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 (?) 
 병장 이승일 04-24 19:33 | HIT : 470 



 이 글은 김지민씨의 글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글에 대한 답변은 아닙니다. 저는 개고기 문제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어떤 분위기를 비판하고자 이 글을 썼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민씨의 글과 의견, 혹은 개고기 문제에 대한 찬/반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이 글에 대해 대부분의 책마을 주민들, 그리고 저와 개인적으로 친한 몇몇 분들이 전혀 공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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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개고기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가 브릿지 머시깽이의 태도보다 덜 어리석거나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장은 "문화는 다 상대적이고 다양한데, 그 다양성을 알지 못하는 브릿지 머시깽이야 말로 야만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이 말해주는 바가 대체 무엇입니까? 지구상의 문화가 다양한 것은 분명한 <사실> 입니다. 말 그대로 여러 개의 문화가 있으니까요.그러나 그것으로부터 그 문화들이 모두 동등하다는 <가치판단> 이 따라나올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지금 당장 우리가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동등하다는 판단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동등하다는 판단 역시 우열관계에 대한 판단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 기호는 "<" 와 ">" 기호와 같은 종류, 같은 맥락 안의 기호입니다.)

 우리는 관찰 대상이 다양하다는 사실로부터 그들이 모두 동등하다는 가치판단으로 아주 쉽게 빠져듭니다. 무언가가 많아지기 시작하면, 그것들 사이에 우열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따라서 우리는 그 많은 것들을 단지 <표> 로 만들어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표의 각 칸들은 모두 같은 크기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동등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동등함은 우리의 접근방법으로부터 비롯한 것이지 대상의 진정한 속성으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동등한 <방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양한 것들의 동등함은 단지 그러한 방식으로부터  비롯했을 뿐입니다.

 저는 프랑스의 문화가 한국 문화보다 더 우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람인 제가 어찌 그렇게 믿고 싶어하겠습니까? 아니 그보다는, 한국문화와 프랑스문화 모두에 무지한 제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등하다" 라는 판단 역시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 라는 판단처럼 하나의 적극적인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것이 더 우월한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러한 우열관계가 정말로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개고기를 먹은 적은 없지만, 기회가 되면 언제라도 먹어보고 싶습니다. 즉, 저 자신이 프랑스인들의 가치나 문화에 동의하고 있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브릿지 머시기의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은 그들의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았는지 말입니다. 왜 그렇게 개고기 먹는 문화에 반대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본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는 단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놈들 하여간 미쳤다' 라는 식으로만 받아드리고 넘깁니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 아닙니까? 
 우리가 브릿지 바도르보다 나은 점이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엥똘레랑스에 대한 똘레랑스는 필요없다." 는 말이야말로 제국주의의 모토였으며 현재 미국의 침략 모토임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타인에게 관용을 배풀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쉬운 것이 또 어딨습니까? 그런 말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관용을 배푸는 사람에게만 관용을 배푸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딨겠습니까?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할 줄 압니다. 관용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었을 때, 그리고 우리에게 관용을 배풀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을 때에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들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있었는지 깨닫기 위해 '관용' 이라는 말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배척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관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타자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없이 '다양성을 인정하라' 라는 모토를 남발하는 것은 정말로 공허한 일일 뿐이며, 또 하나의 독선과 오만일 뿐입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그들의 가치판단 기준을 알 수 있고, 그런 과정에서 그들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조금씩이나마 더 알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절대적 결론을 이끌어 내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노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고, 또 해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덮어놓고 '어차피 다 각기 다르니깐 끝' 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저는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왜곡되고 오해되어 있음을 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모든 <지적 게으름>에 대한 근사한 핑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자각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 라는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이 다양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장으로부터 우리의 주장과 입장을 맹목적으로 보호하는데에 그것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의견이 다 다르다, 문화란 다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해라" 등등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굉장히 계몽되어있고, 진보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가장 비겁하고, 피상적이며, 독선보다도 오히려 오만한 것일 따름입니다. 도그마를 주장하는 사람은 주변의 반응으로부터 자신이 독선적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상대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독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불안감조차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그들이 모두 동등하다는 가치판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들이 동등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방식, 즉 그것들을 하나 하나의 항목으로서 수집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입니다. 브릿지 바도르를 비판하려면, 그가 몸담고 있는 가치기준을 면밀히 파악해보는 것이 우선이며 유일하게 정당한 방법입니다. 단지 다양성에 호소하는 것은 브릿지 만큼이나 유치한 태도에 불과 할 뿐입니다. 
 개고기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유치한 태도가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편만해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음을 <지식인이라는 표징> 으로 여기며 서로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저는 차라리 유치원생들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자신이 그다지 지적으로 자랑스러운 존재가 아님은 알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상병 최영일 
 브리짓드 바르도,, 04-24   

