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용서한다는 것, 그 용기에 대해서
상병 김민규 [Homepage] 2008-10-17 10:21:07, 조회: 200, 추천:0
용서한다는 것, 그 용기에 대하여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고
살아가면서 쌓여가는 기억중에는 밝은 것들 만큼이나 아픈 것들이 함께 공존한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경험에서 나온 것이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일, 그리고 오해에서 쌓인 것과 같이 다양한 측면에서 형성되며 이루어진다. 경험의 강렬함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지속성과 작용방향이 결정되겠지만, 그 꼬여버린 응어리를 풀어 내는 데에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며, 때로는 평생을 지고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해 아파하다 무덤까지 지고 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쓴 뿌리'를 극복하는 문제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대하고 진지한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그 과정을 지나가고 있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때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상처가 깊어지고 골이 벌어져 봉합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개인은 주변에 도움을 청하다 극단적 결말로 내몰리기도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과거의 유령을 인식하지 못하고, 왜 자신이 현재 상태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한 채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것이 해결의 출발점이다. 이가 아프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신경까지 썩어 그 순결한 핑크빛 세포들을 잘라 도려내야 하는 최후의 상태까지 이른 이후가 대부분이기에 우리는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을 것을 권유받는다. 몸이 병들듯이 마음도 병든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인정했을때에만 치료의 명약을 투여할 수 있다.
왠지 모르게 몸이 만성적으로 피곤하고, 매사에 웃음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오는, 주위는 즐거워도 나 자신은 이격되어있는 것 같고 그 속에서 홀로 고독감을 느끼는,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는 상태가 바로 우울증의 신호다. 정신과에서는 이제 우울증을 '뇌에 생기는 일종의 감기같은 증상'으로 보아 적극적 형태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과거에 우울증은 그저 먹고살 만 하니까 부리는 정서적 사치라고 여기는 경향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하나의 정식 병명으로 분류되어 상담치료에만 의존하던 과거와는 달리 약물치료까지 병행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단지 현대 대중사회에서의 고독을 느끼는 현대인의 습관성 질환만은 아니다. 생각하며 존재하고, 경험하여 성장하는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시행착오이자 성장통인 것이다. 부끄러워하며 머물러 있다거나 발목을 잡혀 끌려다니기에는 남은 생의 축복이 너무도 고결하고 찬란하다. 극복하고 넘어가야만 나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체념이거나 폭식이거나 잠을 자는 등의 소극적이고 회피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원인을 정확하게 직면하고 다가가야만 더 큰 전이(轉移)를 막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이 암덩어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방법을 모색했다. 과거에는 뇌의 신경중 일부를 절제해 아예 우울의 상태를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나름대로는 의학적인 시도가 있었으나, 희생양은 아예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딱딱한 고체인간이 되어 침을 질질 흘리며 굳어버렸다. 예술로 승화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순수예술의 분야와 함께 풍자나 패러디, 언어유희와 같은 형태의 소심한 복수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지배계층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할 수 없었던 전통사회에서 연극과 같은 형태로 발전되어 억눌린 소리를 말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했다. 오랜 시간동안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무당은 민중의 상담자로 함께 울고 웃고 소리지르며 맺힌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대신했다. 무당을 찾아온 '환자'는 자신의 속상한 일상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하나하나 풀어내며 서러움의 통곡을 한다. 그저 무당은 그의 마음에 그토록 끼여있는 때들을 벗겨낼 수 있도록 유도하고, 들어주며, 드라마틱한 이벤트를 구성함으로서 그것을 떠나보낼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성당에서의 고해성사도, 자신의 내밀한 비밀을 절대 보안이 유지되는 누군가에게 토로함으로서 회개를 구하고 떨쳐버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같은 방식의 해결법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은 각 종교에 조금씩 상이한 형태이지만 조금씩은 존재하여 영혼의 안식과 안정을 돕는다. 현대사회에서의 정신과 치료 역시도 많은 부분을 환자가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그 보조수단으로서 최면과 같은 초과학적이고 초월적인 - 격식과, 예의와, 수치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문제는 많은 경우 아픔을 느끼게 된 계기가 상상하지도 못한 먼 과거로부터 비롯된다는 데에 있다. 전생(前生)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다소 앞서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논의에서 제외해야겠다. 현생(現生)을 기준으로 했을 때, 어릴 적의 사소한 상처, 예를 들자면 걸어가다가 넘어져 울었는데 오히려 뚝! 하는 호통을 들었다거나, 부모에게 어부바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경험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부터 거절감과 좌절의 상처는 자라간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던 경험과 같이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형태의 거절은,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했을 때에도 '혹시나 저들이 나를 돌려세우지는 않을까' 라고 하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나타난다. 친근한 친구였으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찜찜하게 등 돌려 헤어진 경우라든지, 정말 사랑했던 관계였지만 이런저런 신파 스토리의 전개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는 류의 관계에 대한 실패는 마음 한구석에 잔류하여 인식하든 하지못하건간에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유령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그 방법을 찾지 못한다. 이미 멀어질대로 멀어진 기억인지라 찾아가서 그땐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그땐 내가 잘못했다고 빌고싶지만 빌 수 있는 대상은 없다. 후회와 안타까움과 분노만이 남아 자신을 괴롭히지만 떨쳐버려도 바람부는 추운 날이면, 혹은 조금이라도 연결고리가 있는 다른 사건을 접하게 되면 다시금 떠올라 악몽이 된다. 아프다. 이젠 벗어나고 싶다.
