐 전혀 그렇지 않겠죠? 제 동생은 타협의 길을 택했습니다. 입시미술을 지독히도 싫어하고 혐오하면서도 대체 뱃속에 뭘 꾹꾹 숨겨놨는지 잘도 참으면서 그 진흙창같은 터널을 통과한거죠. 동생이 재수하던 시절에 언젠가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그냥 연습한다고 생각하라고. 구성 잘하는 것이 꼭 많은 걸 죽이진 않는다고. 잃지 않은채 '기술'을 함양하는것도 언젠간 상상력의 무기가 된다고.
물론 그건 스트레스 많은 입시생을 안심시키기 위한 좋은 핑계였을거예요. 항상 그 반대로 말하던 것에 비한다면 그 당시 몇년간의 거짓말들은 모두 자신의 딸을 위한 거짓말이었던거죠. 저는 종종 한예종 미술원에 지원해보라고 제안했지만, 동생은 그러고싶지만 너무 후달린다는 말을 하며 포기했어요. 그건 일종의 도박같은 것인데다 미술원 같은경우엔 학부를 이미 졸업한 미대생들이 도전하는 경우가 허다했거든요. 미대 지망생들에게 입시미술은 무시하기 어려운 괴물같은 존재입니다. 그곳을 통과해지나가야 길이 뚜렷해보이기 때문이죠. 이건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안개 때문에 생긴 착각 같은 것이겠지만, 아무런 대안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이 괴물을 무시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제 동생은 타협할 수 밖에 없었어요. 슬픈 일이죠. 인정하긴 싫지만 그 사이에 너무 많은 빈틈이 있는건 사실입니다.
3. 세련된 디자인, 닫힌 도시공간
휴가중에 만난 풍경입니다. 홍대입구역 근방에서 들렸다가, 이내 종로의 영풍문고로 향했요. 시청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탔는데, 시청역은 "세계디자인수도"라는 박람회 홍보로 가득하더군요. 이런 기획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만들어낼지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저주를 퍼부을 것까진 없겠죠. 사실 이건 입시미술이라는 문제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일거예요. 우선 오늘날 디자인이란 이미 '예술'과는 많이 멀어진 것이거든요. 근대 이전에 그것이 부르주아나 귀족들에 의해 주문을 의뢰받은 장인들의 자신만의 도제시스템에서 '공예' 내지는 문장미술 따위와 같은 것으로 존재했다면, 오늘날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업 생산물들을 얼마나 더 잘 포장해서 팔아낼 수 있는가에 그 성패를 거는, 실용주의적 서비스산업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무수한 디자인 이론들 중에서 가장 논쟁적이며 솔직하게 등장한 것은 기능주의입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테제가 기능주의 디자이너들과 이론가들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죠. 이는 쉽게 발견되는 그 오점들에 의해 쉽게 기각되었지만 실용주의의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오늘날은 시대의 트랜드를 반영하는 디자인이 대세로서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요컨대, 자본이 디자인이라는 포장지를 가장 필요로 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전략으로 구가하는 시대인 것입니다. 디자인값, 포장값이라는 말이 참 많이 등장하는데, 최근에는 이것의 비중이 어느때보다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어떤 상품에 있어서는 기술의 진전보다 디자인의 변화가 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 주위의 친구들이 핸드폰을 선택하는 기준만 보아도 이를 알수있죠.
