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Bernard Werber - 신  
병장 김민규  [Homepage]  2008-12-10 10:40:47, 조회: 202, 추천:0 

신
Bernard Werber

주의 : 아직 책을 읽지 않았으나 읽을 예정으로 하고 있는 독자는 다소간의 미리니름의 소지가 있으니 이 글을 지나치기 바랍니다.


1. 백과사전

태초에...
무(無)가 있었다.
태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떠한 빛도 어둠을 흩뜨리지 않았고, 어떠한 소리도 고요를 깨뜨리지 않았다.
도처에 공허가 가득했다.
최초의 힘인 중성의 힘이 지배하던 때였다.
하지만 공허는 무엇인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때 무한한 우주 공간 한복판에 하얀 알이 나타났다. 모든 가능성과 모든 희망을 품고 있는 우주 알이었다.
이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 5권


2. 물음

누가 보았을까?
누가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3. 백과사전

설령 전자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한들, 자기가 원자라고 하는 훨씬 방대한 집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까? 원자는 자기가 분자라고 하는 더 커다란 집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분자는 자기가 예컨대 치아라는 훨씬 거대한 집합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또 치아는 자기가 인간의 입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물며 한낱 전자 주제에 자기가 인체이ㅡ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 있을까?
누가 나에게 자기는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마치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같다. ‘한낱 전자인 내가 장담하건대, 나는 분자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다’ 또 누가 나에게 자기는 무신론자라고 말한다면, 그건 마치 이렇게 단언하는 것과 같다. ‘한낱 전자인 내가 장담하건대, 내가 경험하는 것보다 높은 차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만약 그들이 속해있는 세계 전체가 그들의 상상력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뭐라고 할까? 만약 전자가 원자, 분자, 치아, 인간의 차원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도 행성, 태양계, 우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도 행성, 태양계, 우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나아가서 우주 역시 현재로서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훨씬 더 큰 어떤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전자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는가?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들어 있고, 작은 것 속에 더 작은 것이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우리는 우리를 추월하는 한 세트의 러시아 인형 속에 들어 있다.
이제 감히 말하거니와, 인간이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데는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세계보다 높은 차원에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의 무한한 복잡성을 감지하고 아찔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은 바로 그런 현기증에 맞서 안도감을 얻기 위한 한낱 외관이 아닐까?
- 애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 5권


4. DNA : 세계를 이루는 세 가지 힘

양전하를 가진 양성자와 전하를 갖지 않은 중성자와 음전하를 가진 전자가 모여 하나의 원자라는 집합을 이룬다. 이 세계를 이루는 3개의 힘, D와 N과 A는 그렇게 규정되었다. (여기서의 DNA는 생명공학에서 밝혀져 있는 염기서열을 본뜬 것이기는 하나 실제의 그것과는 무관함을 밝힌다. 염기서열의 구성체는 4종이다) 세계가 이루어져 가는 원리 역시도 이 3원적 태도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남과 함께(Association), 남과 맞서서(Division), 남과 무관하게(Neutral).
D는 devise나누고 decoupe자르고 detruit파괴하고 desintegre해체한다. 실질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실체는 지배의 힘, D뿐이다. 빛이 있되 어둠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빛의 부재不在가 있을 뿐이다. 열이라는 실체는 존재하되 차가움이라는 것은 관념적 개념일 뿐이다. 섭씨 -252도라는 수치는 열의 부재를 나타낼 뿐 그 반대 개념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달은 밤을 비추지만 그것은 태양빛의 반사에 불과할 뿐 독립적인 광원光源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랑愛과 선善은 악惡의 부재로 증명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사에 등장한 도덕의 원칙은 사실은, 금기와 절제에 기반을 둔 소극적 행위의 준거 아니었던가. 우리는 악한 것이 무엇인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으나, 선한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머뭇거리게 된다. 거짓되지 않고, 해를 입히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것.  하물며 D와 A 사이의 어딘가인 N이 규정될 수 있겠는가. 다만 D를 +1로, A를 -1로 가정하고, N을 그 정중앙인 0에 두고자 의식적으로 나열했을 뿐이다.
인간은 파괴와 죽음의 본성에 이끌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갈망할지언정 불안하게 여긴다. 반면에 실패는 그들을 낯익은 세계, 과거의 세계로 이끌기에, 인간은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통속적인 상상 체계에서 자유는 언제나 의심을 받고 방탕과 연결되기 쉽다. 인간은 행복을 건설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불행을 줄이기 위해 애쓴다. 공포가 그들을 눈멀게 한다. 우리의 불안은 미래를 상상하는 우리의 능력에 기인한다. 농업을 발명한 인간이 미래를 내다보게 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상상이 꽃피었고, 장례의 풍습이 생겨나 발전하면서 종교라는 형태로 굳어졌다. 인간은 돌을 쌓고, 자신들을 상징하는 토템을 정하고, 정령을 숭배하며 기우제를 지냈다. 세계의 실체를 알 리 없는 작은 원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 이해의 방향 역시도 짧은 안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었으나, 이 세계의 복잡성을 감지한 인간들에게 안도감을 주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종교란 기성복이나 즉석식품 같은 것이어서,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생각을 모두에게 강요한 것에 불과하다.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 그것은 자아를 넘어서는 어떤 초월자를 느끼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 것, 혹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는 길이다.


