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권의 종언, 그리고 그 부활을 위한 제언 , 게슴츠레>

1.

얼마 전, 정확히는 9월 6일에 방송된 <개그 콘서트> 10주년 특집에서는 현재 활동 중인 캐릭터들과 왕년에 인기를 끌었던 캐릭터들을 반반 섞는 식으로 인기 코너 [봉숭아 학당]을 꾸몄다. 그 중 눈에 띄었던 것이 개그맨 박성호의 이른바 '권' 캐릭터였다. 흰 와이셔츠에 빨간 머리띠를 이마에 묶고 "선생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대관절~ [회마다 달라지는 주제의 내용]굽쇼? 그렇다면 [앞서의 내용을 억압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내용]한단 말씀이십니까! 정부는 [앞서의 내용을 수정하라는 요구]하라! 하라!"라는 추억의 유행어를 외치는 이 캐릭터를 보면서 나는 이 캐릭터가 나오던 당시 대학가에 있던 '실제 스포츠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떠올려 보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운동권의 종언'이라는 것은 바로 '현재'나 다가올 '미래'가 아닌, 이미 그 때 '과거'에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로 확인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 말이다.



2.

내가 말하고자 하는 '스포츠권의 종언'이란 단순히 (구체적 정치적 성향을 떠나 포괄적인 의미에서) 스포츠권에 몸담은 학생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지금 활동하고 있는 스포츠권은 물러터져서 '진정한 스포츠권'이 아니라는 그런 식의 이야기도 아니다. 또한 빡빡한 취업현실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시간을 희생해 보다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전개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죄다 '잘난 체'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 '종언'이랑 학교 안팎에서 스포츠권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상징적 힘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상황을 말한다.

앞서 개콘의 '스포츠권' 캐릭터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이러한 것이다. 그 캐릭터에서 중요한 것은 개그맨 박성호씨가 스포츠권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심리적 측면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캐릭터가 등장한 의도가 어떠하든 우리가 그것을 보고 '웃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개콘의 그 캐릭터는 선생님이 들고 나오는건 말이 되든 말이 안되든 무조건 '까고 보는' 캐릭터이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X민주주의, 공X주의 등 실질적인 '정치적 내용'은 비워진 채로 과장된 어투와 몸동작, 그리고 '뭔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맨날 요구만한다(혹은 '떼만 쓴다)' 식의 일련의 '특징'으로 정의되는 이 '스포츠권'의 모습은 단지 개콘이라는 특수한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무언가가 '웃음거리'가 된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현실과 명백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개그 캐릭터 '스포츠권'과의 이 뒤늦은 만남은 솔직히 까놓고 말해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을 상기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그에 대해 기뻐하든 슬퍼하든 간에, 스포츠권이라는 이름은 정의의 상징이라기 보다는 개그의 소재가 되었음을, 대학생들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보다는 여타 동아리활동과도 딱히 구분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활동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극단적으로 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대자보와 팜플렛을 읽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구체적인 행동이나 정치적 논쟁, 독자의 주체성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얘는 이렇구나, 그럴 수 있지 뭐." 혹은 그래봤자 "흠, (나는 아니지만) 이런 애들도 있긴 있어야지'하는 지극히 수동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뿐이다. 1년에 한 번, 점심시간 몇 분을 희생해서 스포츠권에 투표할 수는 있지만, 스포츠권의 활동이란 결코 '나의 일'이나 '우리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인 것이다.



3.

하지만 이런 '스포츠권의 종언'의 원인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주장만을 강요'한 스포츠권 자신의 책임이라고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기에는 학교 바깥의 사회적 상황의 급격한 변화가 걸려있다. 다양한 정치 요구들이 억압하고 있는 사회에서 학생스포츠의 융성과, 그 억압되었던 정치 요구들이 정당이나 시민단체 등 보다 안정된 경로를 찾는 이후 학생스포츠의 쇠퇴는 단지 한국의 상황이 아니라 세계적 상황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중들의 입이 봉해졌을 때 학생들은 대신 그 입이 되어주었지만, 대중들 스스로가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학생들이 대리인 역할을 맡을 사회적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학교 밖의 변화는 학교 내에서도 반영되어 학생들을 묶어두었던 정치적 의무감, 부담감을 완화시키게 된다.

