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영화 마더, 이승우 오래된 일기,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혹들에 대해서.
병장 김요셉 2009-07-02 144140, 조회 138, 추천0
간만에 등장.
스포일러 있음.
아, 한계.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이지 않으며, 난 여기서 도저히 더 이상 못 쓰겠고, 한글을 다시 배워야 하나, 내가 엄청난 근성의 남자라서 당장에 하루에 열시간쯤 글쓰기에 투자하면 좋겠지만 근성따위는, 없음. 억지로 하나 썼으니 이제 한 달 쯤은 또 절대 안써야지. 기타줄이나 튕기며 놀아야지.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73 ∼ 75
1.
당신은 몇 살 때의 일 까지 기억할 수 있는가. 혹은, 당신은 어떤 작고 사소한 일 까지도 기억할 수 있는가.
내 경우, 비교적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여섯 살 때였던가, 자동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차가 급정차하는 바람에(단순한 급정차였는지 사고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몸이 튕겨져 나가 자동차 앞 유리에 머리를 부딪쳤던 기억인데, 아마도 꽤나 강하게 부딪혔었나 보다. 그 장면 이전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작은 것 하나 떠올릴 수 없다. 여섯 살 이후의 일이라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때 유리창에 부딪쳐 머리에 받은 충격과는 별 상관없겠지만, 최근의 기억을 떠올려보라 해도 당장 오늘 아침에 먹었던 식단조차 가물가물한 지경이니 나는 내 기억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기억력도 나쁜 주제에 메모하는 좋은 습관 따위도 없다. 듣고, 잊었다가, 결국엔 제 발등을 찍는다.
발등을 찍었거나 말았거나, 형편없는 기억력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혹들도 있다. 물론 의혹들 중 대부분은 물건을 빌려 준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리지 못하는 정도의 사소한 수준에 불과하고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신상에 큰 변화가 없을만한 문제들이다. 무슨 세상만사의 고진 풍파로 가득 찬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도 아니고. 하지만 끝내 미심쩍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술을 잔뜩 마셨던 지난밤에 대한 기억같은 것들은, 괴롭다. 끔찍하다. 과연 무슨 짓을 저질렀었던 것일까.
다행히도 사람의 뇌는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능을 가졌단다. 떠올리지 못할 뿐이지, 왠만한건 다 차곡차곡 저장되어있단다. 하기는 나도 무려 7년 만에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아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제 알아서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며 얼마나 신기했던지. 그러니 혹시 모를 일이다. 나도 두뇌체조, 손가락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것 같은 그런 것을 하다 보면 이미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지도.
2.
기억할 수 없는 영역까지 최초의 장면을 찾아 거슬러 올라갔을 때 그 끝에 무엇이 있을 지는 당연하다. 당신이 안드로이드가 아니라면 말이다, 분명, 당신이 만났던, 당신이 사랑에 빠졌던, 당신이 결합했던 최초의 여자 ‘마더’가 그곳에 있을 테다. 그 최초의 기억 이후 당신은 끊임없이 당신의 첫 여자 ‘마더’를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억압하거나 억압당하며 당신의 총체적 자아를 형성해 왔을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정신분석의 틀을 추출해 낼 수도 있다. 잘 알려진 사실대로, 정신분석에서 ‘어머니’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히 높다.
영화 마더에서 ‘마더’는 ‘도준’의 최초의 여자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여자이기도 하다. 도준은 백숙으로 몸보신해 생긴 정력을 다른 여자 - 술집 맨하탄의 딸내미 같은, 에게 써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얼굴 빼고는 멀쩡한 구석이라곤 없는 도준에게 선뜻 몸을 허락할 여자가 있을 리 없다. 대신 도준은 마더와 잔다. 실제로 ‘자는’지는, 그러니까 형사들이 도준과 마더의 관계에 대해 하는 말이 진담 같은 우스갯소리인지 우스갯소리같은 진담인지는 불분명하기도 하거니와 설마 싶기도 하지만 술에 취해 들어와 마더의 옆에 누워 가슴을 만지며 잠에 드는 도준의 모습, “같이 잘 여자는 있어”라며 도준에게 넌지시 물을 때 마더가 보이던 그 은근한 눈빛은, 도준과 일순 동일시되기도 하는 진태가 마더에게 보이던 성적 우위와 겹치며 상당히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런가하면, 어떤 식으로든 모두와 깊게 연루되어있는 마더와는 다르게,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마더는 도준의 마더이기도 하고 진태의 마더이기도 하며 형사의 마더이기도 하지만, 누구도 아버지는 없다.
그러나 이 관계, 또 이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건들을 어머니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려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어떤 틀로도 이들을 명확하게 무엇이다 규정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일단, 도준이 바보이기 때문이다.
도준은 바보다. 방금 전에 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진태가 저지른 범행, 고급 외제차의 백미러를 발로 쳐 깨뜨린 것을 제가 한 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런 도준이 영화의 토대가 되는 사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아 사건의 중심에 있으니 모든 것이 불명확할 수밖에 없다. 사건의 외부에서 제 3자의 입장을 취하든 도준에게 직접 몰입하든, 도준이 한 일도 알 수 없고 도준이 하지 않은 일도 알 수 없다. 도준이 모르고, 관객이 모르는 일에 대해서 감독 역시 방관하는 입장을 취한다.
