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베스트-내글내생각] 들뢰즈를 읽자! 철학의 실천과 독서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7-15 11:13:52, 조회: 217, 추천:2
1.
<책마당>에서 김요셉 님이 <천개의 고원>을 몸소 발췌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 구절은 굉장히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 사상가들이었던 괴테와 헤겔은 클라이스트의 마음 속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고 보았는데, 클라이스트는 애초부터 패배했던 것이다. 그러나 클라이스트에게서 가장 기묘한 현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비밀과 속도, 변용태가 그의 작품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이스트에게서 비밀은 내부성의 형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 아니라 반대로 오히려 자체가 형식이 되며 항상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외부성의 형식과 일치한다. 이와 비슷하게 감정도 "주체"의 내부성에서 벗어나 순수한 외부성의 환경에 격렬하게 투사되며, 이 외부성의 환경에 의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와 발진력을 부여받는다. 또한 사랑이건 증오건 그것은 이미 감정이 아니라 변용태이다. 게다가 이러한 변용태는 전사의 여성- 되기, 동물- 되기이기도 하다(곰이나 암캐). 변용태는 화살처럼 신체를 가로지른다. 변용태는 전쟁 무기인 것이다. 변용태(=감정)의 탈영토화 속도. 홈부르크 왕자나 펜테실레이아의 꿈조차 중계와 분기(分岐), 즉 전쟁 기계에 속하는 외적인 연결 시스템에 의해 외부화된다. 수없이 부서진 원환들.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외부성이라는 요소는 클라이스트가 문학의 영역에서 최초로 발명한 것으로 새로운 리듬, 즉 긴장이나 실신, 섬광 또는 가속의 끝없는 계기를 시간에 부여해준다. 긴장이란 "이 변용태가 내게는 너무나 강렬한" 경우를 말하며, 섬광은 "변용태의 힘이 나를 휩쓸고 가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이상의 어떤 경우에도 <자아>는 한 명의 등장 인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몸짓이나 감동은 탈주체화된다. 심지어 그로 인해 <자아>가 소멸하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어떠한 주체적인 내부성도 잔존시키지 않을 듯이 죽을 힘을 다하는 광기와 응고된 긴장의 연속적인 질주 - 이것이 바로 클라이스트에 고유한 공식이다...(후략)
들뢰즈 / 가타리,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 기계', <천개의 고원>, 681-682p
2.
사실, 들뢰즈/가타리만큼 '간지' 나는 철학자 커플도 없지요. 조금은 유행이 지난 감이 없지 않지만, 무엇보다 질 들뢰즈라고 한다면 미셸 푸코와 더불어, 한때 철학 간지의 한 축을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요셉 님이 몸소 그렇게 '어렵다고' 소문이 난 <천개의 고원>을 읽을 정도라면 실로 대단한 겁니다. 사실은 천개의 고원이라든지 들뢰즈에 대한 무수한 소문들이 들뢰즈에 대한 제대로 된 독해를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들뢰즈를 몸소 읽는다는 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고요. 사실은 들뢰즈는 어렵기는커녕 굉장히 '재미 있다는' 것은, 소문만으로 만족하거나 혹은 소문으로 휘둘리는 게 아니라, 소문과 무관하게 들뢰즈 자신을 몸소 읽는 것으로만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시사비평 나아가 우리 삶에 관련한 이런 저런 사유보다는, '철학' 자체가 가장 재미 있습니다. 사실 철학책을 읽는 게 소녀시대를 보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이 '재미 있다'고 하면, 혹은 '흥분된다'고 하면 흔히 (거의 반사회적인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것인 양) 오해를 받곤 하지요. 이 오해는 물론 '철학'은 어렵다는 이런 저런 미신들과 직결됩니다. 저는 이런 미신들과 단호하게 싸우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철학이 읽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선 저는 '철학은 어렵다'라는 말이,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애정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호하게 배격되어야 할 계급 프로파간다(?)라고 선언하고 싶습니다. 철학이 어렵다는 낭설은 단순히, 오만한 심리의 발로에 불과한데, 가령 제가 고시공부를 위해 읽어야 하는 텍스트들을 읽다보면 철학 텍스트가 이것보다 쉬우면 쉬웠지,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단순한 '비교'의 차원을 넘어서, (사실은 철학이 더 어렵냐 고시공부가 더 어렵냐는 문제는 허위 딜레마, 즉 거짓 문제이지요) 말씀을 드리자면, 적어도 고시 공부를 하는 순간 우리가 읽고 익혀야할 것들이 문제인 것이지, 그게 첫 눈에 어려워 보이냐는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철학에 관해서도 저는 똑같은 논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 어려운 것은 단연코 철학과 무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출간된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 책은 지적평등의 모험에 관한 매우 놀라운 통찰들로 가득합니다. 강력추천합니다.)의 한 구절을 떠올려보자면, "(지적 해방의 첩경은) 수사학의 기술들이 구두 수리공이 구두를 수선하는 데의 그것만큼의 주의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혹은 철학 독서의 관건은, 그것이 단순히 집총제식을 하는만큼의 주의력을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우리들은 김요셉님이 발췌한 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올린 발췌언을 어떤 '제안'으로 이해하고, 독해해 보겠습니다.