그렇다면 "디자인수도"란 무얼 원하는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서울시에서 이 축제(?)를 적극적으로 '서울-상품화' 전략의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도시에서의 예술이 원하는 역할 및 기능과 합당한 바를 꿈꾸고 욕망하는지는 미지수입니다. 과연 도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디자인도 중요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공공디자인이라고 말하죠. 거리를 좀 더 공공을 위한 것으로 만들며,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제멋대로 기계화된, 차와 탈것 중심인 도시를 인간 중심으로 바꾸기 위해 자전거 도로를 만들고 도심속의 숲을 조성하는 것 등등. (물론 최근 몇년간 서울이 대단히 기획적이고 중심이 주도하는 방식들에 의해 이런 노선이 활용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청계천, 자전거도로 확장계획 등)
그러나 보다 더 트렌디한 타이포그라피와 보드블럭들, 색색깔의 조형물들로 치장되어가는 종로나 테헤란로를 돌아보며 생각해봅니다. 과연 도시는 공공적인 것으로 변해가는가를. 지금보다 더 많은 공간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지만, 도심은 점점 더 사유화되어가고 있으며, 거리는 점점 더 네온싸인과 광고판들, 선전 조형물들에 의해 덮여가고 있습니다. 어떤 광장은 이데올로그에 의해 그 개폐를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며, 또 어떤 공간(청계천광장)은 영화제마저 취사선택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디자인'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할지 자꾸 되묻게 됩니다. 더 이상 세련된 것과 시각적으로 조화로운 것, 그럴듯하게 잘 정비된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도심에 들어서면 도리어 숨이 더 콱콱 막히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이점에 대해 더 할말이 많지만, 도시공간의 디자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수준에서 줄이겠습니다. (형태씨는 '세계디자인수도'라는 기획을 유일하게 합격점으로 두고 싶다고 말했지만, 저는 제 지독한 비관적 인상을 되돌릴 수 없네요.)
4. 원근법의 세계에서의 교육
형태씨가 어린 시절에 받은 미술 교육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만약 그것을 철저히 원근법적인 삼차원 세계의 테마로 파고들어갔다면, 그래서 그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무엇을 꿰뚫고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주었다면, 그것이라도 만족스러운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건 아니었겠지요. 어른들은 이발소에 걸릴만한 그림들을 원했던 겁니다. 그것이 한국의 기성사회가 파고들수있는 최선의 상상력이었던 겁니다. 그런 시각으로는 원근법의 이면이라든지, 심지어 매너리즘의 대가 뒤러가 구사한 절멸적인 투시력도 흉내낼 수 없죠. 우리의 제도권 미술교육은 르네상스에조차 못미쳐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미술교과서에는 유명 화가의 몇몇 그림만 있을 뿐이지, 총괄적이고 유물론적인 미술사 교육은 제외되어있습니다. 이는 서구나 라틴아메리카 같은 세계에서는 아주 기본적인 공통교과인데요, 우리나라에선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은거죠. 그 누가 정답처럼 제시된 색 이외의 그림자와 음영으로 묘사된 르누아르의 빛을 이해하겠습니까? 그 누가, 극단적 형태성을 추구해나간 고갱의 단순성과 원시성을 그것 이상으로 감상할 수 있겠습니까. 제한된 시각과 상상력을 강요하는 교육 이데올로기 하에선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차라리 미술사 교육이 필요하다는 입장인데요. '제대로된'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보겠습니다. 철학과 인류학적 인지의 확장과 함께 진전해온 미술사와 건축사에 대한 학습은, 자신이 두 발로 서있는 세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어떤 억압에 불가피한 반역을 가장 먼저 꾀해온 예술가들의 자취들은 고뇌하는 화가에 대한 신경증의 세계와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억압들과도 면전할 기회를 줍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군에 자원해서 입대한 키르히너의 고뇌 가득한 표정들과 제 팔을 자른 군인이 나오는 기괴한 그림들을 볼때 우리는 전쟁의 잔혹성과 국가에 의한 개인에 대한 억압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또 피카소나 고흐, 오토나 고야 등은 어떻구요. 주절거림을 절제하기가 어렵네요.