 병장 이승일 
 걍 브릿지 머시깽이 ..... (.....) 04-24 * 

 상병 정현철 
 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04-25   

 일병 황인준 
 그러고 보면 제 자신도 그저 "다양성 다양성" 하면서도 한번도 거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군요. 그저 주위에서 돌아다니는 소리를 듣고 그랬을 뿐. 다양성에 대해서 한 번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04-25   

 병장 김지민 
 글 전체적인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정당방위라는 측면에서 브리짓 바르도 보다는 우리가 훨 낫다고 생각해요. 개인과 개인의 교류에 있어서도 아집을 부리는 자를 포용하는 것은 성현이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집단과 집단의 교류에 있어서 아집을 포용하려면 얼마나 큰 가슴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따라서 승일님의 취지가 이상적이고 올바르기는 하나, 저는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황새 다리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브리짓 머시깽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지언정 저는 포용 보다 정당방위로 대처할 것임을 깨닫습니다. 

 아무튼 승일님의 견해는 놀랍기만 하군요. 어찌보면 당연한데도 말이죠. 04-25   

 병장 진규언 
 아.. 반성중입니다. (...) 잘 읽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저렇게 적어보다가..(승일님 글에 대한 반박이라기 보담, 이걸 읽고 깨달은 바를 적다가.. 결국 동일한 말의 반복인것 같아서 날렸습니다.) 

" 엥똘레랑스에 대하여 엥똘레랑스를 보여라"가, 제국의 논리임을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가지게 된 생각이 섬뜩하기까지 하네요. 진정으로 내가 속한 집단(국가든, 사회든, 소박한 현실공동체이든, 현 소속 집단이든..)이 '제국화'되는걸 바라고 있는건 아닌가.. 하고 반성해 보게 됩니다. 애초에 전 불관용적이다보니 불관용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불관용하는것 같아요..(풀썩..) 04-25   

 상병 나상빈 
 이승일님의 견해는 맞는것 같습니다. 정확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히틀러에게 까지 똘레랑스 를 해주어야 할까요? 노스코리아의 한 독재자가 그렇게 될수밖에 없었던것을 이해하고 그가 저질렀던 짓을 관용으로 감싸안기 전에 태어났을때부터 권총으로 쏴버리는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것은 저뿐입니까? 04-25   

 일병 구본성 
 똘레랑스의 의미가 단순히 상대주의적 맥락이었는지, 아닌지 부터 어질~ 하네요. 그리고 제국의 논리가 "엥똘레랑스*2" 였는지도 어질~ 하구요. 
 대략 똘레랑스와 상대주의, 똘레랑스와 계몽주의자인 볼테르 사이에 연관이 있다면 상대주의와 계몽주의에도 연관이 있는 것인가요? 둘은 거의 극을 달리하는 사상으로 지레 짐작하고 있는 전 혼란이 오네요. 그리고 "엥똘레랑스*2"의 경우 제국을 비판할때 사용하는 논리 아니던가요? 그것이 제국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는 저에겐 납득이 안가네요. 04-25   