3.
김요셉님이 발췌하신,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제가 보기에 독해의 관건은 '변용태', 아마 Affection의 번역어일 겁니다. 사실 스피노자에서 차용된, 스피노자의 사유의 핵심을 이루는 이 단어만큼, 우리나라 철학계에서 용어의 합의가 잘 안 되어 있는 것도 없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변용'에서, '정서', '정동', '변양', '변양태'에 이르기까지... 아마 이 저서(천개의 고원)의 번역자일 이진경 씨는 "변용태(=감정)"이라는 등식을 내세웠는데, 이것만으로는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이라는 게 사실은 일상적 단어의 용례들을 조금 더 다듬는 실천에 불과하듯이, 사실 이 단어는 단순히 'Affection'이라는 단어로 돌아가서 고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응당 느낄 어떤 정서, 정념 내지는 감성적인 기복이라는 단순한 의미에서 사고되어야합니다. 거기에다가, 사람이 즐거움을 느끼면 그것이 금새 주변에 전파되기도 하고,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듯이, '감응'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정감 어리다'라는 일상 용어에서의 그 '정감'으로 Affection, 혹은 Affect라는 동사를 이해 혹은 번역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인간의 정서라는 측면에서, 두번째는 정서의 전염력 있는 '감응'의 측면에서 말이지요. 사실 들뢰즈는 용어의 이 두 측면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클라이스트에게서 가장 기묘한 현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비밀과 속도, 변용태가 그의 작품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이스트에게서 비밀은 내부성의 형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 아니라 반대로 오히려 자체가 형식이 되며 항상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외부성의 형식과 일치한다." 이 구절을 읽기 전에 관건은, 아마 현대성이 Contemporary의 (저도 모를 모종의 프랑스 어의) 명사형일텐데(불문학 전공하시는 분들이 도와주셨으면....), 이는 '동시대성'으로 번역되는 게 더 적절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할 것입니다. 들뢰즈의 사유에서, '동시대성'이란 사실은, 자신의 시대에 격렬하게 대립되는 '반시대성'과 역설적인 동의어를 이루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어떤 작가 내지는 철학자의 '동시대성'에 공감하기 위해서라면, 그들이 자신의 시대에 일으켰던 불화를, 똑같이 우리가 일으키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는 그들의 동시대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클라이스트라는 작가나 그의 작품은 잘 모르지만, 그의 작품에는 어떤 특이한 '정감' 내지는 '정서'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는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들뢰즈/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감정도 "주체"의 내부성에서 벗어나 순수한 외부성의 환경에 격렬하게 투사되며, 이 외부성의 환경에 의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와 발진력을 부여받는다. 또한 사랑이건 증오건 그것은 이미 감정이 아니라 변용태이다." 아마 일상적인 용어 상으로는 거의 비슷한 외연을 지닌 '감정'이나 '변용태'가 갈라지는 것은, 그것이 '주체'의 내부성에 머무르느냐 혹은 외부성으로 투사되며 그 자체의 관성을 지니게 되느냐의 여부에서 갈릴 것입니다. 전에 말했듯이 들뢰즈는 Affection의 두 층위, 일상적인 희노애락과 그것이 감응되고 전파되는 능력, 이 둘 사이의 분리를 끝까지 사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자가 단순한 '감정'으로 주체에 귀속되는 일련의 기분들이고, 후자는 어떤 정서가 극단적으로 확장되서 심지어는 어떤 주체나 자아 그리고 인격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채, '자율화'되어 버린 상태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들뢰즈에게서 전율할만한 것은 바로 이런 극단적으로 실험적인 철학적 사유이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그런 자립화되어 버린 정서는, "화살처럼 신체를 가로지르고", "엄청난 속도와 발진력을 