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눈 먼 자들의 도시 - 비평  
상병 김무준   2009-01-10 00:42:42, 조회: 195, 추천:0 

우선 비평의 탈을 쓴 잡문임을 알려드립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어 자판을 두드립니다.




1.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고른 건 환상적 리얼리즘이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는 수식어 때문은 아니었다. 포르투갈어를 공부하고 있어도 남미문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 유명한 <연금술사> 따위도 손에 든 적이 없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산 건 ‘세상 모든 사람이 눈이 멀게 된다면’ 하는 소재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다.

치유될 수 없는 질병은 다른 의미로는 재해나 재앙으로 해석될 수 있다. 꼭 <아마겟돈> 이나 <투모로우> 같은 재난 영화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레지던트 이블>이나 <새벽의 저주>같은 영화에서는 비록 그 형태가 다르기는 하나 치료방법이 없는 질병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묘사했다. 앞의 영화들에서는 질병의 종류가 이성을 잃고 산채로 썩어가는 짐승이 되는 ‘좀비’의 모습을 띄었다고는 하나, 질병 자체가 전염병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도시는 마비되고 인간의 질서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이러한 소재가 새롭고 참신한 것은 아니다. 이토 준지는 <공포의 물고기>라는 만화를 통해, 살아있는 채로 부패하는 인간과 그에 대한 공포를 묘사했다. 전염병과 그 공포 자체가 소설이나 영화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 이미 이십일 세기에 들어 사스와 조류독감이라는 질병이 발생했기에 재앙은 가까이에 와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위의 소재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다. 불치병은 ‘죽음’을 동반하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라마구의 소재가 참신하게 와 닿는 까닭은 죽음이 수반되지 않은, ‘실명’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눈이 멀어도 살아갈 수는 있다. 눈앞이 하얗게 멀어버리는 백색 실명은 죽음처럼 소리 없이 퍼진다. 눈이 먼 세상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이는 환상을 쫓던 글쟁이에게 호기심을 불어넣었다. 거대한 재앙에 변해가는 인간과 인간성을 텍스트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궁금증은 결국 책을 펴게 만들었다.

2.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무엇일까. 넓은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환상이다. 소설은 현실에서 일어남 직한 이야기 즉,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바탕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소설의 허구성이다. 허구는 작가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공상의 산물이기에 환상이다. 하지만 소설이 이 속성과 모순되게 진실성을 갖는 것 역시도 상상 덕분이다. 세상 모두가 눈이 멀어 단 한사람만 볼 수 있게 된다는 설정역시 허구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하지만 사라마구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상상했고, 상상의 결과를 소름끼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리얼리즘은 사건 자체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데서 힘을 얻는다. 텍스트는 인간에 의해 작성되므로 자연적으로 주관을 포함한다. 사라마구는 리얼리즘을 구축하기 위해, 또한 되도록 주관을 배제하기 위해 관찰자적 입장에서 소설을 써내려간다. 무미건조한 어투로 사건을 있는 그대로 풀이하려 애쓰기에 소설은 더욱 가깝게 읽힌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며 해설자의 설명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화자는 담담하게 사건의 시작을 서술하고, 진행과정을 묘사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눈이 먼다면 어떻게 될까. 백색 실명이 전염성을 갖고 있다고 판명되자 정부는 환자와 보균자 모두를 격리시설에 수용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와 다수를 위해 인권은 묵살되고 유린당한다. 수용소는 으레 집단이 그러하듯 소규모 단체를 구성하게 되고, 현실적 문제에 직면한다.

대다수 소설에서 인간의 생리적 문제해결과 과정은 암묵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사라마구는 리얼리즘을 구축하기 위해 현실적 문제를 텍스트로 끄집어낸다. 우선적으로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욕구불만에 대해 묘사한다. 눈 먼 자들은 갑작스런 실명으로 보통의 맹인들이 그렇듯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누구도 스스로 씻을 수 없다. 수용소라는 공간에서 화장실과 세면장으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선이 고려되지 않은 수용시설에서 움직여야만 한다. 처음에는 지성을 갖춘 생명체답게 화장실을 찾고 용변을 해결하지만, 화장실이 오염되고 시각적 부끄러움에 대한 면역이 생김과 동시에 아무 곳에나 용변을 본다.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아래 복도에서 병실에서 서슴없이 배설 욕을 해결한다. 수용소는 오염되어 악취가 풍겨난다. 병실의 침대시트와 옷, 깨끗했던 모든 것은 오염된다. 이런 환경의 변화 앞에서도 인간은 살아간다.

