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불평기] 근대의 종언-존 루카스 
병장 이승일 01-15 09:32 | HIT : 101 
 

 
이것은 아마 독서후기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정보제공이 부실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글은 "at the end of an age" 라는 책을 번역한 사람에게 보낸 글입니다. 그 번역자는... 구체적으로 밝히긴 뭐하지만 저와 가까운 사람입니다. 
번역자에게 재미로 시비를 걸려고 쓴 글이기 때문에, 비판적인 내용밖에 없으며,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후기의 역할을 하리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번역자와의 친분을 고려할 때, 이렇게 부정적인 내용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공개하는 것은 참 $#%@#$ 한 일이지만, 번역자 본인도 별로 마음에 안들어한 책이기 때문에 올려봅니다. 

방공호에 계셨던 분들은, 이 글의 어조와 논지가 너무나 전형적으로 '이승일스러워서' 지루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전형적으로' 비판할만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扁?제목은 "at the end of an age", 즉 '한 시대의 끝에서' 입니다. 그러나 출판사의 상술로 "자연과학을 모르는 역사가는 왜 근대를 말할 수 없는가" 라는 말도 안되는 제목으로 나왔다고 하는군요. 제 생각에는 "근대의 종언" 정도로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냥 직역해서 '한 시대의 끝에서' 라고 했어도 괜찮았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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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자연과학을 모르는 역사가는 왜 근대를 말할 수 없는가"
         "at the end of an age"
저자 :  존 루카스 - 헝가리 출신의 미국인 현대사가. 1924년 생. 저서 - '근대의 소멸' , '역사의식' '마지막 유럽전쟁' '냉전의 역사' 등

출판사 :문화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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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주제에 관해 전혀 모르는 것이 조금만 아는 것보다 오히려 바람직한 경우들이 있다. 특히 그 주제가 어렵고 난해해서 피상적인 접촉만으로는 핵심을 이해할 수 없을 경우엔 더욱 더 그렇다. 존 루카스 역시 [근대의 종언]이라는 글을 통해 이러한 상황에 기여했다. 그가 자신의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세계는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세계 속에 침투하여 우주의 실체를 구성해 낸다. 정신은 물질보다 우월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적절하게 깨달을 수 있는 시대적 위치에 서 있으며, 그 반대의 믿음에 사로잡혀 있던 지난 400년간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에 자리를 양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주장 자체의 진실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것은 정말로 어려운 문제이며 어쩌면 루카스의 통찰이 옳을지도 모른다.(개인적으로, 상당히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그가 나중에 옳은 것으로 판명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일종의 우연에 가까울 것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잘못된 방식으로 옳다고 말이다. 루카스는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과 철학의 여러 개념들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오해를 수반하고 있으며 과학 지식에 대한 그의 피상적인 이해를 보여준다. 만약 자신이 제시한 ‘근거’와 관련된 내용을 루카스가 아예 알지 못했다면, 그는 훨씬 더 바람직한 방식으로 그의 통찰을 개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끌어들인 자연과학의 사례들을 통해서만 그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그는 신중하지 못했다. 우선 이 문제부터 살펴보자. 

  루카스가 이 책 전체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철학적 관점의 문제점은 그가 사실과 사실에 대한 지식을 자꾸 혼동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인간 없이는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강력한 반실재론적인 관점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와 세계에 대한 지식을 뒤섞었을 때에만 가능한 주장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은 다른 무엇일 수는 있어도 바로 그 대상 자신일 수는 없다. 또한 인간의 지식이 우리의 사회 문화적 여건에 의해 항상 오염된다는 사실로부터 그 지식의 대상 역시 그러하다는 주장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의견을 채택하게 되는 동기는 이해할만하다. 우리가 가진 지식의 역사를 뒤돌아 보았을 때, 그것은 언제나 그 시대의 편견과 욕망의 노예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이 '사실 이라는 개념'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은 것들에 대한 비판이지 사실이라는 개념의 형식에 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이는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사실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러 저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사실이 갖는 절대성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 ~ 는 사실이다.’ ,  ‘~ 라는 사실은 ~을 보여준다.’ 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가 언급하는 사실들이란 대개 역사적, 자연과학적 사실이다. 우리의 진실한 판단은 어건 사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루카스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루카스의 비판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Princaps 라고 칭한 옥타비아누스가 사실상 왕에 다름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그가 아무리 스스로는 왕이 아니라고 했을지라도, 진실은 옥타비아누스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다. 루카스의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객관성을 그토록 질타했지만, 그 질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은 객관주의적이다. 우리는 그의 표현양식을 통해 그가 파괴하려 한 객관성과 사실의 옷을 스스로가 입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루카스는 사실의 독립성과 관련하여 아주 훌륭한 표현을 인용하면서도 스스로 이 금언을 배신한다.

