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보르헤스 
 병장 김광철 06-18 09:40 | HIT : 234 



< 들뢰즈와 보르헤스 혹은 차이의 철학에 관하여>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서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 밖에 없었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표상개념은 철학을 독살한다.

 「니체와 철학」 -질 들뢰즈-




 데리다와 푸코가 보르헤스의 소설들을 그들의 저작에서 직접 인용하며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단서로 사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기실 보르헤스의 소설들 중 상당수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암시하는 내용들로 가득차있다. 그렇다면 노마드의 철학자라 불리는 들뢰즈는 어떨 것인가? 몇 년간 충실한 철학사가의 모습으로 위장해온 들뢰즈가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내고 마치 유랑하는 음유시인처럼 1968년 <차이와 반복>을 들고 나와 자신만의 고유한 사유를 연주하였을 때, 그 선율은 가히 그동한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소한 철학의 초상을 보르헤스는 신들린 예언자처럼 20여년 전 그의 소설들 속에서 이미 그려내고 있었다.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하며 약대 털옷을 걸친 기이한 모습으로 믿기지 않는 메시아의 도래를 소리쳤던 세례 요한처럼, 보르헤스의 쉽게 이해하기 힘든 기상천외한 내용으로 가득찬 소설들은 곧 출현할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가르켜보이며 아우성친다. 이 글에서는 보르헤스의 두 편의 소설과 연관하여 들뢰즈의 사상을 일별해 보고자 한다.    


1. 억압당한 차이의 역사


 들뢰즈 철학의 기본 기획은 기존 철학들이 뿌리박고 있었던 개념 즉 동일성과 부정성을 비판하며 그에 환원되지 않는 차이의 영역,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차이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을 발견하고 오직 이 차이만이 근원적인 것이며, 기존의 개념적 도구들인 동일성, 유사성, 부정성 등등은 근본적인 것이 아닌 차이에서 기인하는 2차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의 반헤겔주의적 성격에서 연원한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모델을 들뢰즈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변증법의 핵심은 바로 부정성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이 의도한 방향이 내 앞에 대상을 세워(표상하여) 인지하는 지성을 넘어, 즉 표상하는 능력으로서의 지성을 대체하는 통일의 능력으로서 이성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이 점이 좀더 명확해진다.

 즉 헤겔은 주체와 대상의 대립을 자기의식이 스스로를 절대적인 것으로 확인해 나가는 절차로 이해하며, 대립자체를 주체자신의 내적계기, 곧 변증법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헤겔에게서 대립 혹은 차이라는 것은 오로지 변증법적 지양을 통한 합일의 '조건'이 될 뿐이다. 이성이 최종적인 완성적인 모습에 도달하려는 내적계기로서만 차이는 고려된다. 따라서 차이는 절대로 그 자체가 근본적인 것으로 고려되지 않으며 변증법에 의한 종합이라는 형식에 '부정적'으로 매개되는 방식으로만 의의를 지닌다. 

 들뢰즈는 차이를 부정적으로 매개하는 철학의 기원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들고 있다. 플라톤에게 현상세계의 개물들은 세계저편의 완벽하고 모범적인 이데아로부터 그 특성을 분유(分有) 받는 형식으로 존립한다. 따라서 그것들이 정초되는 방식은 이데아와의 '유사성'에 근거한다. 즉 개물들과 이데아의 관계는 원본과 복사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으며 각 개물들의 차이는 상위의 이데아와의 유사성에 부정적으로 종합되어 말살되어 버린다. 이데아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철학과 그의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사유는 이런 의미에서 분명히 변증적운동의 성격을 띄고 있다. (주1) 그의 대화편들에서 대립되는 의견들이 보다 동일적인 종합된 의견으로 상승하는 과정의 추동력이 되는 것은 분명히 부정성을 핵심으로 하는 변증적 운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성이 곧 종합하는 능력임을 알 수 있다. 다수적인 것들이 있다면 이것들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것(플라톤의 경우에는 이데아)에 부정적 매개를 통해 하위적,종속적 상태로 종합되는 운동의 핵심이 바로 부정성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에게는 이러한 이데아와 복사물 외에 다른 제3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뮬라크르(simulracre)라 불리는 것들이다. 플라톤에게 이 시뮬라크르는 한 마디로 원본에 대한 잘못된 복사자이다. 그것은 이데아와 어떠한 유사성도 가지지 않는다. 이데아에게 어떠한 것도 상속받지 못한, 이데아의 적자(嫡子)의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것이 시뮬라크르가 지니는 함의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복사물과 시뮬라크르를 구별하는 작업은 이른바 '금고르기'에 비유된다. 마치 불순물들 사이에서 순금만을 골라내듯, 즉 이데아와 유사관계에 있는 좋은 복사물과 그렇지 못한 시뮬라크르를 구별하여 오직 이데아와 복사물만을 참된 인식의 대상으로 삼고 시뮬라크르는 인식의 영역에서 배제해버리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플라톤이 배제해버린 시뮬라크르를 가지고 사유하고자 한다. 시뮬라크르는 이데아에 부정적으로 매개되지 않고 차이를 그 자체로서 드러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반(反)플라톤주의는 시뮬라크르를 통해 이데아와 복사물이라는 관계의 우월성을 전복시키는데 있다.(주2) 

 들뢰즈에게 차이를 매개해 버리는 철학으로 또 하나의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범주론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의 규정이 최상류부터 최하위종까지 가능하도록 만들려 했다. 이를테면 전체 자연의 목록을 세워보려는 기획인 것이다. 예컨대 그 기획은 황인, 백인, 흑인이라는 종(種)은 인간이라는 유(類)에 속하고 인간, 포유류, 어류 등등의 종들은 다시 동물이라는 유에 속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종별화'의 방법은 모사물과 시뮬라크르를 구분하는 플라톤의 '분할'의 방법에 비교해 볼 때, 최고류부터 최하위종까지 모든 부분이 표상의 영역으로 매개되고 있다  즉 플라톤의 분할은 이데아의 적자에 오는 것을 찾고 시뮬라크르는 배제해 버리는 과정을 통해, 표상에 완벽하게 들어오지 않는 사각지대를 남기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두철미하게 종과 유로 짜인 그물을 통해 모든 것을 표상영역으로 포획한다. (주3) 


