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선덕여왕 - 신진혜  
병장 이지훈   2009-05-17 23:09:09, 조회: 60, 추천:0 

시작이 반이다. 그렇다. 시작은 반이다. 물론 “시작”하는 찰나의 순간만을 정확히 포착, 인식할 수 있다면, 엄밀히 말해 시작은 반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시작을 찰나의 순간 속의 단절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역사 속의 연속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시작은 충분히 반이 될 수 있다. 시작이라는 단어 자체에도 역사적인 성격이 있다. 시작은 “시작”이전의 것들에 대해 보다 진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시작”이후의 것들에 대해서는 보다 보수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시작은 역동적인 변화와 지속적인 안정, 두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작의 의미와 시작을 이끄는 자의 희생을 큰 주제로 하는 “선덕여왕”에서 역동적인 변화의 모습과 지속적인 안정성을 모두 엿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선덕여왕”의 주인공 덕만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담담하다. 그녀가 감정표현을 하지 않는 재미없는 인물이라는 말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 그녀가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편안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역동적인 것은커녕 조금이라도 불안정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작은 불안정하고 역동적인 것이라 희생이 따르기 마련인데 덕만은 애초에 완전에 가깝도록 안정적이다.

덕만의 안정성은 역사의식의 확고함에서 나온다. 그녀는 자신이 권좌를 물려받을 것이라 짐작되는 그 시점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자신의 역사적 위치를 자각하고 그 역사적 위치에 합당한 역사적 사명을 스스로 부여한다.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겠다는 그녀의 확고한 의지는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주인공의 안정성을 책임지는 주인공의 역사의식이 큰 틀을 형성하여 소설 전체 흐름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인물의 개성마저도 모두 삼한일통을 위한 역사적 흐름에 휩쓸려 버린다. 삼한일통이라는 개념이 당시에도 존재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등장인물 모두가 덕만의 역사의식을 이해하고 동감하고 돕는다는 설정은 조금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다. 정략결혼에 가까운 결혼을 하고서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불평 한마디, 제대로 된 질투 한 번 내보이지 않는 순종적인 남편 용춘, 덕만의 권좌 등극과 신라를 위해 떠나달라는 설득에 떠났다가 덕만의 지위가 안정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덕만을 돕는 비형, 스스로 용기와 지략을 겸비하고 병권까지 쥐고 있었으면서도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그대로 이어가 덕만에게 충성하는 유신. 이들은 소설의 주요 인물로서 소설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려다가도 주인공이 만들어가는 역사적 흐름의 강이 등장하면 유감없이 그 강에 몸을 던져버린다. 또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하는 ‘하늘’의 도움은 그렇다하더라도, 춘추의 탄생 비화를 알게 되어 덕만이 가지고 있는 언니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마저 모성애로 환원되는 장면은 모든 것이 주인공을 위해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덕만은 어려움을 겪고 외로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확고함과 주변의 비호 아래 결코 절망하지 않고 괴로움에 빠지지는 않는다.

하나의 큰 역사적 틀 속에서 소설이 진행되는 것은 어쩌면 역사소설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책에는 소설임에도 학술서적에서나 볼 법한 참고문헌을 가득 싣고 있다. 작은 소재의 인용에도 그와 관련된 사료 하나 하나를 신경 쓰고 있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만큼 역사를 다루는 부담감이 컸다는 이야기다. 다른 장르의 소설이 아니라 역사소설이기에 문학적 상상력과 역사에 대한 무게감이 상충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다루는 매체는 우리와는 쌍방향으로 소통하지만 역사와 매체의 소통구조는 일방적이다. 따라서 매체의 생산자는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반드시 수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역사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매체는 사회악으로 간주되는 온라인상의 악플들과 다를 바 없다. 악플이라는 매체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와는 쌍방향으로 소통하지만 정작 악플의 대상은 악플과 일방적인 소통구조를 가지고 있다. 역사를 단순히 소재로써만 파악하고 책임감 없이 매체를 생산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온라인을 떠도는 악플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없다.

작가 스스로 역사를 다루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잘 알고 노력했기에 틀이 단단하고, 비교적 보수적인 역사소설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역사를 다루는 매체로서의 책임감을 덜 수 있었다면 더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소설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더 이야기할 것이 많을법한, 더 많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법한 장면들이 있는데 큰 흐름을 해치지 않기 위해 이어가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아쉽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물론 소설 자체는 풍성해지고 유쾌해지겠지만, 이것은 역사소설이다. 역사소설이란 단어에 “역사”가 먼저 나오는 이유가 단순히 어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와 문학, 그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되, 힘들더라도 역사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는 지금처럼 그대로 무겁게 짊어지고 가길 바란다. 책임감의 무게를 줄여 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 시소의 무게를 늘려 가는 것으로 균형을 맞춰나가길 바란다. 작가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를 떠넘기고 시소 중앙에 편히 앉아 손가락질만 해대는 형국이지만 이 모자란 글 하나가 균형 잡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주인공 덕만은 모란이 그려진 그림만 보고도 모란이 아름답지만 향기가 나지 않는 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결국 실제로 심어봐야 했다. 비록 결과가 눈에 뻔히 보이더라도 꽃 심기를 “시작”해봐야 향기의 유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혹 누가 아는가. 덕만이 “시작”의 찬란함 속에서 모란 향기를 느꼈듯이 우리가 심는 바로 이 모란 씨앗에서 향기가 피어오를지. 향기가 나지 않아도 좋다. 그래서 실속이 없어도 좋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누군가 향기를 기대하고 모란을 심기 “시작”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 모란에서 향기가 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도 덕만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시작”의 의미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지. 마지막으로, 모자란 글쓴이에게 모란 씨앗을 보여준 신진혜 누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이 어설픈 글도, 역사소설“선덕여왕”도 이를 접하는 모두에게 어떠한 “시작”이기를.

< 보완되어야 할 조그마한 것들 >
P39 마지막 줄 : ‘부마’란 왕의 사위를 뜻하는데 자신의 남편을 지칭하며 ‘나의 부마’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음
P92 8번째 줄 : 오타 ‘사림’ → ‘사람’
P131 10번째 줄 : ‘고승장군’ 적국의 장수에게 ‘장군’이란 칭호를 달아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음
P311 두번째 단락 3번째 줄 : “도움을~” 문장의 주술관계가 어색함


덧1. 너무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당장에라도 책마당에 주절대고 싶었으나 그보다 독서후기가 낫다는 생각에...흐흐 다시 한번, 반가워요

덧2. 사실 지인의 책에 대한 글을 써보는게 처음입니다. 신기하기도 하고...색다른 경험이군요. 아는 사람이 책을 쓰다니. 소설과 소설을 쓰신 지인의 이미지가 마구 난잡하게 얽혀서 헤매게 되는군요. 덕분에 이걸 보여드릴지 아니면 그냥 간직할지는 결정하지 못했어요. 하하 어렵군요. 

...곧 책마을 여러분들 덕분에 이런 경험이 많이 생기겠죠?

덧3. 시간이 별로 없군요. 마지막 독서후기가 될 것 같아요. 병장 되고나서 거의 글을 못 썼군요. 그렇게 바빴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말이죠.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8
09:05:44 

 

상병 양동훈 
  오 지인의 책이라!! 
하하.. 상당히 재밌고도 독특한 경험인 것 같네요..(웃음) 
책마을을 통해 생기는 이런 경험들이라! 
기대감이 마구 치솟는데요?(웃음 X 1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