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말, 말 , 병장 한상원
나는 오늘도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했다. 그 중에서 크나큰 암시나 사유를 담아서 던진 말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그리고 내일도 아마 그렇게 말할 것이다. 특별히 논쟁이 오간다든지, 생각할 거리가 있다든지하는 정말 유별난 상황이 찾아오지 않고선 나는 오늘과 같은 식의 그저 그런, 이런저런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매일 하는 말은 참 쉽다. 말 한마디 하는 것이 만약 극한과 적분이 오묘하게 결합된 오차방정식의 수학문제를 푸는 난이도를 기본적으로 필요로 한다면 아마 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말은 얼마나 쉬운가. 더하기, 빼기보다 쉽다. 입을 벌려, 숨을 들여마시고 내쉬면서 혀를 적절히 굴리면 된다. 이 과정은 우리의 출생부터 꾸준히 학습되어 이제는 그 정교한 메커니즘조차 스스로 기술할 수 없을만큼 익숙해져있다. 즉, 별 생각 없어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별다른 무리없이 저전거를 탈 수 있는 것처럼.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핸들의 각도나 바퀴의 속도, 페달에 가해지는 적절한 힘의 배분 따위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자전거가 있고 없음의 문제이지, 매번 자전거를 타는 법을 고심해야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말도 그렇다. 하고 안하고의 문제이다.
오늘 온게임넷에서 <스카이 프로리그 2005>를 보면서 내무실에서 난데없는 품평회가 벌어졌다. 잠시 이 품평회의 맥락을 보자. 프로토스가 탱크와 벌쳐, 미사일 터렛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테란의 진영을 파고들다 많은 병력을 잃었다. 브라운관안의 해설진들은 비명을 지르고, 각자의 입장에서 판단을 하기 시작한다. 캐리어 가야돼요, 아~사이오닉 스톰을 쓰기전에 템플러가 죽었어요. 한편, 브라운관 밖에서는 허접한 XX, 저기다 저걸 꼴아박냐. 안되는 X는 해도 안된다니까.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E스포츠나 그냥 스포츠나 알파벳이 하나 붙은 안붙든 내가 해도 저보단 잘하겠다는 식의 말은 대개 어디서나 흔하게 나오는 말이니 그냥 넘어가자. 그러나 또 빠짐없이 나오는 니가 해봐라. 저보다 잘하는지.라는 말은 그냥 넘어가지 말자. 바로 저 말이 오늘 내가 이야기 해보고 싶은 한마디이기 때문이다.
말은 너무너무 하기 쉽다. 갓 태어난 아이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말일 정도다. 그리고 너무 쉬워서 함부로 하는 것이 또 말이다. 뭐, 말하는 행위의 지극한 가벼움에 대해 새삼 지금에 와서 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무수한 속담들과 세계 곳곳에 전래되어 오는 말에 관한 격언들은 인류가 말을 배운 이후에 말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주의깊어야 하는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말하는 행위에 대해서 한번쯤 짚고 가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오늘의 폭주하는 정보의 시대에 우리는 이미 이 한몸을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어떤 방면의 전문가 아닌 전문가들이 너무 많다. 인터넷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다양한 매체, 사회에 넘쳐나는 무수한 커뮤니티와 동아리 조직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보다 넓고 풍부한 정보를 마음껏 전해주는 동시에 자신을 표현하는 원초적인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준다. 그것도 익명의 아이디라는 은밀한 가면까지 제공을 하면서.