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우리는 자랑스런 인간이다
상병 이우중 [Homepage] 2008-11-26 20:06:47, 조회: 164, 추천:2
다 같이 노래하자 룩셈붉. Let's go.
-크라잉 넛. [룩셈부르크]
사람의 아들. 이문열.
정제되지 않은 글이 여러분에게 수많은 비판의 요소를 제공한다고 해도ㅡ
일단은 급히 써갈긴 대로 내놓으려 합니다.
어릴 적 이야기이다.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물었다.
“제사 때 절하면 안 되죠?”
-안 된다. 우상 숭배라고 배웠잖냐.
“근데요, 천주교랑 우리랑 같은 거 맞아요?”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다.
“그러면요, 성당 다니는 사람들은 지옥 가요?”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갈 수도, 안 갈 수도 있다.
“성당에서는 제사 때 절해도 된다고 하던데요. 저도 절하면 안돼요? 그냥 조상님들한테 인사드리는 건데. 서양에서 묵념하는 것처럼 우리는 똑같이 인사를 절로 하는 거잖아요.”
-이미 너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는 건 죄악이다. 기도하자.
... 이제 생각해 보니 그건 선문답이 아니었다. 지금 내 또래밖에 되지 않았을 그 때 주일학교 교사의 당혹감이 이해가 될 듯도 하다.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학교에 단군상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목사라는 사람이 야밤에 숨어들어 단군상의 목을 치는 섬뜩한 짓을 벌이는가 하면 특별기도회다 뭐다 해서 심심하면 시청 앞으로 어디로 몰려가고 예배당은 구원을 약속받는 장소가 아니라 단군상을 세운 자들을 성토하는 장이 되기도 했었다.
도저히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군상의 건립 목적과 세종대왕 동상의 그것에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들의 행동은 이순신 상을 때려부수자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반국가적 행위이다. 구국 기도회 백날 해 봐야 소용 없다.
하물며 로마 중심가에도 늑대의 젖을 빠는 로무스와 레물루스의 상이 떡하니 서 있다는데, 왜 그들은 그렇게 광분했던가.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책을 읽었는데 책은 ‘교회’보다는 (기독교에서의)‘신’을 다루고 있었다.
주인공 민요섭이 다시 교회로 돌아가려 했다든가ㅡ그 본인의 행적과 생각에 맞닿아 있는 것이 틀림없는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에 “더 추한 것이 있다고 해서 좀 덜 추한 것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더 불합리한 신들이 있다고 해서 좀 덜 불합리한 내 종족의 신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기술해 놓고서도ㅡ 하는 식의 결말이 조금은 실망스러웠고, 1차 개정판을 내면서 ‘새로운 신’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못했다 하여, 초판에서 빼 두었던 ‘쿠아란타리아서’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고는 하나 아직도 약간 아쉬운 바가 없지 않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그러잖아도 민요섭의 회귀에 대한 설명 부족이 불만스러웠다고 한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앞서의 반기독적 논리의 치열함에 비해 그는 너무도 손쉽게 기독교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 점 후반부에서 어느 정도는 보충이 되었다고 본다. 원래는 민요섭의 일기 같은 걸 삽입해 철저하게 규명해 보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이 정도로 그친다.”고 한다. 기왕 고치는 거 한꺼번에 손을 보았으면 좋았으련만.
이문열은 민요섭의 입을 빌은 아하스 페르츠의 입을 빌어 야훼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메소포타미아 신들의 사생아. 일찍이 가나안에 버려졌다가 이집트로 흘러들어가 아톤*과 야합한 뒤 다시 돌아와서는 바알**과 내연 관계를 맺음. 훗날 바벨론에 끌려가 마르두크***와 아후라 마즈다****의 씨를 받은 적도 있어 앞으로 어떤 혼혈의 자식을 낳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논다니”
표현이 좀 과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야훼는 만들어진 신, 그것도 여기저기서 되는 대로 끌어모아다가 끼워맞춰서 어렵사리 만들어진 신으로 전락하게 된다.
심지어 “...가나안에 목양신(牧羊神)과 군신(軍神)의 권능밖에 없던 야훼가 바알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농경신(農耕神)의 권능까지 획득하여 전능(全能)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는 비와 바람과 햇볕을 마음대로 하고 있었으나 농경을 위해 그 권능을 사용한 흔적은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엘리야의 승리*****에 이르러 마침내는 바알을 능가하는 권능을 보여주게 된다.”에서 유추해 볼 때, 완성된 야훼의 ‘전지전능’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유대에서 시작된 아하스 페르츠의 여행은 이집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이시스 신전, 바알의 신화체계를 접하고 야훼가 농경신의 권능을 획득하게 된 경위를 짐작케 해 주는 가나안, 소아시아와 북(北)시리아의 카르케미쉬******를 지나 바벨론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사화승*******으로 신전에 머물렀던 페르시아의 고도(古都)를 거친 뒤 인도에서 불교에 대해 이해를 하고 결국 로마까지 오게 된다.
