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법 - 피에르바야르  
상병 이지훈   2008-10-27 04:10:47, 조회: 237, 추천:0 

책마을에 가입한 건 초여름인데 눈팅만하고 가끔 댓글만 달다가 이제야 첫 글을 남기는군요
사실 그동안 썼던 글은 여러 개인데 만족할만한 글이 나오질 않더군요
책마을질(?)과 이것저것 독서하다보니 눈만 높아진 것 같아요 허허 제 펜에 만족하기가 영...
지금 올리는 글도 만족스럽진 않고 미완성에 가깝지만 선배의 응원어린 쪽지에
힘을 얻어 올려봅니다(웃음) 이번에 안 올리면 영원히 책마을 주변을 배회할 것 같아서요 후후



시험을 봤다고 하자. 학창시절 시험이든 언제 어디에서 본 시험이든 이 가정에 제한은 없다. 덧붙여서 그 시험은 객관식이었다고 다시 한 번 과감한 가정을 해보자. 시험을 마친 사람 중 몇몇은 두 가지의 보기 중 헷갈렸던 문제를 떠올리고 자신이 선택한 보기가 답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후다닥 교과서 혹은 해설서를 찾아본다. 자신의 답을 확인하는데는 몇 분, 아니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헷갈렸다는 것은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까, 전부 확인할 필요는 없다. 답이 맞았다고 확인한 후 안도감에 숨을 “후” 한 번 내뱉고 책을 탁 덮는다.

이 글을 접하는 전부가 아닐지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법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나에게 이런 종류의 안도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난 다독가도 아니고 속독가도 아니다. 그저 꾸준히 책을 접한다. 항상 독서에 대한 강박증,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책 자체가 지식 자체라도 되는양 독서에, 아니 책에 집착한다. 다독가보다는 다독가의 서재에 열등감을 느낀다. 책을 읽는 행위보다 책을 소유하고 그 질감을 느끼는 행위에 더 큰 만족을 얻는다. 이 정도면 자가진단으로 북 페티시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책 그 자체에 집착이 강하다. 이러한 책 소유의 집착은 희한한 습관을 낳았는데, 책을 읽는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엄지손톱으로 책장 한 장, 한 장을 애무(?)하는 것이다. 당연히 책의 귀퉁이 부분은 구겨질 수밖에 없는데, 덕분에 내가 소유욕을 발휘한 모든 책에는 이러한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 책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을수록 애무의 강도도 더욱 강해지고 더욱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마치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지식에 대한 변태적인 욕구가 발휘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책의 내부가 아닌 책의 외부 요소에 집착하는 것이 신성한 책에 대한 모독일지도 모른다고, 지식에 대한 불충일지도 모른다며, 이러한 변태적인 욕구가 씻을 수 없는 죄악이라고 느끼고 있을 때쯤 피에르 바야르의 책을 애무하게 되었다.

피에르 바야르는 책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는 어떠한 방법도 모두 유효하고 꼭 독서만이 책을, 또는 그 안의 지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던 것처럼, 피에르 바야르도 나에게 “독서는 죽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책에 이러한 구절은 없지만 내가 받아들인 내용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통상적으로 금기시되는 비독서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펼쳤다.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비독서가 오히려 더 독서다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객관식의 답을 알려주는 교과서처럼 내가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 죄를 저지르게 만든 강박증과 열등감을 잠시나마 조용히 가라앉게 해주었다. 책은 그 자체가 지식이 아니다. 설령 책 그 자체가 지식덩어리라 하더라도 그것을 아무리 닥치도록 읽고 파헤쳐도 나의 지식은 아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책과 지식에 대한 모든 생각들의 주자가 이 책의 홈런 한 방으로 내 머릿속, 가슴속을 향해 득점을 올리는 기분이었다. 만루포였다.