환경의 변화를 사라마구는 냉정하게 서술하고 묘사한다. 딱딱하다면 딱딱하고, 깔끔하다면 깔끔하다. 냉소적이지도 않고 동정적이지도 않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낸다. 다큐멘터리가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영상을 보여주기에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듯, 텍스트라는 한계 속에서 사라마구는 사건을 미화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통째로 보여준다. 시선의 고정은 소설이 끝날 때 까지도 철저하게 지켜지는데 이는 소설을 읽다 몇 차례 책을 덮어야만 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화자와 작가가 객관적 입장을 고수한 채 사건의 진행을 보여주기에 허구는 사실로 다가온다. 일어나지 사건에 대한 사고와, 풍자나 미화가 담기지 않은 그대로의 시선은 리얼리즘을 견고하게 구축한다. 사라마구는 텍스트의 리얼리즘적 구조를 완벽하게 완성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물음과 비판은 놓치지 않는다. 백색 실명에 걸린 맹인들의 행동은 지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사라마구는 욕구 앞에서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철저히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누구도 소설 속에서 이성의 붕괴에 대해 묻지 않지만, 인물들의 갈등과 사건의 진행을 보며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게 된다.

사라마구는 인간성의 붕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수용시설은 보균자와 감염자들을 철저히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는 국가가 다수를 위해 소수에게 행사하는 격리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조류독감이 발생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보균자로 의심되는 국민에 대해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염을 막기 위한 격리였다. 이 조치가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보호조치라 할지라도, 국가의 국민이기에 보균자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독방에 수감되어야 했다. 현실에서 그러했듯이 소설 속에서도 수십의 시민에 대해 보호라는 이름아래 격리조치가 이루어진다. 소설 속에서 국가의 조치가 타당했는가에 대한 물음은 없다. 사라마구는 딱딱한 텍스트로 독자에게 평가를 맡길 뿐이다. 사라마구의 리얼리즘이 더욱 힘을 갖게 되는 것은 그의 객관적 시선 덕분이다.

3.
사라마구는 또한 붕괴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놓치지 않는다. 수용소 내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음식은 철저히 배급제로 공급되지만 눈 먼 자들이 상자의 개수를 정확히 헤아리거나, 식량상자를 제대로 병실까지 옮기기는 어려움이 따른다. 모두에게 일인분의 음식이 돌아가도록 공급된다 하더라도 음식의 양이 개개인에 맞게끔 조절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배고픈 이들은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비양심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맹인들 사이에서도 도둑은 생겨나고 도덕은 무너진다.

수용인원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음식은 재산이 된다. 맹인들의 사회는 원시적으로 돌아간다. 문명이 발생하며 많은 음식을 소유한 자가 더 많은 권리를 소유했듯, 처음의 정당한 배급은 쟁탈과 전쟁으로 변한다. 음식의 유통과정에서 불만이 생겨나며 이 불만은 폭력으로 변질된다. 총을 소지한 맹인이 폭력집단을 구성하고 음식을 강탈한다. 자본이 된 음식은 일종의 무기가 되는데, 제일 먼저 폭력집단이 요구한 것은 돈이었다.

이미 눈이 멀어버린 자들 사이에서 모든 자원(식량이나 세면도구와 같은)이 배급제로 주어지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했을까. 총을 소유한 자의 금전적 피해의식에서 발생했을 수도 있고, 딱히 음식에 대한 지불의 대가를 생각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폭력집단은 마침내 맹인 사회에서 금붙이는 별 이용가치가 없음을 깨닫는다.

인간의 기본적인 세 가지 욕구가 무엇일까. 식욕, 성욕, 배설욕이라 한다. 폭력집단은 무기를 사용해 음식을 독점하며 첫 번째 식욕을 해소할 수 있었다. 배설욕은 모두가 눈이 먼 수용소에서 너무나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폭력집단은 대부분의 구성원이 남자로 이루어져 있었고 식욕과 배설욕을 해결한 자들은 이제 성욕을 해결하려든다. 집단은 음식에 대한 지불로 ‘성상납’을 요구한다. 더 이상 타 집단에게 선택권은 남지 않았다. 굶어 죽거나, 음식을 무력으로 가져오려다 총에 맞아죽거나.

살기 위해, 집단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여자들은 폭력집단의 요구에 응한다. 이성적 사회에서는 절대 생길 수 없는 또 다른 폭력이다. 하지만 모두가 눈이 먼 맹인사회는 원시사회나 다름없는 수준에 머물렀다. 사라마구는 원시사회와 같은 맹인사회에서도 기득권의 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폭력집단에 대한 응징으로 또 다시 폭력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인간이 원초적 본능 앞에서 얼마나 난폭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음식에 대한 도둑질도, 강탈도, 성상납도 모두가 인간의 폭력이다. 사라마구는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문제를 떠나 극한상황에서 인간은 한없이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상식과 도덕은 무너지고 그 위에 새로운 질서가 생성된다.

집단의 변화과정은 과연 유토피아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사라마구의 물음일수도 있다. 사회를 통제하는 절대자나 지휘자는 없으며, 철저히 무력으로 사회가 구성되고 질서가 생성된다. 분명 맹인들 모두는 눈이 멀기 전까지 날카로운 이성과 판단력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질병과 환경의 변화 속에서 기존의 관념을 바탕으로 이상적 사회로 나아가는 약간의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집단은 폭력적으로 변화한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으며 폭력으로 인해 집단은 다시 파괴된다.