 병장 김지민 
 이건 여담인데... 
 엥엥 똘똘 랑랑 거리는게 자꾸 머리에 부딫히네요. 자꾸만 개념으로 와닿지 않고 부서져요(땀) 04-25   

 상병 나상빈 
 이세상에서 자기가 진심으로 하는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자가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그것이 어떤것이든지에 대해서까지 관용을 가져야 한다는건 살인자던 강간범이건 우리는 완벽한 가치판단을 할수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것인지? 04-25   

 병장 김지민 
 상빈 /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좀 맥락이 다른 이야기 같은데요. 04-25   

 상병 나상빈 
 좀더 과격하게 물어본것일 뿐입니다. 브리짓 에 대해 가져야 하는 관용이 과연 올바른지에 대해서요. 그녀가 말한것에 대해 이해하고 어떤 근거나 사유로 나온 결론인지를 깨달았다고해서 과연 관용이라는것 자체를 해줘야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는지에 관한. 

 엥똘레랑스에 대한 엥똘레랑스가 어째서 나쁜것인지 에 관한거지요. 하긴 이것마저도 누군가의 가치판단일테고 그게 전부 탁탁 들어맞을리 없을테니 어처구니 없는 소리일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냥 이승일님에게 물어보는것일뿐이죠 뭐. 04-25   

 상병 신학수 
 이 문제에 대해서...그리고 그 전의 어떤 논의에 대해서 여기 다른 회원분과 쪽지를 나눠 보았습니다만...그 쪽지를 조금만 바꿔서 올려보겠습니다. 


// 예를 들어, 
 유치원생의 그림과 샤갈과 고흐의 그림이 있을 경우에, 
1. 샤갈과 고흐의 그림의 우열을 정하기 힘들다. 
2. 샤갈과 유치원생의 그림의 우열은 누구나 정할 수 있다. 
( 물론 유치원생이 초절정 천재인 경우 제외) 
 요런 맥락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이번의 똘레랑스 이야기 역시 그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아서요. 

 지민씨의 입장은 아마도 1번같은 논의일겁니다. 
 문화에 있어서 2번 같은 입장을 취할만한 것은 잘 없기도 할 뿐더러, 만약 있다손 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히 상식밖의 것이겠지요.(예를 들자면, 저같으면 죽어도 이해못할 식인풍속이라던가) 
 그러나 승일씨 글 같은 경우에는, 2번의 것은 극명한데, 어찌 1번의 두가지 작품에 있어서는 우열을 없단 말이냐. 이것은 우열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 부족으로 우열을 '정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우열을 정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정할 수 없는 것이지 우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다원주의는 자신의 노력부족과 의지부족의 표현밖에 안되는데, 심지어는 그것이 최근에는 지식인의 덕목처럼 느껴지기조차 한다...라는 것이...비판의 요지라고 느껴졌습니다. 

 책마을의 여러 논의 빠져들기 시작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뛰어들 것 같아서 참고 있습니다만...이런 논의들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모든 것에 가치는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동일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동일하지 못한 것이 어떤 계량화가 불가능하다면(유치원생과 샤갈 그림의 경우 수치로는 안나타나도 심적 계량화가 충분히 가능하고, 또 하고 있으니까요)그것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을 알 수 있을 때까지는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적게으름 때문에 기인한 어쩔 수 없음이긴 합니다만, 무력하게 동의해야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승일님의 글은...당위나 논리의 측면에서 지당하긴 하지만, 그 글이 진정한 똘레랑스의 의미를 담기 위해 필자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 너무 크다는 점에서 기대가 되기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해요.// 

 제 생각이 바른 건지는 모르지만. 04-25   

 병장 김지민 
 학수 / 우열이 있을 수 없다. 가 아니고 기준에 따라 우열이 다를 뿐이다가 맞을 것 같아요. 그리고 개고기의 경우에는 문화 전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국소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열평가가 의미도 없을 뿐더러 성립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사회 문화 시간에 배웠듯이 문화는 국소적인 문화 문화들의 합이 아니라 +알파까지 합쳐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만약 '음식 문화'라는 한정된 범위를 가지고 우열을 정한다면 그때는 역시 기준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들어주신 예에 대해서도 2번의 경우, 유치원과 샤갈의 그림의 우열을 누구나 정할 수 있다고 하셨지만, 그 수용자가 간난아기일 경우, 유치원생의 그림을 더 좋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기준점에 대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따라서 '기준점'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리고 브리짓 머시깽이의 말에 정당방위를 내세우는 것은 이런 기준점 자체를 무시하고 공격했기 때문이며, 우리의 기준점이 무너진 이상 상대방의 기준점 역시 무시하는 것이 저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승일님의 이 글에 대해서는 '그게 인간다움'이라고 역설하고 싶습니다. 04-25   

