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은식 월드컵 관전법 
 
 
 
 
  4년 전, 제 동생뻘 되는 중학생 두 명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들은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의 오빠의 표정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세상을 등진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농민은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축이기 위해 농약을 마셨고 어느 대기업 아래에서 일하던 누군가는 높은 곳에서 목을 매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울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웃었습니다. 미친바람에 휩싸여 유례없던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싸우다가 지쳐 아예 자리에 드러누웠던 도시빈민들은 짐짝처럼 끌려 나갔고, 철거된 그들의 터전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위풍당당한 경기장이 들어섰습니다. 우리를 지배하시는 언론에서는 연일 신축된 경기장의 미적 성취를 찬양하기 바빴습니다.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라에서 ‘세계 속의 한국’으로 우뚝 서기 위해 큰일을 하시는데, 그깟 작은 일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겠지요. 큰 것을 취하고 작은 것은 버리라는 옛말이 있으니까요.  

  ‘피버노바’를 생산하는 개도국의 어린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저임금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우리는 ‘피버노바’와 함께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을 달리고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별들과, 그 별들을 후원하는 대기업들에 주목했습니다. 못사는 남의 나라의 어린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실태 따위보다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태극전사들이 강대국을 무찌르고 4강에 진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으니까요.

  제 친구들은 제게 글을 요구했습니다. 팻말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가자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가뜩이나 축제 문화도 없는 나라에 사는 이 땅의 고달픈 민중들이 한바탕 거하게 난장을 벌이는 것을 굳이 문제 삼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던 이 땅의 민중들이 축구를 통해서나마 강대국들을 격파하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제가 비겁하게 뒤로 물러선 이유는 어여쁜 여자 학우들과 한데 어우러져 난장판에 뛰어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꽃다운 이십대 젊음의 한 페이지에 다시 못 올 절호의 축제를 만났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도 하지만, 유희적 동물이기도 하니까요.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과 언론들마저도 ‘자랑스러운 우리 겨레의 기상’ 어쩌고 하며 거나하게 취해 있을 때에도, 박노자 선생 같이 국가주의의 미친바람을 지적하는 진짜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진보를 자처하던 이들마저도 박노자 선생은 원래 우리 민족이 아니라서 우리 민족의 한을 이해하지 못해 헛소리를 한 것이라며 한때 떠받들던 그를 깎아내렸습니다. 저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비록 비겁한 놈이기는 하지만, 그따위 소리나 함께 지껄이며 희희낙락할 만큼 그렇게까지 타락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때 저는 아주 중대한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 것인가. 한국 팀이 예상 외로 놀라운 성적을 거두어 제가 좋아하는 잉글랜드 팀과 맞붙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잉글랜드 팀은 외계인의 초능력 같은 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친한 영국인 형과 함께 타는 속에 맥주를 들이부었습니다.

  4년이 흘렀고 저는 다시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 것인가. 한국이 속해있는 조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팀은 토고 팀입니다. 토고 팀의 공격의 핵이라는 아데바요르는 어느 인터뷰에서 토고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프랑스를 꼭 이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순수한 운동 경기여야 할 축구 경기를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어차피 국가대표 사이의 경기에서 국가를 제외하고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지배를 그 어느 나라보다 잘 알고 있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아데바요르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일본 팀과의 경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필승의 결의를 다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일입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에 프랑스 정부가 수여한 훈장을 원래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에게 수여하던 것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던 지단은 제가 참 좋아하는 선수이지만, 잘생긴 앙리와 화려한 골잡이 트레제게도 괜찮지만, 토고 팀과 프랑스 팀의 경기에서 저는 토고 팀을 응원할 것입니다. 

  토고 팀과 스위스 팀의 경기에서도 토고 팀을 응원할 것입니다. 토고는 살림살이가 괜찮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축구는 거의 종교와도 같다고 합니다. 특별한 놀이거리가 없는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리에서 축구를 즐기고, 축구선수가 되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별이 되는 것을 유일한 삶의 희망으로 생각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스위스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나라입니다. 부자나라에서는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토고 팀과의 경기에서 패한 것을 분하게 여겨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면 큰일입니다. 하지만 월드컵 예선에서 패했을 때 얻는 아픔은 토고 민중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토고 팀을 응원할 것입니다.