“여하한 진실을 말하는 데도 불가피하게 역사적 차원이 있다...그러나 진실을 말하려는 어떤 시도에서나 우리가 불가피하게 역사와 관련되는 것과는 달리, 역사가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훌륭한 표현을 뒤로한 채, 루카스는 다소 엉뚱한 예를 통해 ‘사실’ 이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그는 ‘사실fact'이라는라는 단어가 지난 200여년 전에는 전혀 다른 뜻을 가졌던 단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우리는 그 단어를 지나치게 넓게 사용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표현이 어떤 변천과정을 거쳐 왔느냐 하는 것은, 그 표현이 현재 나타내고 있는 개념과 근본적으로는 무관하다. 한 표현은 과거에는 다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을 수 있다. 실제로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여러 저작들 중 그 어떤 것도, ’사실‘이라는 관념의 부제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사실이라는 관념이 없었다면, 언표된 것과 사실의 일치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참‘이라는 관념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플라톤을 비롯하여 그 이후의 수많은 철학적 저작들이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예화된 개념에 대한 비판을 그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착각하는 실수는 정의와 분류에 대한 그의 비판 속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마치 객관적 사실이라는 관념을 배척한 것과 마찬가지로)정의와 분류라는 과학의 방법론의 한계를 강조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히틀러를 ‘전체주의자’나 ‘파시스트’로 정의내리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예로 든다. 어떤 점으로 보나, 히틀러를 전체주의자나 파시스트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지를 잘 살펴보면 그의 비판은‘정의’가 아니라‘잘못된 정의’에 대한 것이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히틀러를 파시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무솔리니나 스탈린에게 민주적 사회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 루카스의 주장에서 기존 역사가들의 그것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는 단지 특정한 정의(the definition)가 대상을 기술하는 데 그다지 적합하지 못하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 뿐인데, 이는 역사학을 포함한 여러 학문 분야에서 흔히 발생하는 문제에 불과하다. 루카스는 정의라는 개념의 형식에 비판을 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면밀하지 못한 정의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정의와 분류라는 방법론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 혹은 착각하고 있다. 

