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지민씨의 글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글에 대한 답변은 아닙니다. 저는 개고기 문제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어떤 분위기를 비판하고자 이 글을 썼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민씨의 글과 의견, 혹은 개고기 문제에 대한 찬/반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이 글에 대해 대부분의 책마을 주민들, 그리고 저와 개인적으로 친한 몇몇 분들이 전혀 공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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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고기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가 브릿지 머시깽이의 태도보다 덜 어리석거나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장은 "문화는 다 상대적이고 다양한데, 그 다양성을 알지 못하는 브릿지 머시깽이야 말로 야만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이 말해주는 바가 대체 무엇입니까? 지구상의 문화가 다양한 것은 분명한 <사실> 입니다. 말 그대로 여러 개의 문화가 있으니까요.그러나 그것으로부터 그 문화들이 모두 동등하다는 <가치판단> 이 따라나올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지금 당장 우리가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동등하다는 판단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동등하다는 판단 역시 우열관계에 대한 판단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 기호는 "<" 와 ">" 기호와 같은 종류, 같은 맥락 안의 기호입니다.)

  우리는 관찰 대상이 다양하다는 사실로부터 그들이 모두 동등하다는 가치판단으로 아주 쉽게 빠져듭니다. 무언가가 많아지기 시작하면, 그것들 사이에 우열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따라서 우리는 그 많은 것들을 단지 <표> 로 만들어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표의 각 칸들은 모두 같은 크기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동등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동등함은 우리의 접근방법으로부터 비롯한 것이지 대상의 진정한 속성으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동등한 <방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양한 것들의 동등함은 단지 그러한 방식으로부터  비롯했을 뿐입니다.

저는 프랑스의 문화가 한국 문화보다 더 우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람인 제가 어찌 그렇게 믿고 싶어하겠습니까? 아니 그보다는, 한국문화와 프랑스문화 모두에 무지한 제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등하다" 라는 판단 역시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 라는 판단처럼 하나의 적극적인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것이 더 우월한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러한 우열관계가 정말로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개고기를 먹은 적은 없지만, 기회가 되면 언제라도 먹어보고 싶습니다. 즉, 저 자신이 프랑스인들의 가치나 문화에 동의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브릿지 머시기의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은 그들의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았는지 말입니다. 왜 그렇게 개고기 먹는 문화에 반대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본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는 단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놈들 하여간 미쳤다' 라는 식으로만 받아드리고 넘깁니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 아닙니까? 
우리가 브릿지 바도르보다 나은 점이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엥똘레랑스에 대한 똘레랑스는 필요없다." 는 말이야말로 제국주의의 모토였으며 현재 미국의 침략 모토임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타인에게 관용을 배풀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또 어딨습니까? 그런 말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관용을 배푸는 사람에게만 관용을 배푸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딨겠습니까?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할 줄 압니다. 관용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었을 때, 그리고 우리에게 관용을 배풀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을 때에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들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있었는지 깨닫기 위해 '관용' 이라는 말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배척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관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타자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없이 '다양성을 인정하라' 라는 모토를 남발하는 것은 정말로 공허한 일일 뿐이며, 또 하나의 독선과 오만일 뿐입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그들의 가치판단 기준을 알 수 있고, 그런 과정에서 그들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조금씩이나마 더 알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절대적 결론을 이끌어 내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노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또 해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덮어놓고 '어차피 다 각기 다르니깐 끝' 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저는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왜곡되고 오해되어 있음을 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모든 <지적 게으름>에 대한 근사한 핑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자각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 라는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이 다양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장으로부터 우리의 주장과 입장을 맹목적으로 보호하는데에 그것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 다르다, 문화란 다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해라" 등등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굉장히 계몽되어있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가장 비겁하고, 피상적이며, 독선보다도 오히려 오만한 것일 따름입니다. 도그마를 주장하는 사람은 주변의 반응으로부터 자신이 독선적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상대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독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불안감조차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그들이 모두 동등하다는 가치판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들이 동등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방식, 즉 그것들을 하나 하나의 항목으로서 수집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입니다. 브릿지 바도르를 비판하려면, 그가 몸담고 있는 가치기준을 면밀히 파악해보는 것이 우선이며 유일하게 정당한 방법입니다. 단지 다양성에 호소하는 것은 브릿지 만큼이나 유치한 태도에 불과 할 뿐입니다. 
개고기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유치한 태도가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편만해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음을 <지식인이라는 표징> 으로 여기며 서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차라리 유치원생들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자신이 그다지 지적으로 자랑스러운 존재가 아님은 알고 있을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