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김예찬,1421번글그저 사랑하기에 대해  
상병 박원익  [Homepage]  2009-06-11 063800, 조회 139, 추천0 


  가라타니 고진의 진사이론에 대한 독해를 읽고서, 저는 예찬 씨의 독해력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예찬 씨에 관해서 독해력에 관해서는 어떤 기묘한 객관성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분명 심적 여유가 그렇게 많지 않은 인트라넷 사용환경에서 누군가의 사유를 그만큼 정리하고 소화해서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제가 가라타니 고진이나 슬라보예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좋은 철학자이기 이전에, 좋은 논술강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낱 말장난처럼 보이는 서양 철학사의 관념 놀음들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데서 시작합니다. 철학은 자기 나름의 철학사를 소화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예찬 님의 분명한 반헤겔주의와 반대로) 헤겔이 철학이란 개념의 자기운동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일 것입니다. 아마도 사유란 이렇듯, 말을 만들어내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사유의 스승들에 대한 엄밀한 비판적 '독해'에서 시작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어떤 사유의 '단초'를 매일 확인하곤 합니다. 그러나 질투심 때문에라도 예찬 '예찬'은 이정도로 해 둬야겠습니다. 

                                                              


  진사이는 소라이 그리고 노리나가와 더불어, 에도 시대의 국학파의 시조 정도로 알려진 일본의 사상가들입니다.(주1) 이들은 당대의 사상계를 주름잡고 있던 주자학의 원리를 비판하면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런 작업을 대개 '주석학'에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 철학 비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봐도 분명해지는데, 니체의 경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대한 문헌학적 독해를 통해서, 그것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특히나 진사이 같은 경우, 사실은 실천적 학문의 성격에 가까웠던 유가를 형이상학적 체계로 확장시킨 주자학에 대해서 같은 '문헌학적' 작업을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주자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본래 실천적 성격의 종교 이면에 어떤 불변의 '원리'가 있다(전에 진수유 씨가 말씀하신 성서를 관통하는 통일적 원리를 발견하려는 어떤 경향처럼)는 전제로 끌고 가서 형이상학적 체계로서 확립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진사이는 마치 루터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서 본래 그것을 확립시켰던 어떤 유일무이한 맥락들을 상기시키듯, 논어로 돌아가 그것을 엄밀히 독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루터가 아퀴나스를 비판했듯, 이렇게 진사이는 주자학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사이가 '대화'로 발견했던 논어는 사실 조금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사실은 진사이는 삶 속에서 실천적,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에, 논어에 대한 강독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스승-제자 관계를 배제한 '세미나' 형식을 통해서 거기에서 '타자'의 문제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타자는 김예찬 씨가 탁월하게 설명했듯이, 같은 언어게임을 소유하지 않은 타자입니다. 말하자면 주자학의 원리가 아무리 우주론적이고 초역사적 불변의 법칙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더라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모놀로그이며 결국 하나의 언어게임으로 귀착되고 맙니다. 가령 주자학에는 모든 사물에 모종의 원리가 관통하고 있으며,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서 누구나 자신 안의 본성을 궁구하다 보면 성인이 될 수 있다(수신치국평천하)고 이야기하지만 이것 역시 알만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모놀로그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리'가 발견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마주침 속에서만, 말하자면 주자학의 전제를 받아들이지조차 않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뿐입니다. 논어는 바로 이러한 마주침, 즉 대화의 구조로 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예찬 씨는 이러한 '타자'를 다시금 내무반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예화에 뭔가 안일한 게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진사이는 이러한 타자를 '논어'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아무런 텍스트가 아니라 역사적 권위를 띈, 말하자면 '대문자' 텍스트입니다. 루터 역시도 '성경'에서 시작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실 타자는 그렇게 흔한 건 아니라는 방증이 아닐까요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이 발견하는 타자는 사실 흔한 타자입니다. 전혀 주자학도 혹은 중세 신학도 모르는 일상에서 보는 타인들입니다. 그리고 성경과 논어라는 위대한 텍스트는, 역으로 이러한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발견된 겁니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 자체가 희귀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재발견하기 위해서 진사이나 루터나 가라타니 고진이나 사실 쉽지 않은 문헌학적 비판과 지루한 세미나와 학습을 거쳐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보람된 일이지만 대가 없이 주어진 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타자'를 우위에 두고 사고하는 모든 철학이 귀착되는 아이러니로 연결됩니다. 그 아이러니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작 '타자' 자신은 '타자적'이냐는 것입니다. 

