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그녀의 열매  
병장 조현식   2008-09-10 09:16:38, 조회: 309, 추천:1 

나는 한강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지쳐 보인다. 그녀가 만들어 낸 인물들도, 항상 같았다. 아기부처에서도 그랬고 몽고반점도 그랬다. 이 책이 연작 소설이며, 몽고반점의 앞뒤를 잇는 내용임을 알았다면 손도 대지 않았을 텐데. 텍스트의 정신분석학적 연구. 어떤 말을 끼워 맞춰도 결국은 들어맞는 요술과도 같은 그 분야를 주제로 논문을 작성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그녀의 텍스트였지만, 정신분석이라면 치를 떠는 나에게 그녀의 소설은 부담이었다. 그녀는 - 예전에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자리 잡고 있었던 그 자리를 대체해서 무진의 안개를 더욱 뿌옇게 만들어 21세기로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혼란과 성적 욕망, 이기주의의 예술적 포장, 흔들리는 인물을 자잘하게 쪼개는 그녀의 수법은, 프로였다. 항상 책을 덮을 때마다 머시멜로우 같은 말캉한 머리상태를 만들어버리는 그녀의 대담함 앞에 나는 ‘더 이상은 이 책은 읽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서도, 이 피곤한 작가의 피곤한 소설을 피곤한 일상의 반복 안에서 또 다시 들척거렸다. 그것은 홍어의 알싸함이었다. 거진 밋밋한 그녀의 문장에 숨겨진 지독한 인간에 대한 그녀의 알싸한 태도가 또 한 번 책장을 들추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채식주의. 책 표지부터 이상하다. 채식주의자라고 대놓고 제목에 써놓았다면 책 표지는 응당 초록색과 흰색정도로 꾸미고 피어나는 새싹 같은 것들로 알록 장식을 해놓아야 옳았다. 그렇게 지나친 포장을 하지 않았어도, 다 말라가는 나무에 석양이 지는 황량한 들판을 책 표지로 장식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표지부터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책의 내용은, 오히려 채식주의를 포기하게 만들 정도다. 채식주의를 주장했다가 책의 주인공처럼 말라비틀어지다가 결국 정신병동에 갇혀 기괴하게 빙빙 도는 날카로운 정신을 가지게 될 바에야, 나는 미국에서 날아온 소고기라도 먹겠다는 삐뚤어진 다짐을 하며 덮어버리게 되기 딱 좋은 내용이다. 소재로서의 채식은 세 연작을 관통하는 메인 소재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책의 중심인물인 아내 영혜가 작은 동박새를 뜯어 먹어버린 순간, 채식은 더 이상 없다. 그녀는 계속해서 채식을 하지만 그녀의 정신만이 자신 스스로 강제한 채식으로 날카로워질 뿐, 아무것도 죽일 수 없는 식물을 염원할 뿐. 몸은 말라가지만 날카로워진 정신이 몸 밖으로 표출될 때 영혜는 상처입고 사나운 동물로 변한다. 이러한 괴리 속 무너져가는 영혜의 주위를 맴도는 주변 인물들 또한 무너져간다. 