또한 이 시기, 정치적 공간에서의 학생스포츠의 당위성 약화와 맞물리게 된 대중문화의 확장과 97년 경제위기라는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대학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전적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대학은 이 시기 '대중정치의 요람'에서 '입시 걱정이나 벌이 걱정 없이 마음껏 청춘을 즐기는 놀이터'(입학 초기) 혹은 보다 좁아진 취업길을 뚫기 위한 준비를 하는 '취업학원'(보통 2~3학년 부터)으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90년대 어떤 규제도 없이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사립 대학들의 증가로 인해 대졸자들이 폭발적으로 양산된 것은 이런 경향을 가속화했다.

[물론 K대의 경우 이런 거시적인 사회경제적 변화 이외에도 전임 총장으로 부터 시작된 학교 운영에 있어 기업적 원칙(총장이 할 일은 기부 많이 받아오는 것이다, 라는 말에서 드러나는)의 적용이라는 문제 역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학교 운영에 있어서 '상업적 전환' 역시 학교 경영진들의 책임만으로 평가하기는 애매하다. 소위 명문대라는 상징적 위치가 그러한 전환을 요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경영진의 '학원화'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구조적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K대의 등록금 인상과 새 건물에 대한 열광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이렇듯 '스포츠권의 종언'은 그들이 '사람을 계몽하려는 듯 한 거만한 태도' 같은 심리적 요인이나 '대학 사회의 파편화'같은 추상적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요인들의 변화가 걸려있다. 대학도 사회에 속하는 이상, 사회가 변하면 그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 앞에서 '스포츠권은 아직 살아있다!'라고 아무리 외쳐봤자 그것은 주관적인 주장은 될 수 있으나, 사회적 사실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 통신사 광고나 <시크릿> 같은 자기 계발서들이 판매하는 환상과 달리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가지면 '생각대로'되는 마법의 세계가 아니라, 개인이나 집단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있는 '현실'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스포츠권의 종언'은 단순히 나 자신의 주의주장이 아니라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조건이다. 그러나 비권이 아닌 스포츠권이 총학생회로 당선되는 상황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주어질텐데, '그렇다면 왜 비권이 아니라 스포츠권 학생회가 당선되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스포츠권의 종언'이 꼭 스포츠권에 대한 극단적 혐오(와 동시에 비권에 대한 전적인 선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실 스포츠권과 비권, 학내 정치를 대하는 학생들의 표준적 태도는 매우 양가적이다. '스포츠권'을 보면서 '타인에 대한 존중없이 자기 입장만 강요한다'고 말하고, '비권'을 보면 '좀 생각 없어 보인다'라고 말한다. 이런 양가적 입장은 언표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일관성이 없는 모순적 태도지만, 그 말이 언표되는 위치의 측면에서 볼 때는 '그게 무엇이든 간 어쨌든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라는 식으로 항상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에서 일관성을 가진다. 학생들은 스포츠권이 총학이 되면 안된다라는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스포츠권이 되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는 소극적 태도를 견지한다. 여기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쏟는 것은 개인적인 '낭비'에 속한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스포츠권의 당선은 필연적이라기 보다는 우연적인 것에 속한다. '혐오'가 아닌 '무관심'이라는 상황은 스포츠권의 종언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보다 끔찍한 것인데, '혐오'의 경우 사라지는 것이 단지 '긍정적 관계'라면 '무관심'의 경우에는 '관계'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포츠권'과 그 이름이 표방하던 어떤 대의가 '죽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스포츠를 '살리는' 것이다. 물리적 현실 뿐 아니라 상징적 현실에서도 '낙장불입'이 통용된다. 컴퓨터 게임처럼 아무일 없다는 듯 '리셋'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크게 두가지가 있을 수 있다. 스포츠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에 기뻐하던가 슬퍼하던가 분노하던가 어쨌든 개인적인 애도를 표방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고, 스포츠권의 '부활'이라는 기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다른 한 가지 방법이다. '부활'이란 죽음의 부인이 아닌 죽임의 인정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스포츠권의 부활은 이전의 스포츠권을 그대로 고집하는 것(죽음의 부인)도, 주변의 상황을 기회주의적으로 따라가는 것(죽음에의 굴복)과도 다른 과정이 되어야 한다.



