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결산 : 재탕 
 상병 김현동 01-09 16:24 | HIT : 504 



 예전 35캠에 올렸던 현동이의 결산입니다. 한마디로 재탕이라는 거지요. 며칠 전에 올린 결산은 이 결산 이후에 읽은 책들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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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지. 빠뜨린 게 좀 있긴 있는데, 2월인가부터 7월까지 읽었던 책들일 겁니다. 독서후기를 따로 썼던 건 그 후기로 결산을 대신했어요. 각각 글을 따로 올리지 않는 건 어차피 책 검색 db를 조금이라도 늘려보기 위한 것이므로.



1. 적과 흑 - 스탕달
 뛰어난 솜씨로 사회를 격렬하게 풍자한 스탕달. 사회풍자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사랑도 역시나 격렬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후반부에서는 까뮈의 이방인이 떠올랐는데, 비단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리라 생각되네요. 다른 소설들에 비해 굉장히 뚜렷한 캐릭터들 또한 아주 특징적이었습니다. 고전다운 작품.

2. 소년시절 - 헤르만 헤세
 범우사 문고판. 쉬는 시간 틈틈이 읽었어요. 그냥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플롯은 없고 스토리만 있는 단편집.

3.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 라우라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맛은 크게 느끼지 못했어요. 오히려 맛본 건 화끈거리는 칠레고추의 화려하고 붉은 맛. 불처럼 뜨거운 고추향입니다. 애잔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이건 주체 못할 만큼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랑이야기더군요. 욕망과 쾌락과 섹스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코끝을 강하게 때리는 칠레고추향을 내고 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처럼.
 다른 것보다 맘에 안 드는 건, 쪽 수는 별로 안 되는 책이 두꺼운 척 하고 있다는 것.

4. 콜레라 시대의 사랑 - 가르시아 마르케스
 낭만에 대한 적나라한 패러디

 마르케스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못한 내가 첫 번째 읽을 그의 소설로 "콜레라시대의 사랑"을 선택한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붙어 다니는 가장 큰 수식어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라는 것인데, 85년에 나온 이 소설 속에서는 아주 간단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장치들만 보일 뿐, 그 수식어를 정당화시켜 줄만한 타당한 근거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거의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말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라는 민음사의 카피에서 나는 일단 보르헤스를 떠올렸다. 어떻게 빌려서 읽게 된 보르헤스 전집(전집을 다 읽은 것도 아니고, 그중에서 일과 이분의 일 권만 읽었을 따름이다)에서 느꼈던 마술적 리얼리즘에 몸을 부르르 떨며 "마르케스도 엄청난 독해력을 내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 제목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분명 "불한당들의 세계사", "픽션들"같은 제목에서 느꼈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는 느낌과는 달랐다. "콜레라시대의 사랑"에서 나는 너무나도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고, 부르다가 목이 쉰 온 몸을 갈가리 찢어버릴 듯 한 낭만성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이런 21세기에서는 거북한 감정을 "백년의 고독"이라는 제목에서 마음껏 누렸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내 스스로와 타협하고 마르케스를 집었다. "소설을 풀어가는 기법은 같을지라도 소설이 보여주는 주제와 성격은 보르헤스의 그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그저 환상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기술, 사실을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콜레라 시대에 일어나는 불멸의 사랑을 더욱더 애절한 마음으로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콜레라시대의 사랑"은 정말 보르헤스의 소설과는 이미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두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랐던 거다. 괜한 겁을 먹었구나라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이것이 정말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가 쓴 것인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백년의 고독"을 먼저 읽었다면 이런 의문을 안 가졌겠지만(아직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도 추측 혹은 기대 이상의 의미는 없다), 분명 "콜레라시대의 사랑"에서는 이 기법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빅토르 위고를 기다리는 젊은 시절의 우르비노 박사에게서만 "픽션들"의 페이지를 넘쳐흐를 듯한 각주에서 맡았던 냄새를 희미하게 느꼈을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백년의 고독"을 읽기 전까지 마르케스를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라는 수식어에서 해방시키기로 마음먹는다.

 마르케스에 대한 카피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였다면 "콜레라시대의 사랑"에 대한 카피는 불멸의 사랑이었다. 콜레라시대의 사랑과 불멸의 사랑. 이 두 이름의 사랑 중 어느 것이 더 가슴을 뛰게 만드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랑은 거울을 마주보듯 한 모습이라 생각되었다. 사실주의 소설보다는 오히려 낭만주의 소설에서나 느낄만한 것을 나는 이미 절절히 느끼고 있었던 거다.

 아직 누가 주인공인지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읽었을 때 까지는 나의 환상이 계속 되었다. 십대의 두 남녀는 누구나 한번 쯤 겪는 첫사랑의 열병 이상으로 서로를 애무했다. 하지만 나의 이 낭만적 상상은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강간을 당하는 순간부터 미친 듯이 파편을 튀기며 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르케스는 깨진 낭만적 상상의 파편에 다쳐 속절없이 피를 흘리는 내게 이제부터 노골적으로 섹스 자유주의의 가장 모범적인 인물을 그려 보여 낸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주 대놓고 낭만주의의 밑바닥까지 비웃어 버린다. 이백년쯤 전에 푸슈킨이 벨킨을 통해 쓴 기록에서 실비오를 한껏 비웃어준 만큼.

50 년이 넘게 한 여자만을 사랑한 남자. 한 여자만을 사랑했고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여자와 섹스를 한다. 한 여자만을 사랑해 오직 그녀와만 섹스를 한다는 것만큼이나 심심하고 구차한 변명이다. 심지어 정열적이기만 한 섹스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대화로서의 섹스조차 그는 성취했었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외투를 잃어버린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이다. 하지만 19세기 말 태어난 라틴아메리카의 아까끼는 외투를 잃고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돈을 벌고 부자가 되어 600여벌의 금의를 바꿔가며 입고, 기어코 롤리타를 죽음에 몰아넣으면서까지(아, 오로지 가여운 것은 아메리카 비쿠냐뿐이다) 잃었던 외투를 손에 넣는다.