  프랑스와 스위스는 다 잘사는 나라들입니다. 누가 이기건 저는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위스 팀보다는 프랑스 팀이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랑스 팀과 스위스 팀의 경기에서 프랑스 팀을 응원할 것입니다. 

  한국 팀은 괜찮은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지성, 이영표, 이천수, 박주영, 이을용 같은 훌륭한 선수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팀과 프랑스 팀의 경기에서, 그리고 한국 팀과 스위스 팀의 경기에서 한국 팀을 응원할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 팀과 토고 팀의 경기입니다. 저는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 것인가. 한국보다 훨씬 못사는 토고 민중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라도, 축구를 거의 종교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토고 민중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서라도, 축구 외에는 이렇다 할 희망이 없을지도 모를 토고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토고 팀이 이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이 땅의 민중들도 삶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고된 업무에 지친 동료들과, 나아가 이 땅의 민중들과 더불어 크게 웃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팀과 토고 팀의 경기에서 한국 팀을 응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토고 팀의 선수들도 훌륭한 경기를 펼쳐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설령 토고 팀이 한국 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돈에 돈 축제가 곧 다시 시작됩니다. 다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우리의 이목도 오로지 그 돈 축제에만 집중될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시는 언론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실 것이고, 화려한 축제의 이면으로 우리가 정말 보아야 할 것들은 가려질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월드컵을 꿈꾸어 보지만,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아무튼 축제 기간 동안이나마 우리 모두 크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축제의 이면을 보는 것에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축제가 끝난 뒤에도 만국의 민중들이 크게 웃을 수 있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크게 웃을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크게 웃을 일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웃는 일보다 우는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병장 김동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7-11 0749) 

  
 
 
 
일병 변화수 (20060608 140841)

4년 전 월드컵 때 북한의 도발에 의해 아까운 우리 군인명도 여러명 희생되었지요. 
이번 이지스함에서 그 이름이 다시 부활한다고 하니 최고의 이지스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병장 김태훈 (20060608 142617)

서해교전 중 숨져간 장병들이야말로 이 나라를 지킨 훌륭한 영웅들입니다. 
그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것입니다. 얼마나 죽기 싫었을까요 
또한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그들에게 얼마만큼 관심을 주었나요 
제 스스로도 부끄럽습니다. 굶어죽어가는 다른 나라 어린이도 소중하지만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의 희생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미군장갑차에 깔린 여중생만 중요하고 대한민국 군인의 목슴은 중요하지 않은건가요 
그 군인들을 위해 누구하나 그 흔한 촛불한번 안들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병장 마성은 (20060608 143237)

김태훈  굶어죽어가는 다른 나라 어린이와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과 미군장갑차에 깔린 여중생의 목슴은 '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더 중요한 생명은 없습니다.    
 
 
일병 변화수 (20060608 145443)

생명에도 순위가 있습니다. 1순위가 자기 생명, 2순위가 사랑하는 생명, 3순위부터는 자기에게 
가까운 순위입니다. 
일부 운동하는 분들은 미군장갑차에 깔린 여중생의 목숨으로 그 많은 시위를 했지만 서해 교전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위해 꽃 한송이 바치는 것을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인도네시아 지진으로 몇천명이 죽고 또 죽어가고 있지만 지금 여기서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뉴스로 보고는 슬쩍 '안됐다' 생각하고 말 뿐이지. 정말 가슴 아파하며 
당장 가서 도와줘야 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보통사람은 남의 생명 수천보다는 자신의 생명 하나가 더 소중한 법입니다.    
 
 
상병 안대섭 (20060608 151100)

인종에도 순위가 있습니다. 1순위가 갓 블레스드 순수혈통 아리안, 2순위가 라틴 한량 떨거지들, 3순위가 아프리카 야생 니그로들, 4순위가 어글리 에이시안 옐로 멍키. 
어떤 분들은 아우슈비츠가 어쩌고 하면서 인종에 속하지도 않는 유태인들의 망령을 언급하지만, 얼마나 많은 돌격대원이 서부전선에서 목숨을 잃었습니까. 슬라브 민족 나부랭이들이 대전 동안 한 3천만명 죽었다지만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지 누가 정말 가슴아파 하겠습니까.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남의 생명 수천보다는 자신의 생명 하나가 더 소중한 법입니다.    
 