5. 


보다 구체적으로 내가 스포츠의 부활을 위해 제언하고 싶은 것은 대학 내 멤버쉽, 일종의 '시민권'을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종언 이전 스포츠 권에 의해 운영되던 학생회는 특별한 제도적 장치가 없이도 분파적 차이는 있지만 어떤 최소한의 '대의'를 중심으로 소속감과 정체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를 가능케 했던 데에는 앞서 간략히 말했던 것처럼 한국 사회의 특정한 정치적, 사회경제적, 상징적 조건이 큰 역할을 차지했다. 하지만 87년 6월을 기점으로 전반적인 정세는 역전되었다(혹은 그런 것으로 경험되었다). 따라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스포츠권을 자신들의 상징적 대표성으로 행사하는데, 또 그런 상징에 의해 지탱되던 총학생회에의 소속감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지게 되었다. 스포츠권을 지키려는 입장에서 학생들의 무관심에 대해 얼마든지 불평을 퍼부울 수도, 그에 좌절하지 않고 용감하게 아직도 대의를 통한 소속감을 호소해 볼 수 있겠지만 이는 현재의 사태를 돌파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현재의 교착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공적 공간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그 최소한의 공적 공간의 구심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바로 '학생회'이다. 비록 참여율과 소속감, 학교 당국에의 발언권 등에 있어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지만, 학생회는 어찌되었든 전 학생의 표결에 의해 그 대표성을 대외적으로 인정받고 또 그에 해당하는 예산을 분배받는 대학 내의 제도적 자치 기구다. 이 기구를 기반으로 우리는 학우들의 소속감을 (더 이상 기능하기 힘들어진) '대외적 스포츠'의 차원 뿐만 아니라 '자율적 제도'의 차원에서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학생회 스스로를 '(학교 밖) 권리의 요구자'로 주장하는 데는 익숙하나, '(학교 내) 권리의 책임자'로 생각하는데 매우 서툴다. 하지만 학생회가 학외 스포츠에서 활용하는 발언력의 근거가 사실 학내 유권자들의 표와 그들이 지불하는 학생회 기금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학교 밖) 권리의 요구자'의 역할은 '(학교 내) 권리의 책임자'의 역할과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후자만이 강조될 경우 학생회는 단순히 단순히 학생들의 '조합'이나 심할 경우 '동사무소'로 전락할 위험이 있지만, 전자만이 강조될 경우 학생회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 자체를 침식하는 모순적 상황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스포츠의 종언을 딛고 부활을 꿈꾸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학생회에 게 있어 '권리'라는 개념의 양면적 성격과 양자 사이의 긴장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 하에서, 더 이상 '스포츠의 대의'가 작동하지 않게 된 현재의 정세적 조건에서 학생회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당연히 '권리'의 다른 면인 '제도적 장치'의 보충이다. 만약 종언의 사태에서 스포츠권 자신들의 책임이라는게 있다면, '낡은 정치적 이념을 아직도 고수한다'는 데에서가 아니라 '학생스포츠는 영원하다'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조건을 역사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몰역사적 태도에서 찾아져야할 것이다. 만약 스포츠권이 학생 사회의 대표로서 자신의 정당성을 유지하고자 했다면 이런 상징적 조건의 변화로 비롯된 침식을 보강할 만한 제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안이함의 배경으로는 스포츠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또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반제도적인 성격들이 거론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는 다른 지면으로 생략하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학생회라는 것이 최소한의 대표성과 에산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학생회를 대외적 저항성이 아니라 학생으로서 시민권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것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학교 역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생활 공간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생존에 필요한 다양한 요구들이 상존한다. 자치활동을 할 공간을 얻지 못한 동아리나 소모임, 보다 전문적인 전공 수업이나 세미나를 진행하고 싶은 학부생, 알바에 바빠 공부할 시간이 없는 대학원생, 생활비에 고민하는 자취생 등등. 이런 '대학'이란 작은 사회에 특수한 필요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사회적 시민권을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차원에서 보장되는 기본적 시민권들의 맥락에서는 지나갈 수 밖에 없지만, 개인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권리들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식으로 학생회의 기반을 다져가는 것이다. 이런 '학생회 시민권'이라는 제도적 장치는 국가나 학교 행정기구에의 저항권을 침식하자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주의만 따른다면 오히려 이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착된 학생회를 통해서 '스포츠권'이 등장한다면 아마 그 스포츠권은 과거의 귀환이 아니지만 나름의 상징적 위력과 긍정성을 가진 그런 스포츠권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제도적 장치를 갖춘 학생회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스포츠'의 양태들에 관해 이야기해볼 수 있다. 내가 가설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학생회를 통과한 조직적 차원에서의 등록금 납부 거부 운동이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장 아쉬운 것이 상징적 지지가 아니라 결국 돈이라면, 그 돈줄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학생들의 자율적 집단의 차원에서 다룸으로써 안정적인 교섭권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물론 납부 거부 운동은 지금까지도 있었지만, 개인의 결단을 촉구하는 '호소'에 불과했지 이런 제도적 차원에서 시도되지는 않았다. 비슷하지만 좀 더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전교생 몇 학기 단체 휴학하기 등이 있겠다. 6학기 이내라면 학교는 개인의 휴학을 금지할 어떤 법적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2) 또한 학내 시민권의 차원이 일단 확립된다면, 이를 학내 시설 노동자나 비정규직 강사, 외국인 학생들로 확장시키는 식의 운동이 가능할 것이다. '학교'가 단지 일회용노동력, 고급 소비자로 간주해왔던 이들을 엄연한 권리와 목소리를 가진 정치적 주체로 정식화하는 것이다. 이런 적극적인 조치들이 따른다면 '제도적 멤버쉽'의 정초는 스포츠의 '양보'가 아니라 스포츠의 '급진화'로 이어질 수 있다.)