5. 세계의 시작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지금처럼 짜임새 있는 모습이 아니었고, 생물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어둠이 깊은 바다를 덮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생겨라!’ 그러자 빛이 생겼습니다.  그 빛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물 한가운데 둥근 공간이 생겨 물을 둘로 나누어라’ 하나님께서 둥근 공간을 만드시고, 그 공간 아래의 물과 공간 위의 물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공간을 ‘하늘’이라 부르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래의 물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은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은 바다라고 부르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풀과 씨를 맺는 식물과 씨가 든 열매를 맺는 온갖 과일나무를 내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빛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누고, 계절과 날과 해를 구별하여라.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것들은 하늘에서 빛을 내어 땅을 비추어라’ ... 하나님께서 두 개의 큰 빛을 만드셨습니다. 그 중 큰 빛으로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 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또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빛들을 하늘에 두셔서 땅을 비추게 하셨습니다. 또 그 빛들이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움직이는 생물을 많이 내어라. 새들은 땅 위의 하늘을 날아다녀라’ 하나님께서 커다란 바다 짐승과 물에서 움직이는 생물과 날개 달린 새를 그 종류에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온갖 생물을 내어라. 가축과 기어다니는 것과 들짐승을 각기 그 종류에 따라 내어라’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들짐승과 가축과 땅 위에서 기어다니는 생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1) 우리의 모습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온갖 가축과 들짐승과 땅 위에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 그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이 다 지어졌습니다.
- 저자 미상, Ch.1, Genesis, 쉬운성경


6. 현신現身

‘순수한 정신이었다가 다시 물질로 된 존재로 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한 마디로 <신>의 세계관은 규정된다. 인간이 죽고 죽어 천사가 되었다. 천사는 세 명의 인간을 담당하여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때로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천사는 자신이 왜 그들을 돕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치아의 작은 분자가 인간이라는 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던 천사가 물질의 옷을 입고 신神 후보생이 되었다.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모든 것을 넘나들던 영靈의 몸이 인간의 형상이 되어 작은 스크린에 투영된 [18호 지구] 속 한 부족을 맡아 144명의 인간을 이끈다. 신은 영매를 통해서 계시의 형태로 개입할 수도 있고, 그가 가진 힘의 상징인 앙크 십자가의 D버튼을 사용해 벼락을 내릴 수도 있다. Age of Empire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배경설정에 지극히 문명 진화론적인 구도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부족이 수렵생활을 하다 동굴을 발견하고, 석기를 이용하며, 불을 사용하고 농경문화를 발달시킨다. 정착을 택하거나 침략자들의 사냥감이 될 것을 우려해 유랑생활을 고수한다. 어느 쪽이건 목적은 하나, 생존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부족은 민족이 되고 영역은 확장된다. 필연적으로 싸움이 일어나고 D력이 냉혹한 세계에서의 유일한 길인 것처럼 비쳐진다.