부여받고", "긴장이나 실신, 섬광 또는 가속의 끝없는 계기를 시간에 부여해주며", "전쟁 기계에 속하는 외적인 연결 시스템에 의해 외부화된 채", "그의 몸짓이나 감동은 탈주체화됩니다." "심지어 그로 인해 <자아>가 소멸하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옹알이' 마냥 유행되어 왔던, 신체 없는 기관이라든지, 전쟁기계라든지, 탈영토화라는 것은 어떤 동일한 작용을 가리키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정감Affection, 이중적 측면, 즉 일상적으로는 거의 붙어 있었던, (1) 개별적인 자아가 경험하는 정서들과, (2) 정서 자체의 자율적인 전염력을 극단적으로까지 분리시키는 어떤 작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단일한 실체로 인지되었던 개인의 상상적 자아나 자존감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비인격적 인식작용 같은 것을 상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상정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움직이는 어떤 정서, 인식, 같은 것을 가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의 결과들을 탐구해야한다는 것이죠.
4.
이렇게 이해해 본다면, 이제 남은 것은 지금까지의 독서경험을 일상적인 사례들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볼까요? 거기서 앨리스는 웃고 있는 고양이가 점점 사라지지만, 웃음 자체만은 남은 채 떠돌아다니는 기묘한 상황을 목격합니다. "이상하기도 하지, 웃음 없는 고양이는 몇 번 봐왔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이라니!"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철학자는 들뢰즈를 독서하면서, 바로 이 것을 "기관 없는 신체"(고양이 없는 웃음)과 직결시킬 수 있음을 제안합니다.
이게 단순히 말장난으로 들린다면, 다른 사례를 들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탈영토화'라는 것은 그가 말하는 변용(=정서)Affection의 극단적인 자율화를 일으키는 과정입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것은 어떤 정서가 그것을 촉발Affect시켰던 바로 그 현실적 원인을 떠나 그 자체로 자신의 결과를 재생산해 내는 기묘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가령 정신분석에서 발견한 '강박 신경증'의 사례를 보더라도, 프로이트는 1차대전 참전용사가 끊임 없이 꿈과 환상 속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전쟁의 극단적인 전율을 반복해서 '경험'한다는 사례를 우리들에게 보고했습니다. 이것이 어떤 정서가 단순히 주체에게 귀속되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며 반복하는, '탈영토화'의 바로 그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역사적인 사례를 본다면, '느와르'라는 영화 장르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련의 프랑스 영화들을 참조하면서 미국에서 확립되었던, '탐정 느와르'라는 장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사회가 겪었던 급격한 해체와 혼돈들을 역사적으로 반영하는 대중예술의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느와르'라는 장르가 그것을 촉발시켰던 실제적인 역사적인 배경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이 장르 저 장르로 옮겨다니면서 강력한 전염력을 발휘하며, 거의 모든 장르들에 달라 붙을 수 있는 어떤 서사적 양식이 되어 버렸지요. 가령 오늘날 관점에서 봐도, 매우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홍콩 느와르'를 생각해 봅시다. 이쯤 오면 느와르라는 장르는 그 스스로를 재생산해내며, 자신의 정서를 끊임 없이 산출하며, 영화의 장르와 영역들을 가로지르는, 탈영토화의 과정을 겪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단순히 어떤 심리학적인, 혹은 사회학적인 설명으로 말끔히 처리할 수는 없지요.
들뢰즈가 '사건'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이러한, 탈영토화의 순수한 생성과정, 즉 어떤 설명의 틀로도 말끔히 처리될 수 없는 돌발적인 장르의 '발생'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심리로도, 혹은 어떤 사회적인 원인으로도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바로 그러한 '간극', 혹은 '비-장소'를 사유했던 것입니다.
5.