2. 표상 - 차이의 부정적 매개 


 그렇다면 왜 표상활동은 차이를 부정적 방식으로 매개하는 활동일 것일까? 보르헤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표상활동의 본질 중 하나를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 즉 표상을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들뢰즈가 지적하듯 표상(re-presentation) 이란 단어에서 접두사 RE-는 차이를 종속시키는 동일적인 것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 '나타남(presentation)'이란 '직접적 있음'이다. 접두사 RE는 이 '직접적 있음'을 '다시RE' 스스로를 통해 매개하여 있게하는 의식의 활동을 가리킨다. 표상이란 서로 차이를 지니는 잡다한 나타난 것들을 다시 파악(把握)하는, - '파악'의 한자말에서 알 수 있듯이 - 다시 '거머쥐는' 활동이며 이 잡다한 것들의 거머쥠은 잡다의 차이를 '동일한 하나'의 지평에 귀속된 것으로 나타나게 한다. 표상활동을 통해 차이는 오로지 동일적인 것에 종속된 것으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하나의 분필을 표상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각기 다른 시간(T1, T2, T3.......)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분필의 형상들(F1, F2, F3.......)은 모두 상이한 것들이다. 대낮이었던 T1에서 주어진 분필의 색깔은 하얗다. 그러나 빛이 전혀 없는 밤에 경험된 분필은 더 이상 흰색이 아니다. 심지어 분필을 사용한지 한참 지난 T3에서 우리는 전보다 길이가 훨씬 짧은 분필을 지각한다. 그 자체로 보면 각기 지각된 것은 전혀 다른 분필들이다. 그러나 이처럼 차이나는 것들로 주어지는 경험을 우리는 그 자체로 긍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차이나게 주어지는 것 배후에 늘 변치않고 있는 것. 즉 항상 동일한 '분필'이라는 실체가 있는 듯이 생각한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F1, F2, F3의 차이를 그 자체로 긍정하지 못하고, 그것들은 '분필'이라는 배후의 동일한 실체에 귀속된 한낱 우유(偶有)적 속성일 뿐이라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것의 위치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강등시키는 방식으로만이 하나의 분필은 표상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표상활동 속에서 진행되는 차이의 부정적 종합 때문에 들뢰즈는 "표상개념은 철학을 독살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푸네스는 갑작스럽게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가 된다. 즉 그는 망각의 능력을 상실한 채 불면에 시달리며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 나 혼자서 가지고 있는 기억이 세계가 생긴 이래 모든 사람들이 가졌을 기억보다 많을 거예요."

 우리는 한번 쳐다보고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세 개의 유리컵을 지각한다. 그러나 푸네스는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모든 잎사귀들과 가지들과 포도알들의 수를 지각한다. 이러한 가공할 기억력을 소유하는 대가로 그는 무엇을 잃게 되었는가? 보르헤스는 푸네스가 다름아닌 표상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 그는 <개>라는 종목별 기호가 다양한 크기와 형상들을 가진 상이한 수많은 하나하나의 개들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또한 그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14의 3에 있는 개와 (정면에서 보았을 때) 4의 3에 있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골머리를 앓았다. 그는 거울에 비쳐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자신의 얼굴들과 손들 때문에 화들짝 놀라곤 했다." 

 푸네스는 위에서 지적한 표상활동의 본질인 차이점을 잊고, 일반화/개념화 시키는 활동을 할 수 없는 자이다. 한마디로 그는 도무지 표상할 수 없다. 우리가 <개>라는 하나의 대상을 표상하려면 주어진 수많은 차이나는 잡다들, 예컨대 정면에서 본 개와 측면에서 본 개 등과 같은 잡다들의 차이를 하나의 동일한 <개>라는 대상에 부정적으로 매개시켜 종합해야 한다. 정면에서 본 개의 모습과 측면에서 본 개의 모습은 분명히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이 차이의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개>라는 대상이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차이는 그 동일한 대상에서 파생되는 2차적인 양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부정적 종합의 방식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다양들의 차이를 '잊고'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차이를 부정적으로 종합하지 못하면 표상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푸네스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개라는 대상을 경험가운데 정립하지 못하고 골머리를 앓으며, 심지어 순간순간 늘 다르게 주어지는 자신의 모습에 동일한 자아의 통일성 조차 위협당하며 화들짝 놀라곤 하는 것이다.(주4)  

 표상활동과 다르게 배후에 어떤 것도 가정하지 않고 오직 경험상에 차이나게 주어지는 것들만을 긍정하려는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 밖에 없"다. 이 '세부적인 것들' 이란 무엇인가? 상위의 동일성에 부정적으로 매개되지 않는 것들. 본질(이데아)에 종속되기를 거부한 것들. 그것은 다름아닌 시뮬라크르들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푸네스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 나의 기억력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지요."

 기존 철학의 금고르기 과정에서 탈락된 것들. 영광스런 이데아의 적자(嫡子) 자리에 앉을 권리를 박탈당한 사생아들. 표상의 영역에서 제외되어 버린 그 부스러기들만이 푸네스에게는 주어져 있으며, 들뢰즈는 그 부스러기들만을 움켜쥔 채 그의 철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그의 사상적 입지를 매우 불리하고 협소한 지점에서 구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플라톤이래 지금까지 풍성한 결실을 맺어왔던 부정성에 기반한 모든 철학적 성과들을 비판하며 출발해야 한다. 칼끝과도 같은 그 치명적인 지점에서 들뢰즈는 어떻게 그만의 독창적 사유를 꽃피우고 있는가? (주5)


3. 내적 차이와 외적 차이


 우선 들뢰즈가 내세우는 '차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미 상기한 바와 같이 들뢰즈 철학의 전체 기획은 어떤 방식으로도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차이, 즉 그가 '차이 자체'라고 부르는 것의 가능성에 관한 물음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들뢰즈는 차이 자체를 '내적 차이' '절대적인 궁극적 차이' 라고도 부르며, 고전 철학에서의 '개념적 차이' '유사성' 등과 대립시킨다. 종(種)적 유사성이란 유(類)의 자기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다. 떄문에 유사성 혹은 종적 차이는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 차이라기 보다는, 개별자들을 유적 동일성에 종속시키기 위한 매개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런 종류의 차이는 이웃하는 닮은 종들로부터 그 종들을 포섭하는 유의 동일성으로 이행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들뢰즈는 차이 자체와 대립시켜 '개념적 차이'라고 부른다. 개념적 차이의 궁극적인 역할은 다수를 전체의 표상에 매개하는 것. 즉 존재의 세계를 유와 종의 질서로 대표되는 유기체로 표상하는 일이다. 여기서 결국 차이는 궁극적인 동일성, 전체성, 유기체적 표상에 봉사하는 부수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차이 자체 즉 내적 차이는 유기적 표상에 봉사하는 어떤 개념적 형태로도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궁극적인 것의 자격을 가지고 대상 발생의 선험적 근거로서 역할한다. 사물의 발생에 있어서 차이는 궁극적인 단위이다. 그러므로 차이 자체는 서로 다른 두 대상 사이에서 경험되는 외적차이와 구별된다. 절대적인 궁극적인 차이는 언제든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두 사물 혹은 두 대상 사이의 경험적 차이가 아니다. 개별자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경험적 차이'는 이미 개체로서 우리 경험 한가운데 나타난 개별자들 사이에 성립하는 외적 관계라는 뜻에서 외적 차이인 반면, 차이 자체는 하나의 개별자가 그 개별자로서 발생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는 차이라는 뜻에서 '내적 차이'라고 불린다. (주6) (주7) 

