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흑백 텍스트에 물감을 칠하며  

병장 김형태  [Homepage]  2009-04-16 15:41:36, 조회: 69, 추천:0 

흑백 텍스트에 물감을 칠하며  



? 박수영 作 - 안녕, 첫사랑


-나 널 좋아해.

좋아한다는 고백을 마지막으로 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지난 시간을 짚어보니 ‘좋아해.’라는 말로 사랑을 고백해본 적이 없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고, 조금이나마 부끄러움을 줄이고파 하는 마음에 나를 위한 고백으로 상대방에게 직접적이지 못한 고백들을 했었다. 언제나 그렇듯, 좋아한다는 뜻의 고백은 ‘내뱉기’위함도 있지만 나에게로 다가오는 상대방과 나 사이의 공허감을 뚫고 들려오는 상대의 대답에 귀 기울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표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대답에 따라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박수영의 ‘안녕, 첫사랑’은 그 끝을 제목 그대로 안녕이라 맺었다. ‘나 널 좋아해.’ 라는 솔직하고 담백한 고백에 비하면 허무하지만, 그 안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완결은 있을 수 없다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슬퍼할 만한 시간의 감정은 남겨두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고백과 ‘안녕, 내 첫사랑’ 이라는 홀로 되내임의 사이의 주인공, 아니 박수영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남겨주지 않았다. 아마 그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을 터. 그리고 여타의 생각들 보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안녕이라는 주관적이지만 객관적일 수 있도록, 따듯하지만 다소 냉철해질 수 있도록 판단했던 것이다.

한참을 이 얘깃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릿속에는 ‘안녕, 내 첫사랑’이라는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한번, 두 번, 세 번 읽어도 마지막 문장은 마음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제 나에게 나만이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라며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2B연필과 스케치북을 꺼냈다. 하얀 종이를 네모로 가득 찬 종이로 나누기 전에 액자식 얘기의 한적한 구석구석을 그려보았다. ‘얇은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글바글 터져 나오던 소음과 적요(寂寥)한 침묵은 서로 단층을 형성했다.’와 ‘엷으면서도 강하게 빛이 마음속 추억 위로 덧칠해졌다.’ 같은 부분들은 이 얘기를 그림으로 만드는데 어려움으로 다가 왔다. 또 나아가 궁극적 목표인 영상으로의 탈바꿈 과정에 있는 네모속 그림들은 그의 옅은 안개가 찬 듯한 글들을 찾아가길 원했다.

어떤 분위기의 영상으로 만들어야 할까. 밝고 경쾌한 노래가 가득한 핑크빛 로맨틱코미디로 만들어 마지막 대사의 슬픔을 강조해야 할까. 아니면 차분한 그의 일상대로 영상을 꾸며 마지막 대사조차 그저 그런 일상으로 보여 더 슬픈 얘기로 남아야 할까. 또, 어린 녀석들의 부끄러움과 강인한 것처럼 보이는 대사들 속에서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면 어떤 대사들로 채워야 하는 것일까. 아역과 성인역이 공존하는 이 어려운 캐스팅은 도대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이따금씩 ‘읽는 순간, 멋진 영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같은 글’을 만나면 내 멋대로 펼쳐버린 파노라마의 필름들과, 영상을 채우고 있는 나만의 아이보리 모노톤, 모든 것을 감싸 안는 BGM들로 하염없이 내 머릿속 영사기가 돌아간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지금 내가 읽는 것이 내가 그리는 것이 되고 또 내가 만들 것이 된다니 가슴 설레이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시나리오 작업과 콘티를 마무리해 짧은 대화조차 해보지 못한 박수영에게 찾아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협조해 달라.’고 얘기를 해봐야겠다.

마지막 부분은 확실히 머릿속에 인화해 두었다. 먼저 조금씩 줄어들어 거의 들리지 않는 음악과, 가끔씩 들리는 공원의 적막함 속에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 널 좋아해.” 라 말할 것이며, 이 글과 같이 세 번의 엔터만이 존재할 만한 검은 화면, 그리고 “안녕, 내 첫사랑”이다.

YTN의 짧게 지나가는 코너, 한국의 명산 - ‘주흠산’편의 BGM만 들어도 떨리는 이 봄철의 내 가슴은 흑백의 텍스트들을 옅은 수채화로 칠하기 전 얇은 2B연필로 슥슥슥-명암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 박수영 作 - 안녕, 첫사랑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10
10:10:52 

 

병장 김무준 
  옛날 생각 나네요. 쩝. 2009-04-16
18:44:14
  

 

병장 이동열 
  봄인가요.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