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
상병 김현진 05-29 02:07 | HIT : 157
<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 (마크 트웨인)
나는 (장편)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소설을 읽을 시간에 차라리 좀 더 본격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읽거나,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외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편 소설은 같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장편 소설을 싫어하는 만큼 좋아한다. 단편 소설은 짧고, 저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의도하는 바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지루하게 늘어지는 50분짜리 멜로 드라마가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장편 소설이라면 단편 소설은 보는 이의 눈과 귀를 고정시키는 수십 초짜리 광고와도 같다.
<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 는 유명한 미술계의 거장,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반전영화처럼 비틀어 픽션화한다. 어느 휴양지로 놀러간 주인공은 한 술집에서 만난 사람에게 "사실 조금 전 우리 앞을 지나간 사업가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하던 천재 화가 고흐다" 라는 말을 듣게 되고, 그 충격적인 선언을 시작으로 그 사람은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고흐에게는 같이 그림을 그리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이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그림도 잘 팔리지 않아 끼니마저 잇기 힘들자 그들 중 하나가 이런 제안을 한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죽은 걸로' 하자. 그리고 남은 세 사람은 죽은 걸로 한 사람의 이름으로 모든 그림을 팔자. " 가위바위보를 해서 고흐가 죽은 사람이 되었고, 고흐는 장례식에서 텅 빈 자신의 관을 묻게 된다.
작가가 살아있었을 때는 팔리지 않던, 팔아 봐야 물감 값도 건지기 힘들 정도로 헐값에 팔렸던 그림들은 고흐가 대표로 죽은(척을 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굶어죽은 어느 가난한 화가'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쳐가다 어느새 '광기 때문에 요절한 천재 화가'로 변모한다. 고로 예상하겠지만, 요절한 천재 화가의 그림은 고흐와 그의 친구들이 이전까지 만져보지도 못한 거액에, 줄기차게 팔려 나갔다. 고흐는 그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친구들은 휴양지에서 여유롭게 살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는 주인공의 물음에 그 남자-고흐의 친구-는 안데르센의 동화 한 편을 이야기한다.
[ 한 어린이가 작은 새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새는 노래를 아주 잘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작은 새를 잘 돌보지 않았죠. 새는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습니다. 노랫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슬퍼졌습니다. 결국 새는 죽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슬퍼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죠. 그리고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아 장중하고도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습니다.
... 이해하겠어요? 이건 마치 시인을 굶어죽게 한 다음 시인을 위해 호화스럽고 장중한 장례식을 치러 주는 것과 같아요. 장례식에 쓸 돈을 시인에게 미리 주었더라면 그는 굶어죽지도 않았을테고, 어쩌면 더 훌륭한 시를 썼을지도 모르죠.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당연한 것이다. 예술가를 기다리는 건 장례식의 꽃다발 뿐이었다. 우리는 오감의 즐거움을 누린 대가를 예술가에게 지불하기는 커녕 그를 굶겨 죽이고, 그걸로도 모자라 장례식에 참석해 영광마저 대신 누려왔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교훈은 뭘까? 그래. 예술가가 살아있을 때 잘 지원해 줘서 그가 오래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하자? 아니다. 그건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이 태어나기 위해선 창조주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더 이상 내가 사들인 작품을 넘어서는 것이 태어나지 않고,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이어야만 하므로.
죽은 예술가의 피를 먹여야 그의 작품이 걸작으로 거듭나므로.
나는 이 이야기에서 '이타적인 인간의 관계'에 대한 회의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이타적인 행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도 원한다는 인식에 근거한 행위인데, 이는 상대와 나는 본질적으로 같은 인간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논리에 의해 긍정된다. 고로 이타적인 행위-호의- 또한 이기적이다. 그러나 개인은 저마다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심지어 타자가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심연을 갖고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성격을 띈 이 '호의'는 오히려 인간을 고독하게 만드는 제거 불가능한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외로움과 배고픔은 예술가 대 인간 집단이라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호의적인 이기심과, 이기적인 호의에 의하여.
일병 정영목
전 이 글을 읽고 엉뚱하게 '보랏빛 소'가 떠올랐습니다. 뭔가를 팔려면 그것이 주목할 만한(Remarkable)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보다는 '광기 때문에 요절한 천재 화가'가 사람들에게 와닿았을 겁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안목은 부족하니 '예술'을 마케팅 하려면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을 조작하는 것이 중요하죠. 리마커블의 반대말은 "아주 좋다(very good)"임을 되씹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05-29
일병 정영목
추가 - 이런 의미에서, 안데르센 이야기의 작은 새는 노래를 아주 잘(very good) 불렀기 때문에 비극을 맞이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노래를 '정말 아주' 잘 부르면 그 자체로도 '리마커블' 한 것이지만, 결국 그 새는 주목을 끌지 못했기 때문에 노래를 그렇게까지 잘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죠. 우선, 자기 앞가림도 잘 못하는 어린 아이에게 의존했던 것이 큰 실수요, 어린 아이가 원하는 건 '노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했던 것이 두 번째 실수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이냐 아니냐, 이타적인 것은 이기적인 것이냐 아니냐, 라는 논의도 좋지만, 어떻게 이타적인 행위를 이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수단이요, 후자는 목적이니까요. 05-29
상병 김현진
역시 책은 읽기 나름인가 봅니다. 떠오른 게 이렇게 다른 건 영목씨가 '보랏빛 소'를 보았고 저는 라캉에 관한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 주목을 끌었기 때문에 좋아했던 겁니다. 문제라면 아이의 싫증이겠지요. 유희에 있어서 '싫증'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싫증에도 불구하고 넌 내 주목을 끌어야 해'라는 건 만화나 드라마 주인공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화를 직접적으로 읽는 건 무의미한 짓입니다. 새가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는가, 아이가 뭘 원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뭘 말하고 싶었냐가 중요하죠.