 
일병 변화수 (20060608 151938)

사실을 부정하고 비꼬아도 소용없습니다. 
대섭님도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수천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 보다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가 더 슬프고 눈물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대섭님이 대부분의 보통사람과 다르다면 할 말 없지만. 
전쟁에서도 당연히 적군 수천, 수만이 죽은 것 보다는 내 옆의 전우 한명 죽은 것이 
더 슬플 겝니다.    
 
 
 병장 박진우 (20060608 153137)

길지 않은 인생. 남의 슬픔에 동조할 여유는 없다. 
라거나...    
 
 
병장 마성은 (20060608 153819)

변화수  누군가의 죽음이 자신의 피부에 얼마나 와 닿느냐에 따라 슬픔의 깊이는 다를 수 있겠지만, 생명에 순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수천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 그 땅에 살던 누군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함께 가슴 아파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 땅에 살던 누군가의 부모님은 나의 부모님 만큼이나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상병 안대섭 (20060608 154016)

비꼬기는요. 이왕 감각적으로 목숨값을 매길꺼면 나치스처럼 범국가 내지 민족적으로 아예 공시'명'가를 책정해 주는것도 참 괜찮지 않나 싶었을 뿐입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08 154059)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다.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분리되었을때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어제 본 책에 나오는 구절인데 성은님의 글을 보니까 생각났어요. 
성은님의 월드컵 관전법은 잘 알겠습니다. 부디 즐거운 월드컵 되시길.    
 
 
일병 변화수 (20060608 155503)

바로 그 피부에 와 닿는 슬픔의 깊이가 순위 입니다. 순위가 높을 수록 피부에 와 닿는 슬픔의 깊이가 
수위가 높아지겠지요. 
냉정한 표현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만약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지라도 인도네시아의 그 사람들이 
지금처럼, 자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처럼 슬퍼해 주진 않을 것 같습니다.    
 
 
병장 이유석 (20060608 155930)

사람모이는 곳에 돈이 모이지 않겠습니까..    
 
 
병장 김태훈 (20060608 170231)

마성은 전 누구의 목숨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거냐고 물어본거죠. 
깔려죽은 여중생과 총탄과 불길속에서 숨진 병사들 간에 목숨의 귀천은 없는데 왜 후자는 묻혀진건지.. 
아까 말씀드린 그 흔한 촛불하나 나오지 않은것인지 전 그게 궁금하단겁니다.    
 
 
상병 박진욱 (20060608 180648)

마르크스 이래 지겹게 내려온 착취와 억압의 사슬로 보는 시각을, 마치 자신의 것인냥 가로채기 하면 곤란하지요. 영국인 친구 이름이 엥겔스던가요    
 
 
상병 안대섭 (20060608 195514)

애꿎은 부모님들 그만 돌아가시게 하는게 좋을것 같은게, 변화수 일병님이 설명하셔야 할 부분은 얼마나 슬픈가가 아니라 '슬픔이 어째서 죽음의 가치와 연결되느냐' 하는 것 아닐까요. 지금까지 하신 말씀으로는 '값나가는 죽음에는 더 많은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더 많이 슬프면 값나가는 죽음이다.' 정도의 정보 밖에는 얻을 수가 없군요. 

일단 죽음과 슬픔의 상관관계에 대한 제 소견을 밝히자면, 어떤 죽음이든 인간이 자신의 '피부'로 느끼기엔 너무나 강렬하기에 애초에 어떤 관계도 정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계속해서 예로 드셨는데, 이는 단순한 정보량의 차이에서 기인한 현상일 뿐이라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전한 대한민국 모처에 앉아 TV 뉴스 꼭지와 숫자 통계로 접한 죽음을 가지고 '피부'로 느꼈다고 주장하지는 않으시겠죠. 

2차 세계대전간 미군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독일군을 죽이게 되는 동기'에 대해 '원칙적으로는 반대', '전쟁이니 어쩔 수 없어서'라는 답변이 70% 이상을 차지했고, '증오심 때문에', '전우에 대한 복수심으로' 등의 답변은 극히 미미했었죠. 
죽음 앞에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사람들도 너, 나 할것없이 '그냥 인간' 이었던겁니다.    
 
 
상병 정준엽 (20060608 202857)

성은님우리가 맥심을 즐기듯 월드컵도 그렇게 즐길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살아갑시다. 

유석님사람 모이는 곳에 돈.. 이 아니라. 돈 있는 곳에 돈이 모입니다. 

진욱님마르크스 이래 지겹게 내려온 시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지겹기는 자본주의가 더하죠. 

