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을 놓기 위해 촛불을 지키는 사람이고자 (상병 주영준/051207) 
 
 
 
 
들불을 놓기 위해 촛불을 지키는 사람이고자





-You cannot dismantle the house of master by the tools of master.

태어나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잡지-페미니스트 저널 'IF'의 01년 여름호였는지 가을호였는지-에서 본 수 많은 글 중 아직도 기억나는 유일한 문장이다. 우리는 주인의 도구를 가지고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 주인의 도구는 주인의 집을 건설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주인의 도구는 주인의 집을 파괴하거나, 우리의 집을 건설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우리의 집이 필요하다. 의식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요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집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의 도구로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도구가 필요하다.

넓은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집을 가지기를 원한다. 아니 가져야 한다. 이는 生의 유일한 명령이다. 물론 우리는 이중 권력을 구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넓은 세계는 결국, 하나뿐이다. 집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주인의 집을 파괴해야 한다. 어떤 러시아인-편의상 부하린이라고 하자-의 말대로, 우리는 양당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당이 권력을 잡으면 다른 당은 감옥에 가 있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는 주인의 집을 파괴해야 한다. 우리의 도구로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도구가 필요하다.

주인의 집 안에서 우리의 집을 구축하기 위하여, 주인의 집을 파괴하고 그 위에 우리의 집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도구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주인의 집으로 가득 찬 세계의 철물점에서 파는 것은 주인의 도구들 뿐이다. 사바세계에 가득찬 모순들이여. 그래서 어떤 미친 프랑스놈은-편의상 루이 Ats. 라고 해두자-가족들을 죽이고 자살해버렸다고 '언뜻' 들었다. 아니어도 상관 없다. 주인의 도구로 가득 찬 세계에서, 우리의 도구가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철학적 난민이 되어버린다. 집 없이 내쫓기는 무리들. 그리고 나는 아직 유목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기에 이런 우리의 현실과 미래에 낙관할 수가 없다. 근대를 벗어나지 못한, 어쩌면 근대에도 범접하지 못한 내게는 편한 집이 필요하다. 집을 지어야 한다. 하나뿐인 세계에.

답은 어쩌면 간단하다. 맨손으로 집을 쥐어뜯는 수 밖에. 양 손이 빨갛게 피로 물들 때까지. 추운 겨울에, 얼어붙은 피로 우리의 망치를 만드는 것이다. 파괴와 건설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말은 쉽고 아름답다. 행위는 녹록치 않으며 지난하다. 지난한 길을 걸어갈 자신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리를 책마을에서 마주쳤다.

물론이지만 이 곳, 책마을은 군 내 인트라넷 상의 동아리다. 인문/사회/독서의 범주를 아우르는 그런 동아리다. 군 내 인트라넷 상의 동아리이기 때문에 나는 김상희와도 강승민과도 한상원과도 승부를 낼 수 없고 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라고 어떤 남미인-편의상 마르코스라고 하자-이 확실하게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장을 해제당했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없다. 소통? 개뿔 쥐어짜서 여드름 만드는 소리 하지 말자.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소통을 고민하는 것은 빵도 못사먹는 판에 케이크의 보존술을 연구하려는 자세와 다르지 않다. 내가 여러분들과, 혹은 나 스스로와 벌여내는 싸움은 어디까지나 맨손으로 하는 유희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 구르며 익힌 격투술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총칼을 들고 싸워야 할 먼 훗날의 전장에서.

비록 사회과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언어들을 많이 빌려 온 얼개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식론의 문제일 뿐이다. 적당히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느꼈을 법한 그런.