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보다 역동적이고 활기차게 만들고 있지만, 동시에 쉴새없는 정보 교환으로 많은, 너무나 많아서 다 알 수 없는 지식들을 양산해내고 가면과 가면뒤의 진짜 얼굴을 쉴새 없이 혼동시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변화된 정보사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양산형 지식체계들은 키워드 하나만 쏙 집어 넣으면 자동판매기처럼 덜컹하는 쇳소리와 함께 온갖 상상도 못할 정보들을 우르르 쏟아낸다. 그 상품들은 너무 많고 너무 광범위하다. 무언가 알아야만 할 것 같은 것들이 가까이에 있기는 한데, 그 많은 것들 중 선뜻 무엇을 골라야 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터넷 검색으로 건질만한 양질의 자료는 정말 만나기 어렵다. 무슨무슨 방송에 소개된 맛집이라든지, 광고에도 나오는 연예인이 많이 다니는 헬스장이라든지 그런 정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많아졌지만 지식이, 앎이 많아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지식 역시 많아진 양 마구마구 자신들의 식견을 온 누리에 자랑한다. 그리고 그 당당한 자랑거리들은 너무나 쉬운 우리의 말에 의해서 파티용 풍선이 마구마구 부풀어가듯 퍼지며 우리의 주변을 채운다. 황우석 교수의 사건만 해도 아직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고, 서울대 조사위원회가 조사를 하고 있지만, 조사위원회의 준회원이 마치 전국에 수백만을 웃도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가끔, 기사마다 댓글을 달고 황교수든, 노이사장이든 성토하는 사람들이 죄다 줄기세포를 한번쯤 복제해보고 논문도 읽어보며 조사하곤 하는지 진지하게 궁금해진다. 아, 사실 안 진지한 농담이다.
이 와중에 우리는 정말 자신의 말을 하면서 살아가는가. 내가 마구 뱉어내는 나의 말과 나의 견해들은 과연 나에게서 비롯되는가. 어딘가의 사이트, 어떤 뉴스, 어떤 칼럼에서 읽고 머릿속에 저장해둔 기억들은 모두 나의 말인가. 그리고 그 말이나 견해는 올바른 것인가. 명확한 근거와 논리적으로 정합성을 가지는 유효적절한 말이라 부를 수 있는건가. 소위 <카더라 통신>의 악명은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정보가 과연 정확한 것인지의 여부도 명확하지 않을 뿐더러, 내가 말하게 되는 평가 역시도 도무지 그 연원을 종잡을 수 없는데 나오는 말을은 도대체 무언가. 무엇을 근거로 저 선수의 플레이를 좋다 말하고, 행정수도 이전은 하면 안 되는 것이고, 쌀 개방은 해야되고, 저 가수의 노래는 엉망이고, 떼지어 등장하는 댄스그룹의 멤버들은 죄다 기획사의 꼭두각시라 비난하는가. 혹시 이들은 죄다 자신의 취향이고, 감정이고 아쉬움은 아닌가.
앞서의 당신에게 나는 정말로 묻고 싶다. 당신이 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확신하냐고.
이런 말하는 분위기에 대해 혹자는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의 근거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그 근거가 언제나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전제하에서다. 하지만 우리가 내 뱉는 말들은 종종 손쉽고도 자연스러운 배설처럼 그 말이 향하는 곳을 지저분하고 악취가 나게끔 더럽힌다. 사람사이에 이루어지는 소통은 그저 말과 말들이 오고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새적소에 가해지는 유효한 발차기와 지르기로 포인트를 쌓아나가는 태권도 경기처럼 필요로 하고 적확한 경우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춤을 춰본 사람이 티비에 등장하는 가수들이 추는 춤이 어려움을 알고, 운동을 해 본 사람이 권상우나 김종국의 몸을 만드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아는 것 처럼, 누군가와 소통을 한다는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야 말로 비로소 말과 말로 이루어지는 소통이 어려움을 실감한다.