 페르미나 다사와 플로렌티노 아리사 모두 자기기만이라는 콜레라에 걸렸던 것이다! 단지 면역능력이 뛰어난 여성만이 이십대가 되기 전에 콜레라에서 치유되었으며, 평생을 콜레라에 시달리는 것은 오로지 플로렌티노 아리사였다. 단 한번 바라본 모습을 사랑하여 평생을 바치는 남자의 모습은 낭만적으로 보이겠지만, 600여명의 여자와 섹스를 하며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아니 한 여자만을 사랑한다고 자신을 속이는 남자의 모습은 낭만의 적나라한 패러디이다.

 대단원에서 결국 다시 사랑하게 되는 두 노 연인의 모습이, 특히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배를 타고 함께 있고자 하는 결말에서 보이는 고귀한 "척" 하는 사랑의 모습이 그들이 늙고 병든 상태로 나누는 섹스만큼 아름답지 못했던 건(그렇다, 자글자글하게 늙어버린 두 사람이 나누는 섹스는 소설 속에 나오는 다른 어떤 섹스보다도 아름다웠다. 비록 그 과정과 결과가 희미할 지라도) 마르케스가 다분히 의도한 것이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오십년 동안 페르미나 다사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수많은 사랑을 나누었고, 마지막 남은 열정을 그녀와의 사랑에 쏟아 부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불멸의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기만의 일생을 산 후 얻은 전리품일 뿐이며 그것이 이렇게라도 괜찮은 모습(두 노인의 황홀한 섹스!)으로 끝을 맺게 된 건 수명을 다한 낭만주의의 죽음에 표하는 마르케스 최후의 경의라고나 할까.

5. 백년의 고독 - 가르시아 마르케스
 고독은 운명이다

 제목이 주제이다. 한 가문의 백 년 동안의 흥망성쇠를 그려내고 있고, 이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그 가문의 고독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작가는, 마치 이문열이 더러운 한국 사회의 이야기를 꼬깃꼬깃 아주 작게, 그러면서도 원래의 것과 가깝도록 극도로 세밀하게 접어서 아주 조그마한 집단 혹은 무리에 집어넣듯이, 부엔디아 가문만의 고독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의 고독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문열과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짓이긴 하지만, 마르케스의 책을 이야기 하면서 이문열이란 이름을 꺼내는 것이 이렇게도 어색한 것은, 소설의 장르적 기법적 구별 따위를 떠나, 마르케스는 더럽고 커다란 것 그렇지만 결코 운명적이지는 않은 것을 작은 무리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고 비극적인, 그야말로 운명적인 사회의 고독을 작은 무리에 집어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종이를 멋들어지게 접어내는 기술은 같은데 종이의 색깔과 질감도 다르고, 접어서 표현해 내는 것의 모양새와 사이즈까지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백 년 동안 돌고 도는 순환 속에서 수많은 아우렐리아노와 아르까디오는, 역시 많은 아르만따와 레메디오스와 함께, 떠올랐다가 잠겼다가 섹스를 하다가 잠을 자다가 전쟁을 하다가 자손을 낳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사라진다. 그래, 이것들 모두가 중요하다. 부유, 침전, 섹스, 수면, 전쟁, 번식, 그리고 그리고 소멸. 무엇 하나 비극적이지 않은 것이 없으며 무엇 하나 고독의 운명을 풍기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 이 파란만장한 가문은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가문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의 실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연은 인간의 생각을 통해 조종되고 인도된다. 하지만 운명은, 괴테의 말처럼, 인간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인간들의 전혀 무관한 외적 상황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대참사 쪽으로 휘몰아치는 법이다. 우연은 고통스럽고 슬픈 상황을 야기할 수는 있지만, 결코 비극적 상황을 야기할 수 없는 반면, 운명이란 언제나 가공할 것이어서, 죄 있는 행위나 죄 없는 행위, 그리고 서로 무관한 독립적 행위들을 불행하게 결합시킴으로써 고도의 의미에서 비극적으로 된다. 이것이 부엔디아 가문이 잠길 수밖에 없는 심해의 실체다. 끝도 없이 일어나는 근친상간과 끝도 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패배, 그리고 백 년 동안 돌고 도는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황금물고기와 아마란따의 수의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바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마술사처럼 기술한다.

 보르헤스(아, 알지도 못하는 보르헤스를 자꾸만 언급하는 내가 너무나도 뻔뻔스럽구나)가 환상을 사실처럼 만들고자 하는 것에 집중한 것에 반해서 마르케스는 사실을 환상처럼 만드는 것에 집중을 한다. 무대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호흡을 규칙적으로 내뱉을 수 없게 만드는 마술사다. 이런 마술사적 기질이 소설이 가진 주제를 극도로 강화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사실이다. 고독할 수밖에 없는 핏줄 - 부엔디아 가문의 운명이 콜롬비아와 라틴 아메리카, 나가서 인류의 고독으로 스멀스멀 물들어 가는 것은 마르케스가 시도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극치로 인해 더 빨리, 더 광범위하게 발휘된 것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라도 동의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죽음의 늪에 빠져있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구원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고 부르는 것 아니겠는가.

6. 검찰관 - 니꼴라이 고골
 너무 빨리 읽혔어요. 아니, 빨리 읽혔다기보다 너무 짧았죠(땀). 아주 날카롭고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달리 할 말이 없지만, 이렇게 짧은 희곡 단 한 편을 한권의 책으로 냈다는 게 신기합니다(민음사 참 대단도 하다!). 이건 체홉의 "벚꽃동산"이 한권의 책으로 나오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일이고, "코"와 "외투"가 각각 한권의 책으로 나오는 것과 전혀 다름없는 일이죠. "검찰관"이 그동안 훌륭한 번역이 없었던 작품이기 때문에 물론 희귀성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건 좀 그렇네요 헛. 조금이라도 더 재미가 없었다면 산 걸 후회했을 겁니다.

