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10월 결산  
상병 이우중  [Homepage]  2008-10-31 12:53:32, 조회: 265, 추천:0 

동민님의 '다독에 반대한다'는 글은 잘 읽었습니다.
'(이우중따위가 쓴)결산에 반대한다'고 곡해했던 점 일단 사과드립니다.
물론 (단시간의 속독에 의한)다독의 문제점은 글을 통해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단시간의 속독이라는 것이 꼭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나온다든지, 상황묘사 빼먹고 소설을 읽어제낀다든지, 아니면 수능 명강사들이 찝어주는 언어영역 비문학 지문 독해법 같은 것만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저는 책을 좋아해요. 굳이 독서가 아니고 '책'이라고 쓴 것은 독서의 대상이 되는 책 자체가 좋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다 보니 원래 글 읽는 속도가 빠른데다가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또 그에 비례해서 책장 넘어가는 속도도 빨라지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까 평소에 제 말 속도도 빠르군요. 하지만 조루는 아니에요. 응?

여기까지 10월 결산을 쓰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었습니다.

1. 풀밭 위의 돼지 - 김태용
끝없이 중얼중얼거립니다. 말이 되는 소리건 아니건 일단 내뱉고 봅니다. 이런 걸 자동 기술이라고 하던가요. 혹자는 김태용을 두고 '데리다의 사도'라 칭하기도 합니다. 소설이란 결국 언어를 통해 만들어 내는 것인데 언어란 놈이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말하는 해체주의적 소설이라니요. 제 짧은 머리로는 이해하기 약간 힘들었지만 확실히 서사와 상황의 묘사에 치중한 소설들에 비해서는 참신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록작 중에 '편백나무 숲 밖으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딱 봐도 어딘가 윤대녕씨의 '편백나무 숲 쪽으로'의 패러디 같은 이 소설은 내용상으로 '은어낚시통신'이랑도 비슷합니다. 주인공은 역시나 메시지(여기서는 전보)를 받습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하구요. 하지만 여기의 주인공은 존재의 기원을 향한 여정을 떠나는 대신 "떠난 적이 없는 내가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하고 쿨하게 받아넘긴 뒤 또 쭝얼쭝얼거립니다. 존재의 기원에 대한 동경 따위는 없네요. 정말 의미는 끝없이 미끄러져 가고 텍스트는 읽히는 횟수만큼 오독됩니다. 저는 독자의 수만큼 오독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만 해도 처음 읽을 때랑 두 번째 읽을 때 조금씩 달리 다가오더군요. 비단 이 '편백나무 숲 밖으로'가 아니더라도 주인공들이 시도하는 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내뱉는 말은, 그 무수한 말들은 기의와 결합되지 않은 기표일 뿐이에요. 중얼거림이죠. 기의와 분리된 기표는 그 지시 대상인 사물까지도 언어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산'은 '창'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고 '농구공'은 '좆(남성 성기가 아니라 욕으로의)'을 대신하여 '세상 참 농구공 같네', '이런 농구공 같은 경우가'처럼 쓰입니다. 친구의 잠꼬대는 "이런웃지않을수없잖아"로 들리기도 하고 "이렇게웃을수있어서"로 들리기도 하며 "이제웃고있는것도"라고 들리기도 합니다. 친구의 잠꼬대가 나오는 소설은 첫 수록작인 '검은 태양 아래'인데요, 이 때까지는 다르게 들리는 잠꼬대들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짱돌을 굴려보기도 했었는데 헛수고였군요. 허허.