5. 바우하우스, 미술원
10년정도 됐을겁니다. 국민대 미대학장이 아무개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마 국민대 미대가 정말 좋아질 거라고 얘기했었거든요. 그후로 종종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다른 교육을 한다는거예요. 이를테면, 베끼고 따라하면 연습만 주구장창하는 교육은 아닐뿐더러, 상상력의 궤적을 힘겹게 따라올라가 찾아올수있도록 돕는 교육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교육시스템은 대개가 바우하우스의 예술교육 경험을 그 근원으로 삼습니다. 바우하우스 2기에 새로 들어온 건축가들은 새로운 형태의 교육시스템을 제안했고, 이를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시도했습니다. 학생들은 어떤 본질적 형태에서부터 탐구적인 토론 수업을 시작합니다. 이 반복되는 토론과 논쟁 속에서 찾는 어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테마를 스스로가 찾아가는거죠. 교수는 이 탐험의 안내자 내지는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나서야 작업은 시작됩니다. 폐쇄된 작업공간에서 시작되는 이 작업은 철저히 전통적인 중세 수공예 장인의 도제시스템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짧지만 굵었던 바우하우스에서 교육법의 변증법적 변천 과정은 이후 미국의 아키텍쳐 스쿨들을 중심으로 여러 미술학교에 전파됩니다. 오늘날까지 서구에서는 이 바우하우스적인 교습법이 주류를 이룹니다. 이런 교육이 현대예술과 예술 교육이 안고있는 모든 문제를 해명하거나 극복할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한계들마저 요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체되어있습니다. 도리어 한국에서는 원근법의 기술은 가르치면서 그 세계를 추구했던 시대에 살았던 예술가들의 생각이나 고뇌, 그리고 그 이후의 변칙이나 변화들에 대해서는 심각할 정도로 무관심하죠. 몇몇 교사들은 교과서나 책 속에서 그 이야기들을 읽었겠지만, 스스로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세계를 활자 그대로 옮겨주며 가르쳐주는건 불가능한 도전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6. 멀고 먼 미술관
변기가 예술작품일 수 있을까요? 뒤샹의 변기는 뉴욕의 유명 미술관에 갔을때, 예술작품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질겁하며 놀라거나 비난했지만 어느새 그것은 고가의 예술작품이 되어 현대미술 화보에 쉽게 등장합니다. 아방가르드가 무너뜨린 예술의 경계가 이미 우리들을 양쪽 방향에서 위협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선 예술과 변혁이 제거된 실용주의디자인의 가공 세계를 들이대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모두에게 허락되었으며 모두에게 동등한 공공 미술의 세계로서 도전하고 있습니다. 둘은 모두 우연적으로 등장했지만 둘 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패배할 것입니다. 뒤샹 이후 한동안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미술관의 파괴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부르주아들이 만들어놓은 미술관이라는 성이 예술을 싸구려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술관이 파괴될때 예술도 해방될 것이고 우리의 정신도 해방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다소 기계파괴운동을 떠올리게 합니다만, 그보다는 더 차원높은 시선을 제안합니다. 예술은 공공 모두에게 평등하게 허락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년 겨울, 병영문학상 덕에 나간 휴가에서 저는 여자친구랑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 갔었습니다. <서양미술거장展 : 렘브란트를 만나다> 전시회를 갔었는데 입장료가 만만치 않더군요. 아마 12000원이었을겁니다.(가난한 궁인에겐 거금이죠.) 전시된 그림들은 너무 좋았고, 특히 램브란트의 그림들은 30분씩 멈추어서 보곤했지만, 전시관에서 출구로 나오면 각종 기념품들의 유혹도 만만치 않더군요. 이것이 오늘날 미술품 전시회의 풍경입니다. 이미 그 입장료가 거금으로 느껴지는 관람객에겐 풍요로운 자세로 그림을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죠. "12000원 냈으니까 12000원어치 봐야하는데, 도대체 12000원어치 감상하는건 어느 정도의 감정을 느껴야 하는거지?" 이런 고민이 마구 들면서 자유로운 감상을 방해하는 겁니다. 정말 비극입니다. 이래서 돈이 있어도 입장료가 있는 전시회는 들어가기가 싫은 겁니다. 저는 인사동에 자주 가곤하는데, 도대체 입장료 1000~2000원씩 받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어요. 핏. 아무튼 최근 몇년간 루브르나 오르셰, SOMA 등에서 가져온 유명 화가들의 고가의 작품들이 서울 도심에서 전시회를 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세계적 명화들이 우리 곁으로 오는 것인가요? 넉넉한 사람들에겐 그럴 것입니다. 미술관은 가까워졌죠.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그럴까요?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그 '미술관들'(명화 전시회를 여는)이 어쩐지 좀 더 멀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차라리 파리나 뉴욕에 쳐박혀나 있을 것이지. 라는 못된 심보를 품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쓴웃음 한번 짓지 않을 수 없네요.(울음)
7. 무너뜨린 담, 가까워진 골목 - 골목길 영화제로 초대합니다!