7. 17호 지구

사실 [18호 지구]를 다스리기 전에, 신 후보생들은 [17호 지구]를 거쳤다. 2035년을 살고 있는 도시문명의 행성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건물들은 높아지고 차선은 갈수록 늘어난다. 하늘에는 온갖 형태의 비행체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2222년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 도시의 팽창이 중단되더니 살아 숨 쉬듯 연기를 뿜던 도시는 사라지고, 창과 화살로 무장한 몇 개의 부족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유는 종교적 맹신이었다. 배타와 금기에 바탕을 둔 종교를 신봉하는 몇몇 국가가 한 통속이 되어, 민주적인 가치를 억압하고 자기네 종교의 교리를 강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금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죽이고 다른 종교의 사원에 불을 지름으로서 물의를 일으켰다. 심지어는 저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희 편의 온건한 사람들까지 공격하며,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폭탄을 설치해서 무수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런데도 민주주의자들은 그런 맹목적인 폭력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몰랐다. 민주적인 가치들을 존중하면서 폭력에 맞서는 길을 찾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들이 기세를 올리면 올릴수록, 민주주의자들은 그 이유를 자기들에게서 찾기 바빴다. 부당하게 매를 맞은 사람이 스스로 맞을 짓을 했다며 반성하는 꼴이었다.
민주 국가들은 차례차례 무릎을 꿇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정면으로 맞서기는 커녕, 재앙을 중단시킬 방안을 놓고 자기들끼리 싸워댈 뿐이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질문이 있었고, <금하는 사람들>에게는 답이 있었던 셈이다. 민주적인 나라가 고립된 작은 구역으로 줄어들고 그마저도 광신도들의 맹목적인 테러에 시달리고 있을 때, <금하는 사람들>의 진짜 우두머리가 마침내 정체를 드러냈다. 그 자는 이미 얼굴이 얼려진 테러 집단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다. 오히려 천연자원을 많이 보유한 가장 부유한 나라의 공식적인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였고,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줄곧 천명해 왔던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금하는 사람들>의 체제에서는, 이중성이 군사적인 책략으로 여겨졌던 것을 민주주의자들은 몰랐다.
과학과 기술은 종교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져 억압되고 폐지되었다. 예술은 철저하게 검열되었고 의사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시간이 더 흐르며 독재자는 늙어 죽었지만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다툼으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신정神政제국은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2222년의 창과 화살로 무장한 몇 개의 부족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후보생들은 폐허가 된 17호 지구의 잔해속에 남은 인간들을 이끌어 다시금 희망이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이는 신 후보생들을 가르치는 진짜 신 크로노스의 교육과정의 일부였다. 두 시간의 <연습게임>이 끝나고 그 결과를 검토한다. 그리고는 앙크 십자가를 들어 그 모든 것을 소멸시켜 버렸다.
인류에 애착을 느낀 몇몇 후보생이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대답은 단호하다. ‘오염된 대양에 맑은 물 한 방울이 떨어진들 무엇이 달라지겠나? 이제 물을 완전히 갈아 버려야 해. 낡은 것으로는 새것을 만들 수 없다. 너희는 이 행성의 주민들과 친해지기 시작해서 애착을 갖는 모양이지만, 이들에게는 수백만 년에 거친 오류와 폭력이 빚어낸 나쁜 습관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 이들은 높은 단계로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는 고대인들의 의식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노예의 정신상태를 보이고 있다. 우리가 이들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미 연구가였던 애드몽이 끼어들어 반론을 제기한다. ‘동물들도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청천벽력이다. ‘이들의 미덕을 애써 찾지 말고, 이들의 악행을 상기해라. 너희는 이들의 고문과 광신, 비열한 짓거리, 그리고 막판의 야만적인 작태를 보지 않았는가? 모든 것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폭력적인 종교 하나가 이렇다 할 저항도 받지 않고 너무나 쉽게 온 행성에서 득세하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런 일은 일어났고, 앞으로 또 일어날 것이다. 뤼시앵, 자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 인간들은 끝장이 난 것이다’

D력이 발사되고 남극에서 거대한 빙산이 떨어져 나가며 재앙은 시작되었다. 대양의 수위가 높아지고 골짜기가 사라진다. 산봉우리들은 섬으로 변했다가 결국엔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광대한 일곱 대륙이 있던 행성에는 이제 하나의 대양만이 존재한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극소수의 동물과 인간이 떠다니는 물건에 매달린 채 죽음을 피하려고 애면글면하고 있다.
극지를 덥히며 만들어진 거대한 구름이 행성을 덮어 하늘을 가린다. 그러자 행성의 표면에 햇빛이 닿지 않아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물이 얼어버린다. 17호 지구는 이제 얼음 행성이다. 그 표면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스케이트장으로 변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에 떠 있는 하얀 알이다.


