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베스트-독서후기]로 위장한 잡설
병장 이우중 [Homepage] 2009-01-02 19:56:24, 조회: 288, 추천:1
슬픈 시간의 기억 - 김원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두려워요’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의 네 중?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간단한 설명은 [2008년 최고의 책]을 참고하시길. 근데 거기도 뭐 해설 갖다 붙여 놓은 수준이라.
나는 한국소설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5~60년대 전후戰後 사회상을 그린 소설이나, -이를테면 조성기의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라든가 문순태의 ‘문신의 땅’ 윤흥길의 ‘소라단 가는 길’ 같은- 7~80년대의 격동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 -꼭 그 시대의 중심에 서서 깃발을 들고 선두에서 외쳤던 사람만이 아니라 귀를 막고 입을 닫고 도서관에만 있었던 이가 되새기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든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한손에는 긴 볼펜을 한손에는 큰 물컵을 들고 모든 것은 네 개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도 사탄을 추가해 사위일체로 만들어야 한다든가, 요즘 sports가 주춤하는 이유가 삼민투에서 민민투로 바뀌어서 그런데 기왕 바꿀 거면 하나를 뺄 것이 아니라 거기다가 민정을 추가하여 사민투로 만들어야 했고, 그랬더라면 아주 잘 나갔을 것이라고 본인 스스로도 두군데서 돌 맞을 소리지만 감히 지껄인다는 ‘위대한 미치광이’같은 소설들, 그리고 난쏘공 연작. 혹은 ‘붉은 방’의 가정적인 형사조차도, 어쨌든 그 시대를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뭐든 읽어 보고 싶다- 에 끌리는 편이다.
물론 지금 우리 시대의 이야기도 그에 못지않게 좋아하는데, 그것이 아웃사이더의 비루한 일상에 관한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다.
써 놓고 보니 뭐 결국 다 좋아한다는 말 같긴 하지만 그 또한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7차 교육과정을 맞이하야 새로이 한국 근?현대사라는 과목을 가르쳤었다. 실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국사책 끄트머리에 곁다리로 실려 있던, 소설에서는 종종 나오지만 이상하게 그에 대해서는 진도 핑계로 항상 현대사 앞에서 종강을 해 버리던 격동의 근?현대사를 올컬러판 두꺼운 책으로 배울 수 있다니. 그것도 정규 수업시간에.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새로 편성된 그 과목 역시 책만 화려해지고 다루는 시기만 조금 더 늘어난 곁다리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3학년이 되어서는 담당 선생께
“저는 수능에서 ‘한국 근?현대사’ 대신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정치’를 응시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앞으로 선생님 시간이 되면 홀로 방송실이나 빈 교실을 찾아가서 자율적으로 정치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교실에 있어 봐야 실컷 자다가 제 귀에 거슬리는 말 실수라도 한 마디 하실라치면 벌떡 일어나 딴지 걸기나 술이 덜 깬 모습으로 죽치고 앉아 다른 학우들 면학 분위기 조성 방해만 하지 않겠습니까. 내신 준비 역시 제가 알아서 할테니 걱정 전혀 안되시겠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 정중히 양해를 구한 뒤 그 시간이 오면 누가 폐품처리장에 버린 걸 고쳐서 타고 다니던, 수리해 주신 자전거방 아저씨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돈도 받지 않고 그냥 가라던 삐걱거리는 고물 자전거를 타고 하숙방으로 직행하여 영화감상에 몰두했다가 다음 수업시간에 맞춰 돌아오곤 했다. 물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영화를 재생시킨지 얼마 되지 않아
‘샘이방송실갔다왔는데니없다든데찾아오라고**이(반장)내려보냈다’는 문자를 받으면 또 무슨 말같잖은 핑계를 댈까 고민하며 돌아가야 했고, 갑자기 ‘조ㅈ되ㅏ따빠리오ㄴ나’ 같은 문자가 오면 정말 미친 듯이 페달을 저어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장장 3일에 걸쳐 다운받아 놓은(신고할 생각이라면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구차한 변명이지만 구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5년이나 지난 일이다. 시효도 지났을 거다.) Once upon a time in America 풀버전은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무한반복해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어린 데보라를 훔쳐보는 누들스, 아니, 누들스가 훔쳐보는 데보라, 그러니까 어릴 적의 제니퍼 코넬리의 환상적인 자태밖에 없다. 어쨌거나 그 때는 마냥 즐거웠다. 다시 돌아가라면 망설임 없이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추억이 있는 한국 근?현대사가, 정확히 말하면 그 교과서가 양팔저울에 달아 보니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더라. 는 말이 나오는 걸로 안다. 자세한 설명은 피하자.
그런 와중에 오늘 꼬꼬마 어린이들의 위문편지를 받았다.
“우리 오빠도 궁인이라서 아저씨들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알아요” 처럼 자기 ‘오빠’와 다른 ‘아저씨’들을 서로 다른 집단에 교묘히 집어넣는 건 마냥 웃고 넘어갔지만 다른 어린이의 편지 내용에는
“요즘 Book한(권)은 좀 잠잠한가요”
“도덕 시간에 배웠는데 저도 Book에 대해서는 좀 알아요. 커뮤니(케이셔니)즘, 카라멜은 기름사탕, 영어를 배울 땐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부터 배우고, 대통령은 뽑지 않고 자식이 대를 이어간다 등등...”
