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 발터 벤야민
이병 홍명교 2008-07-15 13:23:06, 조회: 366, 추천:0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도서출판 길
프랑스와 독일의 좋은 책들을 많이 번역해온 독문학자, 불문학자들과 벤야민 연구가들이 모여서 획기적인 기획을 내놓았습니다. 발터 벤야민의 저작들을 한데 모아서 체계성을 갖추어 10권의 선집을 번역 출판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탁월하고 선언적인 논문의 저자로, 그리고 <아케이드>라는 대저작을 통해 총체적 도시, 건설, 자본주의, 문화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아왔습니다. 이 선집은 <아케이드>를 제외하고 발터 벤야민이 생전에 쓴 논문, 에세이, 저서들을 분야별/주제별로 나누어 3년여에 걸쳐 발간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현재까지 1,2,3권이 나왔는데 군입대 직전 들린 영풍문고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부대에 전입하고나서 책을 펼치는 순간 책을 읽을때마다 벤야민의 사유-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벤야민의 초기 저술들을 한데 모은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는 각각 연대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목적과 목표하에 서술된 글들입니다. '일방통행로'란 벤야민이 일방통행로의 거리를 지나갈때 흩어진 이미지들에 대해 사유하듯 이미지-사유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온갖 이미지들에 대한 사유, 꿈에 대한 사유, 카프카나 예술작품, 사진, 소설, 글쓰기 등에 대한 사유들이 모여있습니다.
초기의 벤야민은 유대교적 신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아있었는데, 꿈에 대해 묘연한 느낌으로 몽환적으로 서술한 문체는 모두 그 영향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유는 하나같이 유물론적 지평 위에 펼쳐져 있습니다. 요컨대 그는 변증법적 사유와 유대 신비주의적 탐구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한국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이 불었습니다. 80년대가 소비에트 맑스레닌주의의 시대였다면, 80년대후반~90년대초반에는 단연 루이 알튀세의 구조주의 철학이 유행했고, 90년대 후반 이후는 계속해서 라깡이나 들뢰즈, 또는 네그리류의 전성기죠. 하지만 이런 학문적 경향들마저도 학문의 '수입' 통로에 의해 영향받은 측면이 다분히 큽니다. (지식인들의 학문적 취향도 중심부국가의 유행을 따라가니 참 쓸쓸하긴 합니다만.)
초기 들뢰즈나 라깡 논문, 책의 번역본 대다수가 미국과 영국에서 영문으로 번역한 것을 재번역한 것이었고, 여기에 미국적 우편향이 개입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요컨대 철학서를 단지 '철학'서로만 읽을뿐 실제 현실 비판, 자본주의 비판의 무기로서 철저히 정치학-사회학-철학의 구분없이 연구된 논문들에서 '정치'가 제거되었다는 것이죠. 미국 지식인사회에서 정치를 거세하는 과정이 그대로 인입된 것이라고 보면 될것 같습니다. 책으로 멋 좀 부린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들뢰즈 책 한권씩은 다 읽어봤다고 말하지만, 대다수가 예술비평의 차원에서만 수용할 뿐이며, 그마저 '예술비평'과 문화비평도 알맹이가 제거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는 벤야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맥락이 존재합니다. 벤야민이나 푸코, 들뢰즈의 연구들은 프랑스에서의 정치철학적 경향성과는 다르게 한국과 미국에서는 정치가 제거된 스타일로서의 학문경향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문화면에서 가장 쉽게 그들의 책들에 대한 소개글을 찾아볼 수 있는건 행간의 의미를 경시할 수 없게 만듭니다.
따라서 2008년에 이르러 직번역된 벤야민 선집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현대미학/철학의 흐름에서 벤야민의 왜곡된 위치를 재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는 벤야민에게 있어서 문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일상과 무의식/의식의 구조 안으로 넓혀가는 것을 위해 꼭 거쳐갔었어야했던 관문이었습니다. 벤야민은 평소 도시구조, 건축, 꿈, 어린시절, 프랑스문학, 글쓰기, 종교 등 넓고 다양한 부문에 걸쳐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런 것들에 대한 연구를 경계없이 하나로 묶어서 작업해낸다는 것은 학문의 경계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던 그에게 연구자로서 첫번째 제1의 관문이었던 것입니다. 카프카 소설, 문학 등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에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선집은 10권까지 나올 예정입니다. 두번째책은 벤야민의 저작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논문과 <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논문이 묶여있습니다. 본래 '결산글'로 쓰려고 했는데, 길이 길어져서 따로 올려야겠네요. 저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는 처지라 후기를 제대로 쓴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워낙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의 소제목들을 지닌 책이라, 직접 '체험'해보시는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 이 정도로 맺음하겠습니다.
지통실에서 상황병으로 근무서면서, 한달전에 읽은 기억을 토대로 메모장에 몰래몰래 쓰느라, 제대로 소개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는데 멋진 책을 읽고 요렇게 쓰니 죄짓는 기분이네요.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는 카프카적인 문체가 숨겨진 연구이기도 합니다. 뭐라고 경계지어 명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벤야민의 사유가 말그대로 '이미지화'를 꿈꾸며 전개됩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39:32
일병 이동열
명교님의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제가 부족한지 느낍니다.
