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목적 고전 읽기의 필요성
이 글은 주영준의 '원전 읽기의 어려움. 그리고 소극적 사회학에 대한 비판-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개론서 찬가 - 찌질이를 위한 변명'에 대한 답변입니다. 영준씨의 생각에 크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없으나 약간은 다른 관점에서 원전과 개론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한참 지나간 글을 들추어 씁니다. 참고로 '원전'이라고 하면 개론서에 반대되는 책이라는 소극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로, '고전'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고 불가피하게 역사학과 사회과학에 한정된 예를 들었습니다.
독서의 목적 고전 읽기의 필요성
'고전'이란 무엇인가 군생활의 벗 한컴사전에 의하면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오랫동안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전은 역사적이고 동시에 혁신적인 책이다. 다시 말해 당대의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하면서 또한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고전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출간 당시부터 화제가 되어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책도 많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근대사 및 사회학의 고전 N.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은 1930년대에 출간되었는데, 당시에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다 70년대 와서 주목받기 시작했다(한길 그레이트북스로 나와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프루동의 저술과 활동의 영향력은 19세기 중후반 내내 맑스를 압도했지만, 지금은 프루동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전이 꼭 길거나 어려운 것도 아니다. 고전에는 대학의 전문 연구자들이 철저히 학술적인 환경에서 저술한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사회에 직접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고전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간략한 책들인 경우가 더 많았다. 역사이론의 고전으로 누구나 가장 먼저 꼽는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가 대학에서 몇 차례 강연한 것을 엮은 책이고, 그람시는 심지어 감옥에서의 저술활동을 통해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을 남겼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수세기동안 끊임없이 해석되고 또 해석되는 정치학의 최고 고전이지만, 중학생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아주 짧은 텍스트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고전은 짜릿하다. 가장 깊이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깊이가 아닌 재미이고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그 과정이다. 고전에는 진정한 지의 쾌감을 느끼게 해 주는 감동이 있다. 개설서에는 감동이 없고 굳이 있을 필요도 없다. 개설서의 목적은 초심자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대략의 전체상을 제시하며 최소한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과서는 수차례 검증된 최고의 개설서이지만 그것을 읽으면서 감동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시험 공부하듯 재미와는 관계없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감동은 독서에 필수적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앞서 언급했던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구절은 모든 역사 교과서 첫머리에 나오기에 고교생도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사실 그 구절만 기억한다면 시험 문제 틀릴 일은 없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이상 살면서 그 이상의 지식이 필요할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직접 읽지 않는 이상 저 구절 이상은 조금도 생각할 수 없고, 수능이 끝났다거나 하는 목적이 달성된다면 언제든 잊어버릴 수 있다.
이 책은 사실 대학생이라면 약간만 집중을 하면 충분히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똑똑한 고교생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꼼꼼하게 직접 읽어보면 정말 놀랍다. 아주 논리가 명쾌하고 친절하게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기 때문에 도저히 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특히나 역사의 진보를 믿는 역사가이기에 그 메시지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진리를 깨달았다는 감동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유명한 책을 감동하면서 읽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뿌듯하고 어디 가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카를 읽고 키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읽어 보면 앞서의 감동에 비견할 수 있는 충격이 머리를 강타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근대 역사학을 비판하는 이 책은 아주 얇고 문체가 간결해서 카를 읽은 사람이라면 역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젠킨스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텍스트뿐이다.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는 '과거의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현재의 역사가와의 대화'로 바뀐다. 읽기 전까지 진리라고 생각했던 카의 주장은 순식간에 박살나고, 존재하는 것은 오직 텍스트뿐이라는 젠킨스의 주장은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다.