8. 백과사전

초콜릿 케이크 만드는 법.
재료(6인분) : 검은 초콜릿 250g, 버터 120g, 설탕 75g, 달걀 6개, 밀가루 깍아서 6큰 술, 물 3큰 술
준비시간 : 15분
굽는 시간 : 25분
아주 은근한 불에 외손잡이 냄비를 올려놓고 물을 부은 다음, 그 물에 초콜릿을 녹여 기름처럼 반지르르하고 향긋한 반죽을 만든다. 버터와 설탕을 첨가하고 반죽이 균질적인 상태가 되도록 계속 저으면서 밀가루를 넣는다.
이렇게 준비된 것에 달걀노른자를 하나씩 첨가한다. 달걀흰자를 잘 휘저어서 하얗게 거품을 낸 다음 초콜릿 반죽에 섞어 넣는다.
이렇게 얻은 반죽을 안쪽 면에 미리 발라 둔 틀 속에 붓는다. 오븐에 넣고 200도에서 약 25분동안 굽는다. 위쪽은 바삭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게 굽는 것이 굽기의 요령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케이크를 살피고 있다가 제때에 꺼내는 것이 중요하다. 케이크 한복판에 물기가 없고 칼로 찔러 보았을 때 초콜릿이 살짝 묻어나면 다 익은 것이다.
미지근하게 식혀서 먹는다.

-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 5권


9. 생명

후보생들은 얼음이 되어버린 행성에 D력을 날려 녹인다. 행성이 팔딱거리고 꿈틀거린다. 그 표면에 균열이 생기고, 화산들이 분출하면서 불그스레한 액체를 토해낸다. 구워진 행성은 부풀어 오르고 연기를 피워 댄다.
후보생들은 세 가지 힘을 통합해 원자를 만드는 방법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구성물들을 만드는 법을 배워간다. 중성자(N)를 중심으로 전자이든 양성자이든 무엇인가를 결합시키면 새로운 형태가 된다. 광물을 만드는 법을 터득한 후보생들은 점차 복잡한 단계로 나아간다. 식물을 창조하고, 바다 속 어류를 만든다.
처음에 어류는 생김새가 모두 물고기와 비슷한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신 아레스는 공격하고 침략하고 서로 파괴하여 정글의 법칙을 이룰 것을 요구한다. 잡아먹히지 않고 잡아먹는 것, 남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이는 것이 생명체의 생존의 방법이고 곧 당위라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체들이 만들어진다. 강력한 턱뼈, 집게와 갈고리, 위장의 개념이 등장한다. 첫 세대의 초식성 물고기는 식물을 먹고, 이 초식성 물고기는 새로 생겨난 육식성 물고기들의 먹이가 된다. 육식성 물고기들도 그 공격성의 효율에 따라 계층이 구분된다. 물리적인 힘과 공격성의 한계가 곧 드러나고 번식이 새로운 전략이 된다.
이전 세대의 물고기들은 버려진 채로 번식을 계속하면서 배경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들은 결점이 충분하게 보완되지 않은 상태라서 그저 신세대 물고기들의 먹이가 될 뿐이다.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살아남을 자들은 살아남고 어리숙한 몇몇 부류는 종말을 고한다. 그것은 단지 [18호 지구]속 어류의 한 종이 사라진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종을 만든 후보생도, 종의 소멸과 함께, 자동으로 이 거대한 게임에서 탈락하여, 사라진다.
생존경쟁은 본격화되어 조류가 하늘을 뒤덮고, 그 다음으로 육상생물이 나타난다. 거대한 초식공룡으로 시작된 땅 위에서의 생명은 점차 세련된 모습을 갖추어가며 조밀화 되고 다양해진다. 비로소 종과 목이, 계통이 분화되어 가는 순간이다. 창조의 마지막 단계에는 인간이 있다. 그러나 이번 창조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인간의 DNA 자체에 대한 접근은 후보생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이루는 부족과 문명을, 17호 지구에서 그랬듯이, 발전시켜 나가고 희망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과제인 듯하다.