  6. 

K대의 경우 이러한 '제도의 멤버쉽'은 주로 비권에 의하여 접근되어 왔다 .그러면서 스포츠권 내에서 이런 '제도의 멤버쉽'은 유권자이자 납세자인 학생들이 누려야할 '사회권'의 측면이 아니라 단순히 학생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복지' 식으로 프레임화 된 측면이 있다. (실제적으로 비권의 정책이 그러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선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비권의 행보에 대한 그런 인식이 존재했고, 또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권과의 경쟁심리 때문인지 "아, 그거. 복지? 뭐 중요는 하지.. 하지만 학생회란 말야.." 정도의 태도가 스포츠권이 '제도적 멤버쉽'을 대하는 주요한 경향이 되었고 이는 스포츠권으로 하여금 결국 구조적 조건에 의해 초래된 '스포츠의 멤버쉽'의 약화를 더 많은 '스포츠의 멤버쉽'을 강변하는 것으로 메꾸려는 악순환적 전략을 채택하게 하였다. 다소 격하게 비유하자면 독에는 구멍이 뚫린지 오랜데 물이 빠지는 속도보다 빨리 물을 집어 넣고 보자는 식으로 물을 채운 것이다. 그러는 사이 구멍은 커지고 물이 빠지는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다. 오늘 날 학생들이 학생회 뿐 아니라 학교 자체를 그저 '지나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학벌주의 역시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되는 집단적 정체성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나에게 도움이 되면 취하고 안되면 버리는 식으로 실용적으로 활용되는 스펙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학생들이 이렇게 교활해지는 것에도 정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회인'이 아닌 '학생'의 입장에서 주어지는 온갖 문제들을 '홀로' 해결할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나 학교 당국은 물론이거니와, 학생회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사회로의 진입 문턱에 서 있다 할 시기에서 이런 홀로서기만을 경험한 개인에게 '문제의 사회적 해결'이란 정말 낯선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제안들이 기만적인 것, 새빨간 거짓말로나 느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진보적 실천을 도모하는 이들은 이런 결정적 시기의 좋은 기회를 놓쳐버려서는 안된다. 게다가 이 기회에 우리는 기존 스포츠 세력의 지분을 나눠받는 것이 아니라, 최종 책임자로서 '스포츠'에 임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스포츠권에 있어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제도적 멤버쉽의 정식화는 단순히 전략적 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 요청이 된다. 또한 스포츠권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이 홀로 사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 이들, 집단적 결정을 통해 개인의 문제가 보다 더 잘 해결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도 그러하다.