 그렇다면 이러한 내적 차이는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가? 내적 차이를 논할 수 있는 영역은 과연 어디인가? 차이나는 다양을 부정적 종합을 거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차이를 개념에 매개하는 표상활동을 그토록 비판했던 들뢰즈가 이제 발딪고 의지하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해야할 땅은 어디인가? 다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 그것은 철저히 '경험'이라는 대지에 뿌리박고 있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철학이 '경험론'으로 꾸며져야 하리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들뢰즈는 그의 경험론을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괴이한 이름으로 명명한다. 여기서 '초월적'이라고 표현할 때, 그것은 철저히 칸트적인 의미의 초월로 이해되어야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대상들을 선험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방식을, 그것이 선험적으로 가능한 한에서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 개념들을 일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인식을 초월적(transcendental)"이라고 부른다.(주8)즉 '초월적'은 우리의 인식을 가능케하는 선험적 조건들을 탐구하는 시도들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쯤이르면 우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어떻게 경험론이 '초월적'일 수 있단 말인가? 근본적으로 '초월적'이란 수식어가 경험론에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말그대로 선험(先驗)적인 즉 전혀 경험에 의해 포섭되지 않는, 한마디로 그 자체는 경험되지 않으면서 경험을 가능케해 주는 조건들의 탐구가 '초월적'이 지니는 함의라고 한다면,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명칭은 심각한 오류가 있어보인다. '초월적 관념론' 혹은 '후험적 경험론' 등과 같은 조합은 쉽게 수긍할 수 있지만  '초월적 경험론'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플처럼 어색해 보인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4. 강도이론 


 이해를 위해선 먼저 칸트의 강도이론에 대한 지식이 필요할 둣 하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현상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식인 '직관의 공리'와 '지각의 예료'를 다루며 각 방식에 대응하는 것으로 '외연적 크기'와  '강도적 크기'를 내세운다. 우선 외연적 크기란 부분들의 외재성에 기반한다. 즉 서로에 대해 외재적인 부분들이 포착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종합됨으로써 인식되는 하나의 단일성이 외연적 크기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부분들은 전체에 선행해서 표상되어야 하며, 부분들이 선행하여 표상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부분들이 외재적이기에 가능하다. 예컨대 선행하는 서로 독립적인 다수의 부분들인 1미터들이 종합(포착)되어 100미터라는 단일한 크기를 이루는 것, 혹은 독립적인 다수의 1분들이 종합되어 1시간이라는 단일한 크기를 이루는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외연적 크기를 가진 존재는 서로 외재적인 부분들의 다수성을 지니는 동시에 이 다수성의 통합인 단일성도 가진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외연적 크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크기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바로 강도적 크기이다. 강도적 크기는 직관을 도(度)의 관점에서 채우는 것을 말한다. 강도적 크기도 포착을 통해서 도달하지만, 외연적 크기와 달리 그 포착은 계속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이 포착은 한순간에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서로 다른 감각들의 계속적인 종합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100미터라는 외연적 크기가 1미터짜리 부분 100개의 나열로 번역되는 것과 달리 하나의 강도적 크기는 서로 독립적인 혹은 서로 외재적인 부분들의 종합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가령 30도라는 온도는 10도짜리 온도 셋의 종합으로 이해될 수 없다. 세 개의 10도로부터는 어떤 식으로도 30도라는 온도의 크기가 도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속 10킬로미터로 달리는 말 열 마리가 마차를 끈다고 해서 이 각각의 말들의 속력이 더해져서 시속 100킬로미터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강도적 크기에서는 서로 외재적인 부분사이에 성립하는 덧셈뺄셈이 소용없다. 이처럼 부분들이 연속적으로 포착될 수 없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강도적 크기는 오로지 부정성인 0도에 얼마나 근접하는가로만 나타낼 수 있다.

 어러한 칸트의 강도이론이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에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내적 차이가 경험가운데 실재가 발생하기 위한 충족이유라는 들뢰즈의 생각이 강도이론 속에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도적 크기를 통해 어떤 경험의 대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크기를 구성하는 감각들이 차이나는 변별적 관계를 맺고 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강도적 크기로서 나타나는 '배고픔'의 예를 들어보자. 배고픔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몸속에 지방이 모자라는 것 혹은 단백질이 부족한 것 자체는 배고픔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외연적 크기와 같이 연속적으로 종합될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니며,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포착되지 않는다. 즉 1미터 100개가 모여 100미터가 되는 것처럼, 지방의 결핍(배고품1), 단백질의 결핍(배고픔2).....이런식으로 각각의 결핍들이 연속적으로 결합되어 우리가 하나의 '배고픔'이라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다만 각각의 결핍들이 일정한 정도에 도달하였을 때 순간적으로 배고픔을 느낀다. 베고픔의 이유가 되는 이런 요소들은 의식적으로 경험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반성을 통해 그런 요소들이 상호종합되어서 배고픔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주9)

 여기서 상호종합된다는 것은 외연적 크기에서의 부분들의 외재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각각의 결핍들이 서로 외재적일 경우, 즉 서로 독립적인 항일 경우는 결코 종합을 통해 배고픔이라는 강도적 크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외재적 종합이 아니라 서로 내적으로 관여하는 상호적 종합만이 하나의 강도적 크기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호종합의 결과로서 강도적 크기(배고픔)가 의식 가운데 출현하는 실재이다. 이처럼 강도이론은 의식의 차원에서 지각되는 실재를 발생적인 측면에서 기술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의식 상관적인 유한한 실재인 '거시지각(macro-perception)'은 의식되지 않고 무한히 변별적인 '미세지각들(petites-perceptions)'의 종합을 통해 강도적 크기로 발생한다.

 그런데 미세지각들의 변별적 관계는 명색이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지성에 뿌리를 둔 표상, 즉 개념이 아니다. 오로지 감성적인 것의 충위에서 감각들 사이에 성립하는 바개념적 차이, 즉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자체' '내적차이'의 표현이 바로 변별적 관계인 것이다. 이처럼 강도이론에서는 실재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감성적인 것들 가운데 성립하는 내적 차이, 즉 변별적 관계를 도입하고 있다. 