이렇게 한다면, 남은 일은 들뢰즈와 '대결'하는 것이지요. 저는 사실 들뢰즈의 '반헤겔주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가령, 제가 들뢰즈를 거의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던 <신체 없는 기관>(들뢰즈의 신체 없는 기관을 패러디한 책 제목이지요) 지젝의 책은, 이런 점에서 오히려 들뢰즈가 묘사했던 순수한 '탈영토화'의 과정이 헤겔의 변증법과 매우 가까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건데, 저는 사실 '진정한' 독서는 바로 이러한 의문제기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다음에는 헤겔을 '국가철학자'라고 매도한 들뢰즈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8-24
15:41:49
병장 양동훈
일단 프린트부터 해야겠네요 이건. 차마 눈으로 읽을수가.... 2009-07-15
11:24:51
일병 이승진
일단의 좌절감과 또 밀려오는 조급증. 이래서 책마을을 기피하게 되나 봅니다. 텍스트를 둘러싼 수많은 낭설과 미신의 안개에 허우적 거리지 말 것에 대해서 강력한 지지를.
저의 문제는 그 구두 수리공이 수선할 때만큼의 주의력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 원인은 언제나 텍스트를 경험과 교배시켜서 부르르 떠는 습성에 너무 젖어있어서 인 것 같네요. 어찌보면 혈액형에 대입해서 자신을 찾는 것과 비슷하단 비난을 듣겠군요. 슬퍼라.
원익님의 글을 언제나 강박으로 다가옵니다.결코 비난이나 가치판단같은 게 아니라 이건 저의 문제랍니다. 접속과 동시에 무력감에 사로잡혀버렸네요. 2009-07-15
12:30:09
병장 김요셉
저는 굳이 따지자면 문학도, 좀 더 정확하게는 주정뱅이 정도에 속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제 책읽기는, 시를 읽든 인문서나 철학서를 읽든 비평적으로 사고하기에 앞서 - 대뜸 일종의 '감동'이랄까, 이를테면 '숭고'비슷한, 그런 것들을 텍스트로부터 건져내는쪽으로만 뻗어나가더군요. 주체의 내부성에 위치한 무엇이, 변용태로서 작용하여 주체를 극복하여 외부성으로 뻗어나가는 - 탈영토화하는 - 마침내 "리좀" - 이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어떤 가슴 뭉클한, 이런데서 저는 '흥분합니다'.
때문에 뭐랄까, 아카데믹한(소재의 문제든 방향의 문제든) 글을 쓰는데엔 영 잼병입니다. 애초부터 비판적 읽기부터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다, 숭고나 취향의 문제를 글로 풀어 설명하는건 무진장 어려운 일인듯합니다. 그 흔하다는 '논술' 한 줄 써 본 적 없군요. 이건 좀 심각하게 자책해야 할 문제고,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만.
'제안'대신에 '발췌언'을 올린 것 또한, 저 문장을 가지고 도저히 원익님의 글만큼 밀고 나가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보고 느낀 숭고를 당신에게 도저히, 풀어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아예 그대로 떼다 보여주겠다. 라는 (무책임한)식이지요. 그걸 원익씨는 제안으로 받아들이고 이토록 훌륭하게 써 주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덧.
제가 읽은 판본은 이진경씨가 아닌, 김재인씨가 수고해주신 번역본입니다. '변용태'에 관해 역자가 주석을 달아놓은게 있는데, 어디서 본 것 같긴 하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그 주석을 찾으려 드디어 책을 완독해버릴뻔했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책의 가장 앞 부분에 있습니다. 원익씨가 풀어 써 주신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기왕 찾았으니 옮겨적습니다.
