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8월 결산 - 파리에서 뻬쩨르부르그로  
이병 홍명교   2008-09-15 05:20:38, 조회: 291, 추천:2 

수업이 끝나면 느긋하게 학교 벤치에 앉아서 하늘 위 구름 모양 생김새들을 구경하거나, 학교 앞 활어횟집과 파전집, 곱창집을 전전하며 다른 영화친구들과 밤새도록 영화얘기만 하며 한량같이 살던 제가 어쩌다가 이렇게 악착같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더워서 그런지 더 악착같이 책만 읽은 것 같네요. 지난 한 달은 시간이 좀 많았습니다. 7월에는 병영문학상 소설 쓴다고 그거에 매달려서 살았는데 8월에는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서 책만 봤네요. 이번 달에는 3일 연휴가 두 번이나 있어서 여유 시간이 더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나니까 좀 폭력적으로 느껴지네요. 결산만 올려대는 저의 게으름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세요. 이등병이잖아요.(웃음)


<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민음사

발자크의 ‘인간희극’ 중 가장 유명한 소설이죠.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전 이제야 읽었습니다. 다른 소설들에서 익숙하게 접했던 캐릭터 몇몇이 다시 등장하고 관계망이 보다 더 복잡해집니다. 고리오 영감의 삶과 그의 딸들, 그리고 주인공과의 관계들을 통해 드러나는 당대 파리의 물질주의 풍조가 만연한 모습을 슬프고 조소를 담아 묘사해냅니다. 인물간의 관계망들이 직조되면서 만들어지는 서사가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고리오 영감>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김예찬님이 발자크에 대한 훌륭한 글을 쓰셔서 그 안에 많은 내용이 있기에 제가 뭐라고 따로 쓸게 없네요. 저 역시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문장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완결적인 소설을 비완결적이며 열린 결말로 만들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젊은 라스티냑에겐 앞으로 파란만장한 파리에서의 삶이 있을 것입니다. 결코 행복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을 삶이. "이제부터 나와 파리와의 대결이다!" 제 블로그에도 그대로 옮겨적었더랬답니다.
cf. 955  [내글내생각] 발자크, 근대 도시 파리의 가장 탁월한 비평가  [10] 


<적과 흑 1>·<적과 흑 2>, 스탕달, 민음사

스탕달을 패스할까말까 고민하다가 <적과 흑>정도는 읽어봐야 할 것 같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어서 모파상 단편을 읽은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좀 고민했죠. 하지만 이 두꺼운 장편을 읽고 나서는 정말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적과 흑>은 한 열혈 청년 쥘리앙의 사랑과 욕망, 출세욕 등에 대해 다룬 서사입니다. 쥘리앙은 귀족도 아니고, 가난한 목수 집안의 아들이어서 프랑스대혁명 이후 다시금 역사적 반동기를 맞이한 당대 프랑스에서는 신분상승의 욕구를 이루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죠. 그래서 그는 유난히도 나폴레옹과 보나파르트를 숭앙하며, 정치적으로는 급진적 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명예를 떨치는 길은 주교 정도의 사제로 출세하는 길만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생각과 모순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어려서 라틴어 성경을 독파한 덕에 한 귀족 부인을 만나게 되고, 귀족 집안 자제의 가정교사가 되면서 핍박만 받던 집안에서 뛰쳐나갑니다. 
그러면서 그는 시골의 한 귀족 부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위험한 것이며, 오래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시대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별을 고하고 사제학교를 거쳐 사제학교의 한 얀센주의 사제로부터 신망을 얻은 쥘리앙은 파리의 대저택에서 명망높은 백작의 비서로 일하게 되고 그곳에서 아름답고 콧대높은 백작의 딸을 만납니다. 백작의 딸은 여느 귀족들의 허영심 가득하고 껍데기뿐인 삶을 질려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콧대 높은 백작 딸은 쥘리앙을 사랑하게 되죠. 
쥘리앙은 두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갈등합니다. 수많은 고뇌 끝에 그는 자기 암시로 딸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 쥘리앙에게 닥치는 결말은 비극일 수밖에 없습니다. 출세를 향한 욕망도, 사랑을 향한 욕망도, 그리고 정치적 야망도 결국 가난한 평민 출신의 다혈질 청년 쥘리앙에겐 넘을 수 없는 운명의 벽이었던 것입니다.
<적과 흑>은 이처럼 가장 전통적인 비극 서사의 틀을 토대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한 격정적 청년의 “모험담”과 같은 서사 전개로서 그 격정성을 묘사해냅니다. 그리고 이 쥘리앙이라는 중심 캐릭터는 영웅이 아닌 욕망과 카리스마가 결합된 인물로써 자기 사명을 다하고 ‘사형’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낭만주의 소설에서 보이던 낭만적 영웅의 개인적 죽음이 아닙니다. 스탕달은 정치성을 소설 속에 인위적으로 부여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지만 자신의 소설이 낭만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소설로 남길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관료로 일하기도 했던 작가는 ‘쥘리앙’이라는 불쌍한 청년의 죽음을 왕정복고라는 역사적 반동기의 혼란스럽고 비극적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적 죽음임을 풍부한 서사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과 흑>이 넘어선 시대적 경계는 바로 이점에 있습니다. 더구나 스탕달은 이 소설을 혼신을 다 해 집필하면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삶, 한, 욕망을 심어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의 일생>, 기 드 모파상, 문예출판사

