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파시즘 (2) 
 병장 이건룡 05-17 14:49 | HIT : 154 



"자유주의적 사회에서 금지되었던 인물이 해금되는 것은, 소비에트 백과사전에서 관료적 결정으로 그렇게 하듯 일거에 되는 것이 아니다. 소비에트 백과사전은 새로운 판이 나올 때마다 이제까지 언급할 수 없었던 인물을 드러내고 그와 비슷한 수나 아니면 더 많은 수의 인물을 마룻바닥 밑으로 쓸어 넣어 버린다. 우리사회에서는 그 과정이 더 매끄럽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리펜슈탈의 나치전력이 갑자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된 것이 아니다. 문화적 수레바퀴가 더 이상 문제시 되지 않게 된 것이다. 역사를 내동 건조해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취향이 한 바퀴 순환하여 논쟁의 여지가 증발 될 때까지 기다림으로서 논란을 해결한다." 

( 일제시대라는 과거의) 긴장과 함께 파시즘의 미학에 대해 접근해 본다. 개인적으로 기대한 이미지의 매혹적인 면을 진중권씨에게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룰 수는 없었다(히틀러의 보이스카웃 단인 유겐트 슈탈의 미학적 접근 때에는 불성실하게 읽은 탓인지 실패하였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거물에 대한 이해를 더불어 결벽적인 도덕성에 의해 마땅히 사장되어야 할 문화에 대한 접근과 기생하듯 생존해있는 한 '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수잔 손택에 범주화에 의하면 파시스트의 문화의 잔존은 도처에 널려 있다(지워도 지울 수 없는 것 같은......). 

 레니 리펜슈탈은 히틀러 집권 당시 히틀러와 괴벨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영화감독이자. 영화배우로써 활동한 전적이 있으며 으레 나치의 선전물로 손꼽히는 작품(귀동냥으로 얼핏 들어 보았을만한) <신념의 승리>(1933), <의지의 승리>(1935)는 그녀의 대표작이다. 그밖에 작은 <푸른 빛>(1932), <올림피아>, <저지>(1954)가 있다. 

 리펜슈탈의 <누바족의 최후>라는 과거 연력의 단절을 의미하는 이 사진집의 서문에 해명에 담긴 서문으로 인한 복건의 분위기를 손택은 불편한 사실을 들추어낸다. 사실 나치즘에 협력한 전범과는 달리 리펜슈탈 그녀는 불기소 처분으로 전범과 같이 처벌 받지 않았고, 영상물은 선전물이 아닌 다큐멘터리로써 그녀의 예술적인 성과에 대해 대다수가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성공한 여성상으로 널리 인식이 되고 있다.("누구나 최고로 치는 영화를 만든 여성의 이름을 빼야만 한다면 페미니스트들에게는 통탄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바타이유의 세계의 도처에 깔린 '긴장'을 수잔 손택의 '열정'이 담긴 '매혹적인 파시즘'으로 읽어가 볼 차례이다(1974년 글이다). 리펜슈탈에게 보이는 파시스트 수사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고귀한 야인'이라는 오래된 개념의 파시스트 버전의 특징은 사색적, 비판적, 부수적인 것은 무엇이든 경멸한다는 것이다. 원시적 미덕에 대한 리펜슈탈의 작업은 레비-스트로스 처럼, 원시적 신화, 사회조직, 사고의 복잡 미묘함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리펜슈탈은 누바족이 씨름경기의 육체적 고통 속에서 고양되고 하나 되는 방식을 찬미할 때 파시스트 수사를 강력하게 재사용한다. 씨름경기에서 누바 남성들은 '거대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온 힘을 당겨 밀고 당겨' 상대방을 바닥에 쓰러트린다. 이들은 물질적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의 성스러운 정기를 새로이 하기' 위해서 싸운다."  

