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궤도를 이탈하려는 별의 소리를 듣다.  
병장 고동기   2008-10-06 11:16:55, 조회: 205, 추천:1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이미 정해져있는 아득하고도 먼 길을, 인내하며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 길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소설은 그 길 위의 출발선을 갓 지난 1950~60년대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초등학생일 때부터 입시를 준비하여 명문중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다. 그 정도가 다를 뿐이지 명문학교에 진학하려는 욕심은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고민들이 내게도 와 닿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은 주인공인 ‘유준’과 그 주위의 친구들-엘리트 집단에 속하는-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어진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 왔으며, 앞으로 다가올 대학입시마저 성공적으로 치워낸다면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 미래란 거저 쥐어지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인내와 자기관리를 요구하며, 어떤 이들에게는 마음속에 품어왔던 꿈을 살며시 접어야만 하는 고된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학교라는 곳이 정해주는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 잘 알고 있듯이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지식이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치열한 내부경쟁을 통해 한정된 인원을 선발해내는 곳에서 지식이란 평가와 잣대가 되는 도구일 뿐이다. 그곳에서 자기목적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은 열등생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열등생이란 오로지 학교라는 곳이 존재할 때만 존재한다.) 학교는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의 관습과 기호들을 교육시키며, 그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에 걸리게 하여 일찌감치 낙오시켜 버린다.

 소설 속의 준은 스스로 열등생이 되는 길을 자처한다. 학교를 중심으로 한 그 단단한 계(界)에서 스스로 이탈하려는 것이다. 준은 그와 반대되는 친구인 모범생 ‘영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영길 : 너희들 두렵지두 않니? 너나 인호형은 퇴학했구 정수까지 휴학을 했는데, 이건 아주 니들 맘대루잖아.
    준  : 시키는대루 하기 싫어할 뿐이지 나두 노력하구 있어.
    영길 : 노력은 무슨……아무렇게나 사는 거지.
    준  : 그게 나쁘냐? 나는 말야, 세월이 좀 지체되겠지만 확실하게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거다.
    영길 : 학업을 때려치우면 나중에 해먹구 살 일이 뭐가 있겠어?
    준  : 어쨌든 먹구 살 일이 목표겠구나. 헌데 어른이나 애들이나 왜들 그렇게 먹구사는 일을 무서워하는 거야.
       나는 궤도에서 이탈한 소행성이야. 흘러가면서 내 길을 만들거야. 』


 그렇게 준은 ‘별은 보지 않고 별이라고 글씨만 쓰는’, ‘시에 코만 박고 있는’ 자들을 멀리한 채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엘리트 집단에서 뛰쳐나오는 것. 자신이 가졌던 기득권을 순순히 포기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눌러버려야 하는 것이다. 준은 자신이 속한 엘리트 집단이 후에 사회의 지도층이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글을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학교와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도 사회의 지도층이 될 수 있을 거란 얘기다. 하지만 준은 그 길을 걷지 않는다.


『 당시에는 명문고교의 어린 ‘신사들의 모임’을 서로가 대단하게 여겼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세상 어느 사회에나 있는 엘리트 놀이게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좌절하거나 아니면 살아남아서 요 모양의 산업사회를 이끌어갈 사회 지도층이 되었다. 그들은 그맘때에 벌써 세계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 따위를 모조리 읽어치우고 어른들도 읽기 힘든 사회과락이나 철학책들을 읽고 의젓하게 비평을 하며 토론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들은 사창가를 가거나 어두운 대폿집을 드나들며 퇴폐의 흉내도 냈지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지도자가 되는 길인가도 잘 알았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정말 방기하지는 않았다. 인호나 나처럼 온몸을 던지는 일은 곁에서 지켜보기에는 신나는 모험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끝내는 신중한 충고를 하며 한 걸음 비켜섰다.
 이런 길에서 탈락되었던 청소년기의 어느 때부터 나는 저절로 알아차렸다. 이들이 얽어내는 그물망 같은 사교가 서로 직조되어 일정한 그림으로 나타난, 이를테면 연애와 결혼, 성공과 실패, 출세와 낙오, 사랑과 야망 따위의 전형들이 결국은 한강을 둘러싼 자본주의 근대화 사회의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음을. 아니면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까지 연결되고 그 길은 어둑 확장되고 뚜렷해질 것이다.
 어쨌든 내가 그때의 그 모퉁이에서 삐끗, 했던 것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필연이었다. 그 길은 내가 어릴 적부터 어렴풋하게 이건 빌딩가의 대로처럼 너무도 뻔하고 획일적이라고 느껴왔던 삶으로 가게 될 확실한 도정이었다. 그러나 벗어났을 때의 공포는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다. 』