그리고 밤새 내린 빗물에 젖어 푸르게 빛나는 들판에 불을 놓기를 꿈꾸면서, 나는 작은 촛불을 들고 있으렵니다. 바람은 휘몰아치고 폭우는 쏟아집니다. 들불을 꿈꾸며 나의 촛불을 들고 미친듯이 들판을 질주한다면, 운이 좋으면 미친듯한 놈이 될 것이고 운이 나쁘면 나쁜놈이 되어 나쁜놈에게 가해지는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운과 상관 없이 나의 촛불은 힘을 잃고 꺼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촛불을 품 속에 숨기고 나는 조용히 걸어가렵니다. 떨어뜨리게 될 글들은 나의 그런 보행의 기록입니다. 모두에게 적대적인 한 공간에서 질식하는 가련한 언어를 웅얼거리며 감히 소통하고자 하기도 합니다.





병장 김형진 (2005-12-07 17:20:58)  
기다렸습니다. 영준님 글도 잘 읽고 있지만 코멘트도 유심히 잘 보고 있어요.
사실 코멘트까지 유심히 보게끔 만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거든요. 자, 다른 세계를 보여주세요.  

병장 육이은 (2005-12-07 17:30:40)  
이웃사촌님!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일병 김동민 (2005-12-07 18:54:17)  
잔인하리만치 처절한 현실감각과,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과 같은 작지만 강철같은 의지.
님의 선언 조그맣게 새기면서 앞으로의 행보 주목하겠습니다.  

상병 김승연 (2005-12-07 21:31:00)  
자유를 잃고 헤메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서 깨어나길.
자신의 도구를 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나길.  

병장 김동환 (2005-12-08 09:01:16)  
특정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먹으면 그런 게임을 하곤 해요. 다들 말을 너무 잘해서
시끄럽다보니 고안한 게임인데.
'ㄱ'쓰지 말고 말하기. 'ㄱ'과 'ㄴ'쓰지말고 말하기.
'ㄷ'까지 가본적은 없습니다만 'ㄱ'과 'ㄴ'만으로도 깨닫습니다. 죄지은듯이 에둘러 말하는것이
얼마나 답답한지를. 
다들 왠만큼 언어적 감각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그렇게 스스로 채우는 족쇄가
게임이 되고 유희로써 작용하는 것이겠지요. 


끝으로 뭐 항상 하는 말이긴 합니다만 결코 매너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길.

기대하겠습니다-.(웃음)  

상병 김강록 (2005-12-08 09:56:31)  
과연, 프로메테우스의 후예는 불장난을 포기하지 않는 법.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father라 부르는 불장난을 한번 저질러봅시다.  

상병 김상희 (2005-12-08 13:12:38)  
읽고 한참 후에나 알았어요. 이게 [얼개]란 사실을.. 우리 스스로도 각자의 도구를 만들 힘이 있을꺼예요  

상병 엄보운 (2005-12-09 10:27:22)  
'행위는 녹록치 않으며 지난하다.', '적당히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영준님 글에 사로잡히듯 읽게 되는 건 바로 이러한 문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손가락을 치켜 세울 수 밖에 없군요. 경계에 선 당신에게 원츄를!  

상병 강승민 (2005-12-09 13:03:08)  
드디어 쓰셨군요. 

저의 우상 마돈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국의 여성이여 처녀성을 팔아 버리라고. 이용하라고. 그것도 아주 떳.떳.하게

우리도 불장난을 저지를 때가 올겁니다.  

상병 신효섭 (2005-12-10 04:36:34)  
신디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 이 갑자기 듣고 싶어집니다.
불장난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가 숨어있을 나의 도구가 장난감같이 툭, 
하고 내 던저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병장 한상원 (2005-12-10 12:53:28)  
마지막 문단이 너무 맘에 드는데요. 늘 스타일리쉬한 글,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웃음)  

상병 박형주 (2005-12-11 18:50:08)  
멋지네요.

전직이 궁금해질 정도로.  

병장 이정국 (2005-12-11 19:30:30)  
문장연습중 ?

대충 이런내용인가요?  

병장 안준호 (2005-12-11 20:00:01)  
왜 저는 이 글이 이해가 안될까요? 아아... 슬픈 현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