  가령 레비나스라는 철학자에게 타자란, 전혀 예기치 못한 문맥 속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윤리적 대화와 배려를 요청하는 낯선 자입니다. 모든 윤리적 문제는 바로 이 타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이 '타자' 역시 레비나스 자신의 유대교의 문헌들에 대한 독해와, 나치즘이라는 역사적 파국 속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타자들(희생자들) 자신은 정작 윤리적인 존재냐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내무실에 온 세상 물정 모르는 유학파 신병이 철학적 '타자'냐고 하면은 그렇지 않고 단순히 군기 에듀케이션 센터에 보내버려야 할 백치에 불과합니다. 이 신병이 레비나스주의자이거나 고진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타자성'은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문제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간과하고 넘어갈 때, 가라타니 고진이 발견한 '타자'나 '대화적 구조'는 범용한 것으로, 일종의 '여러분 우리 대화합시다'와 같은 진부한 실천윤리로 변질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진짜 '윤리'는 문제의 유학파에게서 타자성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그를 군기 에듀케이션 센터로 보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체 게밥바라가 말했듯이, 때로는 꽃을 꺽어야할 때가 있지만 그게 봄이 오는 걸 막지 못하듯이, 그런 윤리야말로 최고의 '기독교적 사랑'이자 타자를 향한 최고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1)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일본의 리 비판
 
 
 

 

댓글 제안 
  유익한 글과 말은 글쓴이와 본인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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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김예찬 
  어젯 밤 바디우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불현듯 그제 올렸던 독서후기('그저 사랑하기')에 무언가 심각한 오독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는 바디우의 일견 '교조적인' 단언에 또 다시 현혹()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일반성 ≠ 보편성'이라는 부분에 대해 제대로 생각 해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고, 두번째로 '타자'에 대하여 너무나 지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개론'이 원전을 심각하게 곡해하는 사례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또 다시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도 들었구요. 마침 원익님의 지적을 통하여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생활관의 예를 통하여 제가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기존의 '문제'가 아닌, 그 외부의 문제를 생각'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굳이 생활관을 예로 꺼내들게 된 것은 아무래도 친숙한 사례를 통해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 것 같구요. 따라서 조악한 비유로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조악한선정적인 비유를 동원하는 못된 버릇!) 하지만 어떤 공동체의 근본 자체를 되묻는 신병의 등장은 '당연히 그래왔던' 것에 대하여 다시 인식해볼 계기를 마련하지 않겠느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아니, 어쩌면 제 희망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가르치다 - 배우다'는 역전됩니다. 저는 '백치'라기 보다는 '개념 없는' 이라는 표현이 그 신병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일테니까요. 그 신병이 결국 궁기 센터에 가게 되든, 아니면 대책 없는 폭력의 희생양이 되든 간에, 그의 등장 자체는 기존 체제에 하나의 충격으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기존 후임들의 '상식적인 불만들'은 신병의 충격을 통해서 '전제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는 문제 의식'으로 전화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의미에서, 신병은 '외부'이자 '충격'으로 등장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만남의 날이 기대 되는군요. 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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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양동훈 
  사실 예찬씨의 '그저 사랑하기'를 보고 댓글을 적었다 지웠다 적었다 지웠다 하고 결국은 등록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 논의가 또 이렇게 깊어가는군요 낄낄 