더군다나, 모든 불확실성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유도된 것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건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마더’에 의해서 말이다. 가령,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될 수 있는 고물상 주인 할아버지마저, 거짓진술의 혐의가 충분한데다가 사건 해결의 층위 - 확실한 기억의 층위에 떠오르자마자 마더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사건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해결의 실마리는 유폐된다. 거슬러 올라가, 도준이 바보가 된 이유 - 불확실한 기억을 가지게 된 이유가 도준이 다섯 살 때 마더가 도준을 죽이려 먹었던 농약 때문이라고 가정할 때, 또 마지막 고속버스 장면에서 마더가 허벅지에 놓았던 침자리가 망각을 이끌어내는(심하게 비약하자면 죽음을 유도하는) 침자리라고 할 때 마더에게 주어지는 혐의는 갈수록 짙어진다. 기억의 모태가 어머니라면 사고의 모태는 아버지라고 할 때, 아버지는 부재하며 어머니는 기억을 억압하고 숨기는 상황 속에서 모든 추측과 가설은 어설픈 짐작으로만 남을 뿐이다. 이쯤 되면 심지어, 다섯 살 때 마더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기억하며, 폐허가 된 고물상에서 마더의 침통을 찾아 마더에게 되돌려주던 도준이 정말 바보인가 하는 의구심까지도 든다. 바보라면, 원래 어리석고 모자라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라 하는 것일 텐데, 도준은 마더가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반면에 마더는 그 사실을 은폐하고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누가 바보인가.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피의자인가. 상황은 뒤집히고 진태의 말처럼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믿어선 안된다.
또한, 결국 문제는 기억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기억의 있고 없음 보다는 기억의 어디까지가 조작된 기억이며 또 기억이 없다면 의도적으로 망각한 것인지, 어떤 억압 때문에 의한 것은 아닌지에, 달려있다.
3.
만약 어떤 기억을 ‘의도적으로’ 잊거나 잊으려 했다면, 이를 방어기제의 일종으로 포함시켜도 될 것이다. 고로, 영화 마더는 망각을 주된 수단으로 하는 방어기제들로 작동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가정형의 유의하자), 개중 가장 심하게 작동되는 방어기제는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다. 앞에서 언뜻 말했다시피 영화 속에서 단 한 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없었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영화 마더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자. 모호한 부분이 워낙 많은 영화인 만큼 다양한 추측과 해석이 가능하지만, 자칫하다간 해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오류만나을 수도 있다. 단지 주목할 것은 영화 마더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아버지의 부재 또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 요즈음 문화의 흐름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현상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특히나 김애란이나 김숨 같은 여성작가(여성화자)에 의해 쓰인 작품들 속에서 아버지는 무능하고, 있으나 마나하거나, 영화 마더에서처럼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70년대 혹은 그 이후 태어난 작가들에게 아버지는 노동의 상징이고, 산업화의 상징인 동시에 실패의 상징이기도 하다. “김숨의 소설이 이루어지는 바닥에는 무능력한 ‘백치 아버지’가 있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가족들이 있다. 아버지는 작가에게 있어 강렬한 트라우마이자, 소설을 추동시키는 존재다. 김숨의 여러 소설 속에는 단순노동을 되풀이하다가 어느 순간 노동을 박탈당하고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아버지가 반복해서 등장한다(강지희, 「디스토피아에서 단단한 소우주에 이르기까지」).” 때문에 그녀들이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은, 성급하게 저질러진 산업화와 실패한 세대, 어떤 정치적 성향에 대한 부정으로 좁혀질 수 있다.
최근 읽은 이승우의 단편집 『오래된 일기』속에서도 그와 같은 부정은 빈번히 나타난다. 개중에서도 꽤나 큰 무게감을 지닌 단편 「풍장 - 정남진행2」에서, ‘나’는 나와 어머니에게 죄를 지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40여 년 동안 고향, 정남진을 일부러 회피하며 살아왔다. 오로지 아버지와 아버지의 공간인 정남진을 자신의 삶에서 들어내는 데 평생을 바쳤던 어머니가, 임종의 순간에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가 묻힌 자리를 찾아주길 원했기에 고향으로 다시 되돌아갔을 뿐이지, 그렇지 않았다라면 ‘나’가 다시 태어난 고향 땅을 밟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의 청을 내치지 못하고 정남진행을 실행에 옮기면서도 ‘나’에게 아버지와 고향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은 그가 무능해서 일수도 있고 그가 지은 죄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 외에 또 다른 까닭이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쨌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아버지에 대한 부정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일 수밖에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고향으로부터 도망친다 해서 당신이 아버지의 아들 - 혹은 딸이라는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는 없다. 당신이 가진, 그 어쩔 수 없는 것들, 아버지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아 당신 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형질들이 시시때때로 밖으로 새어져 나와 증명하고, 벗어나려는 당신을 잡아 끈다.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같다. 비슷하다. 그러니 아버지에 대한 부정은 자기부정이다.