상병 정택민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 다만, 가설로 제시하신 

2) 또한 학내 시민권의 차원이 일단 확립된다면, 이를 학내 시설 노동자나 비정규직 강사, 외국인 학생들로 확장시키는 식의 운동이 가능할 것이다. '학교'가 단지 일회용노동력, 고급 소비자로 간주해왔던 이들을 엄연한 권리와 목소리를 가진 정치적 주체로 정식화하는 것이다. 이런 적극적인 조치들이 따른다면 '제도적 멤버쉽'의 정초는 스포츠의 '양보'가 아니라 스포츠의 '급진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부분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학내 시설 노동자의 경우 행정직, 사무직 정규 노동자가 아닌 청소 및 관리직 비정규 노동자 분들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행정, 사무직의 경우 실장, 부장 급만 되어도 연봉 5000이 훌쩍 넘어가고 보험이나 여타 복지 혜택이 전부 보장되니까요) 실제로 그들은 학교에서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용역업체에 고용되어 있는 분들이라 학내 투쟁에 휘말릴 경우 용역 업체에서 바로 해고되어 버리죠. 고단하지만 조금이나마 벌어보자고 일을 하시는 분들 입장에선 그런 위함부담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고요. 실제로 k대 사범대에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과 연대-투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시도는 좋았으나 반응이나 결과가 뜨뜨미지근 했었어요. 그 후로는 그러한 투쟁을 본 적이 없구요. 비정규직 강사 부분에서도 의식적으로나마 동의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으실 것으로 생각되옵니다만, 현실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투쟁을 감행하실 분들이 계실까요. 그들도 언젠간 철옹성 집단-'정'교수사회로 뛰어들고 싶어하는 워너비들일 텐데요. 

1번 가설 부분에서도 '이루어 지면 정말 좋겠지만'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문제는 등록금 문제에 대해 전혀 '의식'이 없는 학생들도 상당수 된다는 것이죠. 그 정도 돈 내고 말지. 부모님이 서포트 해줄 수 있으니까. 빨리빨리 졸업하고 좋은 직장 취직하면 훗날 내가 보상할 수 있으니까. 감당 가능하니까. 등록금에 불만이 없는 학생들도 꽤 많이 봤단 이야기에요. 개인적인 생각으론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천명만 의식과 목표가 있는 집단 휴학을 해보아도 괜찮겠다 라는 생각이지만, 실제로 훨씬 더 간단한 총학생회장 투표만 해도 미진한 수준인데(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습니다) 천명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어쨌거나 자신을 희생해야(휴학)하고 드러내야 하니까요. 학교에서 투쟁휴학생 명단이라도 적어간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발을 빼는 학생들을 탓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병장 김예찬 
  택민님이 지적하시는 부분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회'가 중요해지는 것인데, 학생회가 학생 자치 기구로 사실상 무력하기 때문에 시설노동자 분들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기'하는 것 만으로도 일단 효과가 있긴 하지만(일례로 07년도까지 하청 시설노동자 분들은 최저임금도 못받았는데, 학생들의 문제제기로 최저임금은 받게 되었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학생회가 학교 측에 시설관리자들의 정직원 전환을 요구할 수 있어야겠지요. 이 것은 학생회의 힘이 얼마나 세 질 수 있느냐, 에 달린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 강사 문제는 또 최근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부분인데, K대 같은 경우는 이번에 70명이 넘는 분이 해고되었죠. 그만큼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데, 정보 부족으로 학내에서 정확히 어떤 대처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후문 1인 시위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역시 학생회가 학내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더 확보할 수 있다면, 더욱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이 역시 이 글에서 주장하는대로 '제도의 멤버쉽'이 성공을 거둔다면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겠지요. 