4.
지옥과도 같은 수용소의 변화에서 사라마구는 냉정하게 현실을 표현하면서도 희망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세상 모두가 눈이 멀어가는 과정에서도 단 한사람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는다. 여자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크나큰 짐을 짊어지고 집단의 안내자가 되어 맹인들을 이끌지만 의사의 아내는 포기하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시체를 땅에 묻고, 폭력을 자행한 이들에게 폭력으로 응징하며, 일행을 데리고 수용소를 빠져나온다. 철저히 이성과 가치가 파괴되며 자신 역시도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도 의사의 아내는 주저앉지 않는다. 누구도 그녀에게 책임을 주지도 않았고, 봉사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의사의 아내는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는다.

병실에 모인 모든 이들은 한 때 의사의 환자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의사의 아내와는 단 한줄기의 인연도, 공통점도 없다. 혈연으로 묶여진 가족도 아니고 의사의 아내가 병실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빚진 것도 아니다. 그녀는 동정이나 가식이 아닌 희생으로 모두를 이끈다. 그녀의 모습은 헐리우드 영화 속 히어로의 모습도 아니고 집단을 선동하는 혁명가의 모습도 아니다. 모든 것을 눈으로 목격하며 슬퍼하고 주저앉지만 의사의 아내는 끝까지 희생한다.

의사의 아내는 생존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살인이나 도둑질을 행하면서도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며 단지 눈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에게 희생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울고 아파한다. 그녀 역시 백색 실명이라는 대재앙 앞에 버려진 인간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사라마구는 그녀의 존재를 바탕으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가 보다.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 전체가 마비되며 생지옥으로 변해버린 도시 속에서도 희망은 존재한다. 언젠가는 눈이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 희망이고, 그녀가 그녀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것 자체도 희망이다. 유토피아는 건설되지 않았고 인간은 욕구 앞에 한 없이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의사의 아내는 일행에게서 하나의 희망으로 서있다. 살 수 있다는 희망.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

마지막 남은 희망은 소설의 끝에서 모두에게 전해진다. 욕구를 위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외면적 모습만을 가꾸며 자신을 함부로 다뤘던 여자는 볼품없고 힘없는 노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평생을 약속한다. 소설 마지막부에서 눈이 다시 밝아 앞을 볼 수 있게 되어도 여자는 노인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 집을 염원하던 이들은 집을 찾고, 청결을 원하던 자들은 그것을 얻는다. 식욕이 해결되고 잃었던 것들이 회복되면서 잃어버렸던 인간성과 개개인의 가치관, 무너졌던 질서가 재정립되고 일어선다. 그리고 모두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 사라마구는 냉정하고 딱딱하게 재앙이 닥친 도시를 지옥으로 묘사했다. 허나 정작 그는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반드시 희망은 있어야하며 그 희망을 바탕으로 염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박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뱀발. 아 정말 못 썼다.
뱀발 둘. 심심해서 이러는 건 아님.
뱀발 셋. 비평이 무어냐, 에헤라 디야~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4:01:14 

 

병장 정병훈 
  일전의 무준씨라면 토를 달지 않은 깔금한 글로 뽑아 냈는데 요샌 조금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 간혹 보입니다. 그건 나만의 생각이겠죠.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모든 해석이 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작가가 어떤 의도로 눈 먼 상황을 설정 했는지는 저는 아직 사라마구와 얘기해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탁월한 상황 설정이 독보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런 소재가 참신하거나 신선한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고, 정말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죠. 일전에 허원영씨가 적은 '문학의 위기에 대하여'라는 글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소재거리가 없어 글을 쓰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는 말이죠. 사실 저도 많은 글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했지만 간혹 소재고갈로 어려움을 느낍니다. 일전의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에서도 밝혀졌듯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불려지지 않았고, 가장 멋진 시는 씌어지지 않았듯 이 소설이 제게 주는 의미는 글을 쓰는데 있어서 단순한 소재지만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구도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이네요. 더불어 소재가 없다는 개소리는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죠. 뻔한 얘기들 이라는 말 또한 말이죠. 
그 외에 이 책은 노벨문학상이나 뭐 기타 유명한 책이라 여타부타 하는게 식상하군요. 
자알 봤습니다. 2009-01-10
01:02:57
  

 

병장 이우중 
  아뇨. 잘 쓰셨는데요? 허허.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요, 희망으로 재앙을 극복(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으려나? 어쨌든)한 뒤의 '눈뜬 자들의 도시'가 그래서 무척이나 읽고 싶어요. 2009-01-10
07:12:36
  

 

일병 조민석 
  눈먼자들의 도시, 눈뜬자들의 도시,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 하하 
도시를 참 좋아하는 사라마구씨! 2009-01-10
09:52:50
  

 

상병 김무준 
  식상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사라마구가 높게 평가되는 것은, 어떠한 현상에 대한 상상을 표현하며 무서울만큼 현실적인 객관으로 텍스트를 작성하면서도 문제의식의 제기를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리얼리즘을 리얼리즘으로 풀어내기는 어렵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2009-01-10
10:09:49
  

 

상병 김용준 
  아직 못 본 소설이라 그런지 바로 눈길이 가더군요. 흐흐흐. 잘 보고 갑니다. 낄낄낄. 2009-01-12
13:5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