모파상은 세계 3대 단편 작가로 꼽히는, 마침내 사실주의의 지평을 열어젖힌, 그러면서 신비주의와 자연주의적 소설을 구현한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모파상은 스스로 사실주의자이기를, 그리고 자연주의자이기를 거부했습니다. 문학이란 어떤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둘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문학관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그가 사실주의적 경향, 자연주의적 경향과 멀리했다고 볼 이유가 되진 않을 것입니다.
<여자의 일생>은 모파상의 초기 장편 소설로써 한 여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 소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연의 변화에 대한 뛰어난 묘사로 자연과 인간이라는 두 소재를 절묘하게 엮어 나가기도 합니다. 여성-일반의 비극적 삶을 한 순수했던 여성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이 소설은 그 사실적 묘사가 보여주는 면모들 덕분에, 그리고 종반부에 가서는 그 모든 비극성을 비집고 들어오는 생의 의지가 보여주는 가역성 덕분에 온 몸에 전율을 전해주는 묘한 소설이었습니다. 
여성은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근대 유럽의 지역사회는 잔인할 정도로 가부장제적 억압의 그물로 덮여있습니다. 생명을 통해 다시 얻는 끊임없는 비극적 운명의 불가역성과 한 갓난아기의 탄생으로 다시금 재부정되는 인생의 비극성이 담긴 서사는 인생(그 중에서도 ‘여자의’ 인생)을 양극단의 쌍응을 이루는 형태로 모사합니다. 
또한 <여자의 일생>은 서사의 기술 방식 자체를 자연에 대한 묘사로 환원시킴으로써 자연이라는 구조 속의 인간을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사실주의적 서사를 자연주의 안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여러모로 <여자의 일생>은 모파상의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소설임에 분명합니다. 어제까지 다녀온 휴가에서 만났던 제 한 친구(여자입니다.)는 <여자의 일생>에 대해 얘기한 저에게 <여자의 일생>이 지독히 싫었었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주인공이 너무 처절하게 느껴지고 삶이 암울하다는 것을 소설에서 보다 더 스펙타클하게 확인하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부조리를 예술작품에서 재확인한다는 것은 예술을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시키는 걸까요? 모파상을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을 그것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상징해내기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의 말을 듣고나니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나 <프로메제>같은 영화들을 보고 그것이 너무 사실적인데다 인물들의 삶이 너무 비정한데다 서사는 불편하고 암울해서 짜증났다는 사람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고민입니다. 옳은 것이 반드시 공감 받는 것만은 아니니까요.