태훈님 
순국한 병사들은 '위대하신' 국가가 나서서 슬퍼해 주었습니다. 순국한 그들에게는 화려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슬퍼하고, 북한에 대하여 재발 방지를 촉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의를 불태웠었죠. 

그런데, 깔려죽은 여중생에 대한 소식은 우리의 '위대하신' 국가는 철저하게 “침묵”했습니다. 국가는 이와 같은 사태를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동생의 죽음은 국민이 나서서 슬퍼했습니다. ‘위대한’ 국가가 화려한 장례식과 훈장을 병사들에게 주었다면, 국민이 줄 것은 눈물과 촛불뿐이었습니다.    
 
 
일병 변화수 (20060609 064845)

가치라. 저는 생명의 순위에 대해서 얘기 했죠. 자신이 몸으로 느끼는 생명의 순위. 
대섭님도 자신이 몸으로 느끼는 생명의 순위에 대해서는 저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다른 사람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생명이 그 사람에게는 1순위일테고, 저에게는 제 생명이 1순위. 
그건 대섭님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대섭님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요. 
'생명은 다 소중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생명은 다 소중한 겁니다. 
저는 누구의 생명은 중요하고 누구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1인칭인 자신이 느끼는 생명의 중요성의 순위에 대해 얘기했지요. 

예를 드신것에서 독일군에게는 독일군 자신의 생명이 1순위 일테고, 미군에게는 미군 자신의 
생명이 1순위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독일군을 죽이는 것일테고. 만약 어느 미군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적군인 독일군의 생명의 순위가 높다면 자신은 독일군을 죽이지 않고 자신이 죽는 방법을 
택하겠지요.    
 
 
 병장 김동환 (20060609 080620)

가치를 판단할때는 외부적 요인의 개입이 필연적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오죠.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는데 난산이라 아이를 출산하면 산모는 죽습니다. 아이를 포기하면 산모가 살수 있고요. 그런데 이 부부들이 공식적으로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의 카톨릭 신자들입니다. 아버지가 고민하다가 친하게 지내는 랍비에게 조언을 청하자 랍비는 단숨에 산모를 살리라고 조언합니다. 아버지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고 몇년 뒤 그 부부들은 순조롭게 새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얘기. 
아무런 외부적 요인이 없다면야 생명은 동등하고 소중한 것이겠지만 이런 생명의 가치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는 거의. 얄밉게도 외부적 요인이 항상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예외없이 개인의 영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싸우실 일들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각자의 길을 걸어가면 되는 
그런 류의 화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병장 김태훈 (20060609 091011)

병장 김태훈 (20060609 085220) 

정준엽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중생 사건에 정부는 미군에 국내법을 적용하겠다는 말도안되는 강경책을 내놓았지만, 서해교전 장병들이 산화한 것에 대해선 북 쪽에 그 어떤 강경발언을 한 적 없습니다. 선전포고는 아니더라도 강력한 유감 또는 원조 중단 같은 정책을 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뱀다리 - 생명 우선 순위에 대해 짧은 저의 견해... 아무리 부모형제 가족이라도 자기목숨보다 소중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제가 죽으면 이 세상도 끝입니다.(물론 세상은 잘 돌아가겠지만) 
어차피 모두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아닙니까    
 
 
상병 안대섭 (20060609 092249)

객관적으로 동등하니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객관적으로 느껴라, 라는게 아닙니다. 동환님이 언급하신 낙태의 경우 굳이 산모의 목숨까지 가지 않더라도, 다른 이유(산모가 강간 피해자라거나, 미혼모라거나 기타 아이를 낳음으로써 고통을 받는) 때문에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 판단에 대해서는 동환님 말씀대로 조용히 각자의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아니, 철저하게 개인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화수님이 계속해서 '나'를 언급하심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하게 생명의 항목에 숫자를 매기고 순위를 정하며 동의를 구하는 '발화하는 행위 자체'가 전혀 개인적이지 못하다는거죠. 
정말 개개인이 느끼는 가치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셨다면 1순위 나 자신, 2순위 누구 3순위 누구 하는 도식을 제시하시지 않으셨을겁니다. 화수님의 가치는 개개인의 것이라기 보다 '국가'나 '민족'의 것이라 보입니다. 

물론 그런 가치,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공공연하게 언급하는 것은 분명 지적 가능한 사항이라 생각되는군요.    
 