냄비에 재료를 쏟아 붓고 기다리면 그것이 초콜릿 케이크가 될까? 수많은 돌연변이의 발생과 퇴조 끝에 마침내 살아남은 하나의 변형체들이 모여 이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어쩌면 창조를 믿는 것보다도 더 굳건한 믿음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베르나르는 보다 실리적이고 덜 공격받을 수 있는 방향을 택했다. 진화의 과정과 적자생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지적설계(Intellectual Design)가 융합된 양상이다. 두 개념은 양립할 수 없고 항상 반대되는 것으로 구별지어왔던 우리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대목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방법과 모습이 어떠한지 정확한 속사정까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가 모든 것을 만든 순서가 성경의 첫장에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곳에 기술된 바는 우리가 믿는 진화의 과정과 꼭 닮았다.


10. 백과사전

누가 보았을까? 누가 진정으로 알고 있을까? 
내가 찾아낸 답은 단 하나, 신 또는 신들이다. 이건 물론 신 또는 신들이 존재할 때의 이야기다.
나는 티베트 불교의 경전 ‘바르도 퇴돌’에서 이집트 ‘사자의 서’에 이르는 종교적인 문헌들과 5대륙 제 민족의 샤머니즘이나 천지 창조 설화들을 두루 참조했다. 이것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은 서로 일치하는 바가 많다. 마치 우리를 초월하는 고차원의 시공간과 우주 운행의 원리에 대한 집단적인 깨달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 Bernard Werber, <신> 머리말에서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 Paul, Ch.13, 1 Corinthians, 쉬운성경


11. 재앙

냉혹한 현실속에서 18호 지구의 부족들은 각자의 노선을 따라 발전을 거듭했다. 각 종족은 자신들이 모델로 삼은 토템을 기준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쥐족은 강력한 군대를 창시하고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법칙을 철저히 적용하여 유랑하는 유령들이 되었다. 말벌족은 모계 중심의 아마조네스를 구축하여 그 다른 한 축을 구성했다. 돌고래족은 쥐족을 피해 신대륙을 찾아 떠난 끝에 결국은 섬이라는 새로운 안식처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찬란한 피라미드의 문명을 꽃피우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를 구축하고 분산된 소통에 의한 정치체제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앞서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공포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렸다는 점에서 뛰어났다.
144명의 후보생들은 하나둘씩 줄어가지만 그러함에 따라 문명의 성숙도는 점차 올라간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수업시간에만 개입할 수 있는 후보생들의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수업시간 외에도 일어나는 무작위 사건으로 인해 민족이 멸망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부정행위로 이어져 두 명의 후보생이 수업시간이 끝나고 난 후에 18호 지구를 관리하는 아틀라스의 집에 잠입해 세계에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에드몽 웰즈와 미카엘 팽송, 이야기를 이어가는 핵심 인물 둘이다. 
팽송의 부정행위에 대해 아프로디테는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 어쩌면 그것은 팽송에 대한 징계보다 더 잔인한 것으로, 바로 그가 맡고 있는 <돌고래족>에게 천재지변을 내린 것이다.