"누바족은 아리안 족이 아닌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리펜슈탈의 초상은 나치 이데올로기의 더 큰 주제일부를 상기 시키는 면이 있다." 과거 나치 이데올로기에서의 깨끗한 것과 불순한 것, 결백한 것과 부정한 것, 정신적인 것, 즐거운 것과 비판적인 것을 대비시킨다는 점이다. 나치 독일에서는 유태인을 비난한 주요 논리가 유태인이 도시적이고 지적이며 파괴적이고 타락시키는 '비판정신'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치 이데올로기의 미적 판단의 기호처럼 리펜슈탈은 위의 인용된 씨름경기를 육체적 기술과 용기를 드러내고 강한 자가 아닌 약한 자를 억누르는 것이 공동체 문화의 통합의 상징인 사회의 이미지의 동경처럼 그려져 있다(*<누바족의 최후>에서 최후는 무슨 뜻인가? 멸종되어 가는 미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나치가 집권한 독일에서 작업한 <올림피아>에서는 올림픽 운동선수들의 '거대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근육의 움직임에 대한 집착이 이러한 맥락에서 시도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녀의 미의 관점은 <누바족의 최후>또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볼 수 있다. 

 뿐더러 당시 독일 정부의 선포와 함께(아마 괴벨스의). "극단적인 유태주의 지성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독일 혁명으로의 성공으로 독일 정신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예술비평이 "유태인의 특유의 특징"을 띠고 있다하여 1936년 11월 공시적으로 예술비평을 금지된 시점에서. 바로 가슴보다 머리를, 공동체보다 대인(*위인)을 중시한다는 점을 파시스트 예술의 '육체적인 완벽함'이라는 유토피아적 미학에 대한 강조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누바족의 최후>를 리펜슈탈의 과거와 분리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고약하고 악의에 찬 것처럼 보이겠지만, 리펜슈탈의 작업의 연속성을 확인 하는 것, 그리고 또한 그녀의 복권이라는 이상스럽고 억누를 수 없는 움직임을 보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교훈이 있다. 셀린느, 벤, 마리네티, 파운드 등 파시스트가 된 다른 예술가들(파브스트, 피란델로, 함순등 영향력을 잃으면서 파시즘에 매달린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의 경력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리펜슈탈은 나치시대와 완전히 동일시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요 예술가이며 제 3제국 시대뿐만 아니라 제3제국 몰락 후 30년이 지난 후에도 파시스트 미학의 여러 주제를 꾸준히 보여 주고 있는 유일한 예술가인 것이다." 

 그 시대에 정치가 예술의 수사, 후기 낭만주의 시대 예술의 수사를 이용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국가 사회주의 정치와 예술의 관계가 정치적 필요에 종속되었다는 점이 아니다. 1933년 괴벨스의 정의에 의하면 "예술의 가장 포괄적이고 고양된 형태"는 바로 정치이며, "현대 독일 정책을 만들어 내는 우리자신이 예술가이다. ······ 예술과 예술가의 역할이란 형태를 만들고, 형상을 부여하고, 병든 것을 제거하고 건강한 자를 위해 자유를 창조해내는 것"이었다. 

 정치와 예술의 이 같은 관계는 좌파 정권이든 모든 독재정권하에서든 마찬가지이다. 다만 차이점은 나치는 언급한 바와 같이 '육체적인 완벽함'이라는 유토피아적인 미학을, 반면 소련이나 중국의 공식 예술에선 '유토피아적 윤리'를 설파한다. 공식 공산주의 예술의 무성적 경건함과 대조적으로 나치 예술은 외설적이며 동시에 이상주의 적이다. 

"유토피아적 미학(육체의 완벽함, 생물학적으로 부여받은 정체성)은 이상주의적 에로티시즘을 뜻한다. 섹슈얼리티는 지도자의 매혹과 추종자의 기쁨으로 변환된다. 파시스트적 이상은 성적 에너지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정신적'힘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성적인 것(여성)은 언제나 유혹으로 존재하며, 이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반응은 성적 충동을 영웅적으로 억누른다." 