결론은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과거의 부족하고 나약해서 실패했던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그 과오가 무엇이든간에 무덤까지 지고가며 내내 아파하고 슬퍼하고 벗어나지 못해야 할 이유는 없다. 세상은 산 자들의 무대이다. 살아있는동안 최선의 의지로 극복하고 일어서 다시 좋은 것으로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 그것은 죄책감과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과 희망의 노래이다. 언제까지 그 때의 기억의 단편에 매달려서 서성여야 할 것인가. 자신을 용서하는것은 그러나 과거를 부정하는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실패를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면서 다시는 돌이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기에 그것이 값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선행되고 나면 타인을 용서하는 것으로 시선이 옮겨갈 수 있다. 비록 대면하여 매듭지을 수는 없으나 그 당시의 그를 불러내어 '그때 니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내가 용서할게' 라고 말하며 억울하고 권력관계에서 수직적 열등의 위치에 있었던 자신을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위치로 올려놓는 것이다. 어떤 앙금도 복수의 칼날도 포기하기로 결정하면서 기억을 자유롭게 하늘위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그것은 더이상 아픔이 아닌 승리의 전공이 되는 것이다.
영화 '밀양'을 보며 내내 불편했던 것은 용서를 강자가 약자에게 배풀 수 있는 은혜로 규정하고 그것이 뒤바뀌었을 경우에 겪게 되는 복잡한 심경을 봐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전개에 있어서 철저하게 감독이 의도한 구도대로 그려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솔직하게 말해 살인범 그녀석의 태도는 뻔뻔하지 않았는가. 뒤늦게라도 용서하고자 찾아온 전도연에게 '나는 이미 주의 은총을 입어 용서받고 평안하네 그대도 그러하길 바래'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원을 얻기에는 철저한 회개가 필수적이기에, 자신을 용서하는데에 필요했던 아픔만큼 상대방이 나로 인해 고통받은 만큼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서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인지를 이해했다는 철학적 성장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자기 책임만 빼내 도망치겠다는 현실도피와 다름아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의 그 마지막 장면이 마음 깊이 와닿으며 눈물로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평생을 가슴에 한으로 안고 살아왔지만 그래도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그 잔혹한 살인마를 직면한다. 떡까지 싸서 들고 찾아갔으나 손은 떨리고 눈물이 쏟아진다. 그래, 그것이 바로 직면과 용서의 과정이다. 계기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일어나는 하나의 신고식인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살인마는 무릎을 꿇는다. 그렇게 힘든 면회를 하고 결국 '윤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사라진건 인간 윤수일 뿐 더이상 세상에 '살인마'는 남지 않게 되었기에 그 용서의 시간은 고결한 것이다.
가끔 인생이 서글프고 무상할 때가 여전히 있다. 그럴 때 나는 술 한잔을 동반자로 삼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는다. 읽는 내내 마음 한켠이 아리고 아프다. 쓴뿌리들을 붙들고 씨름하며 아파했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술이 목으로 넘어갔다가 눈으로 다시 다 나오는 것 같다. 그래도 정말 내 인생이 다행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과거의 악령들, 열등감과 패배와 좌절들이 더이상 내 위에 얹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든 다시 일어나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현재의 비상식적이고 이성으로 납득 불가능한 상황들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코드이고 키이다.