젠킨스를 읽고 나서 리처드 에번스의 '역사학을 위한 변명'과 에릭 홉스봄의 '역사론'을 읽어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진다. 에번스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역사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홉스봄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이 가지는 위험성을 비판한다. 홉스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주장 역시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쯤되면 역사이론이 대략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에 확실히 박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통해 진정 머릿속에 새겨지는 것은 역사이론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남는 것은 진리라 생각했던 이론이 반박되고 새 시대의 이론을 직접 깨우치는 과정에서의 자신의 지적 성장이자 그 즐거움이다. 지식은 쉽게 잊혀지지만 감동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지식 습득이라는 측면에서도 고전은 결코 완전하지는 않지만 가장 확실하다. 역설적이게도, 또 당연하게도 고전은 그 어떤 개설서보다 이해가 잘 된다. 개설서에서 한 단어로, 한 문장으로, 한 단락으로 설명하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난해한 원문의 몇 배나 되는 개설서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고전은 개설서에 비해 우위를 가질 수 있다. 당대의 언어를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개설서의 언어는 잘 와닿지 않지만 고전은 절대 모호하지 않다.
고전을 직접 읽으면 쓸데없이 오해하는 일도 줄일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하기도 했던 예를 들어보자.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한 번쯤 들어 봤을법한 종교 비판의 문구가 있다. 그런데 종교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저 유명한 구절은 사실 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은 '헤겔 법철학 비판'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 텍스트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독일에서 종교의 비판은 모든 비판의 기원이다. 종교 비판은 그 시대에는 너무도 당연해서 굳이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저 구절의 진짜 메시지는 종교가 아편으로 기능하지 않게 하려면 현실의 물적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 세계의 변화를 주장하지 않고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말이다. 이 정반대의 메시지는 '헤겔 법철학 비판'을 읽어 보지 않는 이상 알아채기가 어렵다.
고전에서 사용하는 개념이 어렵고 문체가 난해해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면 읽을 필요 없다. 해당 분야의 입문서와 개론서를 읽고 개념과 배경에 익숙해진 후 읽으면 된다. 입문서와 원전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원래 밥도 천천히 먹어야 소화가 잘 된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다. '왜 이 책을 읽으려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충분히 선행되지 않으면 고전은 그 가치를 발휘하기 어렵다. 당대의 대가들이 평생 고민한 주제를 날로 먹으려는 심보는 곤란하다. 사실 니체를 몰라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허영심은 곧 공허한 독서와 연결된다. 저자가 고민한 만큼의 평생의 문제의식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에 기반한 최소한의 문제의식이나마 확실하지 않다면 백번 읽어도 남는 게 없다. 관심 없는 수업의 시험대비용 독서를 생각해 보자. 그런 건 아무리 밤새 읽어도 시험 끝나면 곧 잊어버린다. 반면 관심 있고 재미있는 수업의 공부라면 이해하기 어렵고 방대하더라도 열심히 읽기 마련이다. 그렇게 열심히 읽고 나면 양질의 지식과 더불어 뿌듯함과 감동이 남는다.
고전이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는 그 안에서 다루는 내용이 시공을 초월해 보편적일 수 있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고전에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존재하고,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실마리가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의 가치는 더욱 각별하다. 고전의 독서는 곧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과정이다. 세계는 경이롭기에 그것을 읽는 행위 역시 경이롭다. 기억하자. 독서에서 얻는 건 지식이 아닌 감동이다.
상병 김현동 (20060730 184842)
음. 그렇군.
아주 잘 읽었습니다.
병장 고계영 (20060730 194252)
[입문서와 원전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답변이라기 보다는 '보론'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게겠죠
다 읽고나니 자연스럽게 영준씨의 글과 '같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병장 엄보운 (20060731 081118)
제게 꼭 필요한 글이었습니다. 형주씨와 같은 분이 책마을에 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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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두번째 단락. '고전에서...'로 시작되는 문장들이 정말 마음에 와닿는군요. 역사 관련 고전들의 예시도 훌륭했습니다. 잘 읽었어요.
병장 강승민 (20060731 103857)
........허영심은 곧 공허한 독서와 연결된다. 저자가 고민한 만큼의 평생의 문제의식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에 기반한 최소한의 문제의식이나마 확실하지 않다면 백번 읽어도 남는 게 없다.......
마음을 후벼파는 구절입니다.
잘읽었습니다.
병장 조주현 (20060801 093645)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같은 구절에서 좀..(먼산)
상병 김청하 (20060802 014245)
잘 읽었습니다. 글 자체도 예시도 너무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