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저 누런 강, 나는 한 척의 배처럼  
병장 고동기   2008-11-04 16:24:03, 조회: 167, 추천:2 

2007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누런 강 배 한 척」박민규 
2008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낮잠」박민규




일주일. 그중의 5일 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 그리고 찾아오는 주말. 가만히 앉아 쉬거나 사람에 따라 종교행사에 가거나 한다. 나의 경우에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생각에 잠기곤 한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지난날, 지나온 삶들을 되돌아보는 시간. 그런 주말. 그렇게 하여 만들어지는 일상적인 한 주(週). 이런 삶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뒤도 안돌아보고 정신없이 사는 것 보단 가끔씩 뒤도 돌아보고 사는 것이, 그럭저럭 제대로 사는 듯한 기분을 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거 생각해 볼수록 참. 지루한 일상이다. 지루한 인생이다.


인생을 알고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공지천. 공지천에 물이 흐른다. 그 공지천을 많이도 지나다녔다. 여기저기 건설해 놓은 댐 때문에 하류 쪽으로 가면 흐르지 못한 강물이 고여 있었다. 그 덕에 오리배도 띄워놓고 관광지로도 활용하는 것 같았는데, 대게 아이들끼리는 그 공지천을 보며 ‘똥물, 똥물’이라고 부르곤 했다. 내가 자주 지나다니던 길은 공지천 상류였다. 상류 쪽으로 올라갈수록 수심은 점점 얕아져 다 큰 어른이 물에 빠지더라도 허리까지는 잠기지 않았다.

청계천 복원공사에 영향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참 ‘후지다’라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상류 쪽으로 갈수록 그 정도는 심했다. 물길을 따라 이어져있는 판잣집들은 안 그래도 후진 천(川)을 더욱 후져보이게 했다. 아마 홍수가 나더라도 떠나보낼 살림살이 하나 없을 것 같은 그런 집들. 마당 같지도 않은 비좁은 곳에 비쩍 마른 개를 키우고, 아마도 연탄이나 전기장판으로 한기(寒氣)를 달래고 있을 그런. 그런 집들을 끼고 있던 공지천.

그리고 언젠가는 홀로 공지천을 걸어간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놓쳤을 때, 사랑하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아니면 그저 홀로 걷고 싶었을 때. 그 길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다. 대게 그런 시간의 하늘엔 식어버린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의 몸 반쪽이, 나른한 석양으로 물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걸어가다 걸어가다 판자촌이 보일 때쯤, 널빤지로 이어붙인 후질 근한 다리를 건널 때쯤. 혼자 가만히 서서, 공지천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책가방을 둘러메고 하교중인 학생들. 자전거를 몰고 가는 남학생. 집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쓰레기봉투를 든 허리 굽은 노파. 리어카 가득 폐지를 실은 노인. 다시 그 주변에 꼬마 아이들. 청결하지 못한 얼굴들 손들. 찬거리를 사러나가는 아주머니. 힘쓰는 일을 하고 퇴근하는 듯한 청년. 굳게 닫히거나 활짝 열린 대문들. 하나 둘, 불을 밝히는 집 집. 밥 짓는 냄새. 분주한 적막. 물 흐르는 소리.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 옷깃을 여미는 손. 오고가는 사람들. 흘러가는 시간. 명멸(明滅)하는 삶.

그런 강가에 서서 삶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말이다.


                             *


 더는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나 불편함이 아니다. 자식에게서 받는 소외감이나 배신감도 아니다.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며 삼십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소하고 뻔한,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를 똑같은 속도로 더디게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알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몰라서 고생을 견디고, 몰라서 사랑을 하고, 몰라서 자식에게 연연하고, 몰라서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


                             *


노인들의 이야기였다.「누런 강 배 한 척」,「낮잠」모두. 「낮잠」의 노인은 머물고 있던 요양원에서 첫사랑의 여인를 다시 만난다. 그러나 흘러간 세월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났듯이, 아름다웠던 그녀도 치매라는 병에 걸려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윤동주의 시를 읽지도, 문학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저 ‘방구 뽕 방구 뽕’ 하는 소리에 웃기나 한다. 사랑했던 그녀와 옛 추억들을 되새겨 보지만 치매에 걸린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식이란 것들은 그의 재산을 미리 정리하자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다 늙어버린 노인의 몸은 고장나버렸다. 그토록 사랑했던 첫사랑과 함께 있을 때조차 고장난 몸은 소변, 대변을 흘려보낸다. 

「누런 강 배 한 척」의 노인은 아내가 치매에 걸려있다. 하나있는 아들은 사업이 망해 떠돌아 다닌다. 셈이 빠른 며느리가 조기라고 구워오지만, 그것이 조기가 아닌 대형 할인점에서 산 싸구려 부세라는 걸 안다. 그래도 노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며느라, 찬이 너무 많구나. 백세까지 살겠다는 검진 결과를 말하자 며느리는 반색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님을 백세까지 그가 챙겨줬으면 하는 표정이다. 노인은 결국 치매에 걸린 아내와 여행을 떠난다. 한 달 동안 꾸준히 모은 수면제를 가지고.

