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이 남자가 사는 법.  
상병 김남우   2008-11-18 10:42:22, 조회: 111, 추천:1 

일단은, 반갑네요! 정말로! 리얼리!
이 글을 다 쓰고 올리려니 페이지 접속이 끊겨버렸거든요. 글을 한 번 날려 먹고, 있는대로 짜증을 냈다간, 그 후부터는 얼마나 초조했는지 몰라요. 여기가 이대로 사라져버린건가 하구요.
참
다행이에요.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와,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 '농담'을 읽고 쓴 글입니다.
문맥의 앞 뒤가 전혀 맞지 않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는가 하면, 전혀 출처를 알 수 없는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기 때문에, 위의 두 책을 모두 이미 읽으신 분에게 권장해요.





“형, 내가 오늘 신문에서 봤는데 젊었을 때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왔다는 거야. 그 책을 사야겠어. 그 책에 따르면 젊었을 때의 나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일 수는 있어도 나는 아니라는 거야. 형은 이 말이 이해가 돼?”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상섭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 하면, 젊었을 때의 나를 지금의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거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거야, 두 사람은. 저자가 어떤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펴는지 나도 궁금해.”

권여선. '분홍리본의 시절'



이 남자가 사는 법


  - 이 남자, 김해연.
이 남자 김해연. 조선 땅이 일본에게 넘어가던 1910년, 내 나라 땅도 아니고 남의 나라 땅도 아닌 곳에서 태어났다. 애초부터 나라를 가져 본 적이 없으니, 나라 잃은 설움도 독립에 대한 열망도 모른다. 조선인 신분으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 - 그 어려움이 빼앗긴 나라의 국민으로서 김해연, 한 개인이 가지는 사정(事情)의 전부다.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문제는 그의 개인적인 사정에 치여 그에게 어떤 영감도 감흥도 주지 못한다. 헌데, 그가 그렇다고 해서, 국가나 민족이 아닌 그 자신 즉 개인에게라도 충실히 살아왔던가. 조선인으로 만철에 들어갔다는 데 우쭐해 하던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토비들과 교전하는 일본군의 뒤에 숨어 벌벌 떨던 그가?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사랑을 해 본 적도 없던 그가?
실패한 이상주의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군 장교도 그에게 '그러니 사랑을 해 보라'한다. 사랑이 그의 인생을 변화시킬 것이니, 무엇을 이야기하려거든 그 전에 일단 사랑을 해 보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어떤 사랑을 한다 한들 행복하기만 하면 삶은 거짓이라도 상관없다는 남자의 인생이 바뀌어 봐야 얼마나 바뀌겠나. 충고대로 남자는 이정희를 만나 사랑을 하고, 사랑 뒤에 따라오는 행복도 질투심도 분노도 부끄러움도 모두 맛 본 뒤에 정희와 약혼까지 하게 되지만, 그 사랑의 열정도 행복에 대한 몰두도 이 남자 김해연의 삶을 뿌리채 바꾸지는 못한다. 그에게 달콤하고 황홀한 사랑은 삶의 여분이며 현실 밖의 낯선 환상일 뿐이니, 현실의 삶 그 자체는 될 수 없으니, 그는 여전히 석탄은 알되 조그마한 한 덩어리를 위해 쓰러진 수많은 나무는 보지 못하는 남자에 불과하다.

그래도 차라리 이 편이 더 나았을까. 거짓이라 하더라도 행복한 편이 더 나았을까. 그래 물론 행복하다면야, 그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나 영원히 감추어 질 수 있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거짓이라 불리지도 않는다. 거짓 - 이라는 선언 속에는 이미 그것이 언젠가 발가벗겨 폭로될 것임이 암시되어 있으며 환상 - 이라는 것 또한 언젠가 환상 밖의 현실이 천근만근 족쇄가 되어 환상을 깨고 옭아매어 올 것임을 미리 예언하고 있으니.
거짓이 폭로되듯 환상이 깨지듯 모든 사랑은 언젠가 끝난다. 그 뒤에 오는 날벼락같은 현실은 어떤 식으로라도 바뀌지(혹은 바꾸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한 것일테고, 이것은 김해연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해연의 사랑도 끝났으니, 김해연은 어떤 식으로라든 바꾸거나 바뀌어야 할 처지에 이르렀으니, 사랑이 남자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줄 것이라는 충고는 그 사랑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김해연에게도 얼추 들어맞은 셈이 되었다.
다만 하필이면 다른 여자도 아니라 이정희 였던 것을, 그리하여 환상 끝에 마주한 현실이 너무나도 참혹해져 버린 것을, 삶을 어떤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기 보다는 아예 포기해 버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그렇다 해서 그걸 누구에게 탓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단지 이 남자, 김해연의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까.


