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이 짧은 시간동안
상병 김요셉 2008-12-31 13:44:12, 조회: 118, 추천:0
*
병훈님의 글, [내글내생각] 우리는 깜빡이는 녹색불을 건너야 하는가.
정호승 시인, 이 짧은 시간동안.
-
봄.
한 번 시작된 술자리는 끝 날 줄을 몰라, 2차에서 3차를 거치고는 아침까지도 파장이 나지 않았다가 끝내 다음 술자리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치지 않고 마셨고, 그치지 않고 토해냈으며 그치지 않고 웃었다. 낮에는 졸았고 밤에는 술을 마셨다. 잠에 취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마찬가지였고 취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이나 매한가지였으니, 그 해 봄 내내 나는 미쳐있었다.
간혹 잠에서 깨면 밤이였고, 간혹 술에서 깨면 낮이였다.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고시원의 작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낮 햇살은 모두 어스름했다. 한 줄기의 빛이라기보다는,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연기와도 같아 어둠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대신 어둠 속에 스며들어 제 밝음을 잃어갔다. 그 연기를 들이 마시며 깨어나는 낮이면 아달린에 취한 마냥 눅눅한 이불 속에만 틀어박혀 티브이를 멍 하니 바라보며 쓰린 속을 위로했다.
차라리 밤에 깨어나는 편이 나아서, 고시원 건물의 1층에 있는 술집에서는 취객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고시원 근처의 놀이터에선 닭벼슬마냥 머리를 곧추세운 펑크들이 밤새 술판을 벌이며 노래를 불러대고 있으니, 그 때는 미친 사람이 비단 나 뿐만은 아닌 것 같아 그게 적잖이 위안이 되어 눅눅한 이불에서 빠져나와 거리로 나섰다.
밤 거리엔 우는 여자도 있고. 웃는 남자도 있고. 토하는 여자도 있고. 기타 쥐고 노래 부르는 남자도 있고. 싸우는 여자. 욕하는 남자. 쓰러져 자는 사람. 팔짝팔짝 뛰어댕기는 사람. 먹는 사람. 뱉어내는 사람. 사람들, 사람들, 취한 내가 흔들리는지 취한 그들이 흔들리는지, 다들 하나같이 휘청휘청 거리며 현란한 거리를 쏘아다니고 있는데, 맥주 한 캔 쥐고 밤새 그 틈을 헤집으며 돌아다니거나, 놀이터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펑크들을 구경하거나,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글을 읽거나, 쨌든 그치지 않고
외로웠다 나는. 그에 반해 아주 가끔 - 울었다. 아주 가끔 - 슬퍼했고 위로했다.
오늘은 누가 나를 늙은 가죽가방처럼
지하철 유실물센터 구석에다 내던져놓았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잃어버렸다고 신고하지 않는다
(......)
밤은 깊어가고 배는 고픈데
망년회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지옥은 여기에서 먼가
'유실' 부분
여름.
네 병 쯤 마셨을까.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잃어버렸다. 지갑도 함께 잃었다. 은행에 들른다는 것을 잊었었나보다. 그러니 돈도 잃었다.
당장 방값 낼 돈도 없으니 술값 또한 없는게 당연한데, 잊고 잊다가 한 번쯤 잃어버리면 아차 싶어 취기가 물러날 법도 한데, 여전해서, 되려 우스웠다. 이젠 술 마실 돈도 없구나 키득키득. 어라 키득. 밥도 못먹겠네, 아아 괜찮아 키득. 키득 - 거리다 보니 어째서인지 돈 없이도 술을 마셨고, 속없이 멍한 정신으로 마시는 술은 더 빨리 취했다. 나는 더 자주 기억을 잊고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는 사랑을 잃고 방황했으며, 누군가는 사랑을 얻어 방황했다. 누가 듣기에도 '어쩌라고' 싶을 만한 방황들 앞에서 나는 조그마한 위로라도 보태기 위해 애를 썼으나, 누군가를 만나 앞에 서면 정작 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 거리다 웃곤 말았다. 위로 대신 취기만 보태주었다. 날은 점점 더 더워져만 갔다.
한 때 내 어떤 시절들보다 더 많아 내 주위를 가득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날이 더워질수록 하나 둘 씩 사라지고, 그렇게 방황하는 누군가들만 남아갔다. 아픈 사람들만 남았다. 그들도 언젠가는, 날이 더 더워 뜨겁다 못해 녹아내릴 지경이 되어버릴 때 즈음엔 함께 녹아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졌다. 불안했다. 불안할수록 그들의 아픔을 필사적으로 수집했다. 그들의 웃음을 불신했고 그들의 소통을 불신했으나, 정작 그들이 하나 둘 씩 사라져갈 즈음엔 그들이 아예 사라지더라도 그들이 토해내던 아픔이나마 간직해 사라진 그들과의 소통의 꺼리를 남겨두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수집한 아픔에 필사적으로 공감하고, 그럴수록, 나는 여기 홀로 남겨져 떠났거나 떠나가는 그들의 아픔들만 처연하게 바라보며 그럴 수록,
그치지 않고 외로웠다.
