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벽, 그 너머에 있는 것 , 병장 김형진
 

62비행전대 시절에 올렸던 글입니다.



'에반게리온 현상'이라고 할만큼 뜨거웠던 열풍이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토록 열광시켰을까- 
매스미디어들의 발빠른, 그러나 얄팍한 관심 또한 이 질문에 집중됩니다. 
과학과 종교, 철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방대한 스케일과 무수한 함의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독자적인 우월성을 과시하는 듯한 극한의 완성도. 
그러나 에바 현상의 핵심은 정작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호한 메시지에 있습니다. 

안노 히데아키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작품 속에 제작스텝과 영화 관람객들의 실제 모습을 넣어가면서까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바로 인간인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벽'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사도'라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공격해 옵니다. 
인간들의 반격은 사도 주위에 펼쳐진 A.T Field에 의해 무력화됩니다. 
SF 애니메이션에서 '보호막'이라는 설정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미사일을 퉁겨내고 적의 접근을 막는 배리어(barrier)는 작가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숱한 첨단 무기들에 비하면 오히려 고전적입니다. 
그런데, 에바 월드(eva world)의 A.T Field는 그러한 물리적인 방어막의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드러납니다. 
작가는 그것을 '모든 개개의 인간 마음속에 있는 벽'이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A.T Field 또한 물리적인 형태로 드러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그것과 똑같은, 사도라는 존재를 인간이라는 외부의 존재와 구분해주는 '벽'이었던 것입니다.   


주인공 신지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마음의 벽이 있습니다. 
모성의 부재, 부성의 절대적인 결핍은 그에게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단단한 벽을 쌓게 하였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 자신이 쌓아올린 벽이고, 또한 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타인들의 벽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도망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에바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늘 미안하다고 말하고, 늘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그 벽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신지만의 '특별한' 고통은 아닙니다. 
모든 개인과 개인- 겐도와 유이, 미사토와 카지, 리츠코와 겐도, 신지와 아스카 사이에 그 벽은 고통스럽게 존재합니다. 
벽을 극복하려는 저마다의 방법은 역설적으로 벽의 절대적인 존재와 그것으로 인한 피할수 없는 고통스러움을 드러내 줍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끝내 고통스럽습니다. 
그 고통스러움은 쓸쓸함의 다른 모습입니다. 네, 모든 인간은 쓸쓸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극복할 수 없는 원죄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자이기 때문에 쓸쓸한 것일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쓸쓸함은 우리가 혼자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가 '여럿'이라는 것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나' 말고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에서 '그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가 태어납니다. 
이해받고 싶은데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나'는 '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수많은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의 수만큼 상처받습니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관계는 존재하는 '벽'을 넘어서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들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러한 시도는 표면적으로 만들어지는 관계의 모습과 상관없이 서로의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깁니다. 
사도나 에바의 A.T Field가 단지 상대의 공격을 방어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적을 파괴하는 가공할 무기로 쓰이는 설정 뒤에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입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드러내려는 감독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애초 '하나'가 아닌 존재들에게 '하나'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욕구는 
스스로를 향하는 날카로운 비수일지 모릅니다. 

에바 시리즈의 컨트롤이 파일럿과 기체(機體) 사이의 씽크로율(率)에 좌우된다는 설정 역시 
서로에게 이해받고 싶어하고,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강박관념을 암시합니다. 
에바 시리즈의 두 번째 파일럿- 쎄컨드 칠드런(second children) 아스카는 그러한 
극단적인 강박관념에 시달리다 마침내 자아를 상실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지요. 
그녀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 그 상처야말로 현실의 우리가 친구에게서, 부모에게서, 자식에게서, 
모든 타인에게서 받는 그 상처일 것입니다. 
그리고 애써 그 상처를 외면하며, '덜 상처받는' 기술을 몸에 익혀가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원죄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레(seele)가 추구하는 '인류보완계획'이란 바로 모든 인간의 마음에서 벽을 걷어내는 일, 
그럼으로써 하나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이 필요 없는, 그러한 노력에 수반되는 고통이 없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인간을 만들려는 프로젝트입니다. 
작품 속에서 인류보완계획은 '불완전한 군체(群體)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종(種)을 
한차원 높은 단체(單體) 상태의 존재로 변화시키는 일'로 묘사됩니다. 
제레는 인간의 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근원적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또 다른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신지의 아버지 겐도에게 인류보완계획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에게 이 프로젝트는 죽은 아내 유이를 만날 수 있는 길-  
철저히 개인적인 꿈을 실현하는 방법에 다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의 존재가 된다면 
그가 지고지순하게 사랑했던 여자 역시 그와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모든 '나'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나'와 '그'의 구분이 없는 세계의 탄생, 모두가 죽고, 그로써 진정한 '하나'가 태어난다는 예언- 
그것이야말로 <신세기 에반겔리온>이 전하는 복음의(evangelic)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세계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개체로서의 모든 인간은 그 마음 속의 A.T Field가 사라지는 순간 완전한 하나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에바 초호기 속에서 신지는 인류라는 종의 존재 형태를 결정할 선택을 하게 됩니다. 