아침 7시, 섬의 한복판에 있는 화산에 느닷없이 벼락이 떨어졌다. 그 바람에 약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온 섬이 가볍게 흔들렸다. 몇 분 뒤, 화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더욱 강한 진동이 일어났다. 땅바닥이 갈라지고 가장 높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대지가 경련을 일으키며 흔들리는 듯했다.
게다가 높이가 50미터 가까이 되는 어마어마한 너울이 수평선에 나타났다. 너울은 떠오르는 해를 삼켜버리고 서늘한 그림자를 앞으로 밀어내면서 해변 쪽으로 천천히 나아오고 있었다. 그 푸르고 반드르르한 장벽에 다가갔던 물새들은 여지없이 빨려 들어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진에 놀라서 깨어난 돌고래족 사람들은 해변에 모여들어 수평선을 살폈다. 그들은 마치 악몽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들의 조상이 마을로 몰려들어 오는 쥐 부족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이유도 없이 갑자기 덮쳐 오는 불행을 그냥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왕은 알아챘다. 탈출만이 살 길이다. 그러나 평소의 차분하고 온순한 태도가 눈앞에 재난이 닥쳐오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들처럼 차분한 것이었다.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한순간 공중에 머물러 있던 너울이 마침내 돌고래 민족의 낙원을 덮쳤다. 이 거대한 괴물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였다. 그들은 이리저리 휩쓸리며 애처롭게 버둥거렸다. 구원의 땅이었던 섬이 자기가 품고 있던 거주자들을 죽음에 내맡긴 채 세계의 무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섬은 천천히 가라앉다가 죽음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가뭇없이 가라졌다.
다시 고요가 깃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찬란한 문명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약간의 잔해가 떠다닐 뿐이었다. 탈출을 시도한 배는 160척이었는데 재난을 모면한 배는 12척 뿐이었다. 돌고래족 섬나라의 인구는 30만 명이었는데 살아남은 사람은 3천명뿐이었다.
여왕도 사라졌다. 생존자들은 새 여왕을 선출했다. 새 여왕은 자신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를 즉시 깨달았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다시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뱃머리에 올라가서 말했다.
‘돌고래족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 우리 겨레의 가치와 기억과 지식과 상징을 간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백과사전

오 하나님, 나를 건져 주소서. 물이 내 목까지 찼습니다. 내가 밑이 뚫려 있는 수렁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깊은 물 속에 빠져 있습니다. 엄청난 파도가 나를 덮칩니다. 내가 도와달라고 부르짖다가 지쳤습니다. 이제는 목이 잠겨 아픕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느라 내 눈도 침침해졌습니다.
...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호의를 기다리면서 주께 기도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보호해 주시고, 깊은 물 속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큰 물결이 나를 휩쓸지 못하게 하시고, 깊은 물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고, 무덤이 나를 덮치지 못하게 하소서. 오 여호와여, 주의 순결한 사랑으로 내게 대답해 주소서. 주의 크신 사랑으로 나를 돌보아 주소서.
...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여, 용기를 가지십시오. 여호와는 가난한 사람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며, 포로된 주의 백성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바다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아,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의 마을들을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거기에 살면서 땅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자녀들이 그 땅을 물려받을 것입니다.
- David, Ch.69 Pslams, 쉬운성경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포로로 끌려오지 않고 유다 지방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많은 고생을 하고 있으며 멸시당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그 성문들은 불타 버렸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 주저앉아 여러 날 동안, 울었습니다. 슬퍼서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 Nehemiah, Ch.1, Nehemiah, 쉬운성경


13. 여왕의 기도

여왕은 새 피라미드 속에서 신과의 소통이 재개되자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왜 저희를 버리셨습니까’
신에게서 하나의 대답이 온 듯했다. 여왕이 해석한 대답은 이러했다.
<역경을 통해 너희를 강인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여왕은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쇠똥구리족의 시신들 사이에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로 자기 민족의 고통을 회상하면서 소리없이 울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제발, 제발, 다시는 그런 시련을 저희에게 내리지 마십시오.’
막상 그렇게 머뭇머뭇 신을 탓하고 나니, 문득 자기들이 겪은 시련이 혹독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나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의 신은 배를 만들도록 계시를 내리고 그들이 쥐 부족에게 몰살당하기 직전에 구출해 주지 않았던가. 또 돌고래들을 섬 쪽으로 이끌어서 난파를 면하게 해주고, 아름다운 섬에 그들을 정착시켰으며, 아주 진화된 영적인 생활을 계시해 주지 않았던가.


14. 신의 사정

나는 사랑의 여신을 계속 노려본다. 화가 난다. 아 차라리 쥘 베른처럼 처음부터 죽임을 당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 그랬다면 적어도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껏 보석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박살 나는 꼴을 봐야 한다면 숱한 고생이 다 무슨 소용이랴. 한 민족을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그 민족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라고? 이런 냉소주의가 신들의 속성이란 말인가.
마음을 가라앉히자. 돌고래족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구해야 한다. 내가 후보생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멸망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나는 돌고래족의 신으로서 마땅히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


15. 반전, 그리고 세상을 더욱 이해하는 방법

혹시 저게 바로....
<제 1부, 우리는 신 끝>

2권까지가 완결인 줄 알았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책의 결말은 대반전을 날리며 나를 당황케 했다. 부득이하게 완결되지 않은 책을 보고 독서후기를 쓰다보니 이야기를 완결지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서사의 종결과는 무관하게 이 책은 내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와 시사점을 주었다.