얼마전 저희 가족은 청운동으로 이사왔습니다. 청와대 길 건너에 살고있죠. 얼마전까지 15년간 살았던 집에서 어머니는 유화 물감을 나이프에 묻혀, 부엌에 커다란 그림을 그렸습니다. 싱크대 옆 하얀 벽에 제멋대로 커다랗게 그려진 것이었는데, 그 벽이기도, 그림이기도 한 연두색 망고그림을 볼때마다 부엌이라는 '제도화된' 공간히 철저히 형해화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 그림때문에 부엌은 부엌같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더 멋져보이거나 외로워보이기도, 또는 평화로워보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15년간 딱 두 번, 벽의 그림을 새로 그렸었는데, 심정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고 느꼈습니다. 늘어가는 흰 머리, 50대를 넘어 60대로 향해가는 세월.
이사온 집에는 담이 없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우리 가족이 꿈꾸던 것이었습니다. 예전에 살던 집은 성벽처럼 높은 담이 둘러쳐져 우리를 가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청운동에서 우리집만 담이 없습니다. 담을 없애면 구청에서 몇백만원씩 지원도 해주고, 나무도 심어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좋은 일을 왜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그 높은 담도 모자라서 철망까지 씌우고, CCTV까지 달고, 캡스나 SECOM까지...
담에 없어짐으로 인해 첫번째 효과는 우리집 마당이 지나가는 모든 행인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철벽같은 담으로 둘러쳐진 담으로 가로막힌 폐쇄적 마당은 그 땅을 법적으로 소유한 법적 소유자들만의 사유지가 되지만, 아무란 경계없이 개방된 마당은 마치 그것을 제 집 마당처럼 구르고 뛰놀순 없을지라도 시각적/공간 감각적 쾌를 허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가 보니 갑자기 드러난 넓은 공간(空間)이 일종의 예외적 경험을 제시한 것이죠.
또한 허물어진 담은 우리 가족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을 안겨주었습니다. 바로 골목길과 그 길 사이의 숨소리들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담이 있었다면 볼 수 없는 골목길의 모습이 우리 가족들의 시야엔 너무 잘 들어옵니다. 통창 안에는 거실이 있고, 2층에는 자그마한 제 방의 긴 베란다 창이 있는데, 이렇게 시각적으로 탁 트인 시점에서, 개방된 마당은 단지 마당을 공개한 차원의 문제와는 또 다른 심급까지 제공해줍니다. 그 골목길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어느샌가부터 저의 '눈'과 불가피하게 마주치게 되는 것입니다. 담이 막아놓은 우리의 만남을 무너뜨린 담이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담 너머의 건너편 집 담에는 하얗게 페인트 칠을 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려넣었습니다. 이건 우리 골목길 주변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이 골목을 지나가는 모든 이를 위한 그림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하고픈 말은, 우리의 미술은 그곳에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라는 것입니다. 뻔뻔하고 안이하게 우리는 따라서 구질구질하고 유치한 입시미술은 거부하자고 주장하며 미대 따위에는 가지도 말자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일테니까요. 다만, 이 지독한 병에 걸린 입시사회, 학벌사회, 갇힌 예술의 사회에서는 오직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곳을 향해 우리의 담을 허무는 것만이 가장 쉽고 빠르며 좋은 길이라 생각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제 가족들과는 달리 영화라는 도구를 통해 그 길을 향해 걷는게 제 목표입니다. 내년에 저녁하면, 저희 집 앞 골목길 위에서 달밤이 청청할 즈음에, 야외 영화제를 열거예요. 동네 사람들 열댓분, 가족들 초대해서 죽이는 영화 몇편 틀까 합니다. 이름하야 "골목길 영화제!". 그러려면 엡손 프로젝터부터 사야겠죠? 이제부터 월급 열심히 모아서 90만원짜리 하나 사야겠어요. (그러려면 여자친구한테 전화 안해야하는데... ), 휴우...(한숨)