조금 더 상세히 이야기 해주셨으면 더욱 감사했을텐데(흑흑)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꾸벅) 2008-07-15
13:28:57
병장 김준호
아 이 책 저도 갖고 있는데. 제대하기 전까지 꼭 읽어서 저도 후기를... 2008-07-15
13:39:23
병장 장윤호
잘 봤습니다. 벤야민은 수업 중에 접하고, 주제로 삼아서 발표까지 했는데 기억나는게 없군요(땀)... 아무튼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명교님의 독서후기를 볼 날이 점점 줄어든다는게, 아쉬울 정도네요.(웃음) 2008-07-15
15:41:41
이병 홍명교
이동열/
조금전에 상황병 밥교대하면서 쓴 글입니다. 제가 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실성이 결여된 후기 같아요. 다른 후기는 더 상세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김준호/
준호님이 제대로 정리 해주십시오. 후기 기다리겠습니다.
장윤호/
감사합니다.(웃음) 결국 그래도 윤호님과 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권력차가 있잖아요. 제가 뭔짓을 하든, 발악을 하든, 저는 윤호님이 부러워요. 하하(웃음) 2008-07-15
15:56:13
일병 이동열
명교/
전에도 한번 말씀드린적이 있는데 저도 상황병입니다(웃음)
왠지 반갑네요! 아무튼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꺄아) 2008-07-15
16:07:21
병장 황인준
발터 벤야민..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가능할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앞으로 읽을 후기가 늘어났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게요(웃음).
앞으로 화이팅요.. 2008-07-15
16:09:19
일병 김용진
와~ 구조주의 철학이라든지 모더니즘 들뢰즈 같은 사상과 사람에 대해 자세하게 아는 바가 없으니 그 문단은 애하가 잘 가질 않지만......ㅡ 이런부분도 나중에 명교님이 연작으로 쉽게 설명해주시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웃음) 어떤 책을 소개하시고자 하는지는 잘 알겠어요! 글 소제가 상당히 흥미로워 관심이 가는데요..(웃음) 2008-07-15
16:10:04
병장 이동석
흐흐, 독일에서 유학하고온 교수가 벤야민 가르치면서 그렇게 교재를 까더라니,
직수입이 아니라 미국물 먹어서 그렇다는걸 왜 이야기 안해줬을까. 하하.
끙, 요새 바빠서 책마을 글도 잘 못읽네요. (눈물)
이 선집 기대되는데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개론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원전이라는것도 확 당기는군요.
(그리고 보니 명교님 독서만 좇아가도 괜찮겠는데요. 껄껄) 2008-07-15
18:13:23
병장 이태형
10권이라.
보아하니 비쌀테지요!?
아직 읽을 수준이 아닌지라.
화중지병, 화중지병.
한 10년 후에는 읽고 감탄할 수 있을라나 모르겠군요. 2008-07-15
18:56:29
상병 홍석기
'지름신' 을 강림하게 만드는 글이군요. 거기다 중역본이 아닌, 원역본이군요. 명교님의 말대로 예전 중역본들은 정치적으로 '거세'되어 조중동에 의해 악용되었었죠. 데리다 사후에 동아일보에서 '데리다의 상생 철학을 본받자' 따위의 칼럼을 뻔뻔스럽게 올렸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2008-07-18
14:31:00
병장 박종석
물론 온전한 번역은 중요합니다. 적어도 번역가는 항상 플로베르적 고민을 품고서 번역에 임해야 하겠지요. 하나의 단어에 완전히 대응하는 하나의 번역어를 찾으면서 말입니다. 이 지점에서 오독을 정당화해줄 여지는 전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어떤 철학을 수용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글쎄요, "알맹이가 제거되었다"라는 표현에는 성급한 부분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좀 뻔뻔한 얘기 같지만, 심지어 조중동조차도 그들 나름의 수용을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요컨대 번역의 문제 이후에 와서는 "알맹이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묻기보다 "무엇을 알맹이로 보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정당합니다. 다만, 원전에서 출발해야겠지요. 전혀 쌩뚱맞은 2차적 주석서를 훓어보고서는 하나의 철학에 대해 통달한 양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논외로 제쳐둬야겠고. 그러나 자신이 보고 싶은 들뢰즈, 알고 있다 믿는 푸코, 라캉을 따르는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 푸코, 라캉…… 이들을 하나의 단면으로 규정짓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푸코의 경우 영미권에 적극 수용되기 시작한 후기에 들어서는 그 자신조차도 초기의 저술과는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만들어진 광인에 대한 두껍고 난해한 저서 《광기의 역사》에서 출발하여 《감시와 처벌》에서 판옵티콘의 이미지로 집약되었던 권력과 주체의 날카로운 문제 의식은 촘스키와의 대담에서 볼 수 있듯 분배, 민주주의, 공정한 국가 권력 등의 문제에 천착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위적인 입장으로 변모합니다(지젝은 김상환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데리다의 경우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저는 데리다는 접하지 않았으므로 잘 모르겠군요)
들뢰즈의 경우는 명백히 두 시기를 구분할 수 있겠지요. 칸트, 스피노자, 니체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철학사 전체에 대한 재검토를 거쳐서 《의미의 논리》, 《차이와 반복》의 두 저서에서 절정을 이뤘던 의미의 철학자로써의 들뢰즈. 그리고 펠릭스 가타리와의 만남 이후 《反 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에서 반자본주의적이며 반정신분석학적인 입장을 강조해왔던 들뢰즈. 사실 이 두 들뢰즈를 구분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연장선에 놓고 보느냐에 따라 그 수용점은 크게 달라집니다. 소위 펠릭스 가타리를 만나서 '베렸다'라는 건데, 심지어 지젝조차도 그런 입장을 깔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에게는 《의미의 논리》, 《차이와 반복》의 두 주저 이후의 후기 들뢰즈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펠릭스 가타리 이후의 들뢰즈는 지젝의 사상적 토대인 라캉을 너무 격하게 까고 있기 때문이죠. 닿을 수 없는 실재에 대해 줄곧 은유로 우회하는 정신분석학은 실상 실재로 닿지 못하게 하는 원흉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라캉이 주체의 일반적인 구조로 설명하는 편집증적 구조에 대해 들뢰즈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비판합니다(적어도 《의미의 논리》까지의 들뢰즈는 라캉적인 관점을 긍정하는 듯 보입니다만).