한낱 후보생에 불과한 초짜 신도 그의 144명의 부족을 키워나가며 애착을 느껴 결코 쌍방향적이라 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는 수많은 후보생중 하나일 뿐이고, 18호 지구의 인간들에 비하면 탁월하겠지만 전지전능하지도, 무소불위하지도 않다. 물질의 옷을 입은 완전하지 못한 무언가일 뿐이다.
그가 그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뜻을 내리는 방법은 계시와 기적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스승 신들은 ‘기적과 메시아는 은밀하게 개입할 줄 모르는 어설픈 신들이 사용하는 도구’ 라고 지적한다. 그렇다. 가장 일차원적이고, 직설적이며,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피상적 접근이 바로 기적과 메시아다. 기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D력의 기적으로 공포를 불러일으켜 자신에게 복종하게끔 하는 것이 하나이고, A력의 기적으로 병이 낫는다든가 하는 일방적 호의를 베푸는 방법이 다른 하나이다.
NPNP도 아니고, DADA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모습이 성경에 나타난 구약시대의 신이다. 때로 실망감을 이기지 못해 분노하고 질투하는 모습의 인격이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부분적인 모습이다. 그 스스로 육체가 되어 인간세상에 내려와 함께 살며 A의 기적들을 보여주고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 지성소로 들어간 것도 그 자신이다.
인류는 그를 그토록이나 사랑하지 않았다. 문명을 이룩하고 현생을 개선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고 때로는 세계에 대한 부족한 지식과 관점에 기반한 행동들로 그를 실망시키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죄罪라고 규정했고 율법을 계시해 다스렸으나 이내 한계를 느꼈다. 그랬기에 스스로 피흘리는 모습을 보여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인류가 자기에게로 돌이키기를 원했던 것이다.
괴롭다. 괴로운 것은 내가 그를 생각할 때에 18호 지구를 내려다보며 앙크를 돌리는 팽송의 얼굴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내가 이해하고 있던 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신성모독이라고 지탄하고 싶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록 그런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이 책을 읽은 것이 뚜렷한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아들들을 사랑한 나머지 눈이 멀어버린 신, 더 높은 차원으로 그들을 이끌고 싶지만 한없이 침전하는 그들의 내적 수준, 그것이 바로 오늘날 내가 서 있는 모습이며 그런 나를 한없이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는 내가 믿는 신의 모습이다. 비록 내가 알고있는 그의 모습이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이기도 하다.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알아감을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그것을 종교라고 규정하고 싶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내게는 구도求道이고, 삶 그 자체이며, 생명이 있는한 포기할 수 없는 가장 높은 가치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개역한글판]



辯 : 이 글에 적힌 상당수의 문장은 가급적 본문 그대로를 가져오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최대한 느끼는 바에 근접해 원문을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 신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명사 <엘로힘>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2) 10. 백과사전의 두 번째 단락 참조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1:44 

 

일병 김예찬 
  미리니름을 피하기 위해 그냥 내렸습니다. (웃음) 

대충 스크롤 내리면서 보이는 단어들을 보니, 왠지 [나무]에 있던 어린 신 후보생들이 나오는 단편을 장편화 한 것 같은데 맞나요? 2008-12-10
11:01:22
  

 

병장 김민규 
  나무를 분명 읽기는 했는데, 집 책장에 꽂혀 있는 것도 기억이 나는데, 시간이 죄인지 머리가 돌인지 기억은 백지장이군요. 이런. 저자에 따르면 저승을 탐사한 [타나트노트]와 천사의 세계를 발견한 [천사들의 제국]에 이어진 당연한 저술이었다고 합니다. 2008-12-10
11:06:07
  

 

병장 정병훈 
  미리니름때문에 주욱- 내려 버렸습니다. 

