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의 탈을 쓴 수줍은 팬심  
병장 이우중  [Homepage]  2009-01-08 22:19:47, 조회: 117, 추천:0 

위화의 ‘허삼관매혈기’를 읽었어요. 당신에게도 위화는 친숙한 이름일 거예요. ’94년도였나 당신이 나왔던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인생’(그 쪽 말로는 活着이었죠)의 원작 소설 작가이기도 하니까요.
당신을 처음 본 게 언제였나요. 어렸을 적 부모님의 영화 감상 도중에 불쑥 들어갔을 때 브라운관 속에, 발그레한 등 아래서 당신은 예의 그 표정, 그러니까 턱을 약간 내밀고(혹자는 턱이 튀어나왔다고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입술을 굳게 다문 이지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죠.
그렇게 멍하니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안방 문을 나설 때까지 나는, 부끄럽지만 약간은 황홀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내게, 저 영화는 ‘홍등가’라는 어른들이 보는 영화니까 가서 잠이나 자라- 고 말씀하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까지 제한되어야 하나’ 하는 생각은 물론 들지 않았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잠자리에 들었죠.

당신을 다시 보게 된 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어요. 뭔가 이상하게 편성된 수업은 ‘특기 적성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저를 일주일에 중국어만 6시간 수강하게 만들었었죠. 다시 말하자면 전교생 중 십오분의 일은 특기 혹은 적성이 중국어로 분류가 된 것이었어요. 우리 학교는 외고가 아니었는데도요. 어쨌거나 그로 인해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그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습니다. 불만이 있었다면 중국어를 가르쳤던 선생님 쪽이었겠죠. 그렇다고 그를 싫어했는가 하면 또 그건 아니에요. 사실 그도 꽤 괜찮은 선생님이었답니다. 사람이 너무 쪼잔한 것만 빼면요. 특히 그는 당신을 무척 좋아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당신이 나온 영화를 틀어제끼, 아니 틀곤 했었지요. 결국 그 선생님은 턱이 돌출된 여인과 결혼을 했답니다. 아, 당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군요. 허허.
어쨌거나 자의건 타의건 다시 마주하게 된 당신의 모습은 정말이지 트라우마와도 같았어요. 어렸을 때 ‘홍등’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당신의 모습이, 마치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생생히 재현되었거든요. 그런 이유로 ‘인생’을 보면서 그 명대사. “닭이 크면 뭐가 돼요? 거위가 되지. 거위가 크면 뭐가 돼요? 양이 되지. 양 다음엔 뭐가 돼요? 소가 되지. 소가 다 자라면요?” 다음에 이어지는 두 가지 버전의 대답만큼이나 극 중 부귀의 아내였던 당신의 죽음이 가슴시리게 다가왔었어요.
‘서초패왕’에서는 항우가 어떻게 당신 같은 여자를 두고 권토중래하지 않고 나가 싸우나 싶기도 했고요, 샬로, 그러니까 극 중 항우의 실제 연인이었던 ‘패왕별희’는 또 어떤가요. 물론 그 영화는 거의 데이(였던 장국영)를 위한 것이긴 했지만 당신이 목을 매단 것과 데이가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른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 비극성이라든가, 둘 다 스스로 택한 죽음이지만 완전한 자의는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슬픔으로 인해 죽음들이 어쩌면 눈이 아리게 아름다웠던 것 같기도 했다는 점에서요.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가지고 주말이면 하숙집 주위의 파리 날리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시급 천사백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했답니다. 천 사백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어요. 그 돈을 받기마저도 미안할 만큼 손님이 오지 않는 대여점에서 저는 신작이 나오면 가장 먼저 감상하고, 가끔은 친구들을 불러서 영화 포스터로 유리문을 도배한 뒤 에로영화를 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소득은 진열장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던 ‘풍월’을 발견한 것이었어요. 그 날은 두세번 이상 비디오를 재생시켜 하루 종일 영화를 음미한 뒤 결국에는 주머니에 비디오를 넣고 귀가했답니다. (비록 아편에 찌들어서라고는 해도)그토록 몽환적이었던 당신의 눈빛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금에야 당신께 극약을 먹여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장국영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저런 쳐죽일 놈’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어요. 이해하지만 용서할 수 없었다. 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 땐 그랬답니다.
그런데 ‘진용’을 보면서는 졸고 말았다는 고백을 해야만 할 것 같아요. 그 앞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로 핑계에 불과할 것 같고, 왜 그런 때가 있잖아요. 수업 시간에도 ‘졸면 죽는다’는 일념으로 필사적으로 버티지만 어느새 ‘깜빡’ 하는 시간이 지난 뒤 눈앞에 불이 번쩍해서 화들짝 일어나 보니 선생님이 앞에 있더라. 하는 그런 거요. 허허. 아무리 시공을 넘나드는 당신의 모험담이었지만 감기는 눈꺼풀은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붉은 수수밭’으로 당신은 처음 이름을 알렸었죠. 장예모의 원색과 어우러진, 혀를 넘실대는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있는 당신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에 당신의 어린 아들이 娘, 娘 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아직까지도 정말 강렬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비교적 최근에 본 ‘황후화’는 보고 난 뒤 친구에게 ‘이젠 정말 누나가 아니라 이모님이셔’ 하면서 슬퍼하기도 했지만 저도 첫째왕자처럼 당신의 품에 그렇게 안겨보고 싶다는 생각, 당신께 그렇게 적극적으로 구애를 받는데도 결국 뒤통수를 쳐버리는 첫째왕자는 나약하다 못해 어디 한 군데 나사가 풀린 놈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도 저러는 걸 보면 젊은 게 좋긴 좋나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말이 너무 길어지네요. 그나저나 어제는 신문에서 당신의 이름을 보았어요. 장쯔이 아시죠? 거 왜 2005년에 ‘게이샤의 추억’ 분명 같이 찍었는데 혼자 독박 쓴 그 장쯔이 말이에요. 그녀와 함께 연초부터 중국을 후끈 달군 두 배우로 선정되셨더군요. 11일 방영될 예정인 인터뷰 내용 중 싱가포르로 국적 변경을 한 이유에 대해 “(대중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발언 때문에 기사에 났더군요. 장쯔이는 14살 연상의 연인과의 애정행각이 담긴 사진 때문에 그랬고요.
그 때문에 당신은 2006년에 ‘가장 아름다운 중국인 50명’에 1위로 선정되었는데 이번에는 순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하기야, 중국인이 아니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말이죠. 걱정이 되어요. 대륙의 네티즌들도 우리 네티즌 못지않게 무서운 면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하지만 너무 상심하진 마세요. 대륙의 네티즌들은 호방한 습성이 있는지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용서가 되는 모양이에요. 장쯔이도 그렇게 까이다가 쓰촨 대지진 직후 칸 영화제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인 이후로 호감도가 급상승해 2008년에는 ‘가장 아름다운 중국인 50명’에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니까요.