 그 자신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하는, 외롭고 고된 길을 택한 준은 과연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아쉽게도 소설은 준이 베트남으로 파병을 가게 되면서 끝을 맺는다. 그 후에 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황석영이라는 한 소설가의 성장소설로 읽힌다. 실제로 그는 소설 속 유준처럼, 사춘기 무렵부터 그리고 베트남에 파병을 가서도 작가가 되겠다는, 훌륭한 작품을 쓰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고 한다. 결국, 학교라는 궤도를 이탈했던 준이라는 소행성은 ‘개밥바라기별’이 아닌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샛별’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에게는 준의 미래보다 더욱 궁금한 것이 사실, ‘영길’의 미래이다. 학교가 제시하는 기준에 충실했던 모범생 ‘영길’ 말이다. 여태까지 나는 소설 속 영길과 같은 모범생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 믿고 살았었다. 나는 선생님들의 눈에 어긋나지 않는 조용하고 착실한 학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내내 영길의 모습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준과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했지만 겉모습은 영락없는 영길이었다.

 영길의 실제모델이었던 황석영의 친구는 대학졸업 후 무역회사에 취직하였고, 날마다 밤을 새우며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언제나 모범생이었던 그는, 회사에서도 역시 모범사원이 되려했던 것일까. 그랬던 그는 결국, 삼십세의 젊은 나이에 과로사로 숨을 거둔다. 나는 이것이 단지 이전 세대의, 근대화시대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 시절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지금과 비슷하듯, 사회의 모습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지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두 발휘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이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야 한다.

 나의 주위에 소리 없이 빛을 잃어가는 별들의 무리가 보인다. 제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는, 궤도를 이탈하려는 별들의 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는다. 나 자신은 어떠한가. ‘개밥바라기별’이 아니라 ‘샛별’이 되고 싶은데, 가끔씩 가슴 밑바닥에서는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이 튀어 오른다. 궤도를 이탈하기 위해서는 중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나의 몸은, 그동안 돌았던 궤도의 자리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자꾸만 사회의 기준에 맞추려, 중심을 바라보려 한다.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8:24:24 

 

병장 이동석 
  수퍼 서브 고동기 선수가 들어오는군요. 

위기에 빠진 책마을을 구합니다. 2008-10-06
12:09:01
 

 

병장 어영조 
  굉장히 알찬 마음으로 마지막장을 넘겼던 책입니다. 
개가 밥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별이라는 말이 왜 그리 가슴속에 박히던지요. 2008-10-06
12:50:56
  

 

병장 전승원 
  개밥바라기, 샛별, 효성 은 새벽녘에 보이는 금성을 지칭하는 말이죠. 고작 2년간의 천문부 활동이였지만, 참 재밌는 일도 많았습니다. 특히, 허가된 외박은 그야말로 흐히흐헤헤히-한 상황의 연출이 자연스러워서 참 좋았는데... 2008-10-06
14:38:11
  

 

상병 이동열 
  개밥바라기별- 사서 어머니, 동생 먼저 읽으라고 하고 집에 두었습니다 
바깥바람 쐴때 재빨리 읽어야할텐데... 2008-10-06
14:44:52
  

 

병장 이동석 
  저도 중딩때 그 뭐냐 유성우가 떨어질때였나 뭐였나 
암튼 그럴때 좋아하던 여자아이와, 마침 겨울이기도 해서, 
흐히흐헤헤헤히 
했었고, 
그리고 나서 
알퐁스 도테의 '별'이 가지는 그 미묘한 긴장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흠흠. 2008-10-06
14:46:12
 

 

병장 전승원 
  에스텔- 별을 뜻하는 참 아름다운 이름이라죠. 저 역시 알퐁스 도테의 "별"처럼 별에 아름다운 추억이 깃들어 있어, 아직까지도 별을 보면 그때 기억이 너무나 생생히 떠올라요. 

흐히흐헤헤헤히. 2008-10-06
14:4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