  - 이 남자, 루드빅.
단지 냉소적인 농담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다. 학교에서도 당에서도 열심이였고 노동과 혁명을 믿었으며 사랑도 있었다. 비록 자기기만과 허세로 이루어진 세계 속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 정도 기만과 허세는 가진 채 세계를 대하며, 또한 너무 어렸던 탓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니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나. 사랑하는 사람을 골탕먹이기 위한 치기어린 냉소와 농담이 이 남자 루드빅의 삶을 난파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단 세 문장의 농담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이것 뿐이였다. 그러나 이 짦은 농담 속에 담긴 어떤 정신에 대한 장난스러운 모독은, 그 정신에 대한 맹목성 만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무장하던 그들 모두가 남자를 배척하고 몰아 내쫓토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농담이였을 뿐인데! 그도 그럴 것이, 정신에 대한 모욕은 그들 - 한때 남자 또한 속해있던 그 집단의 정체성 자체에 대한 모독이였을테고 모독이 아닌 농담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 정신 - 일개 사상적 도구로서의 그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집단의 지나친 진지성에 대한 비웃음이였을테니.

남자는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남자를 구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숙함을 가리기 위한 가면극에 지나치게 몰입한 그들 모두에게는 적당한 상대역이 필요했던건지도 모르지. 헌신적인 성녀의 역할이 되어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남자를 구하려 했던 남자의 연인처럼 말이다. 가장 믿었던 친구마져 그를 버리고 남자의 몰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마당에, 남자는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덜덜 떨었겠지. 하지만 떨며 용서를 구걸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을 비웃었겠지.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꽉 막힌, 지나치게 진지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들을 비웃었겠지.
집단에서 쫓겨나 비참한 바깥으로 내몰린 후에, 그 비웃음은 증오로 바뀌어갔겠지. 고된 탄광 노동을 하면서, 자신을 쓰레기로 취급하는 장교들에게 모멸을 당하면서 증오는 점점 자라만갔을테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그 증오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남자를 구원해줄 것만 같았던 사랑 혹은 사랑에 대한 열망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기까지 했으니 그 뒤엔 증오마저도 고작 냉소의 대항으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 이 남자 루드빅도 김해연과 마찬가지로 사랑 비슷한걸 했던 모양이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이 남자의 사랑도 끝났고, 다만 하필이면 이 남자가 냉소와 농담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태어나 버려 그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누구에게 탓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이 남자, 김해연.
연인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예기치 못한 실연을 맞은, 게다가 실연 뒤에야 연인이 사랑때문만은 아닌 다른 이유로 자신에게 접근했으며 비슷한 이유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 그것도 남자의 친구, 에게도 접근해 밀정 노릇을 했음을 알게 된 남자는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한때 삶의 이유이자 전부이던 사랑이 역한 음모의 냄새만 남기고 사라져버리면 남자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러고도 감히, 차마 죽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나.
김해연이 그럴 만한 배짱은 못 되는 사람이란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니 그가 마약에 중독되어 비틀, 비틀 거리다 결국 생을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대목까지는 수긍이 가나, 어쩌자고 그가 자살기도마저 실패해 벙어리 행색 귀머거리 행색까지 하며 삶을 이어나가는지는 쉬이 짐작이 가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것일까. 달콤한 환상은 이미 깨지고 죽음보다 못한 현실만이 남았을 뿐인데.
그가 죽을 배짱 마저도 없는 남자라서? 혹시라도 어쩌면 연인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글쎄다.


  - 이 남자, 루드빅.
그래 아마 그 때 부터였을 것이다. 냉소와 농담을 좋아하고 진지함을 비웃던 이 남자가 되려 지나치게 진지해져 버린 것은.
삶을 난파에 이르게 한 최초의 사건도, 버리고 버림받은 욕망도 지나가버린 시절의 증오도 떨쳐내지 못하고 거기에 사로잡혀 냉소에 지나치게 진지해져버린 남자는 급기야 때늦은 복수마저 계획한다.
나를 배신한 옛 친구에게 복수하리라.


  - 이 남자, 김해연.
어쨌거나.
반쪽은 스스로 죽였으되 나머지 반쪽의 권한은 남자에게 없었나 보다. 일본군의 습격으로 한 마을 전체가 몰살당한 가운데서도 살아남아 버렸으며 밀정 노릇을 하는 민생단으로 몰려 동포에게 죽임당할 위기 중에도 살아남았다. 어쨌거나. 그를 구원한 새로운 연인을 사랑한다. 어쨌거나.
살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으며 죽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으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다시 사랑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고 울부짖게 되었으니, 모든게 '본의 아니게' 그리 되어버린 셈이니, 삶은 여전히 온전한 남자의 것이 아니려나 싶다.
그는 언제쯤에나 자신의 삶을 되찾는가. 몇 번 죽었다 몇 번을 되살아나고 그 가운데서도 언제나 항상 함께 있었던 연인을 사랑하고, 그러나 언제나 역사의 흐름 앞에서 휘둘려지기만 했던 이 남자 김해연의 삶은, 남자의 생이 격랑에 휘말리게 되던 최초의 사건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잡아채고서야 남자의 의지에 복속된다. 이정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자들을, 자신을 속이던 그 자들을 처단하고서야.