병장 윤정기 
  요즘 예찬님의 '화두'는 확실히 저 같은 '비스포츠권' 학생들, ㅡ 부모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대학 등록금 내며, 적당히 알바를 하고, 적당히 공부를 하고 살아가지만, 정작, 대학생이라는 주체의 '스포츠'에 대한 '실천'에 대해서는 머뭇거리던 ㅡ 을 선동하기에 충분한 것이군요. 흐흐. K대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전무하지만, 제 학교의 상황(이건, 사실 저희학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만, 저희쪽은 좀 심각한 편이죠.)에 비해봤을때, '학생회'라는 기구가 변화해가야할 필요성은 절실히 요구되는 것 같네요. 어쨋든 대학이라는 공간 내에서는 '참여'에 그 모든 토대를 담보당할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학생회의 역할을 위해서는, 학생회라는 집단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계획들과, 그것을 학생들에게 '각인'시켜, 학생들로 하여금 그 권리를 찾게 하기 위한 '홍보(?)'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실, 여러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택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개인에게로의 일종의 '피해의식'이 형성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의 필요성이 요구된다는 것이고(사실, 이것은 학교측과 미리 그 내용을 합의해야만 하겠지만), 예찬님이 덧붙이셨듯 학교내에서의 학생회의 권위 즉, '발언권'의 확대가 요구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회를 이끌 사람들의 ㅡ 그것이 마치 어떤 '히어로'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ㅡ 확고한 신념에 의해서만 좌우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저 또한,(벌써 이러면 곤란하지만) 저희 학교의 상황에 대하여 결코 좌시하지 않을, 그리고 모두의 연대를 위한, '행동을 위한 신념(행동화 신념?)'을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아요. 


상병 장동욱 
  스포츠권의 몰락은 제 나름대로 생각한 적이 있는데 결국은 
연대 사태, 라고 할 만한 그것이 결정타를 찍은 셈이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한총련 등으로 대표되는 스포츠권 대표 세력이 
민중들과 유리된 것에 있겠지요. 이전에는 대학생이라 하면 
쉽게 되는 '지위'가 아니었지요. 한 동네에 한명 대학에 가면 마을잔치가 
벌어지기도 하는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지식인으로써 대학생의 
지위가 있었지요. 대학생들이 말하는 것이 '권위'를 가질수 있던 시절이었죠.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의 의미던지... 
하지만 대학 가는 것이 '쉬워'지기 시작하면서 그 권위는 상실되기 시작했고,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들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며 '대표'를 자처하며 움직이던 
스포츠권 대학생들은 민중들과 유리될수 밖에 없었죠.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어느 정도의 민주화,는 성취했다 생각하는 386세대들의 관심사는 경제 문제로 
옮겨가는 와중이었는데 그것을 캐치하는데는 둔감했던 것에 따른 실패였죠. 
저 철조망 윗동네 관련 문제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죠.(그것 역시 오랜 시간과 
경제적 발전, 등에 따라 흐릿해져 가는 문제중 하나였죠.) 

결국은 하나죠. 속칭 '스포츠권'의 실패는, 대다수 민중을 떠난 스포츠는 존재할수 없음을 보여준 것. 부활이라, 이제 부활이라기 보다는 다른 것이 나와야 할 때이지요. 딱히 누군가를 대상으로 '스포츠권'이 되어라 하는것 보다는 모두가 '스포츠권'의 정신을 가질수 있고, 제가 술만 먹으면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개인들의 조금씩은 다른 생각들이 모여 '거대한 여론'이 되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와야겠지요. 스포츠권이라, 이제는 묻어주어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너무도 흐름이 답답하여 누군가 대표되어 길을 열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지만, 글쎄요, 이제 몰라서 안하는 시대는 아니니까요.(그렇다고 보기엔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모두가 함께 움직여야죠. 예전 스포츠권이 그랬듯이 '거부감'을 주는 오류를 피하면서, 모두 함께 하는 방향으로, 급한 마음으로 나서는 것은 유리됨을 자처할 뿐이라 생각이 됩니다. 조금은 두려워서요. 


