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김지민(예) - 바다 밑의 장난전화  
일병 송기화  [Homepage]  2009-01-24 18:51:10, 조회: 100, 추천:0 

그러니까 그건 초여름 무렵이었다. 나의 목숨과도 같던 휴대전화는 언제나처럼 매너모드 상태로 바지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오늘은 점심으로 어떤 컵라면을 먹는 게 좋을 지 친구들과 함께 매점을 돌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울었다. 윙-
내 인간관계야 그리 넓은 게 아니고 나에게 연락을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나와 함께 라면을 고르고 있었기에 누구일까 생각하며 전화를 꺼냈다.
'발신번호표시제한'
신기한 번호였다. 어쨌건 난 전화를 받았다.
"네."
난 예전부터 전화를 이렇게 받았다. '네.' 아는 사람이던 모르는 사람이건 한결같았다. 그리고 전화는 아무 말 없이 끊겼다. 뭐지. 060이나 080따위로 시작하는 번호였다면 광고전화인가 했겠지만 '발신번호표시제한'이라는 번호는 장난전화라는 추리를 하는 데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난 주머니에 전화를 다시 집어넣었고 그리고 난 아마 짜장맛 컵라면을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 전화는 장난전화가 맞았다. '발신번호표시제한'으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전화가 왔다. 
"네."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발신번호표시제한'이라는 번호는 다른 사람들의 전화번호만큼이나 그 사람임을 표현하는 기호였다. 상대방은 정말 가끔 전화를 걸어 나의 한마디를 듣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난 질리지도 않고 그 사람의 전화를 계속 받았다. 그건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놀이였다. 우리의 대화는 항상 같았다. 네. 난 매일 기분과 상황에 따라 밝은 목소리의 네. 졸린 목소리로 네. 우울한 목소리의 네.를 말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변은 없었다. 나만 즐겼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재미가 없다면 상대방은 왜 계속해서 이런 전화를 하겠는가. 어차피 전화비를 내가 내는 것도 아닌데. 어쨌건 그 사람이 있어 즐거운 여름이었다.

그런 여름 중 하루였다. 새벽이었다. 전화가 울었고 난 전화를 잡았다. "발신번호표시제한". 그 사람이었다.
날은 더웠고, 언제나처럼 찌는듯한 열대야였고, 지금 바로 잠들지 않으면 다시 잠들기 위해 몇 시간이고 더위와 싸워야 할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날 찾았다. 난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잠겨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네."
잔득 가라앉은, 탁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전화 저편은 시끄러웠다. 마치 술집이나 대학MT같은 느낌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느낌. 뭘까.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하지만 전화 저편은 여전히 시끄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전화는 끊어지지 않고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1분여가 조금 넘는 침묵이 있었다. 난 결국 그 침묵을 참지 못했다.
"여보세요?"
룰이 깨졌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서 오고 가던 놀이의 룰을 내가 부쉈다. 아니, 사실 먼저 깬 건 그 사람이다. 나의 네.를 듣고 전화를 끊지 않은 게 먼저였다.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잠시 후, 전화가 다시 왔다. 여전히 그 사람이었고, 여전히 주위는 시끄러웠다. 난, 무언가 알 수 없는, 조급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말씀 좀 해보세요."
결국 난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다.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화는 왜 했는지, 하다못해 상대방의 목소리라도. 나 혼자 말을 하며 전화는 끊어졌다 다시 걸려오기를 반복했다. 더운 새벽의 1시간여를 그렇게 보냈다. 몇 달간 지켜오던 룰을 서로가 부숴버린 그날 이후로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 후로 난 가끔 그 전화를 그리워했다. 그저 장난전화라고 해도, 난 전화 너머의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화 저편에 그 사람도 나에 대한 이미지를 멋대로 만들었을 것이다. 아쉬웠다. 사실대로 말하면 난 전화 너머에는 그녀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언제나 나에게 전화를 하며 말없이 끊는 사람이 그녀이기를 원했다고 하는 게 옳다. 난 그 전화를 받으며 언제나 그녀를 떠올렸고 원했다.
사실 매번 전화를 받을때마다 나는 나의 "네."다음에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나야."라는 말을 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원했다. 화가 나 있던지, 웃음기가 섞여있던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난 사실 왜 나와 그녀가 연락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별것 아닌 장난전화로도 그녀를 떠올릴 정도로 그녀가 그리웠다. 2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난 가끔 그 전화가 그립다.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1-28
19:13:19 

 

일병 김태경 
  저도 하루에 두번 그런 전화를 받았었죠. 하필 그날이 그녀의 생일이었습니다.흑 2009-01-24
19:51:22
  

 

병장 김민규 
  엄마... 
아, 시큰해. 근데 고작 할 수 있는 반응이 이거라니... 쩝 2009-01-24
20:40:02
  

 

상병 김무준 
  자세히 읽어보니 기화씨를 통해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니었군요. 아아. 바닷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그녀를 구원해 주는 건 결국 지민씨 밖에 없을까요. 남의 텍스트에 손을 대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괜시리 텍스트에 손을 대고 싶군요. 2009-01-24
23:34:51
  

 

일병 송기화 
  에.... 사실 경험담입니다. 
지민씨 글을 읽고 나니 생각이 날 수밖에 없더라구요. 
지민씨의 일도 은근히 경험담이 아니었을가 싶을 정도로. 
07년도 여름의 일입니다. 2009-01-25
08:59:55
  

 

병장 고은호 
  끄아....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리네요. 2009-01-25
09:21:22
  

 

상병 이지훈 
  아, 뭐죠 이 느낌. 2009-01-25
13:57:35
  

 

병장 이동석 
  덕분에 좋은 글 읽게되었군요. 이것이야말로 좋은 독서후기의 미덕이겠죠. 2009-01-25
23: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