그럼 이만, 언제나 행복하길.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7
15:48:52 

 

상병 이지훈 
  오 좋네요. 근데 요즘 자꾸 말머리를 이용해 제목을 구성하시는군요 허허 
그러나 싫다는 건 아니예요 재밌어서요 

팬...그러고보니 전 스크린 상에서 동경하는 누군가는 없군요 2009-01-08
23:44:55
  

 

일병 김태경 
  저에게는 제니퍼 코넬리.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빛이란 그런게 아닐까요? 
지금이야 '뷰티풀 마인드' 이후로 '헐크'에도 나오고 새영화 '지구가 멈춘 날'에도 나오고 뭐 왕성하게 활동하지만 옛날엔 사실 아역으로 든 뒤 침체기가 있었잖아요. 그때 암울한 눈빛이 전 너무 좋았어요. 약간은 퇴폐적이면서도 지적이고 매혹적인...말도 안되는 그런 눈빛(웃음)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건 98년도에 찍은 다크엔젤인가 다크시티인가 하는 영화인데 남자 주인공은 누군지 기억은 안나도 제니퍼 코넬리의 눈빛만은 선명히 기억나네요. (아 물론 조연이었던 팀 로빈슨도 기억은 나지만요.) 어두운 집안에 홀로 앉아서 들어온 남편을 바라보던 그 눈빛...영화는 쓰레기지만 정말 일품눈빛.흐흐 2009-01-09
00:37:40
  

 