<두 친구>, 기 드 모파상, 범우사

모파상의 주요 단편들이 모여 있습니다. <두 친구>뿐만 아니라 인상 깊은 작품들이 많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오를라>, 기 드 모파상

모파상의 단편들 중에서 괴기스러운 이야기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나 죽음이나 혐오, 증오, 신비주의 등에 대해 다룬 작품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입니다.


<파리의 우울>, 샤를 보들레르, 민음사

모파상 다음은 왠지 보들레르이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연대기적으로도 그렇고, 프랑스문학사에서도 보들레르는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의 위대함이 인정받기 시작하던 시기에 고독하게 상징주의 문학이라는 것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니까요. <파리의 우울>은 파리라는 공간 안에서 보들레르라는 천재가 사유하는 고유한 언어들의 체계입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보들레르가 추구한 문학적 야심의 주요 테마들이 모두 이 두꺼운 책에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출판 당시에는 재판부로부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아홉편의 시들이 제거되었었으나, 이 시집은 복권 된 이후의 모든 시들이 담겨있습니다. 
제가 조야한 시야, 부족한 식견으로 뭐라고 평할 수도 없거니와 보들레르의 시들에 대해 냄새를 맡아보는 정도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뭐라 드릴 말씀도 없네요. 
보들레르는 평생을 불우하고 슬프게 살아온 시인이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그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으며, 오래도록 사랑했던 잔느 뒤발이라는 여성과도 불협화음으로 다툼이 잦았습니다. 
보들레르는 시라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전혀 다른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시들로부터 구름, 알바트로스니 창녀와 파리, 그리고 돈과 노인과 같은 몇가지 주된 소재나 풍경, 테마들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세상에서 뒤처지고 더러운 골목 어귀 어딘가에 숨겨져있는 것들로부터 그는 세계의 여러 층위들을 발견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에 본 시는 <가엾은 노파들>과 <어느 가난한 여인으로부터>같은 시들인데 이 시들에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현대-영화적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전역하면 꼭 ‘가엾은 노파들’을 모티브로 삼은 단편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리의 우울>을 읽다가 발터 벤야민의 <파리 파사주>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한 편 도스토예프스키의 <빼쩨르부르그 연대기>도 떠올랐구요. 셋은 같은 지평 위에 놓인 느낌입니다. 실제로 <파리 파사쥬>는 <파리의 우울>으로부터의 영감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연관 지어서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보들레르 : 저주받은 천재시인>

보들레르의 짧고 파란만장했던 삶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설명해놓은 짧은 책입니다. 


