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아버지,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배꼽.
상병 이우중 [Homepage] 2008-09-27 21:10:42, 조회: 338, 추천:1
처음 오쇼 라즈니쉬의 이름을 들은 건 언제였지?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만든 ‘자료보관함’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지금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천자문을 4살 때 다 뗐다든가, 89년 8월, 만 2세 때부터 일기를 썼다든가(이건 사실이다. 일기장이 있으니. “선풍기에 페인트칠을 하다가 엄마한테 맞았다” “똥, 코딱지 같은 부끄러운 소리를 하다가 엄마한테 혼났다. 조심해야겠다” 같은 일기일망정) 해서 우리 집을 비롯한 동네에 천재라고 명성을 떨치고 있을 그 무렵부터 아버지는 종이 박스를 하나 구해 와서 거기에 ‘자료보관함’이라는 이름을 매직으로 쓰고는 말 그대로 자료들, 내 교육에 필요한 자료들을 신문 스크랩 등을 통해 하나씩 넣어두곤 하셨다. 내가 좀 더 자라면 보여주겠다며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올려두고는 촉수를 엄금했었는데 아무도 그 자료보관함의 존재에 신경을 쓰게 되지 않았던 것이 중학교 때부터 싹수가 보이지 않아서였나 고등학교 때 주색잡기에 심취하고 나서부터였나 모르겠다. “‘한국의 이튼스쿨’민사고 설립”이라는 신문기사에서부터 “상식은 진실에 가깝고 모든 언행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1994. 11. 21” “돈 없는 사람이 정직하게 살기 너무 힘들고 클 수 없는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으며 사는 現世. 우중이만은 양 고시 패스 후 정직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대학교수가 됐으면 제일 좋겠다. 1993. 2. 7(日) 12:05(20년 후의 세상은 많이 달라지겠지만)” 같이 아버지 당신의 생각을 적어둔 쪽지까지 컨텐츠가 다양했는데 지금은 집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서 곰팡이 피어가는 피아노와 함께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겠지.
아버지. 아들은 지금 몰상식, 이라기보다는 비상식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시피 하고 양 고시는커녕 9급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을지 모르고(공무원 시험을 칠 의향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만.) 무엇보다 지금의 상식은 진실에 가깝지 않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생각과는 180도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15년 후의 세상은 벌써 많이 달라졌군요. 그런데 15년 전 사람들 의식의 한 쪽 끝에 기생하던 상식도 진실에 가까웠던 건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해요. ‘진실’이란 놈이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은 물론 아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종교를 갖는 것이 좋다고 하셨고 그 당시 중산층의 ‘상식’적인 종교인 기독교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아버지는 일 년에 두 번, 부활절과 송구영신예배만 참가하며 제사도 꼬박꼬박 지내고 차 안에 들어있는 테이프는 ‘명상의 말씀’이 대부분이니까.)이면서도 다른 종교의 교리들에는 관대한 편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과 함께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 많은 날을 걱정해야만 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 자료보관함의 쪽지 안에는 ‘오쇼 라즈니쉬 - 금강경 책 구해 볼 것’이라는 내용의 것도 들어 있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집을 비운 틈을 타 판도라의 상자 같았던 그것을 열어서 몇 개의 쪽지를 재빨리 훑어보고 다시 올려놓는 순간 외출에서 돌아오시는 바람에 밟고 올라갔던 의자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칠 뻔 했던 그 때의 기억이 도서관의 ‘배꼽’을 보는 순간 떠올랐던 것이다. 아마 그 때 보았던 쪽지들 중에 하나가 그것이었고 그게 처음이었을 거다. 오쇼 라즈니쉬란 이름을 접한 건.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쇼 라즈니쉬가 책 이름이 아니라 사람 이름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정도일까. 어쨌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니 읽고 나서도 사실 그가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이 낯선 이름의 외국인은 그렇게 나의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책을 통해 나와 마주 앉게 되었다.
갑자기 감상에 젖어서 서론이 길어졌다. 근데 아부지, 보고 싶다. 이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있으면 술 잘 못하는 당신을 대신해서 내가 넙죽넙죽 받아 마셔 줄 수 있는데. 이제 먼 길을 갈 때는 내가 운전대를 잡아도 되는데. 아부지 좋아하시던 산행도 입이 댓발이나 안 튀어나오고 내가 앞장서서 갈 수도 있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박 대통령 덕분에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해도 목에 핏발 안 세우고 허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날이 쌀쌀해지긴 쌀쌀해졌나보다. 나는 추워지면 지난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겨울이 좋다.