'변용태(變容態)'(라틴어 : affectus, 불어 : affect)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같은 것들을 가리킨다. 특히 그것은 인간의 것일 경우 '정서'나 '감정'이라는 말로 그리고 좀더 일반적으로 '감응'으로 옮길 수 있다. 대체로 '변용태'라는 말로 통일해서 옮기되, 문맥에 따라 '변용태(=감정)'와 같은 식으로 구체적인 뜻을 보충해서 옮기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들뢰즈가 쓴 <스피노자. 실천 철학>의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용(affection)과 변용태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변용은 몸체와 관련되며 변용태는 마음과 관련된다고 생각되지만, 진짜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즉 '변용'은 변용된 몸체의 상태를 기리키며 변용시키는 몸체의 존재도 함축하는 반면, '변용태'는 변용을 주고받는 몸체들의 상호 변이를 고려하기 때문에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몸체의 이행을 가리킨다. 변용태란 역량 / 힘의 증대(→기쁨) 또는 감소(→슬픔)와 관련된다. 따라서 변용을 주고받을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동일한 경우에도 외부의 힘의 크기에 따라 변용시키는 힘의 크기가 달라진다. 변용태(=정서)가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관념과 다시 만날 때 기쁨은 사랑이 되고 슬픔은 증오가 된다. 2009-07-15
13:36:41
상병 윤정기
햐. 잘읽었습니다. 원익씨의 입장은 역시 '지젝주의자' 인가요. 허허.
요셉씨가 발췌언을 올렸을 때, 저 역시 관심을 가졌었습니다만 이런 사유의 전개가 불가능하다는건 역시, 지식과 인식의 협소함때문인것 같네요.
하나 부탁드리자면, '이와 비슷하게 감정도 "주체"의 내부성에서 벗어나 순수한 외부성의 환경에 격렬하게 투사되며, 이 외부성의 환경에 의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와 발진력을 부여받는다.' 에 대해서도 약간의 설명을 바랍니다. 히히. 2009-07-15
16:51:33
상병 김태완
원익 / 역시 스피노지아인이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형식주의자 다우시군요. 아주 어려운 텍스트를 또 창출해 주셨어요.(절대 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글의 서론부에서 철학자들의 일반적 철학 옹호론을 오랜만에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철학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러한 현상을 오만의 심리적 발로때문이 아니라 소극의 심리적 발로 때문이다로 정정하고 싶습니다.저도 사실 철학에 대해 숭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어렵게 생각하여 다가가기 힘든 학문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중 한 사람입니다. 물론 공부를 통하여 용어들이나 이론들을 많이 깨친 사람에게는 철학이 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또한 단어들의 해석이 덧붙여져있는 글이나 철학적 이론들을 사례들을 통해 예시로써 알기 쉽게 풀어 진 텍스트들을 보면 철학이 의외로 쉽게 느껴진적이 허다합니다. 또한 원익님처럼 재밌게 느낀적도 있습니다. 다시말해 관심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그 어떠한 학문보다 심지어 종교보다도 내 존재에 대해 돌아보게 해주고 더 큰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철학이란 학문에 발벗고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현실앞에 닥쳐져 있는 의식주 해결을 위한 문제들을 뒤로하고 과연 내가 철학에 그만한 주의력을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해 자꾸 회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철학에 너무 빠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삶에 회의를 느껴 우울증이나 무력감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철학에 몰두하지 못하는 이유에 한몫을 차지합니다. 변명이었습니다만 오만이란 말에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변명임을 알면서도 변명을 해버렸군요. 이러한 변명을 둘러대려는 마음을 오만이라 칭하시려 한다면 더 이상의 변명의 여지도 없겠습니다.
들뢰즈를 읽자는 이 글은 잘 읽었습니다. 반전으로 들뢰즈를 싫어하고 헤겔을 옹호하신다는 말씀에 '헐'이란 단어를 저도 모르게 내뱉었지만 말이죠. 특히 1차대전 참전용사와 느와르의 예시는 이해를 더 쉽게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탈영토화 과정'은 정신적 질환으로 분리되지 않은가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변용태가 극단적으로 자율화를 일으켜 신체로부터 탈피하여 분리된다는 것은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의 관념을 만나 정신을 놓게 되는 것과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기관없는 신체'는 자아의 존재를 싸그리 무시해 버리는 듯 보입니다. 다른 Affection을 만나 그것과 결합한다 손 치더라도 그 결합체를 나라고 보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기관없는 신체와 Affection 자율화를 통한 외부 현상의 만남이 나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어찌보면 섬뜻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늘 자체 내부적으로 강조하던 주관을 가지고 살자는 생각이 뿌리채 흔들릴까 걱정이 됩니다. 2009-07-15
17:26:21
상병 박원익
이승진/ 바로 그 '강박'이 제가 원하던 어떤 결과였습니다. 흐흐. 저는 단지 오늘날 시대에 만연해 있는 자기개발에의 강박에서 해방되는 것만 원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강박'을 정초하는 게 진짜 목표입죠.