그래, 채식이라고 말하지 말자. 이것은 단순한 채식의 문제가 아니다. 동물과 식물, 식물성은 다시 여성성으로 치환될 수 있다. 주인공 영혜는 특별한 매력이 없는 여자... 라고 책 맨 앞부분에 서술된다. 남편이 언급하고 있는 영혜의 모습은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없는 중성적인 여자다. 그녀도 그 사실을 계속해서 인지하고 있음에, 여자로서 갖추는 가장 기본적인 속옷조차 입지 않고 살아간다. 이것을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이상을 꿈꾸게 마련인데, 그것은 누구나 비슷하다.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잘 생기게 해주세요. 기타 등등. , 이 장면에서 비극은 시작되고 있다. 텍스트 어디에도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녀가 정상적인 사람의 생활궤도에서 이탈하기 전,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매력 없음을 굉장히 큰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 연작 나무 불꽃에서 이미 어린나이의 그녀가 죽음에 대해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여성성으로 인해 나온 계속된 정신적 압박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인생의 행복이 되어야 할 결혼의 이유가, 아무런 매력도 아무런 단점도 없기에 그랬다는 남편의 서술은 그 둘의 결혼생활에 어떠한 애정도 개입할 수 없었음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남편은 영혜가 채식으로 인해 단점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선로에서 이탈한 열차에 탄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고 영혜와의 결혼생활을 포기한다. 물론 섣불리 그녀의 곁을 떠나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러한 망설임 또한 영혜에 대한 애정이나 점점 무너져가는 잡으려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할 사회적 시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의 옆에서 응당 그녀를 지켜주었어야 할 존재가 떠나고 난 뒤, 그녀의 상실감은 더욱 커졌기에 궤도이탈의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져간다. 점점 야위는 그녀를 잡은 것은, 동시에 처음으로 그녀를 여자로 봐준 것은 놀랍게도 - 동시에 안타깝게도 - 그녀의 형부다. 엉덩이에 선명히 몽고반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형부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리고, 몸을 섞게 되는 순간 그녀는 온전히 여자가 된다. 이전의 영혜는 몽고반점을 가진 영원히 미성숙한 중성적 존재였다면, 온 몸에 꽃을 그린 후의 그녀는 그때서야 여자로 거듭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이 더욱 강렬해진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형부의 후배 J와의 정사도 거부하지 않을 만큼, 여전히 표현은 조용하지만 그녀의 몸은 뜨겁게 당당해진다. 그녀가 꽃, 식물을 그려내어 가장 그녀가 원하는 것에 가까워진 순간에 그녀의 모습이 놀랄 만큼 동물적이고 인간의 욕망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영혜는 이때껏 작은 성기의 자신의 남편이 채워주지 못한 그 작은 성기보다도 더 작았던 사랑에 야위어갔고, 형부에게서 자신이 원하던 꽃과 식물로 바꿔 부를 수 있는 여성의 매력을 획득했지만 그 이후 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무가 되기를 소망하며 말라죽어간다. 지독한 결핍의 소용돌이를 헤집고 살아간 그녀에게 어떤 것도 해치지 않지만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식물은 계속 그녀의 이상향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빠진 인물. 한강의 소설에는 약하고 상처입고 아파하는 빠진 인간들이 가득하다. 연작 소설의 한가운데에서는 영혜가 중심적으로 움직였지만, 채식주의자에서는 사랑을 모르는 살아가는 기계 같은 느낌의 그녀의 남편이 - 몽고반점에서는 그 푸르른 몽고반점에 집착하여 모든 걸 불태워버리는 형부가 - 마지막 나무불꽃에서는 그녀와 가장 닮았던 그녀의 언니가 따로 또 같이 그녀의 슬픔에 따라 움직인다. 이러한 다층적인 인물간의 고리와 더욱 깊게 묘사되는 그녀의 심리는, 지금까지 여성성의 부재로 인해 그녀가 이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한강이 생각하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회복, 그 꾸준한 메시지를 단순하게 도식화시킨 결과가 이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문학은 정답이 없고, 100명의 독자에게서 100개의 소설이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에 - 소설에서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감추어 놓은 시니피에를 찾는 것은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온당하다. -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처럼 한강의 소설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얼버무리듯 책을 덮었다. 그러면서도 또 본능처럼 나는 수 없이 나오는  ‘~ 의 ~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 같은 논문들을 보면서 또 다시 씁쓸한 입맛을 다질 것이다. 이런 건 그냥 가져다 끼워 맞추면 된다고 하면서. 

그래, 차라리 한강한테 나 같이 건방진 인간상에 대해서 소설을 쓰라고 해봐야겠다. 그때쯤이면, 나도 바뀌어 있지 않을까.



2008.9.10.  한강의 연작소설「채식주의자」를 읽고.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6
14:05:38 

 

병장 이태형 
  나무 불꽃은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죠. 
한강의 소설이 대부분 그런 식이었나요. 
그렇다면 읽기 싫군요(웃음) 

너무나도 현학적이라고 생각될만큼 어려운 글과 독서평. 
이해 못해서 심한 좌절감에 슬펐는데. 
현식님은 그걸 보고 이런 독서후기를 남기시는군요. 