사실 그의 책에서 뽑아낸 나의 이야기들은 모두 책에 대한 강박증과 열등감을 견디지 못한 허약한 자의 자기합리화 과정일 수도 있다. 답을 확인한 후의 교과서처럼 난 숨을 “후” 한 번 내뱉고 책을 탁 덮어버렸고, 지금 난 책의 대부분의 내용을 잊어버렸다. 게다가 강박증과 열등감 또한 아직 어느 정도는 나에게 유효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난 그의 책을 나의 내면의 도서관에 적절히 배치했고, 내 도서관의 그의 책을 열람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배치된 책은 그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아니라 나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다. 그가 말하는 내면의 도서관, 잠재적 도서관 등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그 안에 배치되어 있던 책들을 확실히 내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너무 내 손톱을 거치는 책들의 느낌에만 주목했기 때문에 이 도서관의 책들을 사랑해주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책을 꼭 쥐고 있지 않아도 책은 항상 내 곁에 있으며, 내가 손톱으로 애무하지 않아도 책은 나의 도서관에 적절히 배치된 것만으로도 쾌감을 얻는다. 이런 어찌 보면 간단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동안 내 소유욕으로 점철된 책들에는 손때가 가득해졌지만, 정작 내 자신의 도서관에는 먼지가 너무 쌓여버렸다.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먼지 따위는 청소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책과의 사랑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기 때문이다.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생긴 북 페시티즘적 습관은 지식에 대한 욕망이 사라질 때까지, 호기심이라는 것이 사라질 때까지 예전처럼 계속될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02:49 

 

상병 김세현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이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2008-10-27
06:34:36
  

 

일병 김예찬 
  개인적으로 2008년 최고의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책이군요. 물론 저도 지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웃음) 친구가 하도 추천을 해서 개략적으로 훑어봤는데 책이 참 좋더군요. 2008-10-27
07:50:44
  

 

병장 황인준 
  드디어 올렸네(웃음). 
닥달의 효과인가(땀땀). 
잘 읽었어. 읽기 좋기만 한데 뭐. 

책에 대한 강박증이라.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 않을 까, 
나도 책에 대한 강박증이면 좀 심하다고 자부하니까(땀). 
물론 책 내용을 내 지식화 하고, 내 도서관에 적절히 배치하는 게 
좋다고 알고, 또 그렇게 생각하지만,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미친듯이 책을 읽어보고 싶네. 2008-10-27
08:16:15
  

 

병장 정병훈 
  저랑 같은 취미가 있군요. 책과의 애무라... 뭐 저는 애무정도는 아니고 소장을 기본으로 책 수집에 이르는 병에 걸려있답니다. 좋은 책은 무조건 사고 싶어요. 휴 - 
미친거죠? 돈도 얼마 없는데 말이에요. 하하 

그나저나 책을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이 나의 것이 되는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마을에서도 몇번 나온 말이지만. 독서는 책을 펼때 하는게 아니라 책을 덮을때 하는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을 덮고서 그 책에 대해서 한번 더 고민할때 그때 그 책이 진정으로 본인것이 된다고 믿고 있어요. 본인도 그래서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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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통상적으로 금기시되는 비독서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펼쳤다.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비독서가 오히려 더 독서다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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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부분은 약간 설득력이 부족한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독서를 즐기는 입장에서 말이죠.(웃음) 조금더 논리가 붙어 있다면 좋았을거 같습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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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그 자체가 지식이 아니다. 설령 책 그 자체가 지식덩어리라 하더라도 그것을 아무 
리 닥치도록 읽고 파헤쳐도 나의 지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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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관해선 저도 아주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답니다.(웃음) 


잘 읽었어요. 2008-10-27
20:09:39
  

 

병장 이동석 
  명예의 전당에 참고할만한 글이 있습니다. 


[060302] 김동석(예) - 어마어마한 독서목록에 기가 죽은 분들께 드리는 글 2008-10-27
21:56:58
  

 

상병 이지훈 
  책의 내용보다는 제 생각에 집중하려다보니 미흡한 부분이 드러나버렸군요 
제 생각이 아니라 저자 생각이다보니 좀 소홀했던 것 같네요 
그나저나 답글 달려다보니 이미 페이지가 넘어갔네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