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치유의 역사학으로 - 도미니크 라카프라
상병 이지훈 2008-11-14 23:41:53, 조회: 100, 추천:0
내글 내생각으로 할까, 독서후기로 할까 고민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책을 아직 다 읽지도 않았거든요...근데 책이 그 동안 생각하던 문제에 영향을 주었고해서
독서후기로 하기로 했습니다.
역사학자를 꿈꾸면서도 아직 공부가 부족한지라 끝맺음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음 시작할게요
고대사(苦待史)가 아닌 고대사(高大史)
어떠한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은 처음에 작용한 그 어떠한 것이 사라지거나 힘이 희미해지면 같이 사라지거나 힘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예외적으로 작용은 사라지고 반작용만 남게 될 경우, 반작용은 살아남기 위해 처음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끊임없는 변화로 살아남은 반작용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에 오랫동안 살고 있다. 동아시아의 반작용들은 이미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작용이 오래 전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변형된 형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것들은 그저 남아있기 위해 남아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망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망령의 또 다른 이름은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 상처와 한을 통해서 나타난다. 작은 상처든 큰 상처든 상처를 받고 한을 가지지 않으면 민족주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모두 한 번 이상의 큰 상처를 입었고 이에 대한 한 역시 깊고 절절하다. 이들은 상처와 한을 해결하기 위해 민족주의에 의지했는데 이 의지함은 그들을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약해진 그들은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과 같이 더욱 민족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민족주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막연한 불안감, 과거에 대한 영광의 향수로 민족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대마초에 대한 논란이 있던 것처럼 민족주의가 뭐가 나쁜가? 라고 할 수도 있다. 상처와 한을 어르고 달랠 수 있다면, 자기 만족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것 아닌가?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에 의한 상처와 한의 치유는 일시적이고 피상적이다. 아니, 치유라고도 보기 어렵다. 그냥 은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처는 곪고 터지는데 동아시아 각 국가는 좀 더 강한 마약, 좀 더 강한 민족주의로 이를 은폐한다. 강해진 민족주의는 이제 아예 상처의 고통을 잠시 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처를 입은 사실 그 자체조차 잊어버리게 할 만큼 강력해졌다.
강해진 민족주의의 힘은 역사 작업에서 드러난다. 역사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각국의 역사학은 학문의 범주를 넘어서 어떠한 작업장에서의 생산물처럼 보인다. 그 생산물에는 어김없이 민족주의의 색채가 가득하다. 동아시아 어느 국가나 다를 바 없다.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상처와 한이 많다고 하는 국가의 교과서조차 민족주의 색채를 띠고 있다. 예를 몇 가지 들자면 기원전 2333년에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국가의 모습을 갖춘 국가는 아직까지 발견된 전례가 없다. 교과서가 정확하다면 한 국가의 기원이 되는 그 국가가 바로 지구 역사상 첫 사례가 될 것이다. 게다가 기원전 2000년 전 이상 연대의 청동기는 아직 발견조차 되지 않았다. 이를 가장 보편화, 표준화되어야만 하는 한 국가의 역사교과서에 사실인양 버젓이 기술하고 교육하는 것은 민족주의의 반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애매모호하게 기술하는 것보다 민족주의를 반영하여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편이 더 효율적이고 편했던 것일까? 또 이 국가는 분명히 상처만 받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최근에 가까워서는 타국에도 여러 가지 상처를 주었으면서 이는 거의 완벽히 누락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민족주의가 현재까지는 가장 약하다고 판단되는 국가가 이 정도이고, 나머지 국가들은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민족주의 과다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각 나라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차이가 민족주의의 채도를 조정하는 것뿐이지, 동아시아는 민족주의의 색깔만이 가득하다.
강해진 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모체가 되는 고대사(古待史)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를 고대사(苦待史)화 한다. 자신이 고대하던 것처럼 상처가 입은 사실조차 잊고 상처를 준 사실조차 잊고, 거기서 더 나아가 현재, 미래마저 재가공한다. 마치 미래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것처럼 환상에 빠진다. 언젠가는 곪은 상처들이 터져 나올 것이고 그 상처로 인한 한은 분노가 될 것이며, 민족주의는 말과 글을 떠돌다가 막다른 길에 이르면 무기를 들 것이다. 여기에 민족주의, 망령의 위험성이 있다. 없어져야 할 타이밍을 놓친 민족주의가 변형되고 왜곡된 형태로 유지되면 결국 무기를 들게 될 것은 현재 정세만 봐도 알 수 있다.