솔직히 말해 현식님의 이 독서후기도 이해하기 벅차네요(통곡) 
하지만, 같은 작품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 감응했다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어요. 2008-09-10
09:50:07
  

 

병장 조현식 
  사실 아기부처 정도만 되어도 그러려니 했을텐데, 몽고반점 이후로 읽은 한강의 소설들은 다 읽다가 계속 걸리는 느낌이 나는 소설뿐이더군요. 채식주의자 읽으면서 '어디서 봤던 내용인데?' 싶었는데 몽고반점과 연작이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한강의 경우는, 맨날 책 다 읽으면 머리가 지끈지끈하죠. (웃음) 

그리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책에 대한 해설은 따로 하던가 이렇게 책 뒤에 넣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원래 사람은 해설을 읽으면, 그 해설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리니까요. 2008-09-10
09:59:09
  

 

병장 이동석 
  뭐, 소설책 뒤의 해설이야 구색맞추기 용이고 그래야 (평론이나 출판)시장이 굴러가니까 어쩔수 없다고 치고 넘어가지요. 

어쨌거나 한강 소설은 쩔긴 쩝니다. 보고 나면 막장의 밤을 지새우고 나서 자기 전에 담배피는 기분이 들어요. 혹은 아직도 뭐 이딴, (!##$%^%$^#%#^) 의 의미지요. 

한국문학전집을 하루에 한편씩 학습지식으로 다년간 강제적으로 봐야만 했던 제가 느끼기엔 한강이야말로 지금 활동하는 젊은 소설가 중에선 가장 '한국 소설'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어떤 문학이론에 의한 분석이 아니구요, 보고 난 쩔음의 감도가 가장 비슷하달까요. 2008-09-10
10:30:47
 

 

상병 이우중 
  보고 난 쩔음의 감도가 높을수록 '한국 소설'적이 되는 건가요?(웃음) 

전 그럼 박상륭이 현재 생존해 있는 소설가 중에 가장 '한국 소설'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 같아요. 하하... 이거 뭐 당최 무슨 말인지... 

그나저나 같은 소설을 읽고 이렇게 멋진 후기를 작성해 주시니 제가 부끄러워지는군요(땀) 

근데, 영혜가 동박새 뜯어잡수시는 건 남편이 본 허상이라고 전 생각했었는데... 2008-09-10
20:48:06
  

 

병장 조현식 
  동박새는 한마디로, 영혜가 본질적으로 '동물'임을 알려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쩔수 없는 책임의 관성으로 버티던 남편을 떠나가게 만드는 요소가 되죠. 

남편의 착각이라는 생각은 저도 했지만, 작은 동박새가 영혜의 손에 죽어있는 장면은 글의 끝부분이고 거기에 어떠한 부연설명도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지레짐작으로 허상이라고 보기에는 좀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구요. 

오히려 채식을 강제하면 강제할수록 영혜는 점점 날카로워지죠. 자신의 손목을 찌르고, 동박새를 산채로 뜯어먹는 모습. 저는 그쪽에 주목했구요. 

전방위로 소설을 분석하고, 저도 잘 모르고 모두가 잘 모르는 단어를 나열하면서 설명하기에는 제 깜냥이 닿지 않기에 이렇게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비라는 단순한 구조로 삼연작 소설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더 많은 꼬인 플롯과 기의가 소설에 깔려 있었겠지만 하나에만 주목해본거죠. 요새 다들 좋아하는 선택과 집중 같은 느낌으로요. (웃음) 2008-09-11
09:31:53
  

 

상병 이우중 
  그렇군요, 동물성과 식물성,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비. 

전 책을 읽고 이외수씨의 '꿈꾸는 식물'을 떠올려 봤습니다. 결국 식물을 꿈꾸는 사람은 거기서나 여기서나 제대로 못 살더군요. 확실히 우리는 동물의 시대에 살고 있나봅니다. 아, 우리도 동물이지요? 하하. 

그걸 다시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대입시켜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성우월적이다? 흠... 지나친 비약이려나요. 그럼 소위 알파걸들은 여성성으로서의 남성성에 대한 우월성을 보여줬다기보다는 남성화를 택했고 그 결과로 다른 남성들보다도 더 우위에 선 케이스라고도 생각해 볼 수... 비약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그만두어야겠어요(웃음) 

그나저나 오늘 조오서언이일보오에 동인문학상 본심 진출한 작가들 중에서 한강 인터뷰가 나온다더군요. miner 신문에 손을 대야겠습니다. 허허허. 2008-09-11
12:2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