7. 시읽는 기쁨3 - 정효구
 정효구씨, 차라리 수험생을 위한 시 해설서를 쓰는 편이 낫겠다 싶습니다. 어쩌자고 이런 책을 3권까지 낸 건지. 그나마 좋은 시를 추려낸 안목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네요.

8. 햄릿 - 셰익스피어
 노코멘트.

9.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가르시아 마르케스
 여든살의 마르케스

 원래 이 소설은 기획된 세 편의 연작 소설 중 하나라고 한다. 어정쩡한 길이도 그러한 사실을 몸소 말해주고 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얇은 두께에 실망했을 만큼 아주 짧은 분량의 소설인데 가르시아 마르케스 스스로도 이 책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으리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단행본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차피 10년 동안 작가는 새로운 소설을 내 놓지 않은 상태였고 그렇기에, 모든 기다림이 그러하듯, 한참이 지났을 때까지 지속되는 경우, 기다림으로 인한 초조함에 반응하는 감각기관은 무뎌지고, 고로, 오로지 불쌍한 기다리는 이들은 초조함을 유발하는 원인자에게 베풀 용서의 아량을 배울만한 시간적 감정적 여유를 가지므로, 마르케스는 더 만족스러운 성과의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세계의 독자들을 몇 년간 더 기다리게 했어야 하는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접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이었다. 전에 읽었던 "백년의 고독"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이 소설과 비교했을 때 분명 분량 상의 압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긴 분량의 소설만이 뿜어낼 수 있는 그것만의 장점을 제외하고도 마르케스가 성취해 낸 이 짧은 소설의 강점은 앞의 것들에 비해서 확실히 보잘 것 없다고 나는 감히 겁 없이 말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기에 대문호에 대한 무례함을 범할 용기를 가진 것이다.

 모든 책들이 그러하듯, 옮긴이는(다행히도 번역의 아쉬움을 최소화 시켜줄 만한 송병선씨이다) 자신의 사명을 마친 후에 작품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 마르케스 10년만의 신간이 가지는 아쉬움이 어쩔 수 없이 풀풀 새나오고 있다. 옮긴이는 작품 내적인 훌륭함 혹은 그에 못지않은 찬사를 받을 만한 독특함 따위를 언급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스스로의 훌륭함이나 독특함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책이 출간됐을 당시의 여러 가지 해프닝과 오랜만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이라는 이름값으로 인한 판매량(결코 고도의 예술성과는 상관없는) 등을 떠벌리며 작가의 변호 아닌 변호를 하고 있다.

 평생을 창녀들과의 섹스로 살아온 칼럼니스트 "서글픈 언덕 선생"이 아흔의 나이에 열 네 살의 창녀 "델가니다"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표현적 측면에서 사실주의적 기술만이 보일 뿐이고, 그의 대표작이라고 여겨지는 소설에서 보아왔던 마술적 사실주의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조금씩 조금씩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것과는 또 다른 차이이다). 사실주의를 환상적인 기술로 펼쳐보였던 20세기 중반의 마르케스는 이미 21세기의 마르케스와는 다른 사람이라 여겨질 정도이다. 그의 적절하고 감각적인 표현력에는 여전히 감탄을 보내 마지않지만 여타 다른 훌륭한 작가들에게서 보냈던 감탄과 차이점을 둘 수 없음에 조그만 아쉬움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표현적 측면의 특징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이에 대한 위로를 받기위해 작품 소재의 독특함을 찾아보려고 눈을 돌리면 그곳에는 또 이미 나보꼬프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사실 아흔의 할아버지와 열넷 소녀의 사랑은 그 모티브를 다른 어디서 받았다고 작가가 주장하든 간에 나보꼬프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열렬한 추종자라 해도 이 두 커플의 닮은꼴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물론, 순수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이 주인공인 마르케스의 소설은 중년 남자와 어린 소녀의 육체적 섹스가 난무하는 나보꼬프의 "롤리타"와는 성격이 아주 다르긴 하다. 그렇다면 그 점에 있어서는 마르케스 고유의 독특함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면 또 아니다. 잠자는 소녀를 결코 깨우지 않고 리비도를 만족시키는 늙은이는, 마르케스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의 집"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고백하겠는데, 나는 잠자는 미녀의 집을 아직 읽지 못했다. 고로 지금 나는 오로지 옮긴이의 말에서 본 것에만 근거를 둔다).

 수백 명의 여자와 섹스를 나누며 평생을 살아가다 마지막에 단 하나의 사랑을 찾는다는 형식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아주 유사하다. 하지만 비슷해 보이는 이 두 소설의 주인공들은, 최소한 내가 보기엔, 비슷한 점 이상의 커다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새파랗게 젊은 시절에 한 여인을 사랑하고, 오직 그녀를 사랑한다는 일념 하에 평생을 산다. 하지만 그것은(지난번 나의 졸필에도 적어 놓았듯이) 50년 동안 수백 명의 여자와 섹스를 하는 모습과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가지는 모습을 오버랩 시키면서 낭만주의의 처참한 패러디가 된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라는 인물은 자기기만의 훌륭한 완성이다. 

 반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주인공은 평생 동안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결코 사랑을 부정한 적은 없었다. 단지 몰랐던 것이다) 살아간다. 그러다가 아흔 번째 생일날 열넷의 창녀를 보고서 누구보다 순수하고 투명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고 인정한다. 이건 낭만의 패러디가 아니라 낭만이다. 말 그대로 낭만, 그것이다. 

 작가는 1980년대에 쓴 자신의 다른 소설에서는 낭만성을 그토록 짓이겨놓고 이십년이 지난 지금 왜 다시 그 낭만성을 노래하는 것일까. 역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그 어떤 냉철한 시선이라도 나이가 들고나면 인간성의 승리를 부르짖는 목소리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일까(물론, 나의 말은 결코 냉철한 시선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낭만을 사랑한다).