그는 로마에서 어릴 때 희미하게나마 전해 들었던 희랍 철학을 접한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지난 여행이 탄식할 만한 도로(徒勞)의 세월이었다면, 로마의 희랍 철학, 즉 신을 논리와 지식으로 붙잡아 보려는 노력 또한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임을 깨닫고 마음을 굳힌다.
“돌아가자, 헛된 헤맴은 이것으로 넉넉하다. 이제는 자기 속으로 돌아가 침잠할 때이며, 새로운 개안(開眼)을 기다려 실체로서의 신과 마주할 때이다. 내가 신을 찾아 떠날 때가 아니라 신이 나를 찾아올 때이며, 신을 뒤쫓을 때가 아니라 마중할 때이다. 신은 반드시 내 길고 애절한 부름에ㅡ지난 반생의 쉼 없는 추구에 응하실 것이다.”
고 말하며 마침내 아하스 페르츠는 서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의 광야에서 그는 초월적 존재, ‘위대한 신생’을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의 직후, 역시 같은 광야에서 예수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게 뭔가. 야훼(라 썼지만 ‘절대자’로 읽든 ‘초월적 존재’로 읽든 하라.)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육화(肉化)하시어 내려보낸 그의 아들은 결코 메시아일 수 없었다. 그가 어릴 적 테도스에게 들은 바로는, 그리고 10년이 넘는 여행기간 동안 느낀 바로는 반드시 메시아에게는 세 개의 열쇠가 있어야 했다. “첫째는 가엾은 육신을 주림에서 구해 줄 빵이며, 둘째는 나약한 정신을 죄악에서 지켜줄 기적이며, 셋째는 맹목과 잔혹의 역사에 의와 사랑의 질서를 강요할 수 있는 지상의 권세” 였는데 예수는 위와 같은 물음에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며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분께서는 다윗의 자손들을 다른 족속의 손에 붙이셨을 때 이미 왕홀과 검에 대한 믿음을 거두셨”다고, 결국 “사탄아 물러가라”고 일갈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은 액자식으로 책 안에 들어 있던 또 다른 글의 내용이며 그 일부일 뿐이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추려내기엔 무리가 없어 보인다.
보혈의 피로 인간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는 인간의 죄를 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하기 위해 온 것 같다. 그가 십자가를 지기까지 그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람만 해도, 그 대가로 지옥불에 떨어질 사람만 해도 예수가 다시 일으켜 세우고 병을 낫게 한 앉은뱅이와 문둥병 환자보다는 많을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했을 때 그 여자도 여자지만 단 한 번의 돌팔매질도 못하고 흩어졌던 그들, 그들 역시 구원받아야 할 가련한 존재들이다. 그러면 예수는 그 여자의 죄를 용서했듯이 군중의 죄도 사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앉은뱅이들과 소경과 병자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고쳐 주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는 ‘의심’이란 것도 있다. 애초에 기적을 보이지 않으려면 그렇게 할 것이지 왜 굳이 몇 명에게만 그것을 보여서 눈으로 보지 못한 이들에게 사기꾼이니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들고 그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방관, 혹은 방조하게 만들어서 신의 아들을 살해한 공범이라는 죄책감을 씌우는가. 성경에 실리기 위함인가? 맛보기로 보여준 그의 기적은.
오병이어는 또 어떤가. 진정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내려주신 이라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세상 만민을 모두 먹이는 것이 마땅했다. 그랬다면 세상 모든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했을 것이고 그 때부터 이미 천국과 지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영원한 지상낙원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의 뜻”이라며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신(神)의 육화가 아니라 말(씀)의 육화였을 뿐이다.
그럼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 발화자(말씀하신 이) 쪽으로 가 보자.
그 분이 태초에 만들어 놓은 ‘사람양식장’(이곳의 동쪽에는 송승헌이 살고 있다는 괴담이 나돌기도 한다.)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유로 쫓겨난다. 대신 그들은 ‘지혜’를 얻었다. 그 분께서 유일하게 죄라고 규정지은 그 행위를 함으로써 감당해야 할 벌과(사실 왜 이로 인해 벌을 받아야 하는지도 의문이지만) 지혜는 서로 맞바꾸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의 원조(元祖)는 배부른 돼지였을테니.
그런데 여기서부터 선과 악이 생겨났나?