어쨌든!!! 이 ‘배꼽’은 일종의 잠언집이다. 탈무드 같은.
특히 와 닿았던 글들과 감상이다.
“진리는 그대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질 수 없다. 오직 그대 자신이 진리의 차원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참된 사람은 논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증거한다.”
아,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귀한 진리를 천박한 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논쟁을 거듭했던가. 도라에몽에게 모자라도 하나 얻어 쓴 것(모자의 이름이 ‘핸디캡 모자’였던가. 만화책 참고할 것) 마냥 세 치 혀를 놀린 나의 경박함이란.
“훌륭한 말이 그대에게 오고 있을 때 그대는 그 말이 오고 있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그런 말은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을 것이므로. 그대는 먼지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훌륭한 말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다. 그대는 훌륭한 말의 뒤를 좇을 수도 없다. 그 말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므로.”
그러니까, 좇지도 못할 발자국을 따라가려 하지 말고 앞서 걸어간 이의 걸음걸이만 기억했다가 나의 길을, 나만의 길을 갈 때 참고하라는 거겠지.
“사회는 진리를 견디어 낼 수 없다. 사회는 진리를 처형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는 교회를 사랑할 순 있으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순 없다. 사회는 바티칸의 교황을 사랑할 수 있으나 예수를 사랑할 순 없다.”
‘세상 속에 살라. 그러나 세상에 속하진 말라’는 말이 떠오른다. 세상 속에 사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사랑하는 이 빌어처먹을 세상의 구성원이 되지는 말라는 말일까. 진리의 길은 언제나 외로운 것일까. 글쎄.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사람들은 표시판과 상징과 말, 언어에 꼼짝 못하게 되었다. 그냥 믿어 버린다. 실제로 개가 있는지, 있으면 어떤 개가 있는지, 누가 굳이 보러 가겠는가?”
그래. 나도 알고 있는 바니까 써먹어야지 이건. 보다 강력한 상징과 말로 X도 없으면서 있는 척 해도 아무도 모른다 이거지.
“그대, 그대가 원하는 만큼 소유할 수 있으리. 그러나 소유함으로써 이제껏 삶을 완성한 사람은 없다. 삶은 오직 존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 소유로써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세속적이지도, 비세속적이지도 말라. 소유하지도 무소유하지도 말라.”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만든 문구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해 주는군. 소유하지도 무소유하지도 않는다면 주공 전세가 답인가.
“어떤 증명도 완전히 증명될 수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으면 어떤 증명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대, 살아있는 것을 요약하지 말라. 내겐 어떤 가르침도 없다. 설령 가르칠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요약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광대무변하다. 삶은 광대무변하다. 요약하면 할수록 그것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법은 요약할 수 있으나 사랑은 요약할 수 없다. 법은 명확하지만 삶은 명확하지 않다. 요약하지 말라. 살아 있는 것을 요약하지 말라.”
그런 연유로 이 글도 세줄요약은 없다.
“시인은 가난하다. 화가는 가난하다. 그들은 사람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화가는 가난하다. 그들은 힘이 없다. 힘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비폭력적인 사람들이다.”
시인이, 화가가, 소설가가 힘을 가졌다. 이제 그들은 사람을 지배하고 조종하는데 더 큰 관심을 쏟는다. 더 이상 그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 자본에 종속된 예술이라니. 근데, 이 사람들을 계속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알맹이는 과연 무엇인가? 그대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면 그 알맹이는 대체 무엇인가? 그게 그대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물 위를 걸어다니면 그대가 행복해지는가? 허공을 걸어다니면 그대가 행복해지는가? 누가 그대의 행복을 가로막는가?”
물 위로 걸어 강을 건너거나 배를 타고 강을 건너거나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알맹이보다는 껍질에 집착한다. 일단 나부터가. 예수가 물 위로 걷는 ‘쇼’를 감행하면서까지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는 사라지고 물 위를 걷는 초인적 존재로서의 무조건적인 숭배 대상인 예수만 남았다. 그나마도 지금은 숭배의 대상이 예수에서 교회로 바뀌어 버린 것은 아닐까.
“아, 마음이 가난한 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자, 아무 것도 아닌 자.”
에 대해 예찬을 하고 있다.
안하기로 했지만 우리 사회의 상식에 맞게 세줄요약 해보자.
좆도 없는 새끼, 좆도 모르는 새끼, 좆도 아닌 새끼.