5. 초월적 경험론  


 이제 위에서 살펴본 강도이론에 기초하여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말의 의미를 해명해보자. 의식 상관적인 실재대상의 선험적 근거는 변별적인 것들이다. '근거'라고 하는 이유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변별적인 요소들의 종합이 의식적 대상을 발생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근거가 '선험적'이라 불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경험 자체는 우리에게 혼합체만을 제공한다. 반면 이 혼합체를 발생적으로 구성하는 변별적인 것들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가령 혼합체로서 배고픔이 의식되는 것, 경험되는 것이라면, 지방의 결핍, 단백질의 결핍 등 배고픔의 발생적 구성 요소들은 결코 경험되지 않는다. 이 변별적 요소들 자체는 의식되지 않는 지각들일 뿐이며, 그렇기에 '변별적인 무의식적인 것'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배움(인식)은 언제나 무의식을 거치며, 늘 무의식 속에서만 일어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가령 파랑과 노랑은 초록이라는 강도적 크기의 발생적 구성요소로 지각되는 것이지만, 내가 초록을 의식할 때 파랑과 노랑은 결코 의식적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즉 미세지각들은 의식적 지각의 부분들이 아니라, 의식적 지각의 요건들 혹은 발생적 요소들이다. 파랑과 노랑은 초록이라는 경험의 일부분이 아니라 초록이 가능하기 위한 무의식적 '선험적 근거'인 것이다. 결국 들뢰즈의 경험론은 체험된 경험에 단순히 호소하지 않는다. 복합체로서 경험 대상을 가능케 하는 잠재적 요소들, 즉 경험되지 않는 근거를 묻는 것이 초월적 경험론의 과제이며, 이런 점에서 그것은 영국 경험론과 구별된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초월적 경험론이란 기이한 명칭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의상 '선험적'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표상들을 일컫는다. '초월적'은 이 선험적 요소들을 다루는 모든 인식을 말한다. 의식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경험되지 않는 근거를 다룬다는 점에서 초월적 경험론은 두 용어 '선험적'과 '초월적'을 타당하게 자신의 소유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이 선험적 근거를 문제삼고 있음에도 여전히 '경험론'으로 남을 수 있는 까닭, 다시 말해 초월적 '관념론'이 아닌 초월적 '경험론'일 수 있는 이유도 분명하다. 초월적 경험론에서 경험의 근거는 선험적 개념에 있지 않고 순수지각에 있기 때문이다. 경험되지 않는(선험적인) 조건은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파랑과 노랑은 초록의 발생 요소로 고려되었을 때는 결코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경험은 초록 외에는 알지 못하며, 파랑과 노랑은 발생의 근거로서 초록 뒤에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실제로 감각되는 것은 초록이 아니라, 오로지 파랑과 노랑뿐이다. 결국 경험(초록)은 감각되지만 의식되지는 않는 잠재적인 것들의 상호 규정만을 선험적 근거로 가진다. 즉 초월적 경험론에서 경험의 선험적 근거(파랑과 노랑)는 결코 주관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이다. (주10)

 그런데 실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경험 자체(초록)가 아니라 그것의 발생적 구성요소들일 뿐이라면 대체 경험의 위상이란 무엇인가? 들뢰즈는 라이프니츠를 다루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경험상의 지각은 환각적(hallucinatoire)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대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경험되는 것은 분자적인 감각적 지각들 뿐이며, 이러한 감각에 대응하는 대상이란 없다. 의식 상관적인 경험대상이란 오로지 환각이며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유명론적인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잠시 정리해 보자. 우리는 표상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가 표상개념에 대립하여 내세우는 '차이자체'가 가지는 함의를 살피고 이 차이개념에 기반하여 수립되는 초월적 경험론의 의미를 알아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대상과 그것이 기반하는 근본적인 개념으로 여겨졌던 동일성, 유사성 등의 개념은 이차적인 산물에 불과하며 그 배후에는 의식되지 않는 -그런 의미에서 비개념적인- 차이 자체와 그 차이에 의해 성립하는 변별적인 지각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는 들뢰즈의 어찌보면 매우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험론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겐 분명 경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겠는가?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의혹들에 대해 우리는 데리다의 경험론 비판과 그에 대한 들뢰즈의 답변을 살펴봄으로써 불충분하게나마 어느 정도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리라.  


6. 접속사의 존재론 


 우리가 살펴볼 데리다의 주장은 <글쓰기와 차연>에서 수행하고 있는 경험론 비판이다. 데리다의 글이 직접적으로는 레비나스를 겨냥하고 있으며, 레비나스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 전체가 경험론만을 문제삼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데리다의 비판은 분명 '경험론의 근본적인 가능성'에 대해 깊은 성찰을 제공하고 있다. 

 데리다의 핵심적 논점은 감성 중의 경험은 이미 존재 사건을 통해 출현한 존재하는 것, 즉 유한한 존재자에 대한 경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론은 배후에 존재사유를 숨기고 있다.(주11) 그런데 이처럼 감성 가운데 나타난 경험이 그 배후에 어쩔 수 없이 '존재'를 은폐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면 경험론은 참다운 의미에서 경험론일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 사유'는 본성상 비(非)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 사유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철학은 결코 완벽한 경험론일 수 없으며, 어쩔 수 없이 그리스인들의 것이라는 점을 확인해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데리다의 레비나스 비판은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이해를 위해 레비나스의 존재에 대한 입장을 간추려 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존재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이데거에선 존재 사건을 통해 존재자는 존재자로서 출현한다. 이런 뜻에서 레비나스는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것, 곧 '본질'로 이해한다. 존재가 본질임으로 존재자와 그의 존재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자기동일성의 형식을 통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존재자는 존재함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으로서만 있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존재자의 존재는 동일성의 형식, 즉 '자기(soi)에 대한 자아(moi)의 피할수 없는 연관'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본질인 '존재'를 존재자의 모든 이기적 권력의 원천으로 본다. '자아'와 '자기'의 피할 수 없는 연루라는 '자기성'의 구조 속에서는 어떤 구원도 바랄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성의 구조는 곧 '존재 안에 머무르고자 하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세계 안에서 존재자는 자기의 본성인 자기성의 구조에 따라 스스로를 존재자로서 유지하는 일에 골몰한다. 이러한 존재 유지는 나 아닌 것(타자)을 나의 것으로 동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성취된다. 가령 생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먹거리로서의 타자는 나의 생명 유지를 위해 나에게 동화되어야 하며,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표상의 형태로 나의 의식에 귀속되어야 한다. 즉 모든 것은 오로지 주체에게 호출되어 그의 앞에 '대상'으로 섰을 때만 의미를 지닌 채 출현할 수 있다. 주체가 대상을 자기 앞에(vor) 세우는(stellen) 활동인 표상(vor-stellen)을 통해 주체는 모든 것을 그의 개념에 매개시켜(표상시켜) 자신의 인식적 소유로 삼는 것이다. 세계 안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자기(soi)를 부양하는 일에 골몰하는 일뿐이다. 이 자기부양의 목적을 위해 모든 외재적 대상, 타자는 자아에게 흡수 동화되어 버릴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타인에 대한 폭력은 존재사건 자체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윤리의 가능성은 '존재와 다르게(Autrement qu' tre)' 라는 부사구를 통해서 타인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비로소 희망해 볼 수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주체의 개념적 도구로 절대 포획되지 않는 -그런 의미에서 비표상적인- 타자의 도래를 통해 존재의 '자기에 대한 자아의 연루'라는 이기적 구조를 끊을 수 있으며, '자기 존재에 거슬러서' 타인을 위해 행위 할 수 있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이러한 타자는 철저하게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 타인은 감성에 주어진 '흔적'을 통해 그 현전이 무한히 연기되는 방식으로 주체에게 '경험'되는 것이다. 즉 한마디로 타인은 선험적 개념이 아니므로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타인과 만날 수 없다. (주12)