인생이란 무엇일까. 더 이상 남은 것도, 남을 것도 없을 때가 되었을 때, 그때 느껴지는 삶이란 무엇일까. 그저 조금은 허무하지 않을까. 일요일 오후에 자는 낮잠처럼 조금 나른하지는 않을까.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내가 노인들의 삶을 헤아릴 수나 있는 것일까.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서 반드시 삶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도 역시 지난한 삶이 주는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답을 해나가고 있다. 십만 불 달성의 신화를 이룬 정선배가 가시오가피를 팔러 오고, 하나뿐인 딸이 교수직에 지원하기위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하고, 같은 요양원에 있는 친구의 거시기가 내것보다 크고, 첫사랑의 자식이 빚보증 때문에 파산을 하고……  

일주일. 5일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주말동안 쌓인 피로를 푼다. 가만히 앉아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거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종교행사에 가기도 한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지는 일상적인 한 주(週). 그렇게 흘러가는 나른한 생. 마치 지루한 낮잠을 자는 것처럼. 또 그렇게 하루가 간다. 한 주(週)가 지난다.


                             *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삶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연명(延命)의 불을 끄고 나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창을 열고, 나는 베란다로 나간다. 긴 하루의 늦은 밤이다. 흐르고 흐르고 흐르는 차들의 불빛들로, 언뜻 저 멀리 도로가 길고 긴 강물처럼 느껴진다. 아득하고, 멀다. 이제 그만

 건너고 싶다.

 저 누런 강, 나는 한 척의 배처럼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24:55 

 

병장 이동석 
  제가 알지 못하는 박민규로군요. 아 어서 읽고 싶다. 

그리고 이런 글을 기다렸습니다. 오늘은 좀 심심하더군요. 흐흐. 2008-11-04
16:49:23
 

 

병장 고동기 
  카스테라도 같이 읽었는데, 정말 분위기가 다릅니다. 
꼭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코리안 스텐더즈'랑 그나마 분위기가 비슷한데, 
그보다 더 서정적이고 고독하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특유의 유머는 여전합니다. 2008-11-04
16:52:04
  

 

병장 이동석 
  무엇보다, 주동인물 혹은 화자가 청소년-어른 경계, 혹은 그 이후의 젊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도 신기하네요. 허허. 무슨계기가 있는건지 박민규를 잡아다 물어보기라도 하고 싶군요. 무엇보다, 먼저 박민규의 최신 단편들을 쫓아다녀야겠어요. 흐흐. 

사회나 인류를 넘어서 인생-으로 가는걸까요. 허허- 다음은 뭔지도 기대되고요. 박민규 이 귀신같은 사람... 2008-11-04
16:57:40
 

 

병장 정병훈 
  전 동석님처럼 박민규씨 빠돌이는 아니지만, 동기님의 후기를 읽으니 참 좋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주 재밌을거 같다는 생각 말이에요. 
흐흐흐 

제손에는 04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모음이 들려있네요. 그 안에 박민규씨 단편도 한편 들어있더라구요. 

근데 이놈의 돈키호테를 얼른 읽어야 읽어볼텐데... 끙. 2008-11-04
17:34:52
  

 

병장 김선익 
  요즘 너무 바빠요. 주말도 없어요. 필승3주훈련기간이거든요. 
책을 읽고 싶어요. 
심지어 무슨 꿈을 꾸는지 아세요? 
제가 자살소동을 일으키는거에요. 그래서 훈련을 열외받죠. 
짬을 내서 책마을 글들만 조금씩 읽고 있는 중인데 
오늘도 또 꿈꿀 것 같아요. 이런,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웃음) 2008-11-04
17:42:57
  

 

병장 이동석 
  제가 자청하긴 했지만, 사실 전 뭔가의 빠돌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게을러서요. 박민규 빠돌이라기엔 좀 쑥쓰러운거죠. 흐흐- 2008-11-04
18:23:38
 

 

상병 이우중 
  확실히 카스테라 때와는 좀 다른 분위기였어요. 원래 아웃사이더를 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했던 것 같지만 '누런 강 배 한 척'에서는 그것과는 좀 다른 따뜻함, 그러니까 나른함이랄까.. 그런 기분이 느껴졌어요. 

'누런 강 배 한 척'을 보고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의 첫 수록작-이젠 제목도 기억 안나네요. 이런-이 문득 떠올랐답니다. 뭐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요. 

지금 책상 위에는 2007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있어요. 성석제란 이름을 보고 실실 쪼개며 집어들었는데 박민규의 '깊'도 있네요. 허허.. '깊'이라... '깊', '깊', '깊'. 뭐죠, 이 제목? 

흠... 조만간 박민규 새 단편집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2008-11-04
20:54:10
  

 

병장 이동석 
  와우, 정말 박민규는 꾸준히도 뽑아내는군요. 2008-11-05
06:08:13
 

 

병장 이동석 
  낯선 박민규에 대해 이야기 하느라 이거 뭐 가지로-도 안외쳤군요. 

고동기님의 독서후기를 추천하는건, 뭔가 남우주연상을 받는 송강호와 여우주연상을 받는 전도연처럼 이제 뭔가 보수적인 선택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어쩌겠습니까 압도적인걸- 2008-12-11
10:25:07
 

 

병장 김민규 
  상동. 가지로 2009-01-09
19:14:23
  

 

병장 이동석 
  이를테면 저열한 글쓰기를 밥먹듯 반복해온 이동슥 같은이가 어쩌다 가끔 정신이 돌아와서 그럭저럭 글을 쓰면, 상대적으로 매우 잘된 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고동기님 같은 분은 아무리 글을 잘써도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어려워보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 가지로-를 아끼신건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최고-를 지키는게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01-09
20:0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