정말 말할 것이 많은 사회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불만도 많고, 자의식도 강해지고 등등. 여러 요소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말을 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모두가 말을 통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종용하는 사회에서 침묵은 결코 금이 아니게 되버린다. 입을 다물고 있는 자는 답답한 사람 혹은 비사교적인 인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말한다는 것은 점점 그 가벼움을 더해가고 있다. 누구나 말하기 때문에 그 무수한 말들 속에서 자기 하나 이상한 소리를 한들 표가 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듬성듬성 머리에 떠오른다. 대충 어디서 봤으니까,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라는 격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풀어놓은 언어게임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명제를 남겼다. 아, 침묵이라는 단어가 귓속을, 마음속을, 머릿속을 후벼판다. 나는 내가 감히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들을 지껄이며 살아가는가. 침묵은 금이라는 잠언은 너무도 당연히 들어와 그 당연함에 질식해 스스로 그 가치를 잃은지 오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이 신뢰하는 가치, 판단들을 자신의 입장에서 언제든지 말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이 우리에게는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자기에게 스스로 관대해지는 자기 비약, 듣는 이, 읽는 이를 고려하지 않는 독기 서린 의미 없는 말들, 혼잣말이었어야 했을 또 다른 말들에 대해 이제는 침묵하자.
판단은 대개 개인의 취향이고, 말은 그저 가벼울 뿐이다. 자기 스스로에게 내리는 판단,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취향은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타인과 관계 맺는 말하기는 결코 가벼워서는 안된다. 그 경우 말은 정교함을 추구하는 논리이자 어쩌면 과학에 가까운 것이 되어야 한다. 논리와 적절한 상황 판단, 자기 주장에 걸맞는 명확한 근거들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후에야 입을 열자.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그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과정은 언제나 힘겹고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과연 평가나 비난을 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을 갖고 있기는 한걸까. 그런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함부로 말을 던질만큼 자신은 자신에게 떳떳하며 충실하고, 지적인 비난을 쏟아낼만큼 지적으로 고민하며 살아왔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보자.
글을 쓰는 순간에 내가 느끼는 것은 대개 두려움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비판하고 비난하며 말하고 있는 이 근거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난 이 비판을 할 만큼 충분히 무언가를 잘 알고 있는 것이기는 할까. 그것은 내가 하는 말에 대해 내가 느끼는 책임감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한없이 깊은 의구심의 바다를 유랑하는 조난자가 된다. 내가 보고 들은 숱한 생존에 관한 이야기들이 지금 당장 써먹기에 과연 옳을까를 의심해본다. 정말 내가 무인도에서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혹은 로빈슨 크루소와 그의 파트너 프라이데이처럼 나무에다 나무작대기를 비벼 불을 만들어내는게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정말 제대로 비벼대고 있는지. 현실의 바다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하고, 비판받고 수정하면서 사람들은 그 앎의 영역을 보다 충실하고 착실하게 쌓아나간다. 이것은 퍼즐 맞추기와 유사하다. 하나의 퍼즐조각은 의미가 없다. 퍼즐 한 조각은 그와 모양새가 들어맞는 다른 퍼즐 한 조각을 만나서야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 그림이나 의미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퍼즐 맞추기의 목적이 달성되는 길로 비로소 우리는 한 발짝 나아간다.
그 한걸음을 위해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말들이 그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 온갖 오만과 편견, 선입견과 그릇된 상식이나 정보로 더럽혀져 있어 다른 사람의 한 걸음을 주저하게 한다면 우리는 과감히 침묵해야한다. 침묵을 주저하고, 침묵을 못 견뎌 말로써 스스로를 가볍고 무책임하게 몰아가기 보다는 자신의 입을 닫아 만든 공백으로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이 채워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관용으로 자신을 감싸보는 것은 어떨까. 자신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고 든든히 무장시켜주는 논리와 근거의 갑옷으로 채워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무엇보다 때로는 침묵하자. 적어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사족.
이 글은 제 가까운 지인인 정동훈 병장이 예전에 쪽지로 던진 화두와 이번 피디수첩 및 사기극 논란을 관조하면서 떠올랐던 여론의 가벼움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언제나 저의 단조로운 사유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정동훈 병장과 책마을 많은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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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노지훈 (2005-12-20 05:05:52)
나는 생리적 배설의 욕구를 참을 수 없다. 결국... 쌌다. 나는 내가 싼 그것을 계속해서 관찰한다. 그러고는 용감하게도 남들에게 보여주며 내가 만든게 이쁘냐고 물어본다. 그것은 만든게 아니다. 그저 배설한 것이다.