21 세기의 마르케스를 보니 만년의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를 두고 악마의 소설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는 것은 내 상상력의 지나친 비약일까.


10. 조그만 입술 - 마누엘 푸익
 진실 대신 스타일

 마누엘 푸익은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그는 1930년대에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때부터 30년대, 40년대 영화들을 보며 자라났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본 것 같은데, 그 중에는 단연 헐리웃 영화가 가장 많았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그가 소년시절부터 보아 온 수많은 영화들은 그의 소설 창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영향의 뛰어난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조그만 입술"이다.

 영화가 그에게 준 영향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주제, 소재, 내용, 구조, 형식, 문체 등 모든 것에서 영화적 기법을 감지할 수 있다. 마누엘 푸익의 소설은 아직 이 한편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다른 작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이런 독특함이 그의 모든 소설에 묻어나리라 생각된다.

 단연코 가장 눈에 띄는 독특함은 바로 소설을 써내려가는 형식의 파괴와 변형이다. 정말 이토록 많은 기법의 실험이 있었던 소설이 있었나 싶다. 그 누구도 해보지 않은 실험들을 아주 다양하게 보여준다. 시점의 변화는 이미 이 작가에게 너무나도 지루한 테크닉이다. 편지를 통한 사건의 전달, 여러 사건의 공시적인 나열, 황지우나 박남철의 포스트 모던한 시처럼 직접적으로 비망록이나 보고서를 보여주는 방법, 상대방의 대화 없이 독백으로 진행되는 대화, 인물의 심리를 단어 단어의 열거로 좇아가게 하는 방법(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든다. 자동기술법을 이미 저만치 초월한 이미지의 편린들이란!) 등 많은 실험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인데, 더 대단한 건 이 실험들이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성취를 해내고 있다는 거다. 그 성취란 아주 복잡하고 난잡하게 보이던 사건들을 후에 가서 명쾌하게 해결되도록 만드는 플롯을 말한다(이런 점에서 나는 영화 "록 스톡 앤 투 스모킹 배럴스"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연재소설의 형식을 패러디 하고 있다. 그래서 1회, 2회 등의 이름이 붙어있는데 각각의 회는 거의 모두가 다른 서술방식으로 씌어있다. 그리고 서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인과관계를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넘어 간 페이지 수가 남아있는 페이지 수보다 점점 많아짐에 따라 보이지 않던 플롯의 뼈대가 드러나고 조금씩 조금씩 살이 붙어가는 걸 볼 수 있다. 마치 조각조각의 직소퍼즐이 끈질긴 시간 후에 하나의 멋들어진 그림이 되듯이. 이 작가는 정말 사기꾼처럼 치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누엘 푸익을 위대한 작가라고 부르는 것에는 많이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조그만 입술"만을 읽은 나의 느낌은 그렇다. 이 소설은 정말로 특이하게 플롯이 스토리를 지탱하고 있다. 플롯은 해괴하고 도발적인 갖가지 테크닉으로 철저하고 강력하게, 그러면서도 아주 신선하게 구조되어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기법적 형식이 소설 그 자체이다. 형식을 빼고 보면 소설은 우르르 무너진다. 플롯이 그토록 튼튼해 보이는 데 반해 플롯을 제외하면 소설이 휘청거리며 넘어진다는 점에서 아주 아이러니하다. 헤세가 그렇고 톨스토이가 그렇듯,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하는 위대한 고전들이 그 어떤 장치도 없이 그냥 혼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과는 정말 다른 모습이다. 

 소설의 모든 여자들은 공통적으로 보바리즘에 빠져있다. 작가가 헐리웃 영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했는데, 소설을 쓴 작가뿐만 아니라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 또한 헐리웃 영화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는 괴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네네, 마벨, 그리고 히프 모두가 헐리웃 영화에서 보아왔던 멋진 미남과의 로맨스를 상상한다. 하지만 결국 보바리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비록 젊은 날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는 것은 아닐 지라도) 주인공들이 원치 않았던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는데, 이것은 그 시대 아르헨티나의 현실의 한 모습이다. 공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그녀들의 모습은 정치적 불안 속에서 현실을 도피하고자 했던, 그래서 더욱 현실의 고통을 뼈저리게 감수해야하던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스토리가 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는 내용에는 이미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실제로 스토리는 바람둥이 남자에 의해 비참해지는 여자들을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 삼사십 년대 아르헨티나 현실의 반영이라는 의미는 사실 어떻게 보면 소설 속의 많은 실험들에 견주어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성과이다. 작가도 알고 있다. 푸익이 칭찬받을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 바비 인형처럼 빼빼마른 스토리를 화려하게 감싸 부풀리고 있는 테크닉과 형식이다(이런 점에 있어서도 이 소설은 영화적이다). 그래서 비평가들보다도 작가들이 이 "조그만 입술"을 좋아하는 것이리라.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사상가요 철학가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 있어서 마누엘 푸익은 위대한 작가가 아니다. 그는 훌륭한 스타일리스트이고 뛰어난 테크니션이다. 그것이 그만의 강점이요 동시에 한계인 것 같지만 오직 그것만으로도 그는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문학사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할 만하다. 그의 감성이나 사유가 아닌 펜을 움직였던 재주 넘치는 손가락에 감탄을 보내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를 집어 든다.

11.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 - 마누엘 푸익
 독서후기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품의 형식적인 면만을 가지고 썼던 것이니 조금 추가해 보자면.

 이라고 시작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힘드네요. 그냥 궁금하시면 책을 읽어보세요. 좋습니다.

( 이 독서후기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어쩔 수 없이 이 소설을 이야기 하면서 꺼내지 않을 수 없는 게 왕가위 감독의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우리나라에서는 "해피투게더"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제목부터가 소설이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걸 알려준다. 하지만 그 영향이라는 건, 결코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다. 사실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장국영과 양조위가 끌어안고 맘보리듬에 춤을 추는 장면은 영화관련 TV프로그램에서 자주 보았다. 거기서 느낄 수 있었던 영화의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에서 추리할 수 있었던 영화의 내용은 이 소설과 직접적인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형식이 책을 펴낸 현대문학에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지만, 굳이 책의 커버에서 왕가위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은 아주 약간 안타깝다. 마치 영화의 원작이라도 되는 마냥.