상병 정택민 
  예찬님이 말씀하신 '학생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은, 결국 스포츠권의 의식을 가지고 학생 복지에 집중할 수 있는 학생회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윗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비스포츠권의 슬로건인 학생복지에 스포츠권들이 자존심을 굽히고 동참할지 의문이네요. 스포츠권은 보통 대학생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주장하는데요, 그들의 의견에는 동감하지만 k대의 예를 들자면, 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의 이름을 걸고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지는 정말로 의문입니다. 의견에 동의를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학생회의 역할을 벗어났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러한 마인드적 문제가 이상적인 학생회의 첫 번째 걸림돌이라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학생들의 유권의식과 공약관심을 들 수 있는데요. 이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할 순 없겠지만 범대학생적으로 공약알기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김원종씨(김디지)가 주장했던 운동(이름이 생각이 안나네요. 아시는 분 꼭 써주시길)인데, 유권자 모두가 출마자 하나하나의 공약을 꼼꼼이 체크하고 실현가능한 것인지 따져보자는 취지의 운동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먼저 선행되어야 자연스레 유권의식이 생긴다고 봅니다. 물론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지만 적어도 현실정치보단 대학 내의 학생회 선거가 한결 쉬울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적어도 공약에서 구체적인 액수나 이행사항을 제시하기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예를들어 고려대학교 고대공감대 선본에서는 몇 십개의 주변 상호 이름을 대며 '청춘'이란 멤버쉽 카드를 만들어 할인 및 적립을 받아내겠다.라는 공약을 이행한 바 있습니다.)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김원종씨가 주장했던 운동은 매니페스토manifesto 운동입니다. 후보자의 공약이나 약력 등을 유권자가 꼼꼼이 따져보고 판단하여 선거에 임하자는 취지의 운동이죠. 

상병 민해기 
  시사점이 꽤 많군요. 
학생회의 부활을 '시민권'의 개념으로부터 출발시켜야 한다라...... 
어쩌면 정치의 부활이 '투표권'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겠네요. 
하지만 결론이 허해보이고, 결국은 학생사회내에서의 '시민권'개념이 이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군요. 
  

병장 이기범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을 고민해보게 되네요.. 저도 그런 상상을 하곤 했었는데,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한꺼번에 휴학을 해버리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택민// 
학생복지는 더 이상 비권들의 주장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스포츠권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부분 생각하고 공약을 내세우고 있거든요, 요즘은. 그리고 택민씨의 말대로 총학생회의 이름을 걸고 사회적 행동에 나설 때, 그것에 동의하지 못하고 의문이나 거부감을 가지는 학생들을 설득하는 일이 가장 어려울 것 같아요. 아, 순서가 잘못되었군요. 먼저 학우들에게 문제에 대한 실상을 자세히 알리고 그것에 동의를 구한 뒤 행동에 나서야 하는게 맞는거겠죠. 학생회의 역할을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학생들의 대표로서 이것이 학생들의 의견이다- 정도의 목소리는 낼 수 있다고 보거든요. 예전에는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만으로 '학생회의 의견이 곧 학생들의 의견이다!' 라는 대표성(?) 같은 것을 누릴 수 있었지만, 요즘은 아닌 것 같아요. 본문에서 나와있는 대로 반발은 반발대로 일어나거나, 그런 일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 하거든요. 


병장 김태완 
  두려움과 귀찮음에서 나오는 무관심이죠. 학생회에서 하자 연례 과 행사도 하기 싫어하고 귀찮아 하는 판에 대의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찬님의 1)번은 왠지 먼 산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무언가라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사립같은 경우는 등록금 문제가 만만치 않으니까요. 학생회 연대가 이끌어 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많은 학생들도 따를 가능성이 있고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병 송단아 
  "스포츠의 종언을 딛고 부활을 꿈꾸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학생회에 게 있어 '권리'라는 개념의 양면적 성격과 양자 사이의 긴장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다." 
별 다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