형태씨는 디자인이죠? 우리 같이 가죠! 담을 허물고 골목길 담 위에 그림 그리러~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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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46:19
병장 김형태
이건 좀 번외의 논제거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3월에 같은과 친구들과 대학로에 갔었어요. 연극을 보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이곳저곳 갤러리를 찾아보고 있었죠. 마침 입장료도 없는 순수미술과 현대미술을 적당히 섞어놓은 갤러리에 들어가 관람을 하던 중, 유난히도 그림을 보며 말이 많던 저희에게 갤러리 작가분이 다가왔어요. 뭐 주저리 잡저리 얘기를 하다 마지막으로 “미술하시나봐요?”라고 물어봤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쩡이다가 ‘아뇨. 디자인공부하고 있어요. 영상디자인이죠.’ 이라고 말해버렸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그것인데 그때에는 ‘이건 우리가 추구하는 거랑 다른데 같은 미술이라 얘기할 수 있을까? 조금 조심스레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같은 미술임에도 말이죠. 우리가 배우는 것은 ‘시청역에나 가 있을 것’이라는 단순분류가 순수한 눈을 멀게했던 것 같아요.
오우, 미술을 경험담으로 얘기하기 시작하면 속상한 일들만 생각난답니다.
슈가나갈 때면 시청근처의 조형물이나 ‘멋’스럽게 만든 것들이 자주 바뀌는 것을 느낀답니다. 그럴수록 우리 고유의 정통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씁쓸해요. 변하지 않아야 멋있는 것들이 있는데, 자꾸 변화해야 하는 것들만 i아가는 미술에 대한 생각들이 서울을 자꾸만 자주 바뀌어야 할 것들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역시 씁쓸하군요.
예술을 얘기하자면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니 그들의 입맛을 모두 충족시킬 수는 없겠죠. 라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제 미술의 시작은 분명 ‘영화’였습니다만, 이후 ‘영화’에 의해 순수미술도 꿈꿔보고, 연출가도 꿈꿔보았습니다. 지금은 디자인이나, 순수미술, 영화영상 이라고 나누기보다 이 모든 것들을 초대할 수 있는 학예사가 되는 것이 꿈이에요. 예술에 참여할 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닌 우리의 뛰는 가슴’이라는 생각으로 언제고 다가올 모든 미술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야겠어요. 담을 허물때까지 말이죠.
내년, 집앞 영화제에 저도 좀 초대해주셨으면 합니다. 동네사람은 아니지만 언제든 달려갈 용기가 있거든요. 맥주가 필요하다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저에게는 ‘여자친구를 위한 통화비 지출항목’은 존재하지 않거든요.(웃음) 2009-07-07
08:11:54
상병 홍명교
디자인는 보다 행위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 뿐이지 미술이나 예술보다 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야말로 미술이지 달리 뭐가 미술이겠어요. 다만, 디자인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자본이나 권력의 도구로 삼으려는 지금의 작동들이 문제이겠죠. 거기서 마냥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만, 그래도 자꾸 삐져나오고 탈각하려고 하는 노력 그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다음에 또 누가 물으면, "아뇨, 디자인공부하고 있어요."말고, "예, 영상디자인하고 있어요."라고 말하시면 되는것 같아요. 아주 단순한 차이 같네요.
학예사요. 저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걸 꿈꾸는것 같아요. 실은 10월에 준학예사 시험 있던데 그거 보려고 생각중인데. 저희 사단은 자격증 따면 포상휴가(2박3일)주거든요(웃음). 어떻게든 나가보려고 안간힘 쓰는 이 처절함! 2009-07-07
09:04:03
병장 양동훈
햐.