타인으로부터의 고통이 없는, 타인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과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받으며,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서로의 벽을 두드려야 하는 세상. 

결국, 신지는 모든 개인의 A.T Field를 되살리는 후자의 고통스러운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 힘든 선택을 할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미사토입니다. 
상사로, 누나로, 그리고 연인으로 늘 신지의 곁에 있어준 유일한 사람- 
미사토는 절망의 바닥에서 '차라리 모두 죽어버리면 좋겠어'라고 중얼거리는 신지에게, 
타인으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그 상처를 감싸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일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쓰는 덧없는 노력이 그러나 결코 덧없지 않다고 말해줍니다. 
벽을 없앨 수 없다고 해서 벽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책하는 신지에게 네가 하는 모든 일이 그것만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의 의지를 잃고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깊은 나락을 경험했던 미사토라는 한 인간을 
그의 삶 동안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해준 믿음이기도 합니다. 
죽음 직전에 신지의 입술에 남긴 미사토의 마지막 키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결코 무의미하지만은 않다는 그녀의 진실한 메시지- 에반게리온의 복음과 상반되는, 
그리고 아마도 안노 히데아키가 세상의 모든 오타쿠들에게, 모든 인간들에게 전하려한 진짜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결국 인류는 '보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은 오늘도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고, 쓸쓸해하는 개체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고통받지 않는 관계를, 삶을 꿈꿉니다. 
인간인 우리가 결코 초월할 수 없는 마음의 벽 저 너머를 바라봅니다. 
마침내 인정하기 싫은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현실의 삶으로 돌아온 아스카처럼 한마디 내뱉고 싶어집니다.   

      "기분 나빠...."



* 병장 구태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1-0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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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병 김승연 (2005-12-04 22:53:48)  
 
타인이 주는 상처도, 사랑도
타인의 관심에서 얻어지는 것이겠지요.

모두가 하나가 되어 타인이 없다면
결국 관심을 받을 일도 없고 외로울겁니다.

그 군체는 또다른 누군가가 (외계인이 되었건 누가 되었건)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지 않을까요?

무관심이 가장 괴로울 것 같습니다.
저도 차라리 고통을 택하렵니다.  
 
 
 
 병장 박대열 (2005-12-05 10:41:51)  
 
세기말 오타쿠 신화와 현대일본 을 보고 느낀점이지만
하나의 애니메이션에 그런 의미를 담는것이 대단한 것 같아요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병장 이준영 (2005-12-05 21:27:13)  
 
에반게리온에 대한 글들은 정말 많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표현한 글은 또 처음이네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들이 인식보다 앞서서 뚫고 들어온 기분.
잘 읽었습니다. 에바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글이네요.

나와 타인을 가르는 기준, 그에 대한 고찰.  
 
 
 
 병장 김대현 (2005-12-06 14:55:22)  
 
한때 에바에 관한 텍스트 자료들은 모조리 뜯어먹고 살 정도로 광팬이었습니다.
그리고 AT-field라는 건 제 머릿속에 번듯한 개념어로, 고유명사로 남아있게 됐습니다.
학교에서 레폿 쓸 때도 어이없이 AT-field란 말이 튀어나와 당황스럽다니까요 [웃음]

확실히 에반게리온은 웬만한 철학서도 따를 수 없는 '관계'에 대한 통찰이 깃들어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추천하나 드리겠습니다. 정말, 와방 잘쓰셨군요.

덧붙여, 왕년의 팬으로서 도저히 밀려오는 영감을 참을 수 없어 저도 조악한 사족 하나.

제 눈은 아직도 붉은 고리가 걸려 있는 달을 바라봅니다. 아직도 저는 AT-field가 붕괴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에서 (인류의 기원으로 그려진) 아담과 이브는 신지와 레이가 아닌, 신지와 아스카였습니다.
(TV판 1편과 극장판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와 아스카의 붕대 감은 모습이 서로 똑같죠.)
제가 꿈꾸는 사랑은, 제가 꿈꾸는 AT-field의 붕괴는, 레이의 그것이 아니라 아스카의 그것입니다.
손댈 수 없는 영원을 닮은 레이는 그녀의 푸른 머리카락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그녀의 붉은 눈만큼 공허합니다.
구질구질하고 "기분나쁘고" 성격 더러운 아스카이지만, 내가, 또 우리가 진정 사랑해야 할 쪽은 레이가 아니라 아스카이겠죠.
그쪽이, 그렇게 "기분나쁜" 쪽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5-12-07 08:00:32)  
 
이 글. 62전대 시절 마음에 들어서 따로 갈무리해뒀던 그 글이군요(웃음)

아아.. 앞으로 만날 사람은 미사토 같은 현명함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