나는 일제히 편대비행을 하며
허공 높이 무수히 발자국을 찍어대다가
외로이 소금밭에 앉아 울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내 눈물로 소금을 만들지 않는다
(......)
나는 몇마리 장다리물떼새와 함께
외로운 소금밭을 서성거린다
나의 발자국이 소금이 될 때까지
나의 눈물이 소금이 될 때까지
'도요새' 부분
가을.
종강과 동시에 쫓기듯 고향 집으로 내려왔다. 더위는 절정에 달했다. 고향에는 가족이 있었고, 한때 친했거나 여전히 친한 친구가 몇 있었으나 그와 관계없이 나는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더위 탓인지.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와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글을 읽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티브이를 보며 소일했다. 아주 가끔씩 혼자 나가 독한 술을 한두 잔씩 마시곤 태연하게 돌아왔다. 밤새도록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아픈 사람들이 그리웠다. 정작 함께 있으면 따뜻한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주지 못 할 주제에 애타게 그리워 또다시 외로웠다. 그들은 누군가. 무리로 섞여 떠들썩하게 몰려다니면서도, 은밀하게 찾아와 제 아픔을 반 쯤 숨긴 채 웃음 지을 때도, 시덥잖은 푸념이나 내뱉을 때도 언제나 나를 외롭게 하고 괴롭게 하였던 그들은. 어디로 가버렸나.
더위가 꺾일 무렵 일자리를 구해 나갔다. 진주였던가, 어디였던가. 하루 종일 철근을 이고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하루에 팔 만원씩을 받았다. 다섯 날을 일하고 사십만원을 벌었다. 여섯 날 째, 점심을 거하게 먹곤 길바닥에 누워, 가을의 초입이니 이제 꺾일만도 하건만 제 나설 데 모르고 기승을 부리는 더위를 머엉 하니 바라보다간, 느닷없이. 짐을 채겼다. 더위 탓인지.
누군가 만나고 싶었다. 광주보다는 부산이 더 가까웠으니, 태어나 처음으로 부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는 H도 있고 N도 있다.
그녀를 만나서는 한적한 바다에 갔고 산책을 했다. 저녁 무렵 그를 만나서는, 역시나 술을 마셨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으나, 또다시 기억을 잊어, 그녀를 만났던 것도 그를 만났던 것도 부산에 있었던 것도 다 잃어버렸으나, 대신 시집을 샀다. 정호승. 이 짧은 시간동안. 전 날 마신 술 탓에 괴로운 속을, 서면 어딘가의 허름한 돼지국밥집에서 국밥을 먹으며, 더위는 드디어 한 풀 꺾였고. 시를,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산산조각' 부분
겨울.
하루 종일 할 일 없는 사무실에 꼬옥 틀어박혀 공부를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담배 한 대 피우러 밖에 나오니 새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다. 첫 눈이 이렇게 내리고는 한동안 잠잠하더니, 아주 오랜만에 눈이 제대로 내린다. 쌓이지 말아야 할텐데. 쌓이면 치워야 할텐데.
여전히 그치지 않고 외로운 것임은 틀림 없으나, 제 외로움을 들여다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거나 힘들거나 그냥저냥이던 시간들이 봄을 거치고 여름을 지나 겨울에까지 왔다. 서면의 뒷골목에서 시를 읽던 그 해 가을에서부터, 그 다음 해 가을까지. 그리고 그 다음해, 지금 여기까지. 나는 여전히 잊고 잃으며 살아왔으나, 어쩐지, 죽지도 않고. 조금더 나아지지도 않고. 조금도 나빠지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 행복이라니, 뭐 그런 과분한 소리를. 행복 따위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음은, 죽지도 않고 여기까지 왔음으로 인해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불행이라니, 깨달음 없이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불행 따위, 산산조각으로 살아가면 그만인데, 그런 엄살 부려봐야 부처님의 웃음 앞에서 부끄러워지기만 할 뿐인 것을.
봄이 오기 전에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고프다. 누군가들은, 여전히 방황하고 있으며 어쩌면 나 만큼이나 외로워 하고 있을 지 모르지. 마시고 토하고 아픈 누군가를 만나고프다. 만나 함께 마시고 토하고 아프면서, 그들에게 - 내 외로운 이십대에게 어줍잖은 위로를 건네야지. 아주 수줍게. 아주 소심하게.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 하고
사람은 잊혀졌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
사람들은 오늘도 검은 강물처럼 흘러가
돌아오지 않지만
더러는 강가의 조약돌이 되고
더러는 강물을 따라가는 나뭇잎이 되어
저녁바다에 가닿아 울다가 사라지지만
부도밭으로 난 눈길을 홀로 걸으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들린다
'부도밭에서' 부분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8-12-31 13:40:07
병장 정병훈
제 글에 대한 독서후기입니까? 하하하- 일단 웃고 시작하겠습니다.