내가 아주 어릴 때 국민학교 입학을 시키지 않고 일찍일찍 학교를 다 졸업시키려는 의도에서 부모님이 집에 사 두셨던 문교부판 교과서가 기억난다. 20년이 지나도 내용에 큰 차이가 없다니. 빨간(색깔 이야기다) 도깨비 그림은 없어졌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20년 전은 3~40년 전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붉은 톤의 묘사는 사용되었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조금이나마 꼬꼬마들 대가리가 자라 있었다고 판단했는지 도깨비는 아니라 도깨비 눈을 뜬 사람이었던 것 같다.
바뀐 게 있다면 우리 때는 얼음보숭이었는데 얘네들은 기름사탕이구나 정도. 그리고 저런 식의 영어교육은 나도 처음 알았다.
각설하고, 아까 그 양팔저울을 다시 가지고 와서 요 아동들의 도덕 교과서를 오른쪽에, 말(만 많고 정작 탈은 안) 많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왼쪽에 놓고 무게를 달면 과연 어느 쪽으로 기울까?
나는 왼쪽으로 기울 것 같다.
내가 여기 있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이 공간에서는 무척이나 소심해졌고, 천의 하나 만의 하나라도 이곳 생활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데다 비겁하기까지 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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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6-01
15:19:17
병장 김민규
낄낄, 이거 너무 유쾌한데요. 상큼발랄해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저도 고등학교때 근현대사를 날림으로 대충 치우고, 수능도 학교에서 안 배운 정치로다가 봤던 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심정적 동조가 더 크군요. 무슨놈의 교과서에 단체 이름 바뀐 것 밖에 없어? 얘네가 모여서 이걸 결성 했는데, 이걸로 바뀌었다가, 바뀌었대. 뭘 했는지 좀 가르쳐 주시지?
대학 가서, 대한민국 사학계의 왼팔이라는 학풍의 영향을 받아서, 현대사 수업을 들으면서 각인된 것들이 몇 개 있었죠. 리박사는 신바람 이박사보다 더 저열하고, 그래서 <국민 여러분은 걱정하지 마시고 댁에서>는 대구에서 틀어댄 녹음방송이었고, 등등.
그걸 듣고 나서 제 고딩때 교과서를 보니 하필 그 말많은 골드스타표더군요. 근데 왜이리 허접한지. 알맹이도 없고, 색깔이랄 것도 없고, 이 정도 가지고도 난리가 난다면, 우리나라의 학문은 어디로 가고 있는건지. 그저 씁쓸할 따름이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위문편지는, 전국적으로 동원령이라도 내려졌던 모양이군요? 낄낄낄
미역국 말고, 군-주의 사회도 아니고. 2009-01-02
20:45:07
병장 김민규
위문편지에 적힌 싸이 주소에 설렌 마음을 안고 들어갔다가 왠 봉선씨의 미소에 놀라 창을 닫아버렸다는 후임프의 말이 떠오르며, 유쾌하게 한번 더 읽어 보렵니다. 흐흐흐 2009-01-02
20:46:25
병장 이우중
그런데 위문편지 보낸 학교 이름이 '방산초등학교'였어요. 뭔가 좀... 2009-01-02
21:08:55
병장 김민규
이 무슨, 뭔가 좀....
저는 신광'여고'였어요. 허허. 이름만으로 벅차오르는 그대여, 실속은 없었나니. 2009-01-02
22:27:05
상병 이지훈
Book한(권) 흐흐 재밌네요 2009-01-03
02:04:13
병장 홍석기
흐흐. '방산초등학교'에서 오랫만에 피식. 이거 'versatile'(웨스트라이프) 이후로 처음이에요.
그나저나 우중씨 얼개는 언제 나오냐는 말입니까. 아직도 아, 뒷부분을 궁금해하고 있는데.
이 잡설 시리즈 칼럼으로 올리면 아주 그만이겠군요. 2009-01-03
15:12:01
병장 이동석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랬다고,
이건 왼쪽 오른쪽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왜곡의 문제입니다
라고 말하기에 제게 남은 시간이 너무 많군요. 한 달 뒤에나 말해야지.
그리고 저 가기전에 우중님 얼개를 보고 가는게 소원입니다. 2009-01-03
17:47:05
병장 이우중
그러니까 얼개가... 그게 저.. 그러고 보니...
아, 2009-01-03
20:42:50
병장 이우중
라고만 달아 놓으면 정말로 미친-놈 취급하실까봐 이렇게 구차하게 다시 씁니다.
물론 제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정말 요즘 글이 안나와요. 어쨌거나 최대한 쓰도록 노력해 볼게요. 흑흑. 그래서 [얼개]도 쓰기 전에 [칼럼] 한 편으로 우선 찾아뵙겠습니다. 허허허. 2009-01-03
20:45:20
병장 이동석
사실 저도 글 한편 못쓰는 주제에 우중님을 이담비-로까지 칭하겠습니까. 단지 여기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 있다, 정도 표현하는거지요. 흐흐. 2009-01-03
20:53:12
상병 김예찬
저도 골드스타인데, 전형적인 수꼴이라 그런지 고교시절부터 이 책은 위험해, 이 책은 위험해! 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적성 국가의 승전 기록을 아동들이 보는 교과서에 남겨둘 수가 있는거죠? 물론 재밌게 배우긴 했지만. 2009-01-04
12:51:17
병장 문두환
어쨌든 선생님에게 공손히 말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재미난 글에 추천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마을 인심이 야박해졌다는 것일까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 악역을 맡아 슬프신 분이 학교에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분께서 하나의 사건을 말하더니,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보라고 하더군요. 물론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배운 건 없었기 때문이죠. 왜곡과 더불어 은폐의 문제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9-01-05
23:36:30
상병 김용준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얼개도 빨리 보고 싶네요. 후다닥- 2009-01-06
09:2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