 그러나 데리다는 이 같은 레비나스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타인에 대한 비폭력적인 언어, 즉 이기성에 갇혀 있지 않은 윤리적 언어는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가지지 않아야만 할 것이라고 반문한다. 즉 비폭력적 언어는 동사 '존재한다 ( tre/be)'가 금지된 언어, 즉 어떤 술어적 기능도 없는 언어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언어는 불가능 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경험론 비판의 핵심이다. 동사 '존재하다'와 술어적 활동은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비폭력적인 언어는 궁극적으로 모든 동사로부터 정화된 언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는 더 이상 언어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이러한 비판이 경험론에 대해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경험으로부터 결코 얻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존재(est/is)라는 계사(繫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의 타인도 '존재와 다른 것'이기는커녕, 어떤 식으로든 이미 존재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어떤 경우든 근본적인 것이 된다. 존재의 이러한 근본성 때문에 데리다는 동사 '존재한다'는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존재사유를 전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험론이 아무리 존재사유를 부정하더라도, 그 부정하는 언어의 배후에는 어쩔 수 없이 존재동사가 이미 자리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데리다가 보기에 경험론은 자신이 철저히 부정하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역설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경험론의 대답은 무엇인가? 정말로 경험론은 존재사유라는 거대한 늪에 빠져 사라져버릴 운명을 그 태생부터 타고난 사상인가? 그러나 진정한 경험론은 존재개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 때문에 멸망하기는커녕 바로 데리다가 레비나스를 비판하기 위해 옹호하는 그 존재동사(est/is)를 극복해야 할 표적으로 삼는 데서 비로소 경험론으로 존립한다. 데리다와 정반대로 경험론은 모든 동사들과 명사들을 존재동사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경험론의 핵심정신에 대해 Claire Parnet과 공저한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철학, 철학사는 존재의 문제 때문에, 이다EST 때문에 방해받는다. …… 모든 문법, 모든 삼단문법은 존재동사에 대한 접속사들의 종속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꿰뚫고 변조시키며, 존재를 손상시키고 무너뜨리는 관계들과 만나야 한다. EST( 있다)를 ET( 과 )로 대체해야 한다. A 'et' B. ET는 심지어 특정한 관계나 접속사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의 기초를 이루는 것, 모든 관계들을 열어주는 길이다. 그것은 관계들이 …… 존재, 일자, 전체 바깥에서 짜이도록 만든다.…… EST를 사유하는 대신에, EST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ET와 '더불어' 사유하는 것. 경험론에는 이것 말고 다른 비밀은 없다."

 이 구절들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계사는 존재동사가 아니라, 접속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하늘은 est/is 푸르다"는 말은 존재를 그 근저에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임'과 et/and '푸름' 이라는 두 속성이 이웃하고 있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소년의 눈이 푸르다"는 그 문법적 구조를 통해 존재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현혹하지만, 사실 이 문장은 "Blue-eyed boy"라고 번역되어야 마땅하며, 그것이 뜻하는 바는 '소년', '푸름', '눈' 들이 배치됨(agencement)이다. 요컨대 '존재'는 경험론이 설명해 내지 못하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먼저 경험론이 제거해 버려야 하는 허구인 것이다. 문법이 일으키는 환각에 대항해 계사는 존재동사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들의 배치를 의미하는 접속사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경험론의 사명이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보르헤스의 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 등장하는 매우 기이한 형태의 다음과 같은 틀뢴의 언어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으리라. 

"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란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 …… 북반구의 언어들에 있어 원초적 핵은 동사가 아니라 단음절 형용사이다. 명사는 형용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들은 <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둡고 둥그런 위에 있는 허공의 밝은>, 또는 <하늘의 - 오렌지빛의 - 부드러운>, 또는 다른 집합의 방식으로 달을 말한다. …… 아무도 명사들의 현실성에 대해 믿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의 존재사유의 세례를 받지않은 틀뢴인들은 어떤 식의 언어를 발전시켰는가? 그들의 언어는 "명사들의 현실성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곧 경험되지 않는 '존재개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은 오직 "허공의 밝은" "오렌지빛" "둥그런" 등과 같은 속성들이지, 이 속성들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출현시켜주는 것이라 믿어지는 불변의 존재를 가정하는 <달>이란 명사는 결코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만을 긍정하는 틀륀인들은 들뢰즈주의자가 되어, "EST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ET와 '더불어' 사유"한다. 따라서 틀륀의 언어에는 계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경험되는 속성들만이 접속사를 통해 '배치'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틀륀인들에게 "있어서 세계란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 여기서 '독립적 행위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들은 곧 상위의 혹은 배후에 늘 동일적으로 있으리라 가정되는 존재에 종속되기를 거부한 것, 우리가 이미 살핀바있는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서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과 동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에게 익숙한 들뢰즈의 용어로는 바로 시뮬라크르라고 불리는 것들이 아닌가? 틀륀의 세계는 존재에 종속/매개되지 않고 그 자체로 긍정되는 수많은 시뮬라크르들의 접속사를 통한 연접 혹은 배치됨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추앙했던 로고스(존재사유)의 태양이 저물어 버린 이 틀륀의 땅에서는 오직 경험의 부스러기들만이, 버림받은 사생아들인 시뮬라크르들만이 로고스의 빛이 미치지 않는 음지 속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틀륀인들의 존재개념 전복을 보다 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아홉 개의 구리동전이라는 궤변]이다. 