이런 수준높은 글들을 보게 되다니.. 이곳이 아니면 제가 어디서 미술에 대한 이런 글들을 접할 수 있을까요(웃음)
정말,
더이상 붙일 말은 없고,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2009-07-07
10:24:35
상병 홍명교
김형태/
정말 올거죠? 빈말 아닌데. 정말 골목 영화제 할거예요. 최대 20명 정도가 딱 적당한 규모의 영화제라서 미리 예약하신 형태씨에겐 유리하답니다(웃음) 나중에 제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통해 포스터를 확인해주세요 하하
영화가 끝나면 가벼운 맥주 또는 와인 한잔과 함께하는 작은 파티가 집 안팎과 마당에서 열립니다. 2009-07-07
15:22:06
상병 김예찬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영화제를 한다면 저도 꼭 초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흐흐.
한 가지 좀 주제와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요새 들어서 계속 확인하게 되는 것이 문화적 자본의 대물림 현상인데, 어떻게 보면 명교님의 글을 보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네요. 만약 명교님의 부모님이 미대 출신이 아니었다면 명교님의 예술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 아니, 애초에 예술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지 - 생각해봅니다. (물론 명교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건 바로 제 얘기이기도 하구요.) 주변에서 이른바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물론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겠지만, ㅈ파도 집안이 좀 되어야 할 수 있는 세상일까요. 애초에 어떠한 종류든 자본이 있지 않은 한은 (정치적/문화적) 정서라는 것을 가질 수도 없는 세상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09-07-07
16:36:24
병장 백단
3. 비전공자로서 생각하기에는....아니 우리나라 입장에서 생각하기에는 그런것들이
다 너무 혼란스럽고 유치찬란다고 생각하지만 (네온사인들과 여러가지 것들이)
그것도 우리나라 디자인이 아닐까요? 우리가 보는 시각에서는 그것이 하E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곳에서 본다면은 다른 생각이 들거라고 생각합니다(뭔소리인지..)
제가 외국에서 오는 손님을 맞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지만은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한국에 오면은 한국만의 활기 같은것이'있다고 합니다. 바로 저런 것들이
그런것이 아닐런지....물론 다른 나라에도 저런 네온 사인들같은것이 있지만은 우리
나라 처럼 저렇게 휘황찬란(...) 하지는 않지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감동을 받았으면은... 나름 좋지 않을까요? 지나가면서 하는 헛소리입니다 2009-07-07
16:49:34
병장 차종기
크학 , 저도 미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는,
입시지옥은 미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죠,
저도 체육입시를 했었는데, 말그대로 지옥이었으니까요,
궁인들이 하는 훈련보다 더 힘들었다고 자부 합니다.
형태님의 댓글 중에 예술에 참여할 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닌 우리의 뛰는 가슴’이라는 생각으로 언제고 다가올 모든 미술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라는 문장이 맘에 들어요.
와아, 정말, 기회가 된다면,
골목 영화제에 가보고 싶군요. 흠흠. 2009-07-08
09:39:19
상병 권홍목
골목영화제 저도 가보고 싶어요
제대로 된 미술사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해요. 학교 미술시간때마다 생각했었더랬죠. 이런 붓질하는 기술도 좋지만, 초중고를 다니면서 미술수업을 들어봤자 미술관에 가서 어떠한 감동도 받지 못하면 대체 미술수업을 왜 받는건지... 진정 예술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면, 우리 대중도 그걸 받아들이는 법을 좀 알 필요가 있는데 말이죠. 2009-07-08
10:11:43
상병 홍명교
김예찬/
그러게요. 그런 생각을 하니 몸둘곳을 모르겠네요. 제 머릿속의 L스러움은 좀 다른 영향이 컸지만, 미술이나 예술에 대한 교양이나 자양분같은건 부모님의 영향이 전적으로 컸던것 같아요.