민규님의 말씀대로 타나트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에 걸친 마지막 신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고 하더군요. 제가 베르베르를 대단히 좋아해서 왼만한책은 모두 소장하고 있지만, 타나트노트는 그닥 재밌게 보지 못해서, 그 이후 작품인 천사들의 제국과, 신은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참. 워낙 유명하니, 다들 재밌다고 해서 일단은 미리니름을 피해야죠. 2008-12-10
15:52:52
  

 

병장 김민규 
  이거 미리니름때문에 죽- 묻혀버리는군요. 

사실 읽으신 분들이랑 이러쿵 저러쿵 논쟁을 벌여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흑흑 2008-12-10
16:56:55
  

 

병장 정병훈 
  논쟁을 좋아하는 민규님댁에 화제거리 하나 놔드려야겠네요. 하하하 2008-12-10
17:22:58
  

 

병장 이동석 
  싫어하는건 아닌데, 계속 보다보면 강약중간약의 패턴이 느껴지는 책도 있어서 슬슬 질린다 싶어요. 그래도 구미가 당기는군요. 미리니름, 발음이 참 어려운... 2008-12-10
17:55:40
 

 

병장 김민규 
  그쵸. 베르나르의 최고 단점. 너의 공격패턴 알아냈다. 그건 강중약약중강약이다. 
그래도 이번건 좀 낫더군요. 번호로 사람 부르는 짓도 안 하고 (웃음) 2008-12-10
19:58:04
  

 

병장 이동석 
  허허, 제 생각엔 일년에 한권씩 책을 내는건 물론이고, 각종지면에 글을 쓰고-이건 한때 그랬다는건 아는데 요즘은 불명확합니다만-하는등의 지나친 다작-다른 의미에서의 과작-이 그 패턴의 정형화를 불러일으키진 않았나 싶어요. 

물론 전업작가로서의 삶이 제 쓰고싶은대로만 쓰고 살기엔 녹록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베르나르 정도면 슬슬 다른걸 시도해봐도 될텐데 말이죠. 

베르나르 버릇(?)이 글쓰는 감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한편-혹은 한 장-씩 뚝딱-쓰는거라던데, 음. 그리고 보면, 좋은 훈련법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결론은 미리니름을 이기고 민규님의 글을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 말입니다. 에잇 그냥 읽어버리렵니다. 2008-12-10
20:25:32
 

 

병장 정병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쓴 글이 유명한 '나무'의 작품이 되겠습니다. 하루에 한편씩 단편적으로 쓰는건데 그정도의 글이 나오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하는거겠지요. 나쁘게 말하면 질리는것이고. 좋게 말하면 일정한 색을 가진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르베르의 그런 면을 좋아해서 책을 사는 사람도 분명 있기 때문에, 그의 글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솔찍한 말로 질려버린 본인에겐 다른걸 시도해야한다는 동석님의 말이 조금은 듣기 좋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전 그래도 민규님이 쓴 글을 읽지 않겠어요. 훗- 2008-12-10
21:02:06
  

 

병장 김민규 
  개미, 뇌, 나무, 파피용으로 이어지는 테크트리에서 진부함을 느꼈던 저였기에 역시 책을 집어들때 망설였었지요. 뭐 그랬지만, 지금은 3권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버렸군요. 좀더 다른걸 시도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유별난 색깔이 아직까지는 호소력이 있더군요. 한편으로는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 은근슬쩍 한국 독자를 배려한 소재를 끼워넣기도 했더이다. (상업적 배려인지, 난 이런것도 안다- 하는 과시인지, 아니면 정말 우러나온 양심선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병훈님, 우리 술자리 안주는 이걸로 하면 되겠군요. 클클 2008-12-10
21:18:44
  

 

병장 정병훈 
  아- 술이고 뭐고 방금까지 한창 감정을 살려 단편을 쓰고 있었는데, 이게 뿅하더니 사라져 버렸네요. 이게 뭐시깽...(울음) 정말 이 허무함은, 그래요. 술로 달래야 겠습니다. 히히 

아- 시간있을때 한편 올리려고 했는데, 다시 쓰려니 감정 이입도 안되고. 죽겠군요. 2008-12-10
22:00:08
  

 

상병 이지훈 
  읽고 싶은 후기였지만 읽고 싶은 책인지라 허허 
이것 참...댓글 달기가 애매한 처지군요 2008-12-11
00:2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