<벌거벗은 내 마음>, 샤를 보들레르, 범우사

보들레르의 아포리아들을 모아놓은 고뇌의 흔적(들)과 같은 책입니다. 그가 썼던 낙서, 메모, 그리고 작은 아포리아(풀리지 않는 철학적 문제를 일컫습니다.)들을 모아놓았습니다. 때대로 꿈을 적은 것 같은 글들도 있으며, 어떤 글들은 지속적으로 반복되기도 합니다. 
돈, 불꽃놀이, 죽음 등 여러 파트로 나뉘어있는데, 휴가때 책을 집에 가져다놓아서 확인하기가 어렵네요. 
어떻게 이런 걸 책으로 내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발터 벤야민 역시 이런 식의 아포리아들을 책으로 내기도 했죠. <사유이미지>라는 제목으로 말이죠. 보들레르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시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논문을 여러 편 쓰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완성되지 못한 책입니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것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으며, 그 메모들을 어머니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보들레르의 모친은 이것이 세상에 출판될 수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다가, 보들레르가 죽은 이후의 그의 옛 동업자가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이 독특하고 산만한 아포리아들이 우리들 앞에 등장했습니다. 미완이지만, 보들레르가 구축하고자 했던 경계없는 감정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유일한 시집입니다. 멋진 시들이 많죠. 격렬한 감정으로 가득하거나, 고요하고 차갑거나, 단단하고 시니컬하거나,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차있기도 하지요. 구름, 골목길, 노파, 알바트로스, 묘지 등과 같은 상징들을 통해 언어의 사회성을 해체하고 재조직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가 시로서 맞이하는 태도는 시니컬하고 냉정하기 그지없습니다만, 때로는 격렬하고 열정적이며 뜨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차저차하다고 단일하고 깔끔하게 평한다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악의 꽃> 맨 뒤에 보면 보들레르 시에 대한 옮긴이의 평론이 잘 쓰여있답니다.) 아무튼 저는 보들레르의 난해한 상징 시들을 읽으며, 영화도 보들레르의 시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영화들이 떠올랐지요. 도브첸코는 몽타쥬의 시대에 상징적인 미장셴들을 연결해놓은 영화들을 만들어 러시아영화사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는 1920년대 감독입니다.
그리고 같은 파리지앵들로 파리라는 도시공간에서 자신의 영화언어들을 구축해온 감독들이 떠올랐어요.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자크 리베트 등.) 
지난주에 4박5일 휴가를 갔다왔었는데, 그때 이대후문으로 옮긴 ‘필름포럼’이라는 소규모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장 뤽 고다르 영화의 역사(들) 특별전’을 하더라구요. 그곳에서 <영화의 역사(들)>을 봤습니다. 마치 보들레르의 시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보들레르 시를 읽자마자 본 영화라서 더 뜻 깊었습니다. 게다가 보고 싶었던 친구와 같이 봐서 더 좋았구요. 나와 같이 보고 있는 60석짜리 극장 안에 있는 30여명의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를 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자꾸 들었습니다. 
또 어제 본 책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이론 시리즈 : 시나리오>를 통해 다시 간접적으로 만난 <400번의 구타>(프랑수아 트뤼포)에서도 50년대의 파리의 풍경들이 그려지지요. 파리를 배경으로 한 누벨바그 영화들은 그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풍경을 단순히 쉽게 풍경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서사와 구조적으로 결합시키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서울에서 만든 영화들은 왜 그런걸 느낄만한 작품들이 별로 없을까요?



<스페이드 여왕>, 푸쉬킨, 범우사

프랑스에서 잠시 러시아로 옮겨왔습니다. 19세기 파리에서 19세기 뻬쩨르부르그로 옮겨온거네요. 당대의 두 나라의 문학은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각각 자신이 사랑한 도시의 풍경이 조합된 서사를 써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발자크와 보들레르, 모파상은 파리를, 그리고 푸쉬킨과 고골, 도스토예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의 문학을 완성해냈습니다. 한동안은 러시아문학의 거장들을 탐색하려고 합니다. 푸쉬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고리끼까지 보려고 합니다. 
<스페이드 여왕>은 푸쉬킨이 시에서 소설로 옮겨온 이후 쓴 주요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입니다. 액자형 구성으로 이루어진 두 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는 언젠가 발견된 어느 장교의 소설 속에 담긴 이야기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어느 도박의 귀재였던 ‘스페이드 여왕’이라고 불리던 노인과 ‘도박’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이 다시 하나로 모아지는 구조의 소설입니다. 


<대위의 딸>, 푸쉬킨, 열린책들

푸쉬킨이 쓴 최초의, 그리고 아마도 유일한, 장편소설입니다. 그는 이 소설을 러시아 황제 짜르의 위탁으로 쓰게 되었지만, 자신만의 내적 장치로 러시아 역사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담아냅니다. 겉으로 보기에 서사는 낭만주의의 그것처럼 완결적 구조를 지니지만, 사실은 반역의 주동자를 여제와 같은 지위로 묘사하고 또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반역자 역시 짜르와 다르지 않은 인간다운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여왕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듯한 인상을 주죠. 
일부러 푸쉬킨의 시는 피하고 소설만 찾아 읽었습니다. 러시아민담적 전통과 근대유럽문학의 자연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흐름이 한데 어우러져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유럽의 변두리로서의 러시아문학이 아닌 러시아 고유의 문학의 뿌리가 푸쉬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안그래도 푸쉬킨은 러시아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죠. 도스토예프스키, 고리끼, 그리고 심지어 마야코프스키까지도 모두가 자신은 푸쉬킨에게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빼쩨르부르그 이야기>, 고골, 민음사