 마누엘 푸익은 역시나 스타일리스트이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 가장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이번에도 역시 형식이었다. 글을 풀어나가는 그의 재주는 입이 벌어지게 한다. 어떻게 이런 형식으로 소설을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넘어, 어떻게 이런 형식의 소설이 단순한 신선함이나 미학적 효과뿐만이 아닌 훌륭한 문학성조차 획득할 수 있을까라는 감탄하게 한다. 이런 감탄은 분명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바로 전에 발표되었던 소설 "조그만 입술"을 읽었을 때의 그것과 거의 같다. 다른 점이라면 세 번째 소설이 두 번째 소설보다 덜 실험적이고 더 잘 짜여있다는 것이다.

 덜 실험적이라고 말한 것은 일단 "조그만 입술"에서 실험되어 검증된 기법들이 여럿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덜 실험적이고 덜 위험한 방법이지만 덜 신선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검증된 기법들을 강화하고 있다. 기법의 강화는 소설 전반의 구조성을 더 확고히 다지게 만든다. 그의 소설은 두 번째의 것이나 세 번째의 것이나 모두 불친절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읽다가 보면 자꾸 앞을 뒤적이게 된다. 사건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연월일, 그리고 심지어는 시각까지 제시가 된다. 그런데 그 사건들은 시간적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건들이 각각 몇 년도 며칠에 일어났는지 확인해가며 재조합해야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 재조합의 과정이 "조그만 입술"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에서 분명히 더 탄탄하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작가가 굳이 독자에게 사건의 재조합과 같은 수고를 기꺼이 떠넘긴 것은 그냥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일단 이러한 작업으로 인해 독자는 소설의 플롯을 더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다. 사건을 묶었다 풀어내는 것을 독자가 스스로 함으로써 작가의 배신을 겪게 되고, 거기서 소설은 더 극적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단순한 플롯의 구조를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의 전부가 아니다.

 자, 여기서 부터가 진짜 마누엘 푸익이다. 구체적이고 외부적인 장치 즉 사건마다 다르게 서술된 형식, 그 사건들의 비순차적 나열 때문에 독자가 해야만 하는 이 재조합이라는 작업은 마술처럼 그의 예술에 대한 주제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이 불친절한 소설로 독자에게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서 체험하도록 하고 있다. 독자가 손수 해보는 재조합은 그가 소설 속의 글라디스를 통해 드러낸 예술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좇게 만든다.

"그날 밤 저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별장으로 돌아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중 영감을 얻었습니다. 제대로 잠을 이룰 수도 없었죠. 새벽 다섯 시경, 해변에 있던 저는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모래사장 위에서 파도가 남긴 찌꺼기를 줍고 있었습니다. 이런 쓰레기, 전 이런 쓰레기만 사랑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다른 것들은 분수에 넘치는 것 같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잊혀진 실내와, 갈가리 찢어진 신문과 대화하기 시작했지요. 제 작품은 바로 그것이었지요. 즉, 멸시받는 대상들을 모아 그것들과 인생의 한순간, 아니 인생 자체를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글라디스가 자기의 미학을 설명한 부분이다. 그녀는 하찮은 것들을 모아서 조립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조립된 것들은 조립자에 의해 예술성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마누엘 푸익이 자신의 소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각각 다른 형식으로 서술된 사건들은 실험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그것들이 재조합 되었을 때 비로소 미학적 성취를 해낸다. 작가는 독자에게 글라디스와 같은 조립자의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독자에 의해 부여받는 예술성이라. 오, 놀라워라.

 이러한 예술에 대한 그의 철학은 소설의 각 장 처음에 인용되고 있는 영화 대사들에서도 드러난다. 작가가 대중예술인 영화의 적절한 대사를 발췌하여 소설의 중간 중간 삽입시켜 예술성을 부여한 것은 글라디스가 파도에 떠밀려 온 잡동사니들을 선택하여 줍고, 그것을 자신의 방에 배치시켜 예술성을 부여한 것과 똑같은 형태이다. "조그만 입술"에서도 매 장의 처음에 탱고 가사를 인용하며 보여주었던 이것은 기법에서 머무르는 수준의 것이 아니고 문학을 향한 그의 철학이요 지향점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조립자의 역할을 부여하여 소설의 예술성을 완성하는 능동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힌 재주이다. 다만 글라디스나 마누엘 푸익처럼 예술성을 부여할 개체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은 독자로서의 숙명적 한계이니 너무 욕심을 부리지는 말자. 그래도 작가는 작가고 독자는 독자이니까. 뒤샹이 갤러리의 관람객에게 서서 구경만 하도록 만든 것에 비해 마누엘 푸익은 독자에게 독자 이상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푸익을 천재라 부를 만하지 않은가?

12. 거미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제 일기에 이렇게 적혀있네요.
344p, 367p 오타 있음. 거미여인의 키스는 후기를 어떻게 못 적겠다. 내 지식의 밑천이 너무 드러날 것 같다. 메타텍스트 - 상호텍스트, 중고언어 와 같은 것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남성과 여성, 동성애, 성과 권력, 억압에 관한 것들에 대해 프로이트적 관점을 알고 있어야 이 소설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고로, 그것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나는, 패스. 나중에 결산을 할 때 간단하게만 언급을 해야지. 재미있긴 재미있었다. 그리고 분명 의미 있는 작품인 건 확실한데, 그래도, 조그만 입술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에는 약간 못 미친다는 느낌이 있다.