재밌습니다 정말...캬 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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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김태완 
  동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동훈님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여기가 힘드시다면 저와 학주님이 한창 논의 중인 곳으로 오셔도 되요. 전 동훈님을 언제나 환영한답니다. (삼국지 주절잡설 애독자라는.) 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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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오학준 
  이 신병이 레비나스주의자이거나 고진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도리어 '타자성'은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문제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맥락과 상관없이 문득 확 생각이 드는 것이, 타자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아도르노나 서경식의 경우 유대인과 자이니치라는 위치, 즉 스스로 타자임을 강요받는 동시에 끊임없이 타자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인식과 강요 사이가 괴리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는가 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런 자의식을 가져야 할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는, 나에게 타자라는 지위가 강요된다 한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그 생각이 스스로에 대한 환멸과 체념으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보편에 대한 저항의 기점임을 깨닫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도 일정하게 알려진 틀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기존의 보편에 저항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인지 하는 실용적인 의문... '자기의식의 배반'이라는 홍세화의 비판이, 무산노동자가 '근로자'의 삶에 적응한다는 혁명가들의 비판이, 조금은 단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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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박원익 
  사실 제가 제기한 문제도, 엄밀한 학적 논의에 기초하기는커녕, 사실은 일상적인 삶에서 외삽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찬 님이 든 사례가 아무래도 우리들의 경험에 보다 잇닿아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좋은 사례이고, 그게 엄밀히 따져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에서 어떤 신병이 기존의 짬질서에 문제를 제기할 때, 그게 '대화'가 되기는커녕 서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해서 하게 되는, 모놀로그의 향연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지요. 이러느니 저는 차라리 짬질서를 옹호하는 구세대적 인물이 되기를 선호하는 편이고요. 물론 짬 질서를 전혀 공유하지 않은 신병은 경험적으로 봤을 때 결국 짬질서에 흡수되거나 궁기 센터에 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실 그에게서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만한 여유가 있는 양식 있는 고참의 입장에서이고요... 결국은 역시 신병도 모종의 규칙을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궁기 센터와 같은 부조리로 귀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치다-배우다 관계 속에 편입될 때에만, '타자'가 발견된다는 게 저의 생각이고요. 타자란 흔한 타자이지만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초월론적으로' 발견된다는 게 바로 그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예찬님은 이러한 관계 '외부'에서 그것이 발견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요. 이렇게 본다면 타자의 일상성과 범속성을 아무리 강조되도 거기에는 반드시 '미화'되는 부분이 있다고 보고요. 

사실 가라타니 고진의 '타자론'은 저에게 줄곧 어떤 고민의 지점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피할 수 없는 획기적인 통찰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함정이 되기도 하지요. 실은 고진이 이러한 다성적 '대화' 속에서 발견되는, 그러나 경험 속에서가 아니라 초월론적으로 발견되는 타자를 보다 엄밀하게, 칸트적 물物로 다시 재발견하는 데서 어떤 단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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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진수유 
  아주 잘 읽었습니다. 배울 것이 많습니다. 200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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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박원익 
  오학준저랑 비슷한 지점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 역시 '타자론'에는 스스로를 '타자'로 보는 어떤 자의식에 빠질 수 있는 어떤 위험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넓게 봐서 아도르노나, 서경식 그리고 홍세화 모두 그런 위험에 처 있지는 않을까요 2009-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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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병 오학준 
  원익  예,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좀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본다면, 일단 저는 타자론이라는 '이론'과 타자의 삶을 살아가는 '실천'이 과연 분리될 수 있는 맥락인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도르노와 서경식, 홍세화 모두 그들의 '타자' 이론이 그네들의 삶 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하면서도, 그들의 '타자'로서의 자의식이 그들의 사회적 맥락 하에서 '타당'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이니치, 망명자, 유대인 처럼 그 사회에 통합될 수 없는 존재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다만 스스로가 그런 자의식을 가지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그러한 자의식이 인정받지 못할 때 - 내가 왜 타자인가 혹은 네가 왜 타자인가 - 이 타자이론은 사실로서 설 곳이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본다면 타자는 어떤 '사실'이라기보다는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뜬금없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09-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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