고골의 단편소설 모음집입니다. 빼쩨르부르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작은 소설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대체로 괴기스럽고 신비로운 이야기들뿐이며, 인간의 삶의 외로움과 고독, 슬픔 등에 대해 판타지적인 서사를 이용해 드러냅니다. 그리고 모든 소설에서의 공통점이라면 돈과 도시(뺴제르부르그), 그리고 ‘계급’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테마는 모든 소설들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특히나 ‘코’나 ‘외투’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코’에서, 주인공은 어느날 아침 갑자기 감쪽같이 자신의 코가 사라져버렸다는 걸 알게 되죠. 없어진 코를 찾아나섭니다. 그러다가 자기 ‘코’가 자기보다 높은 직급인 5급 관리로서 비싼 외투를 입고 시내를 활보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정말 황당하죠? 
‘외투’에서는 한 가난한 관료가 낡고 얇으며 오래된 외투를 입고 정말 쉴틈없이 일만 하며 바보처럼 살아갑니다. 그는 추운 겨울이 찾아오고, 또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에게 외투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고, 악착같이, 그리고 치밀하게 돈을 조금씩 모읍니다. 그리고 마침내 외투를 사죠. 그에게 무관심했던 사람들은 그의 외투를 보고 칭찬하며 그를 환대합니다. 그리고 어떤 고급관료의 파티에 초대되죠. 하지만 그가 이상하리만치 불편함을 느껴 빠져나온 파티에서 집으로의 귀가길에서 그는 한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깁니다. 그리고 죽게 되죠. 이후 이 사나이는 유령이 되어 밤만 되면 빼쩨르부르그의 어두운 거리에서 나타나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습니다.
이처럼 고골의 소설은 환상적인 테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천연덕스럽게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죠. 고골 소설의 힘이 뿜어져 나오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판타지적인 서사는 돈과 도시, 그리고 계급이라는 근대적인 주제들과 결합되어있습니다. 요컨대, 고골은 시대를 100년 이상은 뛰어넘은 소설가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근대문학의 등장 이후 카프카가 비로소 구축한 세계를 그는 이미 100여년 전에 이루었던 것입니다. 고골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그가 남겨놓은 몇 안되는 작품 중 몇몇을 통해 그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이미 자신이 닿을 수 있는 최종지점까지 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골은 나중에 미쳐서 방황하다가 종교에 헌신해 수십년간 소설과 떨어져있다가, 그리고 자기혐오와 가난 속에서 죽게 됩니다. 자신의 소설에 나오는 가난한 관료의 죽음처럼 말이죠.


<감찰관>, 고골, 민음사

고골의 희곡입니다. 당대의 귀족사회, 관료사회를 시니컬하고 코믹하게 풍자해냅니다. 풍자적 기교와 돈과 계급이라는 테마가 있으며, 이 때문에 이 희곡은 오늘날에도 상연될 자격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No country for old men>, Cormac McCarthy

19세기 문학 여행을 하다가 잠깐 쉬어가는 타임으로 읽었습니다. 작년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소설입니다. 요즘 베스트셀러인 <The road>의 작가이기도 한 코맥 메카시의 소설이죠. 겁 없이 원서로 읽게 되었는데 며칠간 고생 꽤하며 읽었습니다. 관조적이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체들이 소설의 건조한 사막의 풍경들과 잘 어울립니다. 300여쪽에 다다르는 소설은 영화에서는 빠진 추격과정에서의 몇가지 사건들이 더 있습니다. 그리고 상황마다 나뉘어진 각 챕터의 앞에는 보안관이 화자로서 관조적이고 음울하게 세상의 풍조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2,3페이지씩 있죠. 이 부분이 스릴러라는 장르 형식을 빌은 소설의 구조를 전체적으로 내면에서의 자기고백적이고 자기성찰적인 것으로 바꾸어냅니다. 스릴러소설로서 1인칭적인 시점을 이런 방식으로 유지하는 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맨 처음과 맨 마지막에서 토미 리 존스의 독백 나레이션으로 표현되죠. 영화에서는 대부분의 독백이 제거되어있습니다. 각색 과정에서 서사의 끊김을 어느 정도 제거하고 대중성을 고려한 것이겠죠.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와 비교하며 읽으면 재미있습니다. 잘 각색된 영화와 훌륭한 소설이니까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40:08 