 병장 이승일 
 학수/ 
1. 샤갈과 고흐의 그림의 우열을 정하기 힘들다. 
2. 샤갈과 유치원생의 그림의 우열은 누구나 정할 수 있다. 
3. 샤갈과 유치원생 그림의 우열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 
 아무도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과 유사한 기준들은 소유할 수 있다. 

 저는 3번의 입장을 가지고 글을 썼습니다. 저는 3번이 진실에 가장 가깝고, 그러나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1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며, 그러다가 결국 2와 같은 사고방식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3번과 같은 태도 속에서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을 찾아가는' 동업자로서 화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견은 서로 다르고, 또 불완전하지만, 둘 다 완전한 기준의 한 부분을 소유하고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번처럼 생각하면 관용의 의미는 분명해 집니다. 누구도 절대적인 기준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관용이 필요한 것이지,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관용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 수 없는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결국 같은 것 아니냐고 물어보신다면, 이 세상에 그만큼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고 말하겠습니다. 
 또한 여전히 누군가의 의견은 절대적인 기준에 더 가까우며, 누군가의 의견은 더 멀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논의 불가능한 영역, 즉 말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며, 충분한 논의를 통해 진전을 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민 /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기 다른 유한성, 부족함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왜 생각할 수 없을까요? 백두산을 여러 사람들이 뺑 둘러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각자 보는 모습은 다 다를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모든 모습은 백두산이라는 실체의 한 부분들이며, 비록 다들 불완전하고 부분적이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것들입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은 시력이 더 좋고, 어떤 사람은 더 나쁠 수가 있습니다. 다양성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지, 실체의 다양함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민씨가 역설하신 '인간적임' 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것은 제 입장에서는 '불완전함' 과 거의 동의어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완전함에 대한 추구' 역시 인간의 한 측면이며, 인간적인 모습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상빈 / 예, 엥똘레랑스에 대한 엥똘레랑스는 최초의 엥똘레랑스와 동일하게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엥똘레랑스이니까요. 프랑스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엥똘레랑스에 대한 엥똘레랑스'로 간주할 수 없었을까요? 04-25 * 

 병장 강세희 
 승일 / 상대주의에 대한 절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시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저는 상대주의라는 것이 꼭 모든 것이 동등하다라는 적극적 판단을 수반한다고 생각되진 않거든요. 똘레랑스라는 개념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도라고 알고 있고요. 즉 똘레랑스라는 개념과 승일님이 말하시는 부분(절대적 기준이 존재한다)이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네요. 
 추가로 최초의 엥똘레랑스와 엥엥똘레랑스가 동일하게 나쁘다고 본다면 최초의 엥똘레랑스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지도 여쭈어 봅니다. 04-25   

 병장 이승일 
 세희 / 예, 저는 똘레랑스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똘레랑스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절대적 기준의 존재는 인정하되, 우리는 그것을 불완전하게밖에 알 수 없음을 받아드리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불완전함 때문에 똘레랑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엥똘레랑스를 극복하는 방법은 당연히 똘레랑스 아닐까요? 그냥 무조건 관용하자는게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보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게 소통이요 대화 아니겠습니까. 04-25 * 

 상병 나상빈 
 최초의 엥똘레랑스를 제대로 알아봐도 그것을 내가 받아들일수 없다면 지금까지는 극복하기위해 전쟁이 일어났었죠. 엥똘레랑스에대한 똘레랑스는 유토피아적 사고발상은 아닐까요?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예수가 아닌이상에야.. 
 설혹 하더라도 진심으로 하는사람이 없다면 그것또한 바람직하지 않은건 아닐까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발언에 대한 일본의 모든 입장을 이해하고 관용한다면 어떤일이 벌어질런지.. 엥똘레랑스에대한 똘레랑스는 강요되어야하는 선규범 일까요? 04-25   