"< 화요일에 X가 텅 빈 거리를 지나다가 아홉 개의 동전을 잃어버린다. 목요일에 Y가 그 거리에서 수요일에 내린 비로 약간 녹이 슨 네 개의 동전을 발견하다. 금요일에 Z가 길에서 세 개의 동전을 발견한다, 금요일 아침 X가 자신의 집 복도에서 두 개의 동전을 발견한다.> 그 이교 교주는 그 이야기로부터 되찾은 아홉 개 동전의 현실 - 그러니까 연속성 -을 추론해낸다. <그는 화요일과 목요일 사이에 네 개의 동전이,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사이에 세 개의 동전이, 화요일과 금요일 새벽 사이에 두 개의 동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단언한다. 그것들은 그 세 기간의 매 순간바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은밀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존재했다고 보는 게 보다 논리적이다> 틀륀의 언어는 그러한 역설이 설정되는 것을 거부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역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식의 대변인들은 먼저 그 일화의 진설성을 무턱대고 부인했다. 그들은 그 역설이 사용이 금지되어 있고 …… 언어적 오류라고 주장하였다."

 존재개념을 이처럼 유머스럽게 뒤엎어버리는 구절도 찾기 힘들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잃어버리기 전의 동전과 찾은 후의 동전에 대한 경험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경험만을 긍정하면 잃어버린 기간동안 동전이 존재했음은 담보 할 수 없게 되며, 더 나아가 잃어버린 동전과 찾은 동전이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게 된다. 오직 경험의 배후에서 늘 항존하는 동전의 '존재'를 가정하였을 때만이 두 동전이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존재사유를 주장하는 어느 이교교주의 일명 '동전의 가설'은 당연하게도 틀륀인들의 심한 반박에 부딪친다. 마치 우리세계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존재개념을 완전히 배재한 경험론을 상식적으로 매우 터무니없는 것처럼 여기듯이, 틀륀의 "상식의 대변자들"은 정반대로 그 존재개념을 무턱대고 말도 안 된다고 우겨댔던 것이다. 소위 존재개념이라는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지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르헤스는 이처럼 유쾌한 전복을 통해 밝혀내고 있다. 철저한 경험론자들인 틀륀인에게 존재개념은 데리다의 주장처럼 당연히 모든 사유와 언어의 배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궤변이며 이해될 수 없는 역설(paradox)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존재사유를 배후에 둔 계사는 "언어적 오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틀륀이라는 기상천외한 상상세계를 통해 보르헤스는 마치 데리다의 경험론 비판을 미리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들뢰즈에 앞서서 존재사유가 결코 미치지 못하는 경험론이라는 미지의 대륙을 이미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까지의 보잘 것 없었던 논의의 빈약한 결론을 다음과 같은 몇마디 말로 대신할 수 있으리라.  

 불면 속에서 푸네스적 고뇌에 시달리며 달뜬 목소리로 틀륀의 언어를 뱉어내는 분열증자. 

 그것이 바로 보르헤스가 예언처럼 그려낸 훗날 들뢰즈 철학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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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 <플라톤의 변증술> 플라톤의 사유가 부정성을 통한 변증법적 상승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우리는 <향연>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 이 세계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에서 출발해서 저 아름다움 그 자체를 향하여 올라가는 것은 사다리를 올라가듯이 이루어진다..........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둘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아름다운 육체들로부터 아름다운 일과 활동에로 나아가고, 활동에서 아름다운 학문으로 가고, 마지막으로 저 아름다운 자체만을 아는 완전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주2) <들뢰즈의 반(反)플라톤주의> 그러므로 어찌보면 역설적이게도 들뢰즈의 反플라톤주의는 이미 플라톤주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플라톤이 제시한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에 의존하여 플라톤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뒤이어 나올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해보면 좀 더 명확해 지지만, 플라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사뮬라크르라는 개념화되지 않는 부분을 남겨둔다는 점에서 그 안에 이미 비표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 주3) <종별화와 주체의 욕망> 아리스토텔레스의 종별화에 기초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표상활동 속에 회집하여 지배하려는 주체의 욕망을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 나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이제부터는 측정, 증명, 확인되고 수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되기를 요구한다. 섬을 측량하고 이 땅 전부의 평면을 축소한 지도를 만들고 그것을 토지대장에 기록해야 한다. 풀포기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붙이고 새 한 마리마다 발고리를 끼우고 젖먹이동물 한 마리마다 불로 지져 도장을 찍고 싶다. 이해할 길 없고 헤아릴 길 없으며 무엇인가 속에서 부글거리며 끓고 해로운 소용돌이로 가득 찬 이 섬이 추상적이고 투명하며 뼛속 깊이까지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변모할 때까지 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리라!"    

( 주4) <분열증적 주체> 거울에 비칠 때마다 다르게 지각되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을 겪는 푸네스의 고뇌는 분명 또 하나의 주요한 들뢰즈 철학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차이를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동일성, 유사성, 부정성 등에 기반한 표상활동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들뢰즈 철학은 종국엔 '통일적인 주체'조차 부정하게된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수행되는 이러한 작업은 정신분석학 비판과 함께 욕망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게 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유명한 개념이 바로 '욕망하는 기계'이다. 간단히 말해 들뢰즈는 모든 경험의 배후에서 그것들을 종합하며 늘 동일적인 것으로 있는 주체를 부정하고, 욕망하는 기계들의 연접, 흐름을 주체라고 명명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이 바로 들뢰즈의 '분열증적 주체'이다.  

( 주5) <들뢰즈와 하이데거>  들뢰즈는 배후에서 모든 것들을 출현시키는 존재에 대해 묻지 않으며, 저 천상에 있는 이데아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오로지 우리 경험가운데 주어진 것들만을 긍정하는 '표면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신 즉 자연"이라 할 때, 그 자연 안에 주어진 것만을, 표면속에 있는 것만을 인정하는 철학이며, 따라서 고전적 사유 방식에 의하면 자연의 원리 외에는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목신과도 같은 사유 속에서 진행되는 일명 '목신의 철학'이라 이름 붙일 수 있으리라.  

 따라서 들뢰즈는 결코 하이데거주의자가 될 수 없으며, 하이데거는 결코 자연주의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분명히 자연 총체를 '존재자'로 삼고서 그 자연의 '존재'는 무슨 의미인가라고 들뢰즈에게 반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자들은 모두 다르더라도 존재 자체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다. 즉  '존재자의 존재'라는 함의를 가지며 존재가 존재적(ontic)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ontological) 차원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학적으로 접근되기 때문에 들뢰즈의 철학은 하이데거가 보자면 아직 존재자들(ontic)의 차원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레비나스가 스피노자를 다루면서 "스피노자의 실체도 존재자이다"라고 말한 것도 역시 같은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자연이라는 표면 외에는 그 무엇도 -배후의 혹은 상위의 원리도- 인정하지 않는 자연주의 철학이므로, 하이데거와는 양립불가능한 차이점을 지닌다.          