그렇다면, 이정희가 죽었던 그 날 부터 김해연이 복수의 방아쇠를 당긴 그 날 까지, 김해연이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져였을 지도 모른다. 역사가 존재했을 뿐이니 이 남자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았나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은 무의미한 것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 남자들. 루드빅, 김해연.
루드빅의 복수는 어떻게 되는가. 
주체는 있으되 대상 없는 복수가 제대로 성립될 수 있을 리 없다. 루드빅이 계획한 복수의 대상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과거의 것. 한때 그의 농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던 자들은 모두 그때의 잘못은 모두 잊어버렸으며, 그런 잘못 따위는 기분좋게 사과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실수 - 정말 농담이 되어버렸는데, 오로지 이 남자 루드빅만이 과거에 묶여 두 가지 헛된 믿음 -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실수를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 - 에 빠져 있었으니,
"그렇다, 내가 제마넥 앞으로 나아가 그의 따귀를 때렸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때, 대학 강당에서, 제마넥이 '교수대 아래에서 쓴 르포'를 낭독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때였고 오로지 그때뿐이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불리되어 버린다."
"모든 것은 잊혀지는 것이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는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루드빅의 난파가 시작될 그 무렵부터 루드빅은 과거에만 머물렀던 것이니 역시나 김해연과 마찬가지로, 복수에 실패하고 자신의 헛된 믿음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 루드빅이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  이 남자가 사는 법.
이정희의 복수를 위해 죽여야 할 세 남자, 그 중 두 명을 죽였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사지를 탈출했다. 십여년이 흘렀다. 국가도 민족도 모르던 남자는 그새 혁명의 일원이 되었다. 뒤늦게서야 세 명 중 마지막 한 명을 찾아가지만, 썩 마음에 드는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복수를 완결짓지도 못하고 뒤돌아선다.
복수에 실패한 루드빅, 난파가 시작되기 이전으로 회귀하려 한다. 고향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순진한 열정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운 그 곳으로. 
이 남자들.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살아왔을텐데, 복수의 순간에서야 비로서 자신이 진정 생동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있음을 느꼈을터인데, 복수에 실패해버리거나 복수가 부질없음을 깨달아버린 후에는 이제 어떻게 사는가. 
루드빅은 이제부터의 삶은 그저 '실패 이후'에 불과할 것이라지만, 그는 실패 이후의 삶에 대한 좌절감으로 걱정하는 듯 하지만, 그것 모를 일이지.
가슴팍에 넣어둔 총을 꺼내려던 김해연은 자신이 죽일 남자의 자식들을 보았다. 김해연이 그를 죽이는 것은 마땅하였겠으나, 이제 새 시대에 낡은 복수심으로 질척거리는 것은 못마땅할것이니 새 시대의 새 자식들을 위해 총을 꺼내지 않았다, 라고 해 버려도 되겠으나 그것 모를 일이지. 왜냐하면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는 그를 남겨두고 돌아서 가는 김해연의 뒷모습에서 어떤 증오의 감정도 읽어내지 못했으니까. 김해연의 뒷모습에 서려있던 감정은 증오도 회한도 아닌 추억을 곱씹는 아련함 뿐이였으니까.

그래, 모든 것은 시간이 약이니. 시간이 흘러 흘러 증오는 흐릿하니 무뎌지고 그 시절은 추억이 되어버렸을 뿐이니, 무려 십여년이 지난 뒤에서까지 가슴에 총을 품고 한때의 적을 찾아갔던 것은 그때까지도 묵은 감정이 남아있어서가 아닌 단지 매 년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첫사랑에 대한 추억 비슷한 것이였나보다.
그렇게 산다. 사는 법이랄 게 그리 거창 한 게 있을 리 없다. 안그래도 살기 팍팍한데, 살아가는 법도까지 거창하다면 어디 귀찮아서라도 살겠나. 첫사랑도 추억이 되어버리고 복수도 지나고나면 한 시절이였을 뿐이니, 첫사랑이 추억이 된다면 두번째 사랑도 세번째 사랑도 추억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아 남자라는게 다 그러려니 싶기도 하고, 다들 그러므로 한때 집착하던 감정들의 배신감 따위 애교스럽게 넘겨 버리곤 새 여자 만나 새 시대 만나 잘도 먹고 다리 쭉 펴고 잘만 자면서 뻔뻔하게!
그렇게 뻔뻔하게라도 잘 사는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려니.
실패하면 어떻나. 갈 길이 천리길 만리길인데, 단판으로 끝내버리고 혼자 피박 광박 다 쓰는건 억울하기 그지 없다. 2라운드 3라운드 하다못해 패자부활전 이라도 있겠거니. 그것마저 없으면 또 어때. 이 그림 그리다가 푼 돈 저 그림 그리면서 다시 따면 되지. 농구 졌으면 야구하면 되고, 야구 졌으면 축구하면 되고.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20:02:20 

 

병장 정병훈 
  두편다 안 읽어봐서 그런지, 잘 모르겠네요 크흐흐. 2008-11-18
13:58:20
  

 

병장 이동석 
  저는 두 편 다 읽어봤는데도 혼란스러운걸 보면, 
이건 뭔가- 그런것과 상관없이 재밌는데요? 흐흐. 

일종의 옴니버스-라고 불러도 좋을까요? 2008-11-18
17:5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