자연과학에 관해서 그는 더욱 주목할만한 오해를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 이 오해는 루카스 개인에게는 매우 중대한 부분인 것 같다. 루카스가 절대적 개관성에 대한 자신의 불신을 확신하게 된 것에는 추측컨대 하이젠베르크의 저서가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 같기 때문이다. 여러 문맥으로 보건데, 그는 자신이 반감을 갖고 있는 과학자집단에 속한 사람의 입에서 절대적 객관성의 붕괴 비슷한 말이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더욱 명확히 하고 그것에 자신감을 갖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실로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동맹을 맺고자 원하는 자연과학의 유일한 영역인 양자역학이, 실제로는 그가 적으로 삼고 있는 물질 문명의 절정에 해당하는 성과들 - 레이저, 컴퓨터, 초전도체 등 -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더욱 더 아이러니하다.) 상황을 좀 더 희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에게 자신감을 준 ‘적들’의 발견이 실제로는 루카스가 이해한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루카스는 우리가 측정함으로써 세계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원리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양자역학에 대한 수없이 많은 해석들 중 하나이다. 이 해석은 주로 David Bohm 이라는 물리학자에 1950년대 이후 개진된 것인데, 이에 따르면 인간의 관찰은 관찰 대상의 파동함수를 교란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정보를 결코 알 수 없는, 딱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 해석이 (루카스의 바램과는 반대로)양자세계가 완전히 결정론적일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루카스가 정말로 이와 같은 해석에 동조하려 한다면, 그는 아마도 수단을 위해 목적을 포기하는 격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루카스가 그의 논의에 양자역학을 끌어들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세계가 결정론적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물론 루카스가 세계의 비결정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불확정성원리를 일종의 ‘간섭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관용을 배풀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오해는 루카스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일반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모든 일반인들이 루카스만큼 이 주제에 관해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불확실성’, ‘비결정성’ 과 같은 단어가 주는 느낌에 너무 쉽게 오도되어 문제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갖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과학에 대한 무지와 감정적인 태도 덕분에 그는 실로 매우 불성실한 발언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우주론을 비판하면서 스티븐 와인버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우주는 매우 크며, 오직 지능이 없는 생명만 지탱하는 무수한 행성과, 생명체가 도저히 버틸 수 없는 더 무수한 행성들 중에 우리가 여기에서 하는 바와 같이 우주에 관해 생각할만한 생명체가 있는 아주 자그마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말은 스티븐 와인버그의 수많은 말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감상적이고 대중적인 표현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표현은 우주론과 전혀 관련이 없다! 저명한 물리학자의 감수성 어린, 그것도 다른 주제에 관한 말을 조롱함으로써  루카스는“우주론의 불합리성”을 제시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우리는 루카스가 이렇게 얄팍하고 빗나간 공격으로 자연과학을 비난하고 있는 동안, 그리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앞으로 500년이 넘는 시간 후에 우리는 유명론이라는 중세적 미신에 다시 직면할 것이다.”와 같은 실로 거창하고도 대담한, 노스트라다무스를 연상시키는 예언을 토해내고 있는 동안 와인버그를 비롯한 일급의 과학자들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자연의 질서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려고 애썼는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루카스가 저지른 잘못의 정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입증해야할 주장을 오히려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가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아인슈타인을 비판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루카스에 따르면 인간이 100만년 전부터 존재해왔다는 다윈의 주장은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물질이 정신에 선행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고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루카스는 왜 물질이 정신에 선행해서는 안 되고 어째서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입증해내야할 명제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이것을 비판의 근거로 삼고 있다. 프로이트는 결정론을 함축하고 있다는 이유로 루카스의 비판을 받았으며, 아인슈타인은 독립적인 실재의 존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루카스는 ‘결정론과 독립적인 실재의 관념은 원래 틀린 것이다.’이상의 설명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지속적으로, 그는 자신의 짐을 오히려 무기로 사용하는 당당함을 보여준 셈이다. 루카스의 주장에 이미 동의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식의 설명에 설득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루카스가 책 전체를 통해 강력하게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의 물질에 대한 승리이다.(물론 루카스 자신은 이러한 표현을 거부할 것이다. 그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이분법을 거부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력은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근본적으로 정신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분법을 거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정신의 입장에서 물질을 통합하려고 하고 있을 따름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통합하고 있을 때, 이들 사이에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 분명한 사실이다.) 마치 예수가 육신이 되어 땅위에 간섭하였듯이,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물질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역사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충분히 훌륭한 주장이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루카스가 제시하는 설명은 허무할 정도이다. 그 주된 원인은 아마도 루카스가 ‘물질적’ 혹은 ‘물리적’이라는 단어를 이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이 단어가 사회적 의미를 갖는데, 마르크스의 하부구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의미로 쓰인다. 이 둘을 적절히 혼동함으로써 그는 놀라운 비약을 이루어냈다. (단지 물질적 조건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나 의도가 역사에 개입된다고 말할 때, 그는 충분히 정당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 (물리적 대상인)두뇌에 영향을 준다고 말할 때, 그는 단지 물리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두뇌가 정신을 만들어낸다고 말하는 것은 물리주의자의 은유적 표현에 불과하다. 이것을 물리적 대상인 두뇌가 정신에 인과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받아드려서는 곤란하다. 일반적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는 물리주의는 두뇌가 정신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정신과 동일한 것,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관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카스는 사회학적 맥락의 ‘정신의 개입’을 물리학적 맥락에까지 적용하면서, 유물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빗나간 비판이다. 정신과 두뇌는 어느 쪽으로건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변화와 두뇌의 변화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어느 것이 다른 것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인과관계는 시간을 전제로한 개념이기 때문에, 정신과 두뇌 사이에 인과관계가 끼어들 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루카스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은유적인 설명이 가능한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해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 세계의 물리적 본성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주장이 양쪽 영역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루카스는 한 시대의 종말을 예언자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니체와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카스와 니체는 매우 다른 종류의 예언자인데, 그 차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 니체는 시대의 변화를 묘사한 반면, 루카스는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니체의 서술은 궁극적으로 역사적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주장마저도 역사적 흐름의 일부분으로 만든다. 반면 루카스는 ‘근대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역사적이라기보다는 과학적 혹은 철학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루카스에게 한 시대의 종언 뒤에 따르는 것은 ’새로운 한 시대의 시작 the beginning of an age' 가 아니라 ‘궁극적인 시대의 시작the beginning of the age' 에 가까운 듯 하다. 니체는 자신이 묘사하는 변화가 향후 200년동안의 역사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루카스는 (마치 선지자가 예수의 재림을 예언하듯) 드디어 영원히 지속 될 바로 그 시대, 편견과 오해가 극복된 바로 그 시대가 올 것이라는 늬양스를 풍기고 있다. 물론 루카스는 여전히 앞으로 도래할 새 시대 이후에도 새로운 시대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역사의 변화는 앞으로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퇴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루카스에게 가능한 또 다른 역사적 변화는 단지 후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관조하는 이성과 물질의 시대였던 근대를 벗어나, 시간 속에서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정신과 물질에 대해 통찰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예견한 루카스의 저작은 우리에게 많은 고찰의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 고찰은 지금 시점에서 실로 매우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미래에 갖게 될 세계관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고찰을 제시한 방식은 너무나도 거칠어서 그 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책의 제목, 즉 <자연과학을 모르는 역사가는 왜 근대를 말할 수 없는가>에 대해 최소한 한 가지 사례를 답변으로 얻었다. - 루카스 자신이 그 사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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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장 김효진 
48.3.4.68   딱 프란시스 후쿠야마 떠올리고 있었는데 역시 언급하시는군요. 이 글만으로 보자면 후쿠야마보다 훨 저질인데... 01-15 * 
 
병장 이승일 
54.2.9.70   사실 이 책의 번역자는 저희 아버... (.....) 01-24 *