그렇다면 라캉은 어떻습니까? (이 부분에서는 원저를 읽기보다는 지젝 등 2차적 주석서에 기대는 부분이 커서 좀 망설여집니다만) 거울 단계에 관한 논문을 위시한 초기의 라캉은 프로이트를 번역하여 상상계, 상징계의 두 심급과 실재의 세 가지 구조를 제시하는 것에 주력했고, 특히 언어적 질서의 상징계를 강조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팔루스를 강조하며 초기의 이론을 보완한 중기 이후의 라캉의 입장은 실재의 문제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어떻게 상징계를 구축할 것인가가 요지였다면, 그 이후는 실재로의 횡단이라는 조금은 모호한 구원론을 제시합니다. 라캉의 경우는 너무 교묘해서, 초기의 이론을 정교하게 연결하여 그 차이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어설프게 번역된 그의 글을 읽은 주제에 할 말인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라캉의 화법이 남기는 해석의 여지는 광범위합니다. 오늘날 핵심은 실재를 어떤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죠. 앵글로색슨적 수용(그것 또한 하나가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편의적입니다만)처럼 상징계가 지시하지 못한 틈, 칸트의 물 자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지젝처럼 상징계의 일그러진 표면, 요컨대 후생적인 개념(상징계를 어떻게 조작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패미니즘에 있어서도 세련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으로써의 라캉주의, 한편으로는 변태 마초로 매도되는 라캉주의 등의 다면성이 있고요.
원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서 파생되는 여러 수용점에 대해서는 열린 입장으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들뢰즈, 알고 있다 믿는 푸코, 라캉…… 그러나 다른 수용점은 어떤가 살펴보면서, 논의의 외연을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앵글로색슨적 관점을 특별히 배제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생성은 항상 중간에서 일어난다." 《디알로그》의 〈영미 문학의 탁월함에 대하여〉에서 들뢰즈가 말했지요. 프랑스적 사유가 나무라면, 앵글로색슨적 사유는 벽과 벽 사이를 뚫는 혼종성이라고. 뿌리의 고고한 사상적 지평에서 출발해서 줄기를 거쳐 잎사귀에서 개화하는 프랑스적 사유는, 앵글로색슨적 사유를 종종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이죠.
조중동을 상종 못할 무엇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건가 읽어보고, 이렇다 저렇다 대꾸라도 해야겠지요. 어쨌든 그것들 또한 일종의 물음이니까요. 근본적으로, 철학이란 뭔가를 주장하는 것이기 이전에, 질문하기라고 생각합니다. 주장에는 믿음이 선행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종교겠지요(신앙, 신념, 의지 같은 표현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그러나 철학에는 언제나 질문히 선행해야 합니다. 주장하지 않는 철학은 실천이 부재한 철학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으나, 철학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지요. "맑스가 이렇게 말했다"라고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는 것이 철학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따져보고, 대입해봐야죠. 한국적 수용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저렇게 말한 맑스'를 때려잡고 유일한 권위로써의 '이 맑스'를 강조하는 것이 정당한 수용은 아닐 겁니다.
쓰다 보니 본문과는 거리가 꽤나 생겨버렸습니다. 그러나 '미국적 우편향'이 '본령을 잃음'으로 연역되는 것에는 비약이 있다고 여겨져서 조금 끄적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뚜렷한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지 않은 주제에 철학이니 미학이니 끄적이는 제 자신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럼 다들 건필하시길 바라면서, 이만 총총. 2008-08-07
16:45:27
병장 이동석
종석님은, 언제 글을 써주실건가요. 크크.
그런 무시무시한 댓글만 천천히 남기시곤 총총 사라지시는. 크크. 2008-08-07
18: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