 독서후기를 쓸 수 있었다면 아주 긴 후기가 나왔을 할 책입니다. 몰리나라는 남성 동성애자와 발렌틴(역시 남자)이라는 정치범이 한 감방에서 지내며 하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요, 게이가 정치범에게 자기가 보았던 영화를 이야기 해줍니다. 이 두 주인공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것보다 중점적인 건 몰리나가 서술하는 영화의 이야기입니다. 액자 소설의 성격이 강하다는 거죠(중고언어, 상호텍스트성). 총 7편의 영화를 들려주는데, 이 소설이 발표된 사회적 시기를 반영하여 해석했을 때 조금 더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 당시의 사회를 반영하지 않고 해석하여도 상당한 의미를 지녀요. 대체로 일반론적이라는, 뭐 그렇다는 얘깁니다.

13. 어머니 - 막심 고리끼
( 이것 역시 제목이 생각이 안나요)

 평생을 남성과 사회의 학대 속에서 살아온 어머니. 어머니가 세상을 사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오일장의 소처럼 남편에게 팔린 어머니의 인생은 결혼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가 육체적 고통의 연속이었고 그 폭력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말 한마디, 발 한걸음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옭아매는 정신적 공포의 도가니뿐이었다. 잔을 들이켜는 횟수에 비례해 주먹질을 해대며 치고 박고 싸우는 술주정꾼과 아내를 언제 어느 때고 마음 내키는 대로 때리는 남편이 일상 속에서 지극히 평범해 그 누구도 이토록 비인간적인 폭력과 무질서를 저지하지 않는 1900년 근처의 러시아는, 발목에 닻이 묶여 수면으로 떠오를 수 없는 꿈과 희망과 진실의 무덤이었다. 어머니는 깜깜한 밤밖에는 없어 앞이 보이지 않는 그 무덤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는 신앙처럼 오로지 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러시아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지러운 사회는 선구자를 잉태한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공장촌의 빠벨은 러시아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는 러시아의 모성이 길렀다. 광활한 대륙의 모성이 품어 기른 빠벨은 동시에 그의 뼈 마디마디마다를 바늘처럼 차갑게 찌르는 사회의 모순 속에서 자랐다. 수많은 노동자가 이러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자신의 살과 수명을 베어 먹으며 살았지만, 그들 속에서 빠벨이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매일 밤 술을 곤드레만드레 마시고 들어와 어머니를 아무런 이유 없이 죽지 않을 만큼 때리다 감히 의미 없다고 할 만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술집에서 한낮의 중노동과 그 중노동의 대가로 돌아오는 찢어지는 배고픔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기 위해 그와 똑같은 처지의 자신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평범한 노동자를 원망하지 않고, 고통과 굶주림과 뿌리까지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철저한 비인간성을 초래한 사회 구조의 현실을 직시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며, 직접 눈으로 본 아수라장을 변화시키기 위해 느낀 것과 깨달은 것을 몸으로 실천할 만한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렇지 않다 해도, 그의 위대한 용기는 분명 어머니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이데올로기는 진실이 될 수는 없다. 진실은 관념이나 체제, 변화가 가능한 패러다임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오직 신앙에만 존재한다. 빠벨이 자신의 몸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은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체제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신앙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그에게 진실이란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이며 삶의 진실을 위한 그의 투쟁은 사도 바울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빠벨을 품어낸 어머니는 러시아를 품어내는 어머니였다. 태초의 러시아에서부터 그랬듯이 19세기의 러시아도 어머니의 품속에서만 존재한다. 대지 같은 모성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용서와 사랑의 대지는 그 어떠한 강력한 외부의 압력에 대해서도 당당하며, 모든 칼과 창을 튕겨낸, 아니 피를 뿜으며 받아 견디어낸 대지의 가슴에는 결국 아들에 대한 끝이 없는 믿음만이 남는다.

 진실을 위해 싸우던 아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조차 어머니는 절망하지 않았다. 빠벨이 감옥에 간 것은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삶의 진실을 선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실을 보는 눈은 조금 더 많은 이가 가질 수 있었지만 그 진실을 선포할 용기를 지니는 것은 위험하리만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빠벨은 담대한 지도자였다. 진실을 부정하지 않을 만큼 그의 신앙은 곤고했다. 어머니가 절망하지 않은 것은 아들이 선고받은 시베리아 유형의 고통이 어느 정도도 커다란 것인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머니는 삶의 진실 앞에 떳떳한 아들의 행동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모두가 자신들의 선구자로 받드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머니 또한 진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진실은 사상도 아니고 체제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그저 아들, 빠벨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빠벨이 이데올로기를 진실로 여긴 것은 이데올로기가 진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진실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빠벨이 진실성을 부여한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진실은 아들이었고 그것은 어머니가 부여한 진실성이 아니라, 탯줄로 자신과 연결이 되어있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진실이었다. 아들이란 어머니에게 그런 존재이다. 빠벨이 삶의 부조리를 흩어뜨리고 바로잡기 위해 놀라운 이성으로 이데올로기를 신앙한 것과는 달리 어머니는 빠벨을 이미 최초부터 사랑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러시아를 만들기 위한 어머니의 운동은 빠벨의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빠벨은 자신이 진실성을 부여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삶을 바친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이데올로기는 홀로 서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데올로기는 아들의 화신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아들 앞에 그렇게 이데올로기는 서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진실은 아들이라는 일차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에서 이데올로기라는 이차적이고 비구체적인 관념으로 이어진다. 어머니가 헌병에게 뭇매를 맞아 피를 토하면서 그토록 외치며 품에 안았던 삶의 진실은, 부조리와 모순을 뒤엎을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어머니가 그토록 사랑하는 빠벨, 아들이었다. 그 순간조차 그녀는 운동가나 혁명가가 아니라 그냥 어머니였던 것이다. 모든 세상의 어머니처럼 위대한.

 그 어떤 사상과 체제와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덮쳐 와도 변함이 없다. 양파의 껍질처럼 한 겹 한 겹 벗겨내면 그 속의 가장 따뜻한 곳, 불멸의 고지에는 오로지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아가페만이 있다.