 상병 김동호 
 자렛 다이아몬드를 읽어보니 보통 식견食犬문화는 다른 가축이나 영양원으로부터의 육류 섭취가 제한되는 사회에서 관찰된다고 하더군요. (e.g. 아즈텍 멕시코, 폴리네시아, 고대 중국. 뉴기니의 식인 풍습도 같은 맥락에서 짚고 넘어가던데.) 또 지나가면서 얼핏 본 기억이 나는데 빠리꼬뮌당시에도 굶주림에 지쳐 개를 잡아먹었다고 하던 것 같습니다... 홍세화씨였나? 여튼 전 개고기 안먹습니다만 지나가면서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봤습니다. 04-25   

 상병 신학수 
 승일// 어떤 가치의 우열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절대 공감합니다. 
 그것에 대한 지적게으름이 기형적인 똘레랑스를 낳는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노력으로 우열의 기준이 정해졌을 때, 그 기준이 맞는 것인지, 그 노력은 진정 옳은 방향으로 이뤄졌는지를 검증해야만 하는 노력이 또 필요한 것입니다. 
 그 노력의 당위에 대해 비공감하는 바는 아니지만, 역사에서 보듯이 그 노력의 결과물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과는 별도로, 절대적인 기준에 다가갔다고 여겨지는 사실에 대해 검증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힘들고 괴로운 과정이 될 것입니다. 

 지민// 절대적인 기준과 그것에 대한 우열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것이 비록 우리가 알 수 없다할지라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점이란, 어떤 절대성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람마다 그 기준점이 다르다 하는 것은 어떤 가치를 판단하는데 있어 그 측정기구를 적용하는 지점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측정되는 그 대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수용자가 간난아기일 경우, 그 차이를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그림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 그림들은 그 그림들의 가치나 심미성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판단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샤갈과 고흐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둘에게 어떤 자그마한 우열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못 볼 뿐이지요. 그것을 알 수 없을 바에야 인정하자는 것인데, 물론 노력없이 우열을 주장하는 사람들(그중에 어떤 이들은 진짜 覺者일수 있지만)보다는 그것이 낫겠지만, 노력을 수반한 우열의 가늠은 분명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첫째, 노력없는 판단이요, 둘째는 노력의 포기이며, 셋째는 노력 후의 것이 절대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직관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들이 본능인지, 많은 사람들은 첫번째나 두번째 단계에서 세상을 적당히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곤 하지요. 그게 편하거든요. 사고도 별로 안나고. 04-25   

 병장 이승일 
 학수 / 완전히 동감합니다. 학수씨의 생각과 제 생각 사이에서 전혀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어요.(...)아무튼 바로 그 '무한한 노력' , '괴로운 과정'이 똘레랑스이겠지요. (근데 제가 다녀본 어떤 나라보다도 덜 관용적인 프랑스의 언어로 이 단어가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내요.) 

 상빈/ 디스토피아적 발상보다야 유토피아적 발상이 낫겠지요. 올바른 가치기준 하에서 우리가 모두 무능력하고 부족하다고 판단될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올바른 기준이라면 우리 자신을 바꿔야지 가치기준을 바꿀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디스토피아보다 유토피아를 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에 가까이 가기위해 우리자신을 개선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또한 똘레랑스를 어떻게 '강요' 하겠습니까. 엥똘레랑스를 강요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입니다.(웃음) 04-25 * 

 병장 김청하 
 예전에 황진미 평론가가 달아놓은 영화 20자평이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허망 ... 이승일 짱 ... 04-29   

 상병 김재영 
 음.. 그럼 승일씨는 2005년 프랑스 이민자 소요사태를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이 사태와 최근 여주 이주노동자 '보호소'의 화재 사건과의 연관성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