( 주6) <두 차이의 의미> 들뢰즈의 말을 빌면 두 가지 차이가 지니는 대립적 함의는 다음의 두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 오직 유사한 것만이 다르다."  "오직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하다."

 두 문장 중 전자는 전제된 유사성이나 동일성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사고하는 반면, 후자는 유사성이나 동일성을 근본적인 차이의 산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 주7) <차이와 비관계> 동일성, 유사성, 부정성 등과 개념을 상위에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내적차이는 굳이 이름 붙인다면 '비관계' '무관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성에서의 대립은 종합을 창출하기 위한 도구로 봉사할 뿐이지만, 부정성이 아닌 내적차이는 귀결로서 어떤 통일도 이루지 않는 다수성만이 남는 철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A와 notA라는 부정적 매개를 통해 종합되는 관계가 아닌, 항들간에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비관계'의 형태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바로 들뢰즈가 스피노자에게 받은 영향이 드러난다.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지 않는 비관계의 가장 극명한 표현을 우리는 다름아닌 스피노자가 제시한 실체의 두 속성인 연장과 사유와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스피노자에게서 연장이 연장일 수 있는 까닭은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즉 연장과 사유는 A(연장) notA(사유)처럼 부정적 대립관계를 통해 서로의 본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둘 사이에는 본성상 오직 '무관계' 만이 있다. 

( 주8) <초월적과 초재적> 칸트에게 초월적(transcendental)이란 개념은 초재적(transcendent)이란 개념과 비교하여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단 초월적과 초재적 모두 '한계를 넘어가다' 를 의미하는 라틴어 동사 'transcendere'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단 초재적이란 우리의 경험세계 저편의 어떤 세계, 즉 물자체(Das Ding an sich)의 영역을 가르킨다. 칸트는 이러한 피안, 즉 초재적/초감성적 세계가 이론적인 것의 영역 안에서 그것에 대한 타당한 인식이 있을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이에 반해 칸트의 초월적 탐구에서도 일단 경험을 넘어서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넘어감의 방향이 정반대이다. 초월적 탐구의 넘어감은 전방이 아닌, 배후로 향한다. 즉 칸트는 '경험배후로의 초월'을 통해 모든 경험이전에 놓여있는 경험의 조건들을 발견하려한다. 이러한 기획을 기본으로 칸트는 그가 주관 속에 있다고 가정한, 경험에 앞서서 타당한 선경험의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다. 

( 주9) <라니프니츠와 강도이론> 강도이론을 바탕으로 우리는 한편 라이프니츠의 단자론(單子論)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해 볼 수 있으리라. 라이프니츠는 그의 단자론에서 세계의 최소단위로 모나드(monad, 單子)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무수한 모나드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라이프니츠가 모나드를 물질적인 것이 아닌 물질성 이전의 순수 활동성/에너지/힘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에 최소단위를 물리적 실체로 보던 원자론자들의 입장에서 탈피하려는 그의 의도가 깔려있다. 모나드는 물질적 실체인 원자와 달리 기계론적인 파악의 대상이 아니며, 세계의 출현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원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물질적인 에너지/힘의 형태인 모나드로부터 어떻게 물질적이며 연장성을 지닌 세계가 출현하는가? 이것이 바로 라이프니츠의 딜레마다. 그는 이에 대한 답안으로 모나드로부터 물체에 이르는 5단계의 계보를 제시하지만, 그다지 탁월한 설명이 되고 있지 못하는게 사실이다. 

 라이프니츠의 주장은 아마도 강도이론과 함께 고려되어야만 이러한 딜레마에서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을 것 이다. 실재를 강도적 크기의 발생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들뢰즈의 착상은 분명 '힘'의 문제와 긴밀한 연관을 지닌다. 강도적 크기는 힘을 기술하는 데 필수적이다. 섭씨 30도라는 열의 힘, 시속 100킬로미터라는 속력 등을 통해 이미 예시했듯, 힘은 본성상 한순간에만 지각되는 강도적 크기이다. 이러한 강도 이론을 배경으로 들뢰즈는 모든 대상을 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니체와 철학>에서 "대상이란 그 자체 외관이 아니라 힘의 출현이다."라고 말한다. 즉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을 힘의 강도적 크기라는 발생의 산물로 기술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이제 들뢰즈의 강도이론을 라이프니츠식으로 기술해보자. 우리에게 실제 지각되는 것은 비물질적/개별적인 모나드들이며, 그것들이 집합적으로 있을 때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 혹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지각되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물질성을 지닌 사물이다. 즉 힘은 외연적 크기가 아니므로 마치 1미터 100개 모여 100미터가 되는 것처럼 모나드1, 모나드2, 모나드3.......이런 식으로 모나드들이 서로 외부적으로 관계해서 물질적 실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며, 이런 식으론 물리적 실체를 구성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외부적으로 관계맺는 집합으로는 비물질적 힘인 모나드로부터 질적으로 완전히 상이한 물질적 실체가 어떻게 출현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나드를 외연적 크기가 아닌, 어느 한 순간에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강도적 크기로 기술할 때만이 - 마치 지방의 결핍, 단백질의 결핍 등이 어느 한순간에 질적으로 전혀 다른 '배고픔'이란 경험을 출현시키는 것처럼 - 비물질적인 힘의 알갱이들인 모나드가 어느 한순간에 물질적 실체로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이 비로소 납득가능하게 설명될 수 있다.  

( 주10) <들뢰즈와 칸트의 차이점> 초월적 경험론이 경험론이려면 경험의 발생적 요소들 사이의 변별적 관계와 차이 자체는 주관적 형식으로서의 감성으로 환원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주관적 형식으로서의 감성으로 환원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주관적 형식의 요소라면 들뢰즈 철학은 이미 초월적 관념론이지 초월적 경험론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가 지각의 예료의 원칙으로 제시하는 강도이론은 들뢰즈의 이론과 완벽하게 일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칸트의 강도이론에서 나타나는 비개념적 차이는 주관적 형식으로서의 감성에 귀속하기 때문이다. 반면 들뢰즈의 철학에서 변별적 관계는 주관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감각적 지각들 사이에서 성립할 뿐이며 그렇기에 그의 철학은 '경험론'일 수 있다.    