잊으려 애써 봐야 소용없다. 잊는다 하더라도 끝내 당신은 벗어나지 못한다. 부정해 봐야 소용없다. 자기부정에 불과한 것을, 그가 어떤 과오를 저질렀든 아버지를 부정하기 위해 제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기억하고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이승우는, 거기서 더 나아가 화해의 논리를 요청한다.
4.
“상철이 다시 걸음을 옮겨 디디며, 너의 아버지 몸은 저 바위덩어리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말라갔다, 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 내 몸은 평평한 바위 위에 하늘을 바라보며 눕혀졌다. 아마도 아버지가 누운 채 자신의 육신을 말렸던 그 바위일 거라고,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나는 겨우 생각했다. 석양이 바다 위에 피륙처럼 덮이고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아버지…… 내 입에서 바람소리 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풍장 - 정남진행2」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에 대해서, 최근에 문예지에 실린 좌담에서 이승우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대로 옮긴다.
“구원론의 맥락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도, 아버지는 실존적으로 화해해야 할 대상이에요. 아버지라는 개별 인물이 아니라 아버지로 상징되는 체계 같은 것이 있잖아요. 어른, 고향, 제도, 가치 같은 것. 관념적인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들은 아들을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건 그들의 권리고 또 의무지요. 그런데 아들의 권리나 의무는 사랑이 아닌 것 같아요. 아버지를 사랑하든 안 하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든 안 했든, 그런 맥락과 상관없이 아들은 아버지를 찾고 받아들여야 하는 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추구하고 화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 그건 순전히 아들의 몫이에요. 아버지는 이미 이 땅에 없잖아요. 그래서 일방적이고요. 아버지는 화해할 의무도 없고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는데, 아들은 아버지왕의 화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를 발견해내고, 불러내고, 자기 안에서 화해의 논리를 개발하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문학동네 59호, 좌담 ‘구심력과 원심력, 그리고 가족의 와해’)
닭이 울고, 예수를 부인하던 베드로가 통곡을 터트릴 때 그에게 구원에 찾아온다. 아버지를 부정하던 내가 아버지와의 화해를 받아들였을 때, 그 화해의 논리 속에서 자기 구원이 가능하다.
5.
풀리지 않는 몇가지 의혹들이 있다. 아무리 애써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의혹을 해결하면 내게 구원을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도 모른다.
이걸 어떻게 하나, 그냥 잠시 묻어두기로 하자. 왠지,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굉장한 반전을 담고 있을지도 모를) 진실 비슷한 것을 좇기에도 구원 비슷한 것을 좇기에도 아직은 좀 어리지 않나 싶다. 조금 더 많이 저지른 후에, 지금보다 훨씬 더 앞으로 정신없이 달려나간 이후에, 풀리지 않는 의혹들을 수백가지쯤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서야 부스럼들을 좀 긁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린 치기에서 나오는 생각인지.
그러니, 가끔 갸우뚱하지만, 접어두자.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했을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084559
병장 차종기
상처네요. 이 글은 저한테 상처예요. 2009-07-02
152757
상병 서석호
선리플 후 감상.
놀지 마!세!요! 크크 2009-07-02
153024
상병 김형조
그러고보면 봉준호 감독은 줄곧 '아버지'의 부재(혹은 무능)에 주목해온 것 같아요.
[살인의 추억] 후반부에 희생되는 소녀도 어머니의 존재만 등장할 뿐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아요. [괴물]에서는 대놓고 '번번이 물먹는'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요.
더욱이 두 작품엔 보다 큰 개념의 아버지, 국가권력이니 체제니 하는 것들이 구성원들을 보호해주진 못할망정 점차 벼랑으로 내몬다는 반골적 기질이 깊숙이 배어있죠. 2009-07-02
163748
일병 오학준
봉준호 감독이 그리고 있는 가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가족'과는 거리가 있는 듯해요. 괴물에서는 어머니가 없고, 마더에서는 아버지가 없어요. 특히 마더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집착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큰 축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도준을 바보로 만들어놓은 것은 아예 아버지와의 화해라는 생각 자체가 나올 여지가 없도록 한 연출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더라구요. 2009-07-03
063457
상병 홍명교
아버지라는 세계를 받아들인다는건 화해의 숙명이 아니어도,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인거 같아요. 수년간 저를 괴롭히는 화두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것은 숙명일까요 저는 아버지의 세계와 화해하지 않을랍니다. 이건 아마 불가능한 도달을 구하는 의지겠죠 하지만 끝까지 가보려고 발악하는것도 운명처럼 받아들일수만 있다면.. 이미 내가 지닌 어떤 진리체계와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아버지-세계는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면, 파국으로 끝날지언정 그 자체로 운명이 될지도. 어쩌면, 파국적 상황 그 자체가 아버지 세계의 일부일지도 모르지만요. 2009-07-07
093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