 

병장 이건진 
  몇권을 읽으신건지. 대단하시네요. 
도서관이 있으시다니 축복받으셨네요. 
전 이등병때 불이 다꺼진 내무실에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책을 읽었는데.. 

하긴 요즘도 애들 자는데 불켜기가 미안해서 자연광으로 책을 읽습니다.하핫. 2008-09-15
05:31:55
  

 

이병 홍명교 
  도서관은 있는데 책은 얼마 없답니다. 창비에서 나온 한국문학전집이 제일 쓸만한 거였는데 저 오기전에 다 없어졌다네요. 
8월엔 어쩌다보니 14권 읽었네요. 근데 9월엔 슬럼프인가봐요. 자꾸 딴 생각이 나네요. 허허. 괴로워요. 
전 어두우면 책 못읽겠던데, 대단하십니다. 2008-09-15
05:40:33
  

 

상병 김강모 
  독보적이십니다(웃음) 2008-09-15
08:15:37
  

 

병장 이태형 
  괴물...(웃음) 2008-09-15
09:41:29
  

 

일병 오창희 
  저희 도서관하고는 딴판이네요.. 
저도 저런거 보고 싶어요 흑흑.... 2008-09-15
09:45:12
  

 

병장 김원택 
  뻬쩨르부르그. 뾰뜨르 대제가 만들었다는 도시. 그러나 도시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음울한 곳. 늪지대. 그 위에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도시. 그래서인지 그 곳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에는 슬프고 우울한 것들이 많이 존재하죠. 

고골 하면 생각나는 한가지. 뿌쉬낀이 죽을 때 고골이 그렇게 외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제 러시아 문학은 내가 짊어지고 간다."(뭐 대충 이런 뉘앙스?) 

그리고 스페이드의 여왕이라. 제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무언가 조금은 다른 느낌인데. "이반 뻬뜨로비치 벨낀의 이야기"하고 무언가 섞인 듯한 느낌. 2008-09-15
14:18:18
  

 

일병 김예찬 
  이런, 필름포럼이 이사갔군요. 궁에 들어온 다음에 가볼 일이 없었는데 그럼 혹시 서울아트시네마도 함께 이전간건가요? 아니면 필름포럼만 옮기고 아트시네마는 낙원에 머무는건가요?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의 풍경을 훌륭하게 영화적 서사와 결합시킨 영화는 저도 빨리 만나보고 싶습니다. 뉴욕, 하면 우디 앨런이 떠오르듯이 서울, 하면 떠오르는 감독도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2008-09-15
17:23:10
  

 

이병 홍명교 
  김원택/ 고골다운데요.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거 같아요. 
제가 읽은 <스페이드 여왕>이라는 책 안에 "스페이드 여왕"과 "이반 뻬뜨로비치 벨낀의 이야기" 두 소설이 엮여있답니다. 범우사판. 2008-09-16
02:08:37
  

 

이병 홍명교 
  김예찬/ 
서울아트시네마는 여전히 낙원상가에 남아있어요. 필름포럼은 만성 적자를 견디지 못해 이사갔지요. 낙원상가 주인한테 월세 내기가 어려웠다나봐요. 대신 그 자리에는 "허리우드극장"이 다시 생겼죠. 여기서는 <영웅본색>이나 <벤허>같은 스펙타클 고전영화들이 한답니다. 확실히 필름포럼 때와는 느낌이 다르죠. 낙원상가주가 직접 운영한다고 합니다. 