 
병장 김강록 (20060609 102806)

애꿎은 이하의 대섭님 덧글이 심히 마음을 사로잡는군요.    
 
 
병장 마성은 (20060609 122828)

박진욱  제 친구에게까지 지대한 관심을 가져 주시니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 친구의 이름은 웨인입니다. 웨인 루니. 
오늘날 자비를 말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시각을 마치 자신의 것인냥 가로챈 사람들이고,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시각을 마치 자신의 것인냥 가로챈 사람들이었군요. 못된 사람들 같으니라고. 박진욱 님의 높은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병장 김동환 (20060609 124852)

대섭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저 위에 마성은님이 남긴 '생명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계속 이견을 양산해내는 것을 보고 한 얘긴데.(땀) 
저의 기본적인 입장은 왈가왈부 한다고해서 바람직한 결론으로 귀착되는 문제가 아니므로 
각자 조용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 좋겠다는 것이나 굳이 밝히자면 '생명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중요할수는 없다'는 요지입니다. 환경의 차이가 있고, 개인차가 있다는 거지요. 

화수님의 발화자체는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단적인 예로 저는 화수님과 똑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거든요. 대섭님도 그렇고 성은님도 그렇죠. 화수님이 말씀하시는 '순위' 역시 화수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의 차이는 화수님이 대섭님이나 성은님보다는 말씀하신 것처럼 '국가'나 '민족'의(딱 들어맞는 예는 아닌것 같습니다만) 영향을 좀더 받고 있는것으로 보인다는 것. 그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대섭님의 발화자체도 정당하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제가 댓글을 쓴 이유는 우선 누구의 발화가 적절한지, 부적절한지를 지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이건 누구의 의견으로 낙찰될 수 있는게 아닌만큼 동어반복하면서 의견교환이 거칠어지는 
것을 막고 싶었고, 두번째로 당연히 모든 생명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성은님의 의견에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때가 훨씬 더 많아요'라고 오른 손을 들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병장 양영후 (20060609 144929)

유후~ 재미있는데 나도 한마디 하고 싶지만 근무인관계로...    
 
 
일병 변화수 (20060609 150852)

대섭님 처음에 비꼬는 게 아니라더니 애초부터 제가 말하는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로군요.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다고 하실것이지.(웃음)    
 
 
상병 안대섭 (20060610 205939)

동환  물론 개인의 어떤 죽음은 다른 죽음과 구별되고, 분류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문제를 제기하게된 계기는 화수님이 죽음을 서열화하는 '방식'입니다. 자신의 목숨으로부터 시작되서 가족, 여타 사회 단위로 나아가는 -앞에서 국가와 민족이라는 좀 거친 표현을 썼었지만 이쪽이 조금 더 적절하겠군요- '확장된 이기주의'는 인간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죽음의 본질과의 관계는 커녕 죽음에 시선조차 주지도 않은 '아전인수'가 아니냐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군요. 

물론 우리가 '생 날것'의 죽음을 그대로 대면한체, 모든 죽음에 일일이 반응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시선이 간섭받고 왜곡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시하며 행동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경과야 어찌됐든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존재로써의 주체를 얘기한것은 '말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의 철회를 위해서였지, 인간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명석하게 판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화수님이 독일군에 대한 미군의 태도에서 사살하느냐, 자신이 죽느냐의 이지선다만을 발견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개인차를 수용하는 길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미군 설문조사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아니 오히려 전쟁터에서- '~에 불구하고', '~임에도'로 표현되는 일말의 고민과 망설임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앞에서 '쿨'한건 제가 아는한 역사적으로도 매우 제한적이군요. 

변화수 일병님  화수님은 제가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 비난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원래 가릴건 가리고 대화하는게 에티켓 아니겠습니까. 저 스스로도 아무도 제가 화수님의 발언이 쏙 맘에 들었다고는 생각지는 않을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답니다.    
 
 
병장 강규언 (20060615 135109)

'...승리한 군인에게 수여하던 것이라는 이유로 [반색]을 표했던 지단...' 

반색 
【명사】【~하다자동사】 바라고 기다리던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 몹시 반가워함. 또는 그런 기색. 

성은님은 그런 훈장에 난색을 표해야 좋아하실 것 같은데.. 아닌가요 
이미 한참 지난 글이지만 그냥 눈에 띄여서.. 답글이 달릴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병장 마성은 (20060616 104528)

강규언  [난색]으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