병장 정병훈 
  팬심하니, 소녀시대가 떠오르는군요. 저는- 유리가 좋아요. 
이건 정말 미친짓같다 생각하지만, 소녀시대 티져영상을 단숨에 세번 되돌려 보기로 봤다는, 그러면서 극도의 흥분에 소리를 지를 뻔 했다는. 아- 얼른 이곳을 떠나야지. 2009-01-09
02:36:13
  

 

병장 이우중 
  태경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제니퍼 코넬리 또한 제 가슴을 심히 설레게 만들었었죠. 허허허. 2009-01-09
06:43:16
  

 

병장 이동석 
  전 좋아하는 아이콘들이 너무 많아서, 음, 한번 누구를 진정 좋아하는지 대봐야겠군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제니퍼 코넬리는, 이건 뭐 인간이 아니구만, 하는 미미 (미친미모) 2009-01-09
07:03:21
 

 

상병 김용준 
  장쯔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인데 끌끌끌. 잘 읽고 갑니다. 2009-01-09
11:21:06
  

 

상병 김예찬 
  공리 이야기 맞나요? 

전 한때 장만옥을 참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전 왕가위 - 장만옥을 좋아했던 거지 장만옥을 좋아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2009-01-09
18:35:20
  

 

병장 이우중 
  에찬님/ 
네. 본문에는 일부러 공리라는 이름을 집어넣지 않았답니다. 히히히.(왜?) 
왕가위-장만옥 좋죠.. 허허. 
저도 장예모-공리가 아닌가 생각도 하지만 첸 카이거 작품도 있으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한데 그러고 보면 장예모-첸카이거-공리 쯤 되려나? 흠...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인데, 굳이 장만옥을 장만위로, 공리를 궁리로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전 그냥 많이들 쓰던 대로 이렇게 어떤 사람은 원음을 살려서, 어떤 사람은 한자어를 우리 식으로 읽는 게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장쯔이라든가 첸 카이거, 허우샤오시엔 같은 사람들이 전자에 속한다면 후자는 뭐 공리, 장예모(이분은 장이모우나 장예모나 큰 차이 없을 것 같기도..), 양조위, 성룡 같이요. 2009-01-09
18:59:55
  

 

병장 이우중 
  그나저나 저 위에 지운 제 댓글 
'배가 고프다 
라면을 먹어야지' 

는 대체 무슨 정신에서 썼던 걸까요... 2009-01-09
19:05:33
  

 

병장 이동석 
  그리고 보니 전 양조위를 더 좋아하는군요. 여배우는 그냥 평범하게 나문희님을 좋아하고. 
물론 요새는 송혜교. (뭐냐 이 맥락은) 2009-01-09
19:56:41
 

 

병장 김민규 
  아, 그냥 멍하니 읽었어요. 유쾌해요. 크크크크 
배경지식의 한계가 가로막은 부분도 있었는데,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어요. 즐겁군요 2009-01-09
20:24:07
  

 

병장 이우중 
  쓸모없는 애프터서비스 한점. 
공리의 출연작입니다. 물론 정확도는 기대하지 마세요. 
붉은 수수밭-1988 
진용-1989 
패왕별희-1993 
인생(중국 제목은 活着)-1994 
서초패왕-(아마)1994 
풍월-1996 
2046-2004 
게이샤의 추억-2005 
황후화(대륙어로는 黃金甲)-2006 

헐리우드에서 두어편 더 찍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허허허. 2009-01-09
21:55:00
  

 

상병 김예찬 
  그러고 보니 어제 섹션 연예 티비였나, 적벽대전2 기자 회견을 소개하며 량챠오웨이, 우위썬, 린지웨이 등등으로 소개하던데 참 낯설더군요. 금성무는 뭐라고 발음하더라. 성룡을 청룽까지는 괜찮은데 양조위를 량챠오웨이로 부르는건 좀 이상해요.. 2009-01-10
10:58:00
  

 

병장 이동석 
  <마이애미 바이스>에서는 너무 오리엔탈틱-하게 나와서 이모님 왜이러셔요-이런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극중에서는 무슨 섹스폭탄, 인간 비아그라 느낌으로 다루는것 같더군요. 

공리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작은역으로도 꽤 나와서 기억이 날듯 말듯한 영화가 몇 편 있습니다. 2009-01-10
12:3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