이타적인 행위-전자-는 그대로 행위이고, 이기적인 본능-후자-은 동기. 라고 전 의도했답니다. 행위-동기와 수단-목적은 조금 다르지 않나 싶네요.
[" 목적을 위한 수단" =/= "동기에 의한 행위" ]
뭐 이런 거죠. 목적은 수단을 책임지지만 동기는 행위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또한 목적과 수단은 뚜렷이 '의식되는' 것이지만 동기와 행위는 의식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05-29
일병 정영목
각색 - 화가는, 단지 그림을 아주 잘(very good) 그려서는, 비극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림을 '정말 아주' 잘 그리면 그 자체로도 '리마커블' 한 것이지만, 시대를 초월할 만큼 주목을 끌지 못한다면 그림을 그렇게까지 잘 그린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죠. 우선, 자기 앞가림도 잘 못하는 'Human Race'에게 자신을 의탁한다면 그건 큰 실수요, 'Human Race'가 원하는 건 '예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한다면 그 또한 큰 실수라 하겠습니다.
제가 이토록 삼천포 빠지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타적인 인간의 관계'에 대한 회의감'에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류가 말하는 핵심. 즉, '생명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다'라는 명제를 너무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이기적으로 태어났음이 뭐 어떻다는 겁니까? 그럴수록 이타적으로 살면 되죠. 그리고 생명의 기본 동기가 정말로 이기적인 것인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끼리 공상소설을 쓰고 있을 뿐이니까요.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그것이 이타적인 행위를 이끌어 내기 위한 '학문적인 연구' 즉, 수단이라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연구하는 거 자체가 목적이 되면 다소 현학적인 이야기로 흘러가는 듯 싶습니다. 결국, 이타적인 행위는 어렵구나... 하고 사람들이 생각케 하는데 공헌하는 셈이죠.
결론 - 좌절하지 마세요. (역시나 결론도 동문서답형.. 죄송.. 하하하하) 05-30
상병 김현진
저는 유전자의 차원에서 생명 자체의 이기성을 얘기한 건 아닙니다. 전혀 생각도 안했어요. 하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 개인의 '욕망'에 대해 생각했지요. 인간의 욕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게 근본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충족되지 못하는가. 뭐 이런 거요.
거창하게 연구하거나 한 것도 아니에요. 그저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인간이 세상의 기준으로 '최대한 이타적'이려면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생각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가 한 행위가 '이타적이었다'고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이기심의 충실한 발현이지요. 이 곳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05-31
병장 김청하
유전자가 이기적이고, 그에 따라 인간을 설계했다고 해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학계 바깥의 사람들이 그것만 듣고는 그렇게 해석하고 그것이 틀렸다는 식으로 몰아가곤 하지요. 실제로 학계 내에서 또한 인간의 이타적 성향에 대한 연구들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협력과 이타적 행동이 어떤 식으로 유전자에 코딩될 수 있는가, 하는 레벨부터 실제 협력이 개체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레벨까지 말이지요(이건 경제학에 가깝습니다만). 05-31
병장 김청하
이타 행위 또한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과학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법이죠. 05-31
일병 정영목
김현진 님// '이타적이었다'고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이기심의 충실한 발현이라는 것. 적극 동의합니다. 한 예로, '애구ㄱ심'이라는 이타적(?) 행위를 외치는 사람일수록, 무서운 이기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네요.
김청하 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계에서 적지 않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랄까. '극단적으로 환원주의적인' 시각을 밀어붙이면 그 쪽으로 결론이 나곤 하더군요.
인간의 '이타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책으로 프란스 드 발의 '내안의 유인원'을 재밌게 읽었습니다. 생각난 김에, 인상 깊었던 부분을 발췌해 올려야겠네요. 05-31
병장 김청하
음, 두번째 리플은 조금 논점이 다른 얘기였습니다. 부모들도 사실 자기 좋아서 낳고 키우는거 아니냐, 테레사 수녀도 사실 자기 좋아서 그러는거 아니냐, 그 과정에서 쾌락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 모든 동물 모든 식물 심지어 돌맹이마저도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죠. '모든 이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라는 말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은 신의 섭리이다'와 비슷한 수준의 명제라는 거구요. 06-01
상병 김현진
정신분석에 대해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고 비판하는 것이 옳냐고 묻고 싶군요. 비록 그 객관적 타당성을 갖기 위해 정신분석이 자연과학적 연구방법을 도입하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정신분석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과학'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도 한계는 인정을 하고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 정신분석은 자연과학이라기 보다는 인문학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이를테면 철학처럼. 과학이 아니라고 해서 정신분석학이 폄하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쪽 방면으로는 읽은 게 많지 않으니 변호는 여기까지.
" 모든 '행동'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라는 하나의 명제에 대해 "모든 것은 신의 섭리이다" 이상의 무언가를 찾고 있어 보입니다. 한 발 나아가 이기적인 측면을 감추려고 의도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측면에서 그 배경에 뭐가 있는지를 찾고 좀 더 납득할 만한 형태로의 설명을 시도하는 거죠.(이 과정에서 다양한 주장들이 쏟아져 나올 겁니다.) 뭐 이런 식. 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