“우리는 하느님마저도 속이고 있다. 사실 하느님이란 것 역시 우리의 교활한 발명품이다. 하느님 역시 저 어딘가에 있어 우리는 그에게 기도하고 요구하고 안전과 위안과 평안을 구한다. 하느님은 일종의 안전장치, 그리고 저 세상에 예치해 둔 일종의 일생저축.”
물론 마음의 불안으로 인해 신을 만들어내고 그 신에게 몇 푼 쥐어주고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드는 보험이라 생각하고 기도하는 이들을 비웃는 말이겠지만 오쇼 라즈니쉬는 무신론자인가? 이 말을 그가 듣는다면 나한테도 불호령이 떨어지겠구만. 무신론이고 유신론이고 생각을 버리고 에고를 버리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죄송합니다.
“나눔은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유용성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몸을 느껴 보라. 눈을 감고 조용히 느껴보라. 생명은 전체적인 것이다. 거기에 무슨 경계선이 있는가?”
여기의 나눔은 separate이다. 잠시 헷갈릴 뻔 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지 말란 말이겠지.
그리고 가장 머리를 쳤던 두 마디.
“그대는 내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 의식의 표면에서 반짝하고 타올랐다가 금세 꺼져버린다. 그 불빛 속에서 일순간 뭔가 이해한 것 같기도 하지만 깊은 무의식 속에서 강풍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그 작은 불꽃을 금세 꺼버린다.”
“그대여, 잘 들어라. 그대가 영적 성장을 하는 데 있어 어떤 힘이 얻어져서 막 일을 벌이려 할 때, 가장 필요한 용기는 그걸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불씨를 살려 두기 위하여 이렇게 글을 썼다. 빨리 쓰고 집에 전화하러 가야지. 엄마도 사랑해요.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5:31
상병 이우중
댓글 매크로에 이어 이번에는 글 작성도 매크로가 되어 보기로.. 한 건 아니고, 주말간에 너무 심심해서요. 2008-09-27
21:11:43
병장 문두환
본문중에 눈길을 끄는 구절이 있네요.
“사람들은 표시판과 상징과 말, 언어에 꼼짝 못하게 되었다. 그냥 믿어 버린다. 실제로 개가 있는지, 있으면 어떤 개가 있는지, 누가 굳이 보러 가겠는가?”
A는 A이다. 라고 말해도 요즘사람들이 쉽게 믿지도 않겠지만
과거에 A는 A다! 라고 말하면 왜? 라는 질문 조차도 불가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랬던 사실이 역사적 현상처럼 우리생활에 우상처럼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가끔씩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앞에서 짖는 것이 우리집에서 얌전히 밥 받아먹던 개인지, 아니면 주변을 배회하며 이쪽으로 넘어오길 호시탐탐 넘보는 승냥이인지를 알아보려고 슬리퍼를 신고 뛰어나가는 사람이 더 필요했었겠죠.
저도 주말간에 너무 심심하네요. 아흥 다롱디리! 2008-09-28
00:08:45
병장 이동석
감기약과 신나와 여독에 시달려도 좋군요.
좆도 없는 새끼, 좆도 모르는 새끼, 좆도 아닌 새끼.
의 요약 푸하하하. 2008-10-01
11:51:04
상병 이우중
오늘 도서관에 갔다가 다시 보니 '배꼽'은 오쇼 라즈니쉬가 직접 펴낸 책이 아니고 역자가 그의 글을 모아 놓은 거였군요. '배꼽2'는 쇼펜하우어 등의 글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읽어봐야겠네요.
그래도 '배꼽'이란 제목은 오쇼 라즈니쉬로부터 나온 것 같아요. 2008-10-01
16:50:48
병장 이동석
그렇군요? 배꼽! 2008-10-01
20:41:23
병장 김민규
정말로, 요새 이런 류의(?) 컴필레이션에 한창 필 꽂혀 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막 저를 찌르는 것 같아요. 그나마도 보통은 반도 못 알아 듣지만.
뒤뚱거리면서 걷다 보면, 언젠가 나는 법을 기억해내는 날도 있을 거예요. 저는 거위가 아닙니다. 이 반짝이는 청색 날개를 보아건대, 분명히 나는 청둥오리였다고-
바다로 갈 겁니다. 이 시린 시베리아를 버리고 떠나 바다를 넘고 다시 땅을 만나고 바다를 건너서, 내 집으로 갈 겁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만날 겁니다.
가지로. 2009-01-09
19: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