15. 눈 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인간 밑바닥의 폭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진정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을 주제 사라마구는 사백 여 페이지에 걸친 이 상상력의 결과물에 나타내고 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그것 보다 훨씬 이전에,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답다는 것이 과연 규정지을만한 것인가.

 눈이 머는 전염병이 세상을 뒤덮는다. 그리고 그 중 단 한 사람만이 시력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으로 작가는 두 가지 극단의 상황을 만든다. 눈을 잃은 사람들의 상황과 그 불쌍한 사람들 사이에 혼자 눈을 뜨고 있는 여자의 상황.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도 분명 눈 먼 자들은 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눈 먼 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현실의 눈 먼 자들은 그들의 얼굴에 맑고 튼튼한 두 눈알을 가지고 있지 않을 지라도, 사실은 간접적인 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옳다.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의 눈 먼 사람들에 대한 보호는 곧 시력의 공유이다. 눈 먼 사람이 지나갈 때 눈 멀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비켜갈 것이며 눈 먼 자가 위험한 처지에 있다면 굳이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해도 눈 멀지 않은 사람들은 그에게 외칠 것이다. 조심해요! 길을 잃거나 방향감각을 잃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 있다. 택시나 버스를 타고 다닐 수도 있으며 누군가 읽어주는 책을 들을 수도 있다. 사실, 우리 곁의 눈 먼 사람들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긍휼을 베풀어야 마땅할 안타까운 사람들이지만, 소설 속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주위에는 모두 나처럼 눈 먼 사람들뿐이다. 길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나는 일 분도 되지 않아 방향을 잃는다. 집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모른다. 주춤주춤 거리며 앞으로 가다가 앞에서 다가오던 다른 눈 먼 사람과 부딪혀 넘어진다. 일어나 이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장애물에 부딪히거나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더 안전한 자세를 취한다. 두 발과 왼쪽 팔로 땅을 짚고 오른 팔을 앞으로 휘휘 저으며 엉금엉금 기어간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소용없다. 그들은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지를 모르며 나처럼 세 발로 정처 없이 기어가고 있을 뿐이다. 사거리에서 어디로 가야 나의 집이 있는 동네가 나오는지는 그들도 똑같이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누군가와 무리를 지어 다닐 수 있다면 그것은 다행이다. 내 몸을 해치려는 무리(개나 고양이나 사람과 같은)를 만난다면 하나 보다 둘이 세니까. 목숨을 부지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는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면, 먹을 것과 잘 곳과 입을 것만이 눈 먼 내가 당장 구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거침없이 묘사한다. 너무나도 발가벗겼기 때문에 감추는 데 익숙한, 그리고 감춘 것을 보는 데 익숙한 우리들에게 거북하기까지 하다. 눈 먼 사람들 속에 사는 눈 먼 사람은 더 이상 타자를 생각할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타자를 생각하는 것은 여유로운 자들의 사치에 지난다는 것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질서가 질서가 되어가는 모습은, 카오스가 일상이 되어가는 모습은, 그러니까 사회(질서와 조직이 없는 무리도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면)가 혼돈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사람다움의 범주를 벗어난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앞서 달리다 넘어진 사람들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 밟혀 죽는 사람들은 그들을 밟아 죽인 사람을 욕할 수도 없다. 둘은 똑같이 눈 먼 사람들이니까. 밟혀 죽은 사람도 이미 여러 명을 밟아 죽인 살인자일 수 있으니까.

 읽는 사람의 눈살을 잔뜩 찌푸리게 만들 만한 장면도 역겨우리만치 묘사해낸다. 도시 전체가 똥과 오줌과 쓰레기와 죽은 동물들(개나 고양이나 사람과 같은)로 뒤덮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깔끔하게 뒤를 닦는 일은 불가능하다. 첫째로 그동안 볼일을 보던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둘째로 더러운 것을 보이지 않게 치워줄 상수도가, 이제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눈이 멀었기에, 더 이상은 없으며, 셋째로 이미 다른 사람들이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싸놓은 똥오줌이 손과 발과 온 몸에 묻어 있어 더 이상의 불결함을 느낄만한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다운 식생활도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사람다움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썩어서 딱딱해진 빵조각이나 시뻘건 생 닭과 생 토끼는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새나 개나 고양이들이 반쯤 뜯어먹다 버려둔 굶어죽은 시체들이 길에 돌부리처럼 차이는 이 도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식량이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지하 창고로 내려가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밟혀서 죽은 수십 수백 명의 목숨과도 같은.

 눈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의사의 아내(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이름은 사람의 옷차림이나 얼굴 생김새 따위의 겉모습과 같은 거니까. 눈이 없는 도시에서 겉모습은 무의미하다)뿐이다. 아직 눈 먼 사람이 눈 멀지 않은 사람보다 적은 숫자일 때 안과의사인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 눈이 먼 척을 해 수용소로 함께 들어온 이 여자는 선(善)의 화신이 된다. 끝까지 일행의 눈이 되어주는 그녀의 희생은 어쩌면 소설이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 현실이라면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룩하다(그래서 이 캐릭터는 소설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어느 정도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살인하는, 그리고 악의 살인에 조차 죄책감을 가지는 그녀는 무질서한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정의로 그려진다.

 존엄한 수치심의 마지막 끝자락이나마 부여잡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은 작가가 폭로하는 인간의 본성에 결코 반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분명 가진 것을 모두 잃었을 때 진정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말을 하고 있다. 즉 의사의 아내를 통해 주제 사라마구는 그녀의 모습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의 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휴머니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녀가 정의감을 잃지 않은 것은 그녀가 잃지 않은 두 눈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눈이 멀었다면 분명, 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정의로운 살인자가 아니라, 썩은 빵 한 조각이라도 얻기 위해 넘어진 사람들을 밟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강철 같은 의지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눈 먼 자들이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불행인 동시에 행운이다. 그들이 다행스럽게도 보지 못한 것들을 의사의 아내는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아야만 했다. 페스트가 휩쓴 중세 유럽보다 처절하고 나치스가 지나간 전쟁터보다 끔찍하고 진창으로 뒤덮힌 돼지우리보다 불결한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사실 모두가 눈 먼 세상에서 눈이 먼 것과 모두가 눈이 먼 세상에서 눈이 안 먼 것 중 어느 상황에 처하는 것이 더 불행한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 지금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의 선(善)이 진실로 나의 것인가. 진실로, 내가 선한 것인가.