다음 주 화요일, 설탕봉지를 들고 부산에 내려가는 길에, 다시한번 진지하게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0:28
병장 문두환
/민규
흥, 결국 설탕봉지를 들게 된 것에 대한 자랑인 것처럼 들리는군요.
결론은, 나 설탕 먹으러 가요-이겁니까?
돌아올 때의 무거워진 손 기대하겠습니다.
감정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용서는 관계에서의 발생하는 권력이나 지위보다
도덕적 차원에서의 강자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2008-10-17
10:37:49
상병 김민규
당연히 도덕적 차원에서의 강자/약자의 개념이 적용됩니다. '밀양'에서 제가 불편했던 건, '약자'의 갱생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었지요. 살인마입니다. 분명 도덕적으로 큰 잘못을 했고 틀려먹은 녀석인데 피해자가 큰맘먹고 찾아 갔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만,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그 당시의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용서해가는 것이 살인마를 지워가는 회복의 한 과정일 것이지요. 분명 같은 상황을 보고 있는 두 개의 시나리오인데, 밀양에서의 그는 뻔뻔하게 말합니다. '참회하고 구원을 얻었으니 난 됐네, 당신도 잘 사시유'
그것은 진정한 용서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실도피일 뿐이지요. 약자의 용서란 불가능한 것일까요? 2008-10-17
15:36:03
병장 문두환
영화를 보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굉장히 어색합니다만,
전 피해자라고 해서 반드시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반드시 약자라는 가정을 한다면 도덕적 차원에서의 강자/약자의 개념도 적용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결국 일정한 사실관계와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사건에서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물리적이던 정신적인 영향을 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 편이 다른 편을 용서할 수 있는 상황이 될려면, 특히나 약자'였던'쪽이 강자'였던'쪽을 용서할 수 있을려면 그 사건 이후로 둘은 적어도 평등한 관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외부적 작용이 여전한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용서 '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 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2008-10-17
16:02:54
병장 이훈상
대체 이곳 주민분들은 제가 재미없게 읽은 책들을 골라내서 무진장 재밌는 글을 쓰시고 저로 하여금 '난 이래서 독해력이 떨어지나봐' 요렇게 좌절시키는데 재능있으신 분들 같아요. 입대 환송회 날 선물로 받아서 그런건지, 정말 재미없게 본 책이었는데 이리 느낌 꽃히는 글을 쓰시다니요.
자아의 아픔에 대한 기원이라던가 그 치료법으로의 용서라던가, 이런 시각에 대해선 민규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지만 글을 풀어내시는 그 실력. 이것저것이 함께 모여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글맛을 내는 그 손이 너무 부럽습니다. 엉엉. 2008-10-17
22:38:21
병장 이동석
밀양 같은 경우엔, 조금 다른 범주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차원에서는 누가 헤게모니를 쥐었는가에 따라 강자-약자를 구분할수 있겠지요. 극중 전도연은 종교적 구원을 통해 스스로 헤게모니를 쥐었다고 생각합니다. 유괴범을 용서할수 있는 위치에 종교의 힘을 빌어 올라선것이지요. 그러나 막상 유괴범과 조우하자, 유괴범은 이미 죄를 사함 받았다합니다. 그것도 종교의 힘에 의한것이었지요. 자신의 헤게모니를 이미 선점해버린 유괴범의 뻔뻔함에 전도연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전보다 더한 박탈감을 느끼게됩니다. 겨우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종교적 기반마저 잃어버린 탓이겠지요.