망령에 휘둘렸던 것이 비단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었던 것도 아니고 국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작업까지 진행하면서 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동아시아뿐이다. 망령을 달래주진 못할망정 오히려 더 많은 한을 가지고 세상에 남아있게 하고 있다. 망령은 과거의 상처와 한의 집약이기 때문에 역사라는 향불만이 그것을 달래줄 수 있는데 그 향불로 불장난 따위나 하고 있는 셈이다. 콕 집어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는 망령은 아니지만 유태인과 관련된 망령이 아직 유럽에 살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이미 역사라는 향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망령을 달래 왔고, 또 그 향불이 얼마나 과거 상처와의 화해인지에 대한 논의가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동아시아는 이것에 비하면 과거 상처를 받은 것, 준 것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감추기에 급급할 뿐이다. 향불에 대해 이야기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에 거슬리는 이야기가 논의의 대상이 되면 가차 없이 잘라낸다. 아까 예를 들었던, 현재까지는 가장 민족주의가 약하다는 국가의 경우를 살펴보면 “식민지 지배가 국가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다”라고 주장했던 학자는 온갖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매국노로 취급당해야 했다. 물론 그 학자의 주장이 식민지 지배를 했던 국가에게 여러 모로 이용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렇게 매국노 취급당하고 논외로 처리될 만큼 그의 주장이 우리에게 아무런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것이었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언론에서 떠들어댔던 것처럼 아예 근거 없는 허무맹랑하고 매국노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다른 학자의 “고구려사는 고구려사일 뿐이다”라는 주장도 정말 시의적절했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로 치부돼버렸다. 이런 것만 보면 과연 이 국가가 정말 민족주의의 색이 옅은 축에 끼기는 끼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러한 동아시아와 유럽의 차이는 “EU”와 “그냥 동아시아 국가들”로도 나타난다. 오랫동안 역사적 경험과 지역적 공유를 함께 했던 동아시아이지만 비슷한 경우의 유럽과 같이 하나의 공동체, 아니 정기적인 대화의 장조차도 없다. 극단으로 달리는 서로의 민족주의에 으르렁거리기 바쁘다. 동아시아에는 유럽의 향불처럼 향불다운 향불도 없거니와, 향불을 만들기 위한 걸음마조차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막고 있다. 인간이 서로 100% 이해할 수 없듯이 과거의 상처가 완벽히 치유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고 편하게 마약만 꿀떡꿀떡 삼켰던 결과가 오늘날 동아시아 전체에 불안함을 가져오고 있다. 정녕 민족주의가 무기를 들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무기를 드는 순간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동아시아 국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의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향불을 들고 망령을 달래서 그 망령이 사학사라는 분야에서나 이야기되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출발점은 향불, 역사다. 동아시아 역사는 고대사(苦待史)가 아닌 고대사(高大史)가 되어야 한다. 늦었지만 근본적인 치유가 지금부터라도 시작되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미래에는 파멸, 공멸만 있을 뿐이다. 동아시아만의 국가 조직을 만들자 라든지 동아시아 통합 역사를 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서로의 예민하고도 곪디 곪은 상처를 치유하면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넓고 크게 깊게 같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만들어지는 조직은 어떠한 것이라도 환영한다. 모든 것의 시작은 누구 눈치 보지 말고 먼저 향불을 드는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 이 향불을 가장 먼저 드는 쪽은 아직까지는 가장 민족주의 색채가 옅은 국가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향불을 드는 일에 손을 보탤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짤막하고도 건방진 평가-
아무래도 번역체의 번역이 읽는 내내 거슬리는 책이었고 과연 라카프라나 소쉬르, 데리다에 대해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저같은 사람이 이걸 다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의문입니다.
물론 저자가 아니라 옮기고 엮은 이들에게 던지는 푸념입니다...주석은 꼼꼼했지만, 텍스트라던지 컨텍스트, 트라우마 등 저자의 생각이 가득 담겨있는 개념만큼은 따로 설명을 해주거나 적절한 우리말로 바꾸거나 하는 노력이 있었어야 했는데..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니체 전집은 이러한 노력이 눈에 보일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차라리 책 후반부의 해설과 같은 부분이 번역체도 아니고 라카프라를 이해하기 더 용이하더군요
언젠가 실력이 갖춰진다면 원문을 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허허 웃음만..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03:16
병장 김민규
잘 읽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자기중심적 경향이 항상 마음에 안 들었는데 손 안 닿는 등 효자손 빌려 긁은 느낌입니다.
드는 의문은, 우리 나라를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민족주의적 색채가 적은 편, 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과연 실상이 그러한가. 하는 점입니다. 중국과 같은 경우는 민족주의를 들이대기에는 52개 민족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어, 한족 중심이라기보다는 중화주의 중심의 일종의 국가주의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구요. 일본 같은 경우는 군국주의와 서구에 대한 사대주의가 결합된 복합적 형태를 띈다고 생각하구요. 민족적 한이 등장하는 예는 베트남이나 태국 정도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순혈주의라는 황당무계한 '전통'까지 민족주의에 한몫 하고 있지 않습니까? 평화적인 민족이라 역사적으로 타 국가를 침략한 적도 없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그럼에도 슬기로워서 그 침략을 받아내며 과학과 기술과 예술을 꽃피운 나라, 그게 우리가 우리를 보는 관점인게 참 안타까운 한계죠. 자기합리화와 이데올로기적 강박증에 시달린다는 느낌마저 받게 됩니다.