처음에 ‘악’은 과일 따먹는 것이었고 그것이 죄였다. 그로 인해 뭐 산고를 겪고 척박한 땅을 일구는 것이야 ‘(말 같지 않은)원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율법들은 대체 왜 그가 만들어서 던져주는가. 인간의 세상을 만들었으면(사실 이건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율법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질투가 많으신 하나님”인데 그가 만든 우리는 왜 질투하지 말라 하는가. 벌써 자신의 손을 떠난 피조물을 대체 어떤 연유로 계속 툭툭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전지전능함을 십분 활용하여 다시 인간으로부터 자율을 앗아가든가 할 일이지.
게다가 일관성도 없다. 두 딸과 차례로 동침해 자식을 낳은 롯도 축복을 받았으며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죽인 여러 형제들의 피는 어디로 흘러갔는지 아무도 모르고 덮여버렸다. 계명을 어겨도 잘 되는 놈은 잘 된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주의 뜻이면 정말로 인류에게는 지혜라고 하는 것이 아무 쓸모없는 게 아닌가.
오쇼 라즈니쉬의 말을 잠시 빌려 “하느님은 일종의 안전장치, 그리고 저 세상에 예치해 둔 일종의 일생저축”이라는 생각이 마음속 한 귀퉁이에나마 조금 남아 있었지만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생을 마감하면서 “주여, 내가 주님 곁으로 가나이다.”하고 약속받은 천국으로 향하려는 그의 신도를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지옥 구렁텅이로 던져 넣고 “이것이 나의 즐거움”이라며 미소짓는 그분을 생각하면 가끔 섬뜩해진다.
*아톤Aton : 원래는 헬리오폴리스 부근의 지방신이었다가 승격됨. Aten이라고도 불림.
**바알Baal : 신. 이집트에서의 변형
***마르두크 : 바빌로니아의 최고 신
****아후라 마즈다 : 배화교(拜火敎)의 선신(善神)
*****엘리야의 승리 : 엘리야가 바알의 사제 400명과 겨루어서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고 비를 오게 함.
******카르케미쉬 : 현대의 제라불스 부근.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한 뒤 지배층의 일부가 몇 개의 소후국을 형성하여 기원전 7~6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함.
*******사화승 : 조로아스터교의 승려
덧. 액자 바깥의 인물 민요섭이 쓴 경전의 내용 일부입니다.
“너희는 나를 위해 경배하지 말라. 나를 위해 제단을 쌓지 말며, 나를 위해 의식과 예물을 바치느라 너희 귀중한 재물과 노력을 허비하지 말라. 먼저 스스로를 구하라.”
“너희는 이웃을 사랑하라. 내가 기뻐해서가 아니라 그러함으로써 네 이웃도 너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지나치게 많이 가짐을 구하지 말라. 많이 가짐이 악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함으로써 네 이웃이 가난해지는 게 악이기 때문이다.”
덧2. 후주는 책에서 인용했습니다.
덧3. 힘이 빠집니다. 너무 까지(?) 마세요. 허허.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7:23
병장 이동석
뭐 이젠 이문열 까는건 유행이 지났죠. 흐흐. 잘 읽겠습니다. 2008-11-26
20:24:16
병장 정병훈
이문열 까기가 주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얘기가 있어서 그런것 같군요.
좀더 읽고 댓글을 달아야겠습니다. 2008-11-27
07:58:16
병장 이동석
음, 이문열의 책에서 각주만 빌려온게 아니라 종교에 대한 입장도 어느정도 빌려왔기 때문이에요. 이문열이라는 이유로 까임을 받을까봐 지레 건빵을 던졌습니다.
단군상에 목을 치는 일부 교인들이 비판받아야할 이유가 "대한민국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반국가적 행위"라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세부적인 내용을 언급하며 구원받은 자와 지옥 간자의 산술적인 비교-는 본문의 논지인가요? 2008-11-27
11:14:58
상병 이우중
동석님/
비판받아야 할 이유가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여서라기보다는 구국기도회다 뭐다 하면서 나라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기독교가 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인지는 사실 확실치 않지만 저는 이렇게 판단했습니다.)인 단군상을 놓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논의를 통해 조정해 나가야 할 문제를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선동해 큰 목소리를 내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구원 받은 자와 지옥 간 자의 산술적인 비교는 본문의 논지가 아닙니다. 글 쓸 당시에 낀 색안경의 색깔이 너무 짙어서 약간 비논리적인 예를 들었는데 '예수가 진정 메시아라면 그랬으면 안 된다'는 논지 전개의 일환으로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8-11-27
16:01:26
병장 김동욱
예상외로 조용(?)하네요. 2008-12-16
01: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