저도 '서울'을 그려낸 작가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80년대말 장선우-박광수-김홍준류의 "뉴코리안시네마" 세대가 뭐 좀 하나 싶었지만 어영부영하다가 사라졌죠. 2008-09-16
02:14:40
  

 

병장 김원택 
  홍명교 / 고골. 물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긴 하지만, 막판에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미완성작인 '죽은 혼'(러시아어를 다르게 번역하면 '죽은 농노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알맞겠지만요.)을 쓸 때는 너무 반동으로 돌아선 듯한 느낌이라 씁쓸하죠. 

그리고 '감찰관' 이 아닌 '검찰관'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이건 예전에 학부 후배 녀석들이 원어 연극제 때 한 번 해서 재밌게 본 기억이 있죠. 원래 우리나라에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했는데 몇 안되는 예외중 하나. 

그리고 범우사판이 아닌 원작에서부터 '스페이드의 여왕'하고 '이반 뻬뜨로비치 벨낀의 이야기(이하 벨낀이야기)'는 같이 있어요. 그리고 '벨낀이야기'는 말씀하신 대로 액자식 구성이라고 할 수 있죠. 뿌쉬낀이 벨낀이라는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발굴했다는 식의 구성이죠. 뭐 낭만주의를 거쳐 사실주의의 초기까지 살았던 뿌쒸낀이 낭만주의에 대한 사형선고를 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한 낭만주의의 종말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면 운문소설인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으셔도 좋을 것 같고요.(번역본에 따라서는 '예프게니 오네긴'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을 듯) 낭만주의에 대한 사형 선고의 구체적 모습들은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2008-09-16
09:01:46
  

 

이병 홍명교 
  김원택/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까 "검찰관"이 맞네요. (오타!) 
고골의 후기 작품들은 읽어보질 못해서 잘 모르지만, 나중에 고골이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기독교도로 돌아서서 칩거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미쳐버린 천재의 삶은 항상 이렇게 뭔가 비극적이거나 극과 극을 달리네요. 
<예브게니 오네긴> 꼭 읽어보고 싶네요. 2008-09-16
09:16:58
  

 

상병 이동열 
  전 세계문학에는 약한지라 명교님의 글이 좋은 기준점이 되곤합니다 
앞으로 읽어볼 책들이 많아지는게 무서울 정도네요(울음) 
아무튼 늘 명교님께 감탄하고 있습니다(웃음) 

사족. 예브게니 오네긴을 누가 음악으로 옮겼는데... 차이코프스키 였던가요?(땀) 2008-09-16
09:30:31
  

 

병장 이동석 
  이런, 이번엔 정말 읽은 책이 한권도 없군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만 영화로 봤어요. 어흑. 
뭐 명교님이 읽었다고 해서 다 읽어야만 한다, 이런건 아닌데, 
가벼운 만화책과 쓰잘떼기 없는 예능프로 재방송으로만 보냈던 시간은 확실히 아쉽군요. 

폭력적인 결산 맞아요. (농담) 2008-09-16
11:03:35
 

 

병장 이동석 
  그런데 
보들레르의 유일한 시집이라는 표현이 <파리의 우울>과 <악의 꽃> 두 책에 쓰였는데, 동명이인인가요? 아니면 어떤 의미가 있는건지요? 

그건 그렇고, 필름포럼 문 닫은줄 알았더니 이사간거였군요. (역시 궁에서 사바넷도 못쓰고 있으니...) 

고골 단편은 사놓고 펴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마법같은 책이었군요. 

어쨌거나, 우와, 명교님에게 사사라도 받고 싶어지는 결산이었습니다. 꾸벅. 
그런 의미에서 추천이라도. 2008-09-16
11:13:49
 

 

병장 송승관 
  잘못 쓰신 것이거나 의도적으로 쓰신 거 같네요. 파리의 우울은 최초의 산문시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2008-09-17
08:12:45
  

 

병장 이동석 
  음, 최초의 산문시였군요! 2008-10-02
10:4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