저같은 경우는, 어쩌면 사실, 아버지의 지독한 리버럴함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더 독하게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것 같아요. 마침 노무현의 취임과 함께 대학에 들어갔고, 그 시절 자유주의의 표상은 다름아닌 노무현과 유시민이었으니까.. 한편 아버지는 노사모였고 말이죠.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정말 많은 부분에서 원인이 되겠죠? 지젝을 읽는 시절이니 참 더 이런쪽으로 생각하는건지.. 2009-07-08
11:09:42
일병 이승진
몇번 글을 읽어봤는데, 사실 가장 끌리는 건 제목이네요.
'골목'이라는 누구나 진입할 수 있는 공간과 '미술관'이라는 엄숙함의 장벽이 둘러쳐진 공간의 대비.
'누구나'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시점이 아닐 수 없네요.
(돈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교양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괄호 속에 내포된 보이지 않는 '벽'들이야 말로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하는 '권력' 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2009-07-08
11:21:31
상병 김예찬
명교 // 그나마 리버럴이라는 정치 의식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가정이 절대 다수니까요. 일단 (종교 서적과 아동,학습용 책을 제외하면) '책'이라는 것 자체를 찾아볼 수 없는 집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386세대 부모'라는 것도 사실은 특정 계층에 한정된 이야기구요.. 2009-07-08
11:40:40
상병 홍명교
예찬/
맞아요. 전 그런면에서 특혜를 받은 셈이죠. 그렇게 여기면서도 항상 그런 점때문에 항존하는 제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는 생각하곤 해요. 어떤 끈과 완전히 결별해내지 못하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 같은것..
그래서 독립을 빨리 하고싶네요. 근데 뭐, 모아놓은 돈은 하나도 없고, 졸업하려면 3년은 더 있어야 하니 ... 2009-07-08
13:09:51
상병 박원익
저는 오히려 홍명교님과 같은 선택된, 훌륭한 미적 감각을 지닌 리버럴한 부르주아(?)에 어떤 역할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여나 나쁜 의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하고요. 사실 저는 가령 어떤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베풀어주는' 시혜적 행위들이 ㅈ파들의 토양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그들이 아무리 은폐된 지적-계급적 허영심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그것이야말로 도리어 진정한 지적 평등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는 건 역사가 실증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룸펜과 쁘띠 부르주아가 함께 연대하길! 저는 명교님이 괜히 지젝을 읽고 너무 휘둘려서, 자신의 특권을 잃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명교님이 만드시는 문화적-지적 해방구를 다 같이 향유할 날이 오겠지요?
그런데 병영문학상은 어느 부문에서 수상하셨나요? (매우 궁금) 2009-07-08
19:35:04
상병 김예찬
원익님처럼 저도 그 '역할'에 대해서 동감하는 바이나 문제는 언제나 그 계급적 한계에 있겠죠. 저 스스로가 느끼게 되는 바구요. 그건 출신의 한계이자 그들에 대한 시선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하는듯. (근데 역사에서 결국 이들은 정치적 변동과 그 진행 과정에서 하나 둘 씩 사라지게 되지 않던가요. 크크. 물론 그 것이 가능하도록 역사적 격동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평가받을 부분이겠지만.)
명교님은 아마 소설 분야였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 읽어보고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참, 이 글도 가지로 한 표 던질게요. 2009-07-09
08:02:27
상병 박원익
그들은 '사라지는 매개자' 역할을 맡았었죠. 흐흐. 2009-07-09
13:27:05
상병 진수유
짝짝짝! 아. 명교님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읽었네요.
가지로! 2009-07-21
16:09:05
병장 이 원
명교//
저도 잘 읽었어요.
학예사공부라.. 저도 그거 준비하긴 해야하는데
편입이 문제라 잠깐 접어두고 있었어요 후후 2009-08-07
22:55:10
상병 이수룡
오 멋지시네요
저는 전공자이지만
저보다 미술에 관심과 지식이 더 많으시네요
몇 번 더 읽어보고 배워야 할 것 같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