 파시스트 지도자들 자신이 성적은유 즐겨 썼던 것의 연유는 좌익운동의 경향이 유니섹스적이며 이미저리가 무성적인 반면 우익운동은 그들이 제시하는 현실이 얼마나 금욕적이고 억압적이든 그와는 무관하게 에로틱한 외양을 가지기 때문이다. 나치즘은 공산주의 보다 뚜렷하게 '섹시'하다. '섹시한' 히틀러에게 지도력이란 '여성적인' 대중에 대한 성적 정복, 강간 같은 것으로 보았다(<의지의 승리>에서 군중은 엑스터시의 상태로 표현된다. 지도자들이 군중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리펜슈탈의 영화가 여전히 영향력 있는 것은 영화에 담겨진 갈망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매달린 젊은이들의 록 문화, 복귀요법(유아기의 외상체험을 재 경험함으로써 신경증 치료), 반정신의학, 제 3세계의 캠프주총, 밀교 등 온갖 다양한 문화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내용을 추구하는 주의는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낭만적 이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960년에 반 권위, 반 엘리트 주의자였던 상당수의 젊은 자들이 구루(히피의 지도자) 앞에 납작 엎드리고 기이할 정도로 독재적인 규율에 따라 복종한 것처럼. 공동체를 우위에 놓는다고 절대적 리더십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궁극적으로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십여 년 전에는 소수자나 상대적인 취향으로서 분명히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예술이 오늘날에는 그럴 가치가 없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야기하는 윤리적 문화적 문제가 전과 다르게 너무 심각하고, 심지어 위험해 졌다. "취향에 대한 판단은 그렇게 순진하고 무해한 것 일수 없다."
(* 알랭 바디우가 말한 오늘날 윤리의 문제를 이와 같은 고려에 따라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미디어와 정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유포된 '인권'과 같은 세론(世論)은 결코 윤리학의 지표가 될 수 없다(우리는 이 '인권'이 미국의 주요한 공갈 협박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윤리학>).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진실은, 엘리트 문화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대중문화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소수의 문화로서 무해한 윤리적 문제만을 제기하는 취향이라고 제도화하면 불순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취향은 컨텍스트이고, 그 컨텍스트에 따라 달라진다."   

 당시 그녀의 우려에 따르면 파시즘이 최신의 유행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파시스트 미학을 상기시키는 예술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도 캠프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지금은 2007년이니 눈 크게 떠 보면 이미 도처에 널린 파시즘적인 유행을 찾기 쉬울지도)


camp : 예술, 의상, 대화 등에서 키치, 통속적이고 속물적인 주제와 양식을 의도적으로 정교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196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옹호로 시작되어 1980년대에는 예술과 문화에서 포스트모던적 시각이 널리 차용되면서 미술적으로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p.S,

'삼족오 소년 소녀대'에 대한 진중권씨의 불편함은 히틀러 소년단 유겐트 슈탈의 제복을 연상시킨 다는 점에서 심기가 거슬린 다는 점이다(한 꼬리의 '추기'가 이후 그의 글은 쓰는데 가동력이 되었을지). 이는 물론 수잔손택이 말한 바 있는 캠프적인 감수성의 영향으로 구체화 해 볼 법한 문제이다. 나또한 드라마나 일부 방송선전에 따라 형성된 역사의식 기호의 가동력은 얼마나 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수잔 손택의 리펜슈탈에 대한 두 번째 글에서는 <SS제복>, 사도매저키즘에 대해 적고 있다. 

"SS제복은 몸에 꽉 끼고, 두껍고, 뻣뻣하고, 장갑은 손을 감사고 장화는 무겁고 발과 다리를 딱딱하게 둘러싸서 신은 사람이 꼿꼿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치의 상징 인 특별한 제복과 주인과 노예의 심미적인 관계의 의식은 사도매저키즘, 사드풍의 쾌락적 무대를 고안하게 되었다.("색깔은 검정색, 소재는 가죽, 매력은 미, 정당할 근거는 정직성, 목적은 엑스터시, 그 환상은 죽음이다.")   

"무엇이든 순전히 현실적이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하고 흔해빠진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레니 리펜슈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