16. 적의 화장법 - 아멜리 노통브
 전에 언급한 적이 있긴 있는데, 처음에는 닉 오브 타임(죠니 뎁!)이 생각나다가 나중에는 파이트 클럽(오, 브레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이라니!)이 생각나는 소설이었습니다. 크게 충격적이지도 않았고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는데, 확실히 속도감은 있더군요. 그다지 현학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다.

17.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 아멜리 노통브
 적의 화장법과 같이 읽었어요. 플롯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고 그냥 스토리의 나열만 있었는데, 주욱 오르막을 오르다가 뻥 터져버리는 적의 화정법보다 더 좋았습니다. 역시 속도감은 느낄 수 있었고, 살인자의 건강법을 포함해 다른 아멜리 노통브의 책들이 더 낫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뭐, 누가 공짜로 책을 빌려준다면 몰라도.

18. 빌러비드 - 토니 모리슨
 오우, 아주 깊이 있는 책. 분위기는 아주아주 다르지만, 다 읽고 나니 스무 살 때 동숭아트홀에서 혼자 봤던 오구가 생각나더군요. 그야말로 살풀이굿 같았어요. 문체도 정말 유려하고 문학적으로 어디하나 책잡힐 곳 없는 대작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고, 작가도 동시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고전스러운 소설이었어요.

19. 밤으로의 긴 여로 - 유진 오닐
 독서후기 있음. 굉장히 좋음. 누구에게나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 헉, 독서후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건 일기장에 쓰고 보급창으로 옮긴 게 아니라 보급창에서 바로 썼던 거라. 아마 일기장에 복사를 안 해 놓은 듯)

20. 오셀로 -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는 어디서 어떤 식으로 언급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셰익스피어라는 말밖에는.

21. 고도를 기다리며 - 사뮈엘 베케트
 고도는 구원이고 빵이고 뭐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짧은 글이 책 뒤에 있었던 것 같네요. 네, 고도는 구원이며 빵입니다. 인간은 고도를 기다리는 존재이구요. 아주 힘없는 존재죠. 고도에게 다가갈 수도,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도 없어요. 그저 기다릴 뿐. 20세기 최고의 희곡이라고 인정하기는 좀 머뭇거려지지만, 의미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22.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정말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은 죄다 읽어보려구요. 오만과 편견 이후로 이렇게 유쾌하게 공감을 하면서 읽었던 책은 없었어요. 모든 한 줄 한 줄에 밑줄을 치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불끈 솟았습니다. 연애하는 사람에게, 연애를 했던 사람에게, 연애를 할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하겠습니다.

( 이건 얼마 전에 독서후기를 따로 썼었죠)

23. 채털리 부인의 연인 - D. H. 로렌스
 일기장에 이렇게 적혀 있네요.

 채털리부인의 연인은 주제의식이 아주 선명하다. 거의 뭐 대놓고 주장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마치 부활의 톨스토이가 그러하듯). 인간성의 억압. 기계적인 사회의 압력에 짓눌리는 인간들의 해방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성적 욕구의 자유로운 분출이라고 말하고 있다. 뭐, 분출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좀 이상하고 어색하지만, 대충 그렇다는 거다. 단순히 육체와 육체간의 섹스도 물론 나는 100퍼센트 긍정하는 입장이지만, 로렌스는 거기서 그치는 것을 오히려 지양한다. 로렌스는 인간성과 인간성의 합일, 그것이 비인간성에 대한 승리라고 말한다. 아주 많은 섹스신이 나오는데, 한 번 한 번 할 때마다 지향점으로 수렴하는 주인공들을 느낄 수 있다. 더 큰 오르가슴으로, 더 큰 환희로, 더 큰 신음으로, 그리고 더 따뜻한 심장으로. 성적 불구인 클리퍼드가 상징하는 것, 그의 하인인 사냥터지기가 상징하는 것, 그리고 한 곳에서 해방해 다른 한 곳으로 이동하는 코니가 상징하는 것. 그것들은 모두 아주 원형적이며 일차원적이고 상상력의 날개를 묶어놓을 만큼 선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의도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하튼 나는 만족한다. 얼핏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그것보다는 백 배 쯤 쉽다. 고로, 독서후기를 써 볼 생각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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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었나? 후기는 못 썼습니다(......).



 병장 조주현 
..... 대단한 압박이다. 
 푸익이랑 마르케스를 빨리 읽어봐야겟다. 01-09   

 병장 이영준 
 많이 읽으셨네요 정말. 01-09   

 상병 김현동 
 많지 않은데 독서 후기를 여러 편 모아놨더니 순전히 많아 보이는 거(....). 
 그냥 긴 거죠. 많은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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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으로의 긴 여로 독서 후기 잃어버린 거는 꽤 아까워요.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이었는데. 01-09   

 일병 이호석 
 마르케스...빨린 읽어봐야 할텐데. 요즘 너무 피곤해요. 01-09   

 일병 김정민 
 새로운 책이다. 이중에 저도 몇권 읽어봐야겠어요. 
 지금도 관물대에 이번휴가때 가져온 책으로 가득차있습니다. 행복합니다. 01-09   

 병장 배진호 
 음 하나씩 올려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생각할 시간과! 대답할 시간 

 그리고 그 내용을 더 물어볼 시간적 여유정도는 주셔야지요!! 01-09   

 상병 이건룡 
 오랜만입니다. 훈훈한 옛 책마을 시절 독서 목록들이 많이 보이는 군요. 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