상병 노지훈 (2005-12-20 05:10:16)
참. 저희는 엠겜 나옵니다. 김도형씨의 "캐리어 가야해요" 파문 말이 많죠(웃음).
병장 김건수 (2005-12-20 08:48:54)
한번 말하기전에 세번 생각하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상병 김승연 (2005-12-20 21:20:46)
저는 그래서 글이 말보다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뭐 제가 말하면서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져서인지는 몰라도.
글은
썼다
지웠다
몇번이고 한 후에 보여줄수 있으니까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자유에 대해서 조금 더 써주시면 좀더 제 취향의 글이 되겠군요.
병장 조동식 (2005-12-21 09:35:49)
말을 가려서 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느끼게 해주는 글인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가끔 저도 모르게 위에 해당하는 말들을 하는 너무도 당당히 해대던 제가 참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앞으론 정말 말을 아껴야겠습니다.
병장 김동환 (2005-12-21 10:16:49)
거의 말의 토양 위에서만 사유는 소환될 힘을 얻죠.
잘읽었어요. 한표 던지고 갑니다아-.(웃음)
병장 김병기 (2005-12-21 17:53:51)
어떤 사실이나 타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나쁜것 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비판을 하려면 자신의 주장에 대한, 자신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제 자신도 그러진 못하지만 말이죠
상병 박진우 (2005-12-22 13:18:01)
시끄러운 세상.
제 목소리만 높이려는 사람들. 그에게 야합하려는 근거모를 세력들.
모든것이 제멋대로 그 어떤 흐름을 읽을새도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많은 물줄기의 하천처럼...
우리는 모든것들 그저 흘려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필요한 것들, 남겨져야 할 것들조차 잡아둘 생각도 못한채...
병장 이휘훈 (2005-12-24 03:34:29)
남이 있기에 느끼는 두려움들. 타인이 만들어낸 현실의 바다가 저는 상당히 무섭습니다.(그렇게 느끼네요.) 오늘 후임병이 훈련복귀하면서 손금을 봐주더군요. 뭐 기독교이지만 "돈은 많이 버니?", "오래살아?", "혹시.. 다 좋은데 빨리죽니?"라는 질문등으로 웃으면서 오른손을 내밀었죠. 후임왈 인맥이 크게 형성되지 않는다는군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리고 점괘를 믿지는 않지만, 인간관계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상당히 매력적인 무언가라 생각이 되네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혼자서는 의미가 퇴색해버리는 사람들간의 약속이기에, 남에 의해서 비판이고 비난이고 칭찬이고 뭐고를 받기 때문에, 한상원님이 말씀하신대로 한번더 생각하고 논리와 적절한 상황 판단, 자기 주장에 걸맞는 명확한 근거들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후에야 입을 열어야 겠다고 생각되네요. 처음에 말한 그 두려움들 없애기 위해서 저도 한번 이 노력을 해볼랍니다.(웃음)
글 참 잘쓰시네요. 멋집니다.
상병 주영준 (2005-12-24 16:14:58)
뒤늦게 읽고 추천 하나.
상병 박민수 (2005-12-24 23:03:08)
마음이 무거워 지는군요. 오늘도 제 입에서 무차별적으로 튀어 나와버린 말들이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고통스럽습니다. 냉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사유의 부족. 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보여준 그들만의 세상에서 갈피를 못잡고 막연하게 따르기만 했던 나였기에 더 큰 아쉬움을 느낍니다. 상원씨가 즐겨 말하던 "소통"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군요. 글이라는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가진 갖은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여력을 이끌어 낸다고 했던가요?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 뉘앙스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쨌거나 오늘 만난 이 글 덕분에 나름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 혼자 받아들인 것(일방적인 것)이긴 하지만- 상원씨가 말하는 "소통"과 닿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글을 읽었을 때 들었던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군요. 후. 좀 더 나아진 모습의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