앞으로 혼혈 2세들이 사회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면, 그 모순을 무슨 수로 채워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의 농촌은 그들이 접수했다, 고 봐야겠죠. 이리저리 뒤숭숭한 저녁이네요. 2008-11-14
23:52:12
상병 이지훈
움...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이렇게 빨리 댓글이 올라올 줄은 몰랐네요
색채가 적은 편이라고 한 것은 그나마 중국, 일본에 비교해서 한국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등으로 조금은(?) 부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이 더 정치, 경제, 군사 등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민족주의가 짙게 나타났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네요..음 근데 중국, 일본을 제외하면 한국도 그렇게 열악한건 아니네요 좀더 넓게 생각했어야 하는데 배경지식이 좀 부족했네요. 거의 동아시아 3국에 집중해서 생각했거든요. 중국의 경우도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음 단순히 바깥으로만 드러나는 부분만을 캐치한 면이 있네요 2008-11-15
00:00:30
상병 이지훈
그러고보면 저도 아직까지는 민족주의자군요...허허 2008-11-15
00:03:28
병장 김민규
패권주의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봐야 할 여지가 있겠네요. 그것이 국가적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든, 민족적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든 위험성의 측면에서는 동일한 것이니까요. 더불어 생각해봐야 할 것은 개인주의가 시대의 경전이 된 현실속에서 어떤 단위의 깃발아래 개개인이 최면에 가까운 상태로 결속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간다는 것이, 2차대전 당시처럼 여전히 유효하겠느냐는 점이겠군요. 내일 당근 먹으면서 깊이 고민해볼게요.
다시 읽다가 생각난건데 어느 나라에나 모순은 존재하며 그것이 일정 주기로 반복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적으니까 문명진화론자같은데 그런 이야기는 아니구요) 유럽에는 분리주의의 망령이 돌고 있다죠. 바이에른과 북부 독일의 분리운동, 로마를 중심으로 한 남부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북부 이탈리아의 갈등, 바르셀로나를 주축으로 한 카탈루냐주와 저 왼편의 정서적 거리, 북부 아일랜드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시도 등이 그런 현실을 대변하죠. 그렇다고 동유럽은 조용합니까?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 오명을 뒤집어쓴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바이바이- 했죠.
10년 뒤 중국에 그런 사태가 오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요. 대한민국이 통일을 한다고 해도, 모르죠. 일본도 오사카와 도쿄의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죠? 한쪽에서는 오사카 민국이라고 놀리고, 뭐 그런 등등의. 지켜봐야죠. 꾸준히 관심을 두고.
오늘은 자러 갈래요. 좋은 단서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리저리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겼네요. 2008-11-15
00:17:35
병장 강문석
과거처럼 한 이데올로기에 결속되는 형태는 아니겠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묶인 또 다른 경전이라면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여전히 세계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는 선진국들의 또 다른 패권주의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구요. EU를 비롯한 선진국들의 연합은 그들만의 또 다른 민족주의의 양산이 되지 않을까요. 음 이건 좀 너무 나갔다..
사실 저는 한국이야말로 정말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아직까지 '한 민족'이라는 관념을 고수하는 것 자체부터가 그 근거라고 생각했구요. 반만년이나 되는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민족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주장 자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혹은 '단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공한 역사가 없다'라는 주장이라거나. 그럼 세종의 쓰시마 정벌이나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확장된 국경선의 증가는 뭐라고 설명할 거지..
...쓰고 보니까 김민규 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를 바가 없네요. 아 부끄러워..(...) 2008-11-15
18:52:59
병장 이찬선
민족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과거의 영광'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그 '영광스러웠던 과거로의 회귀' 자체가 되돌아가고자 하는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듯 보입니다.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의 회귀라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면 안될 것' 또한 상정하죠.
얼마전에 읽은 책 중에 '유토피아 정치론'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담고 있는 책이 있었는데, 개괄적으로 '유토피아 정치'는 배제와 억압의 대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유토피아 정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배제의 폭력은 필수적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민족주의라는 '그들의' 유토피아를 대할 때 그 속에서 버려지고 희생되고 억압된 것은 무엇인가? 를 매우 처절히 살펴봐야 하겠지요.
지극히 사념이 짙은 주장이지만, '이곳'에 있는 우리가 가장 극명한 예증이지 않을까요? 우리를 이곳에 매여있게하는 이데올로기적 선동들.
과격하다면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순화해서 표현할 자신은 없군요... 허허...
덧, 이지훈님 절 모르시나요? 행여나 제가 아시는 분일까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