2. 강남 개그 - 신장현
제목은 개그인데 내용은 블랙코미디도 아니군요. 개그가 아니에요. 이 책에서 와닿았던 작품들은 '바다로 난 다리'와 '카지노 가는 길'이었습니다. 부산 완월동(사창가)이 무대인 '바다로 난 다리'에서 완월동 아름이의 말은 슬프고, 그만큼이나 아름답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남겨진 눈동자의 새 발자국을 지우려면... 그 사람이 사라진 곳을 오래오래 쳐다보면 된다고." 안 슬프고 안 아름다우시다고요. 읽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어요. 저는 '새 발자국'의 메타포가 참 와 닿았거든요. 그 앙상한 나뭇가지같은 것 네 개가 엇갈려 찍혀 있는 모습을 그려보면 삭막하기도 하고 마음 한켠이 저리기도 하고 그랬어요. '카지노 가는 길'은 사북사태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침 도서관에 가니 사북 사태에 관한 책이 있더군요. 위시리트에 추가했고요, 내용 중에 "자신에게 반골의 피를 준 친부가 최근 불법 정치자금과 관련해 구속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불현듯이 떠오른 지하의 또다른 아버지, 광부"라는 주인공의 회상이 나옵니다. 이거 왠지 에덴의 동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웃음)

3. 쇼쇼쇼<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 - 이성욱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는 분이셨군요. 이인화씨의 '영원한 제국' 표절에 관해 작가와 논쟁을 벌였던 주인공이기도 하고 해서 이름만 들어봤었드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원한 제국'을 재밌게 읽었으면서도 논쟁 내용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네요 저는. 에이 한심한 놈. 그나저나 초반부의 내용은 본인 어린 시절 추억담이고, 중반부 이후에 한국의 근대 도시에 관한 글이라면 '서울의 밤문화(김명환, 김중식 공저)'가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4. 침이 고인다 - 김애란
좌민규에 우애란이라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었길래 집어 든 것 뿐입니다.는 아니고, 두 개의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던 '침이 고인다'가 재밌었거든요. 8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앞의 4편은 우리의 이야기이고 뒤의 4편은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군요.
1980년생의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다.(갑자기 반말이네요. 허허) 그 겨울의 '너'와 같은 나이다. 너와 나 역시 학원 강사였고, 그래서인지 더욱 공감이 갔다. 대부분의 강사진이 너와 나처럼 무경력자 아니면 학부생이었지. 하지만 "우리나라 중학생들, 다 저능아 같다"며 담배만 뻐끔거리고 있는 나에게 네가 초등학교 영어교재의 단어를 물어보았다거나, 그런 너를 좋은 선생님(=만만한 선생님 같다만)이라며 따르는 애들이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가 있던 곳은 서글픈 '서울의 사교육'과는 거리가 좀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서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시골도 아닌, 바다가 보이는 지방 소도시에 출생하는 것으로 시작된 너의 인생은, 어중간하게 끼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적당히 졸업하고, 촌동네에서는 적당하지만 그다지 적당하지는 못한 성적으로 적당한 전문대에 들어가 각종 오락과 주량, 그리고 연애를 연마하다가 어느 샌가 사회로 툭, 하고 내던져져서 어찌어찌하다보니 학원에 취직이 되었고, 그렇게 또 어찌어찌하다가 학원을 그만두고 적당한 남자를 만나 그렇게 결혼도 하게 되었지.
나는 그 때 너를 보고 1980년생인 여자들은 다 이렇지 않을까 하고 섣불리 판단했었다. 가령, 80년생 여자는 도서관에 같이 가자는 말을 들으면 경기를 일으킨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게 잘못된 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지만.

"서울 다 이래. 네가 아는 서울이 몇 곳 안 되는 것뿐이야."

5. 하악하악 - 이외수
친구가 샀다가 욕을 하길래 왜그런가 했더니 책은 두꺼운데 내용이 얼마 없다고 그러더군요. 허 참..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와 비슷합니다. 그 책도 정태련씨가 그림을 그렸던가요.
개인적인 생각은 이외수씨는 소설이 정말 재밌는 것 같습니다. 소설 써 주세요. 끝.