( 주11)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위와 같은 데리다의 경험론 비판은 '존재자들을 출현시키는 존재사건'을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점은 후설의 현상학으로부터이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자신의 철학을 현상학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다. 어떻게 하이데거는 현상학으로부터 존재론으로 이행하게 되었는가? 우선 현상이란 주체에게 스스로를 건네며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기술하는 것이 현상학이라고 한다면, 하이데거는 한가지 이상한 현상이 있음을 말한다. 모든 현상 중에 있는 것이지만, 결코 그 자체로 나타나지는 않는 이상한 현상. 그것이 바로 '존재'이다. 

 우리가 "이 사과는 빨갛다 This apple is red" 라는 경험을 한다고 가정하자. 빨간 사과로 나타난 현상에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칸트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감각과 지성을 통해 경험에 접근한다. 일단 감각을 통해 사과와 빨강의 표상을 받아들이고, 개념의 능력으로서의 지성을 통해 빨강이라는 표상을 사과의 표상에 귀속시켜 최종적으로 종합판단으로서의 경험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2가지를 통해서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사과에 빨강을 비끌어 매주는 것, 사과를 빨간 것으로 출현시켜주는 계사(is)가 의미하는 것. 즉 '존재'라는 현상이다. 이 존재는 모든 현상 속에 있지만, 사과나 빨강과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고 항상 배후에 위장된 형태로만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제 현상학은 그 은폐된 근본 현상인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 즉 '존재론'으로의 전환을 필연적인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현상학은 빨강을 사과 속에 있게하는 주어짐의 방식에 대한 탐구, 계사(be동사/is)에 대한 탐구, 즉 존재에 대한 연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에 대한 접근은 어떤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언어의 원래 의미로 되돌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그리스어가 로마인들에 의해 유럽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의미는 소실되었다고 비판하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그리스어의 개념들은 기존 뜻과는 상이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하이데거는 '어원론적 광신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컨대 오늘날 흔히 본질(essence)이라 번역되는 그리스어 에이도스(eidos)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에이도스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이 우리 눈앞에 보이도록 해주는 것'이다. 즉 t1, t2, t3.....각각의 시점에서 경험하는 서로 다른 분필에 대한 지각들이 단지 흩어져서 순간적인 이미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잡다한 경험으로부터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하나의 분필로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분필의 에이도스인 것이다. 즉 보이는 모든 것을 배후에서 츨현시켜 주는 것이 에이도스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것은 곧 현상이 출현하게끔 하는 지평, '존재함 자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에이도스 혹은 존재라는 근본현상에 접근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을 하이데거는 로고스(logos)라는 또 다른 그리스어의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흔히 현대사회에서 로고스는 이성, 판단, 근거, 개념 등의 의미로 번역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로고스가 그리스어 '벨룬'에서 유래했으며 그것의 실제의미는 '말 속에서 언급되는 것을 밝힌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로고스는 그 근본에 '말/명제'와 친화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모든 현상은 우리에게 늘 명제의 형태로 주어진다. 즉 로고스(말함)은 대상을 우리에게 출현시키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이것이 발언된 말(발화)이건 혹은 생각된 말(사유)이건 말되어짐의 양태와 상관없이 대상이 우리에게 출현하는 방식은 늘 말/명제/로고스의 형태이다. 즉 현상은 늘 로고스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늘 로고스 상관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명제의 본질을 존재자를 보이게 해주는 것이라 주장하며 따라서 로고스(말함)의 탐구는 그의 존재론의 주요 과제가 된다.   

( 주12) <들뢰즈와 레비나스> 내재성과 긍정의 철학자인 들뢰즈와 외재성과 부정의 철학자인 레비나스는 이찌보면 현대 유럽철학의 두 극단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같은 종족으로 묶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들뢰즈는 경험의 초월적 근거를 다시 감각 속에서 정초하고 있으며, 레비나스에게 타인이라는 경험을 형성하게 해주는 근거인 '흔적'은 역시 감성적인 것이다. 따라서 두 사상가를 관류하는 공통의 철학적 물줄기는 그들이 사상적으로 그리스에서 온 자들이 아니라는 것, 즉 존재 사유(로고스)없이 경험의 부스러기들만을 가지고 사유하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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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1.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나는 들뢰즈를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은 아마도 거대한 미로같은 그의 사상 속에서 길을 잃고 해매다가 이제는 방향감각까지 상실해버린 어느 가련한 순례자가 중얼대는 넋두리 정도일 것이다. 

 덧2. 못난 순례자는 넋두리조차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었기에, 이 글은 많은 책을 참고하는 정도를 넘어 배끼고 짜깁끼하여 쓰여졌다. 그렇기에 아마도 나의 작업은 누군가의 말처럼 '인형눈깔붙이기'에 해당될 것이다. 내가 한 일은 '주어진' 인형에 '주어진' 눈깔을 성의없이 붙인 것밖에 없다. 물론 수많은 인형들과 눈깔들의 출처를 각주를 통해 상세히 밝혀야 하겠지만, 글자체가 내가 공부하며 많은 다른 책에서 배껴놓은 노트의 내용을 기반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나의 불성실한 필사 덕택으로 구절들의 출처를 알기가 힘들다.....끙...;;;  


* 병장 김지민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06-20 10:22)  


 병장 박수영 
 너무 전문적이군요. 허허. 
 저 같은 물리학도로서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이건 변명인가!) 
 철학의 세계는 넓고도 깊군요.(막막) 06-18   

 상병 김현진 
 아니, 이런 글을 <가지로> 올려놓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글을 올린단 말입니까! 인형눈깔붙이기든 철학의 대가들의 명저를 채 소화하지 못하고 배출한 설사이든, 이 글은 우리에게 충분한 지적 자극 아니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쳐봅니다. <가지로>~~! 06-18   

 병장 이건룡 
 저도 <가지로>로~ 

 관련 서적 읽는데에는 정말 도움이 되겠습니다. 06-19   

 병장 김병완 
 솔직히 어렵군요! 하지만 제 지식의 부족이 정성어린 글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건 아니겠죠. <가지로> 06-19   

 상병 전경원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책마을과 잠시 떨어져있는동안 

 광철님은 이런 좋은글을 올리고 계시는군요,, 

 특히 즉 존재 사유(로고스)없이 경험의 부스러기들만을 가지고 사유하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이 문장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멋있습니다,, 06-19   

 병장 김광철 
 현진,건룡,병완 // 보잘 것 없는 글이 감당하기엔 과분해 보이는군요. 감사드립니다.(웃음) 

 경원// 앗~ 경원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많이 바쁘셨나보죠? 전 항상 경원님의 글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크크 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