쪽지로 따로 제 글에 대한 설명을 보내 드렸는데, 이건 정말 대단합니다. 오늘 좋은글 많이 만나봅니다. 독서후기라서가 아니라, 이건 정말 제가 생각하고 있던 그것들과 비슷하거든요. 글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 올라온 '이십대 예비저자들을 위하여'를 읽은 탓인지, 출판을 하고 싶다는 생각 말입니다. 제 요새 키워드는 '이십대'인데, 그중 핫 키워드는 모두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그것이라는 것을 요새 새삼 느낍니다. '정신암', '덩어리', '불', '구멍' 우리 끼리 모여서 이 주제에 대한 글을 꾸미는 것 또한 대단히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물론 이건 정말 흥분해서 생각한 것이고, 실현 가능성도 크게 없을 것 같고, 더불어 글 잘 쓰는 분들에게 묻어 가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에.(제 실력이, 참. 하하하)
이십대라면 누구나 공감 할 시이며, 글입니다. 아닌가요?
넓은 덩어리 속의 단면을 보는 듯 합니다. 외로움. 그래요.
키워드 '이십대'로 책 하나 낼까요?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인용하자면,
"어느 누가 이십대의 작가에게 사려 깊지 못하다는 비판을 하는가!!!!" 같은 생각을 다르게 표현 하고 그 모습들을 만날 수 있는 것에 감사 합니다. 제 다이어리 한편에 고이 모시고 있겠습니다. 좋은 시구절이네요.
역시, 이십대는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지만, 그 분명한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십대의 힘이라고 믿고 싶어요. 그래야 되는데. 잘 읽었습니다. 2008-12-30 19:46:19
병장 정병훈
아쉽습니다. 이 글 그냥 독서 후기가 아니라, 내글 내생각으로 해서, 다시 올리면 안됩니까.
이십대 시리즈물인데, 민규님과 요셉씨랑 같이 해서 키워드 : 20대 해서 책 하나 묶어 야될텐데. 냠냠.
이렇게, 밀릴 걸 생각하면서도 글을 남기는 요셉씨의 용기가 부럽습니다. 2008-12-31 11:11:25
상병 김용준
음...일단 좋네요. 후후. 전체적인 분위기가 우울하고 외롭고 쓸쓸한...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생각할 정도의 주제들...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자신과의 싸움이겠죠. 그래요! 우리(20대)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어요. 그것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겠죠.그냥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물어 뜯지는 말아주세요. 다시 말하지만 제 생각이니까요...후- 2008-12-31 11:21:12
상병 김요셉
병훈 /
용기랄 건 없지요. 병훈님 개인과의 소통을 위해 올린 글이니까요. 분량이 조금 길다 싶기도 하나 따로 한 '편'으로 내놓기엔 부족하니 comment와 게시글의 중간 정도인 답글 형식으로 달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뭐, 다시 올려도 됩니다. 아쉽다 하신다면야 - 칭찬에 약한 사람이라서요. [엮인글] 정도의 글머리가 있으면 괜찮을텐데말이죠. 2008-12-31 13:23:57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03:01
상병 이우중
트랙백이 있잖아요. 후후 2008-12-31
13:48:45
상병 김요셉
그런 의미에서, 트랙백 서비스.
http://26.1.1.40:2007/bbs/zboard.php?id=02191&page=2&sn1=&divpage=1&category=9&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779 2008-12-31
13:51:08
병장 정병훈
새로 올라왔군요.
이제 새로 시작한 글이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음-,
소통이 뭔지 모른다는 이 동네 양반들 때문에 일전에 일이 좀 있었지만, 새로 돌아온 뒤 몇분들과는 더욱 깊은 소통을 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원 본글을 제외하곤 대부분을 비공개 쪽지글로 대화를 나누지만, 가끔은 서로의 쪽지 속에서 공개를 하고 싶다고 느낄정도로 좋은 말들이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책하나 냅시다. 풉- 2008-12-31
16:02:37
병장 김민규
저도 정호승 시인은 참 좋아합니다. 이름만이라도 반갑네요.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글 전체에 잔잔하게 깔리는 느낌이 참 좋은데, 이걸 뭐라고 집어서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냥 그대로 음미하고 있습니다. 뭐 많은 것이 필요한건 아니죠. 2009-01-02
15:3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