6. 지붕 - 박상우
"어느 날, 고독이 다가와 말을 걸 때가 있다."로 시작해서 "고독은 높고, 고독은 넓고, 고독은 깊을수록 빛나는 것이다."로 끝을 맺는 이 소설은 작가에 의하면 수직적 공간탐사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수평적 공간 탐사의 과정으로 '샤갈의 마을', '사탄의 마을', '사람의 마을'에 이어 새로이 시작된 수직 공간 탐사 '옥탑방', '지붕'을 거쳐 '화성'까지 뻗어나갔지만 그의 공간탐사 일정은 아직 진행중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이 모든 탐사는 지구와 지구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지구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도 이야기하네요.
주인공은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창작은 새로운 것을 처음 만드는 것이고, 창조는 새로운 것을 고안하여 만드는 것"인데 "창작의 가치는 '처음'에 있고 창조의 가치는 '고안'에 있다. 처음 만드는 것에는 순번의 의미가 있지만 고안해서 만드는 것에는 심오한 질서가 있다...(중략)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곧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어둠이 빛에 기여하고 죽음이 삶에 기여하는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가 탄생한다. 그래서 창작은 인간의 몫이지만 창조는 신의 몫이다. 천지 '창작'이 아니라 천지 '창조'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인공은 말하며 자신의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창작품'일 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신의 (우연을 가장한)필연에 의해, 그러니까 신이 '창조'한 시나리오에 의해 흘러가는 삶(이로 인해 창작의 고통, 혹은 창작자의 고독이 발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을 거부하고 마지막은 본인의 시나리오대로 나아가는 주인공 인호의 모습은 결국 해피엔딩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붕'에서의 벗어남이라고나 할까요. 뭐 다시 또다른 지붕 아래로 귀속되고 말겠지만 지붕 위에도 올라가보고 지붕에서 지붕 사이로 옮겨다니는 삶은 오히려 고독을 벗어나는 것일지도 모르죠. 고독을 벗어난다기보다도 고독'해지는' 것을 벗어나 그의 말마따나 "고독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105개의 일상이야기, 92개의 내글내생각에 비해 28개밖에 되지 않는 [독서후기]에 마음이 아파요.
하루에 한건씩도 채 올라오지 않았군요 이번달은.
달인 분들의 독서후기와 결산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요즘 안 보이는 분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아요. 흐흐.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6:43 

 

상병 김남우 
  김애란에 이어 윤성희를 읽는 것도 참 좋아요. '감기', 참 좋더라구요. 고 앞의 단편집에 실린 'U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는 정말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좋구요. 히히 2008-10-31
13:01:20
  

 

병장 이동석 
  오- 정말 우중님의 독서세계는- 2008-10-31
16:31:06
 

 

상병 이우중 
  남우님/ 꼭 한번 찾아서 읽어 볼게요 윤성희도. 윤성희란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 아, 전혀 상관없는 데서 들었네요. 그 사람이 아닌가 봐요. 허허. 

동석님/ 제 독서세계는- 음... 형편없죠? 하하. 그래도 열심히 읽고 (대충 쓰고) 있답니다. 2008-11-01
11:12:18
  

 

병장 고은호 
  휴우~ 대단하시네요. 
저도 어서어서 부지런히 책을 읽어야 할텐데.. 
우중님 같은 분을 보면은 저도 부지런히 책을 읽어야 겠다는 
자각이 일어난다니까요. (웃음) 

아! 그리고 저도 지금 동민님이 말한 '책을 읽는 방법'을 앞에 펴들고 있는데요~ 
대충 말하자면 '책을 읽을 때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거기서 멈추고 생각해보라.' 
는 내용이 주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잘 기억이 안나면 되돌아가고, 기록하고, 메모하면서... 
그렇게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사람이 하는 행동에 '절대적으로 이게 옳다'라는게 어디 있겠어요. 
그저 좀 더 자신에게 맞는 방법, 더 어울리는 방법을 찾으면 그게 자신만의 '정답'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우중님은 '조루'는 아니에요. (응??) 2008-11-01
11:33:12
  

 

병장 이동석 
  아니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독-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습작기의 다독-이라면 이래야 하지 않을까하여- 2008-11-01
18:3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