제가 보기에, 그 시점에서 무엇보다 신애는 (극중 전도연의 인물) 유괴범을 용서하지 못하리라는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왜 용서를 해야하는가, 그리고 자신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같은 인식에 까지 이릅니다. 뭐 그 뒤 신애의 돌변은 그런 인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을것입니다. (기도회에서의 거짓말이야 테입틀기와 유괴범 딸이 폭행을 당하고 있는걸 보고도 억지로 지나쳐버리는것 같은)
제가 생각하기에 <우행시>의 윤수는 당위가 아닙니다. 제 죄를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스스로를 용서했으면 좋겠지만, 어쩌면 그것 또한 "좋은게 좋은" 그런식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밀양>의 유괴범은 윤수의 모든 과정을 이미 거치고, 이미 스스로를 용서해버려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신애를 대할수 있진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졸면서 쓴거라 대충 수습이 안되는군요) 2008-10-18
01:19:08
상병 김민규
동석님이 지적하신 신애의 추락은 정확하게 묘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차이는 '구원'에 대한 인식의 간격에서 발생하는게 아닐까 싶네요.
일단 도덕적 차원에서의 우열관계는 헤게모니보다는 가치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요. 주도권 다툼은 때로는 대중 정치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서 왔다갔다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도덕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되거든요. 위안부 문제가 그렇죠. 지금까지 일본이 보여온 태도 - 그들이 전적으로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 확산을 방지하고 조용히 침묵해버리는 자세 - 가 어느정도는 먹혀서 오랜 시간동안 그 가녀린 희생자들을 소수적 위치의 약자로 남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국제적 여론이 확산되고 동정어린 시선이 더해지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더이상 소수도 약자도 아니게 되겠지요. (일정한 선善의 가치가 살아있다면) 도덕적 차원에서라면 이러한 변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내적 영역에서의 그것이라고 해도, '나도 강자이고, 너도 강자'인 상황이 발생하면서 모순점이 도출될 듯 한데요.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1에서 1까지의 스펙트럼이라고 할 때에) 누구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냐에 따라 상대적인, 다양한 지점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A는 용서하고, B는 용서받는다'는 일률적 공식이 적용되지는 않겠죠. 용서란 용서하고 용서받는 복합적 과정의 결정체일테니까.
살인범이라고 해도 과거에 그에게 상처를 준 이들은 있었을거예요. 보통은 그들에 대한 분노가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인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살인범이 가장 용서하기 힘든 것은 자기 자신이지요. 자신이 살인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아는 심각한 파탄에 빠져요.(그래서 대부분은 아예 책임을 부정해요) 자신을 인정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자신에게 상처준 이들을 용서할 수 있고, 그제서야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참회하고 갚을 수 있는 거예요.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저야 기독교적 사고에 저를 담그고 있으니까, 제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바를 적자면, 1. 자신을 자각하고 돌아보면서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고 고백한다 2. 그것을 사한 예수를 주로 영접한다 3. 내적 치유와 인격적 재생의 뼈아픈 과정을 통해서 타인을 사랑하고 실천적 행동의 힘을 얻어 살아간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군요. 밀양에서는 불완전한 구원론으로 신앙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비꼰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쇼생크 탈출에서 노인네가 하는 말이 있죠. '당시 어리고 철 없던 철부지가, 상상하지 못할 끔찍한 짓을 저질렀어. 지금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건 뜯어 말렸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 수도 없이 하지. 그래도 더이상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어쩌면 그는 아직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지점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죠. 그는 도덕적 약자예요. 어떤 변명도 자기변호도 하지 못하는, 그러나 자신의 어린 날을 용서할 수는 있잖아요? 자신에 대한 분노가 찬 상태에서는 타인을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는 과정이 발생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걸 KBS 드라마를 보듯 '화목한 가정 컴플렉스'로 생각해버리면,
글쎄요(웃음) 서글퍼질 것 같아요. 2008-10-18
05:38:05
상병 김무준
잘 읽었습니다. [07xxxx]황성규(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에 반대하며 명예의 전당에 있는 우행시 독서후기입니다.
<그렇게 힘든 면회를 하고 결국 '윤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사라진건 인간 윤수일 뿐 더이상 세상에 '살인마'는 남지 않게 되었기에 그 용서의 시간은 고결한 것이다.> 결국 참회하고 용서함으로써 죄는 사라지나요? 그것이 종교적 가치에 기반한 '절대회개'의 결과물이라 설명하신다면 더이상 할 말이 없겠지만.
어쨌든 용서가 치유의 출발이라는 김민규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다음 나 자신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짜 치유와 반성이 시작되겠죠. 우울증에 시달리는 친구가 생각나네요. 술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2008-10-18
05:5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