김요셉/ 사실 '발췌'를 한다는 것도 어떤 센스가 없으면 안되지요. 센스가 없다는 게 제 가장 큰 고민입니다. 아무튼 간에, 김재인 씨가 번역한 걸 제가 헷갈렸군요. 그러고 보니 이진경 씨도 뭔가를 번역했던 것 같은데.... 둘은 요새 어떻게 지낼련지. 흐흐. 바로 책을 참고해서 옮겨 적을 수 있는 환경이 부러운 것 같습니다. 덧글로 남긴 김재인 씨의 주석 감사히 잘 프린트해서 보관하겠습니다.
윤정기/ 지젝주의자라가기보다는, 뭐랄까, 아직은 고민하는 중이랄까요. 하하. '이와 비슷하게 감정도 "주체"의 내부성에서 벗어나 순수한 외부성의 환경에 격렬하게 투사되며, 이 외부성의 환경에 의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와 발진력을 부여받는다.' 이 구절 역시도, 제가 서술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하자면 감정이라는 게 아무개에게 귀속되는 그런, '내면적'인 게 남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자율적인 지평(들뢰즈가 '내재성의 지평'이라고 말했던가요 아마)을 획득하고서 스스로를 재생산해내는 과정을 겪는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김태완/ 사실은 누구나 다 '오만하지요.'
헤겔을 옹호한다는 것은 사실, '국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자기 말 그대로 '아나키'적인 사유를 행했던 사람이고, 또한 정치적으로도 바로 그러한 성향이었고요. 그래서 헤겔은 '국가철학자'라고 비꼬았던 것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국가'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전적으로는 찬동하지 못하는 겁니다. 지금 김예찬 씨가 하고 있는 세미나도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저는 보고요.
사실, 말씀하신대로 '탈영토화' 과정은 들뢰즈에게 '정신증'Psychosis과 연계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정신증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편집증'과 대립되는 개념이지요. 편집증은 사회화하는 기능인 반면에 정신증은 반사회적인, 다시 말해 몰개인적인 심리작용이자 인지능력이고요. 이것을 '인지능력의 결핍'이 아니라, 인지능력의 극단적인 전개로 반전시키는 것은 사실 들뢰즈 고유의 '스타일'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요. 흐흐흐흐. 하지만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들뢰즈의 스타일 속에서는 오히려 '콤플렉스'가 제대로 사고되지 않고 있다고 보고요. 오히려, 들뢰즈가 추구하는 어떤 (우리 사고의, 감정의, 인식의) 능력의 극단적인 잠재성이 어떤 '콤플렉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게 제 개인적인 의구심이지요. 2009-07-16
03:59:04
상병 김태완
원익 / 결국 제가 오만하다는 것으로 판명하신거군요. 슬픕니다. 흑
개인적인 생각으로 들뢰즈가 말한 변용태의 자율화는 콤플렉스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기는 할거라는 겁니다.심저에 내재되어 있는 콤플렉스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써 Affection의 변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부끄럽지만 아닌 척 한다거나 슬프지만 기쁜 척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사가 전적으로 콤플렉스에 의존한다고 못박지는 못하겠습니다.
비가오면 그냥 무작정 우울하다거나 주위에 좋은 일이 있으면 나도 같이 기쁘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콤플렉스가 관여되지 않은 현상입니다. 이는 '기관없는 신체'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정서변환은 전적으로 외부의 접촉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 신체 내부의 무엇도 Affection 변화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들뢰즈의 이론과 상통한다 보여집니다. 신체 내부에 무언가(콤플렉스)라도 존재하면 이는 이미 들뢰즈가 추구하는 이론과 어긋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들뢰즈의 이론에 반하는 학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그러므로 원익님의 의구심과 들뢰즈의 주장은 서로 상반된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이 두 의견을 절충하면 어떨까 합니다. 사람의 감정이나 사고, 인식은 여러 케이스들로 나뉠 수 있는 만큼 그리 간단히 정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마 두 의견 말고 여타 다른 이론들로도 Affection의 변화에 따른 스스로의 재생산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지식의 한계를 또 한번 자각하며 추측만 하는 소인을 용서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